시편 121편 강해 - 이동원목사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 시편121편을 함께 같이 나누겠습니다. 시편121편이 되겠습니다.
교독하겠습니다. 제가 한 절 읽고, 다음 절 여러분이 읽으시고 함께 같이 교독하겠습니다.
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2: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에게서로다
3: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 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 하시리로다
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아멘.
오늘 시편121편을 함께 같이 묵상하고자 합니다. 굳이 타이틀을 붙인다면 "인생의 길이 어려워질 때". 여러분이 시편 120편부터 시작해서 134편까지 보시면 그 시편을 시작할 때 어떤 소개의 말이 그 앞에 붙어있습니까?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모두 15편의 시편들에 대해서 시편120편부터 134편까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흔히 이 15시편을 가리켜서 순례자의 노래, 이렇게 일컬어집니다. Pilgrim songs
왜냐하면 옛날 이스라엘 순례자들이 이스라엘의 3대 명절이라고 일컬어지는 유월절이라든지, 혹은 오순절 그 다음에 초막절, 이 절기가 되면은 이스라엘 국내에도 각처에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나라 바깥 다른 나라까지 흩어져갔던 디아스포라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명절이 되면 가족들을 이끌고 다 예루살렘으로 다 모여듭니다.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은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경내에 들어오게 되면 대부분 저 예루살렘 꼭대기가 시온산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마도 학자들은 그 시온의 언덕이 그리고 예루살렘의 도성이 소위 홀리시티(holy city)-거룩한 도시가 그들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 순례자들은 이제 거의 다 온 것을 안심하면서 아직도 남아있는 거리, 그러나 마지막 대부분 남쪽 지역에서부터 여행을 해서 오는 순례자들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통과해야 하는 그 지점이 바로 유태 사막입니다. 주디아데저트라고 불리워지는 유대사막을 통과해서 예루살렘 도성으로 언덕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때 아마 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마지막 난관이라고 볼 수 있는 사막의 뜨거운 열기를 참고 견디면서 이제 조금만 올라가면은 예루살렘 도성에 도달한다는 기쁨을 갖고 그들이 아마도 이 노래를 불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제목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혹은 "순례자의 노래" 이러한 별명들을 갖고 있습니다.
특별히 시편121편은 이미 말씀을 드린 대로 그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인접해있는 그 산들, 시온산, 감람산, 성전산, 이런 산들이 서서히 눈앞에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마지막 유대황야를 지나가면서 불렀던 노래로 생각됩니다.
시편121편의 그 구도는 크게 두 섹션으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절부터2절까지는 한 순례자의 독백으로 되어있습니다. "모놀로그". 한 순례자가 자기자신의 어떤 생각을 마음을 담아서 독백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모놀로그.
그러나 3절부터8절까지는 또 다른 순례자가 이사람 순례자의 그 노래에 대한 화답형식으로 노래를 하고있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두 섹션으로 나누어지는데 그런데 1절, 2절 그 첫번째 섹션의 한 순례자의 독백 가운데서 일종의 자문자답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자, 1절은 질문이죠?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내가 질문을 던졌어요. 또 스스로 대답을 합니다. 무어라고 대답 합니까?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이 첫번째 섹션이 1절2절에 이 노래 부분에서는 가장 중요한 단어가 뭐냐하면 1인칭 대명사입니다. 1인칭, 이것이 일종의 모놀로그, 독백이고 자문자답의 형식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나"라는 단어입니다. "나" 내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그래서 1절2절에서는 일인칭 대명사가 매우 중요한 단어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두번째 섹션인 3절부터8절까지를 보시면 이것은 다른 순례자가 화답하는거에요.
거기에서는 중요한 단어가 어떤 단어입니까? "너"라는 단어에요. 맞습니다. "너" 라는 단어가 아주 중요한 2인칭 대명사가 중요한 단어로 이제 등장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치 않게 하시며" 이것은 다른 사람이 노래하는 거에요. 첫번째 부분은 내가 노래하고, 내가 노래를 잘할 수 있으면 이럴 때 오페라식으로 노래를 부르면 참 좋겠는데, 하하. 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그러면 옆에 함께 가던 다른 순례자가 나를 쳐다보면서 무어라고 노래할까요?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두 섹션으로, 처음은 무슨 섹션이냐 하면 "나" 섹션이고 그 다음은 뭐에요? "너" 나와 너의 섹션으로 이렇게 둘로 나누어지죠
이 시편은 비단 그 이 성경이 기록되던 구약시대 그 당시에 특별히 시편 하나만 보아도 바벨론 포로후기에 쓰여졌을 가능성이 많다고 성경학자 들은 생각합니다.
포로생활이 끝날 때 그 무렵 그 포로의 고달픈 아픔과 그런 고난의 역정을 기억했던 그 사람들이 이제 인생의 새로운 소망을 저 시온의 언덕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그 감격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올라올 때 불렀던 이 노래, 그 순례의 길을 행하면서 이제 마지막 유대 광야 사막을 지나가면서 불렀던 노래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 당시에 순례자들에게도 이 노래가 얼마나 커다란 은혜와 힘이 되었을까요? 그러나 지금도 오늘 이 시대에도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과 저, 우리는 다 순례자가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됩니다.
그 나라가 우리의 영원한 나라, 우리가 사모할 나라, 우리의 진정한 나라라면 우리는 이 땅에서 잠시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걸어가는 이 순례의 길이 어려워 질 때 특별히 인생의 길에서 우리가 사막을 통과할 때, 열사의 태양이 내려 쪼이는 우리의 숨을 허덕이게 만들고 갈증 나게 만드는 그런 고통스런 사막의 길을 지나갈 때 우리가 부를 수 있는 노래, 아름다운 노래 순례자의 노래 위로의 시편이 바로 이 시편121편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자주 접하는 이 시편입니다마는 시편의 내용을 좀더 깊이 묵상하면서 이 시편의 내용이 우리 인생의 순례의 길에 힘이 되고 소망이 되고 또 기쁨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인생의 길이 어려워질 때 우리가 해야 할 일, 무얼까요?
첫번째로 이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도움을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기도하십시요.
인생이 어려워질 때 또 우리가 삶의 스트레스를 느낄 때 곤고함을 느낄 때 우리는 종종 산을 찾고싶어 지는 때가 있습니다. 산행을 하고 싶어질 때가있죠? 우리가 찾은 모처럼의 산길, 혹은 산자락 어느 모서리에서 우리는 그 자연의 품에서 안식을 느낄 수가 있고 어느 정도의 회복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편의 순례자도 같은 심정이 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유대사막을 지나서 이제 시온의 언덕이 그들의 눈앞에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그 산들이 여기 저기,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니지만 예루살렘 자체가 높은 언덕 위에 있기 때문에 산들이 보입니다. 시온의 산이 또 성전이 서 있었던 성전산, 감란산 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 산들을 탁 보았을 때 그 산에 안기고 싶은, 그런 마음들을 아마 이 순례자들이 느꼈을 것입니다. 산들을 바라보는 자체만으로도 그것은 그들에게 어떤 희망이었고 기쁨이었고 능력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기자가, 그리고 이 순례자가 마침내 깨달은 진리는, 도움은 그 산 자체가 주는 것이 아니라 산을 지으신 여호와께로서 그 도움이 온다는 사실을 그는 여기서 고백하고 있고 그것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이 시편기자가 순례자가 정말 믿음의 사람인 것을 알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연에 압도가 되면, 우리가 자연에 압도가 되면 그 자연을 숭배하고 싶은 그런 충동을 느낍니다.
특별히 고대인들, 또 구약시대 구약성경에 기록되어있는 당시의 사람들 가운데는 이스라엘에는 특별히 바알 숭배자들이 많았습니다.
대부분의 그 바알의 신전, 제단들은 산 꼭대기에 세워집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높은 산에 올라가서 그 산의 정기를 느끼며 산의 아름다움에 도취하고 압도당할 때 그들은 산을 숭배하고 싶은 어떤 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숭배하는 또 다른 신, 어떤 신, 혹은 산의 신, 혹은 풍요의 신, 생식의 신, 이런 신들에 대한 제단을 산 꼭대기에 만들어 놓고 신을 숭배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가장 많은 다수의 강력한 자연 숭배자들이 있다면 그것은 뉴에이지 운동가들 이에요. "뉴에이지 운동" 소위 뉴에이지 운동가들의, 그들의 여러가지 사상이 있지만 그 사상의 가장 중요한 핵심 가운데 하나가 자연을 신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자연을 찬미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 입니다. 또 자연을 잘 관리하는 것도 그리스도인들도 마땅히 참여해야 할 자연에 대한 청지기적 책임가운데 하나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연 숭배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흔히 우리가 신론을 말할 때 범신론이라는 말을 많이 해요.
범신론, 팬티즘(pan-the-ism) 범신론이라는 것은 피조물과 창조주를 혼돈하는 것 이에요. 피조물을 창조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연이 아름다운 나머지, 자연을 예찬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자연을 숭배하게 되면 자연이 신이 되어요. 그것은 그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망각한 채 피조물을 신으로 혼돈하는 착각하는 우상숭배자 들의 일종의 생각의 구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본성 안에 언제나 자리잡고 있는 그런 타락한 인간의 성형이라고 로마서 1장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번 우리 로마서1장을 한번 같이 찾아보시지요.
로마서1장20절 말씀 이에요. 로마서1장20절 말씀입니다. 로마서1장 20 ~ 22절까지, 로마서1장20절, 21절, 22절, 23절 네절을 우리 함께 같은 목소리로 낭독합니다. 다같이 시작.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네, 바울사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창조물 안에서 자연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과 그 능력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이렇게 지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중에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을 알만한 증거들이 없어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라고 핑계하지 못한다, 이렇게 지적하고 있어요.
그러나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그리고 창조주의 어떤 능력과 경이로움을 그들의 마음속에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타락한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하나님을 섬기기 보다도 이 타락한 인생이 취하는 길은 뭐냐하면 마지막 절에 말씀처럼 23절의 말씀처럼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 하나님 영광대신에 하나님 자리에 사람을 놓고 사람을 숭배한다든지 사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가운데 자연 못지않게 아니 자연이상으로 최대의 하나님의 경이로운 피조물이 있다면 인간이죠.
그래서 사람을 숭배하는 일도 많았어요. 사람을 숭배하는 일들도. 로마시대 로마의 황제들을 신으로 숭배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사람을 신으로 섬기기도 하고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사람이 아닌 금수와 버러지 형상, 자연 속에 있는 어떤 동물이나 이런 것들을 오히려 신처럼 숭배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을 혼돈하는 우상숭배의 죄악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편기자는 이 순례자는 산이 아름답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산이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나의 진정한 도움은 저 산이 아니라 저 아름다운 산을 만드신 누구? 하나님에게서 도움이 온다는 사실을 그는 오늘 이 시편을 통해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자가 비로소 우리의 삶에 완벽한 구원자가 되실 수가 있다는 사실이에요. 창조주만이 하늘과 땅을 만물을 그리고 나를 지으신 그 창조주 하나님 만이 인생에서 우리가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비로소 완벽한 도움이 되실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스토리 입니다마는 제가 미국 가서 맨 처음 공부했던 도시가 자동차 도시였던 디트로이트 라는 그런 도시였어요. 아주 오래 전에 그 도시에서 제가 나갔던 교회 목사님께 처음 들었던 얘기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에 이 디트로이트라는 자동차 공업으로 유명한 이 도시에 자동차 정비사 한 사람이 있었어요. 지금도 디트로이트에 가면 뭐 포드 라든지 뭐 이런 유명한 자동차 지엠 회사들이 다 디트로이트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거기에 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유명한 자동차 정비사 한 사람이 자기 차를 몰고 추운 겨울에 회사로 출근하다가 자동차가 고장이 났어요. 그래서 차를 옆에 세워놓고 뚜껑을 열고 어디가 고장이 났나 하고 열심히 추운 겨울에 살펴보고 있는데 이 사람이 유능한 정비사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그 원인을 발견하지 못하고 추운 겨울에 쩔쩔매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세단 하나가 지나가다가 옆에 딱 서더라는 거죠. "도와드릴까요?" 속으로 얼마나 가증 스러웠을까요? 내가 이 도시에 최고가는 정비사인데 내가 고치지 못하는 것을 누가 고치겠는가? 아마 이런 생각을 했겠죠. "그런데 한번 제가 봅시다" 하고서 이렇게 몇군데 보더니 그 다음에 "한번 스타트를 해보시죠" 스타트를 하니까 돼요. 그래서 정비사가 깜짝 놀래 가지고 그 신사에게 죄송하지만 선생님 누구십니까? 그러니까 명함 하나를 딱 주더래요. 명함을 딱 보니까 거기에 헨리 포드. 네, 자동차를 만든 사람 그 회사의 사장, 자동차를 만든 사람, .그 만든 사람이 고칠 수가 있잖아요.
네, 나를 만드신 분, 그 분보다 나를 더 잘 도와줄 수 있는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
시편기자는 아름다운 산을 바라보다가 그러나 그 산을 만드신 그 하나님만이 진정한 내 인생의 길에 도움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인생의 길에 도움이 필요하거든 여러분 우상을 찾지 마세요. 우상을 찾지 마세요.
우리는 때때로 눈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참되고 살아계시는 하나님 보다도 눈에 보이는 우상을 찾아가는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급해지면 어디 가서 뭐 보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아니하는 참되고 살아계시는 그 하나님 그 하나님만이 저와 여러분의 인생의 길에 진정한 도움이 되신다는 사실을 오늘 이 순례자와 더불어 함께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길이 어려워 질 때 그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두번째는 우리 인생의 길이 어려워질 때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걸어 가십시요.
인생의 길이 어려워질 때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십시요. 우리가 인생의 길에서 고난을 당할 때 고난 그 자체보다도 더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외로움일 것입니다. 이 고난의 길을 나 혼자 걸어야 한다는 뼈저린 외로움 아무도 나를 이해할 수 없다, 누구도 나를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아무도 이 고통을 대신할 수 없다는 그 뼈저린 외로움이야 말로 그 고난이상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고통일 수가 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함께 인생의 길을 같이 걸어줄 수가 있다면 그리고 더불어 내가 당하고 있는 고통의 이야기들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순례의 길을 훨씬 더 우리는 잘 견디며 걷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말씀 드린 것처럼 이 시편의 구도에서 1절과2절에서 강조된 단어는 무슨 단어였어요? "나" 라는 단어에요. "나" 내가 산을 향하여, 그러나 3절부터 마지막 절 까지 두번째 섹션에서 강조된 중요한 단어는 무어라고 그랬습니까? "너" 나와 더불어 대화할 수 있는 너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에요. "너". 또 나에게 너라고 불러주면서 나를 격려해 줄 수 있는, 나를 너라고 불러줄 수 있는 친구가 순례자가 내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크다란 축복입니까?
우리는 이런 동행하는 순례자의 필요성의 중요성에 관해서 우리는 전도서4장의 유명한 교훈을 기억해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한번 전도서4장 한번 찾아보십시다. 전도서 4장, 전도서4장9절부터. 전도서4장 9절부터12절까지, 제가 9절 읽고 10절 여러분이 읽고 11절을 제가 읽고 12절을 여러분들이 읽겠습니다. 전도서 4장9절부터.
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 임이라
10: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
느니라
네, 인생의 길에서 함께 할 수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유한다는 것, 얼마나 소중한 일이예요?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내 인생의 모든 이야기들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리고 함께 내 인생의 미래를 더불어 꿈꿀 수 있는 한 사람이 내 인생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크다란 축복일까요?
저는 인생의 순례의 길에서 그래서 친구의 선택처럼, 친구의 선택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부부는 특별한 친구가 아니겠습니까? 남편이나 아내는 일종의 아주 특별한 친구에요 친구 가운데서도 친구, 아주 스페셜 프랜드(special friend), 그래서 부부생활의 축복은 정말 부부가 마음을 함께 할 때 그 서양의 아주 고전적인 결혼 주례가들이 결혼 주례를 하게 되면 기독교 목사님들이 꼭 하던 얘기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함께 하므로 앞으로 슬픔은 반으로 줄어 들것이고 기쁨은 배나 더할 것입니다. 그것이 부부생활의 축복이죠. 부부가 정말 마음으로 함께하는 친구가 될 수 있을 때 함께한다는 사실 때문에 고통은 반으로 줄어들고 기쁨은 배나, 갑절이나 더 증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함께 하기 위해서 부부가 된 그 대상이 정말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없는 친구가 되지 못할 때 또 그것처럼 인생에서 고통스런 사건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어느 잡지에서 제가 읽었습니다.
미국 축구, 미식 축구하는 그 풋볼 코치하는 사람이 감독이 한 2년째 성적이 계속 부진한 거에요 그러니까 친구가 없어져요. 자꾸만 인기가 떨어지고 사람들한테 계속 비판만 받고, 왜 성적이 그 모양이냐? 주변에서 격려해주는 사람들도 없어지고 다 떨어져 나가기 시작해요. 나중에 지나가도 쳐다보지도 않아요. 이 사람이 언제 해고되느냐 그것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사람 마음이 너무너무 비참했겠죠. 그때 보니까 자기를 따라다니고 자기를 환영하고 반겨주는 것은 꼭 하나밖에 없더래요. 자기가 길러주는 개 밖에 없더래요. 개만이 꼬리를 여전히 치면서 자기를 환영하는 유일한 존재가 개 밖에 없더래요.
그래서 어느날 자기의 와이프도 싫어하는 것 같더래요 자기를, 자기의 와이프도. 그래서 와이프 앞에서 이런 얘기를 했대요. "여보 인생에서 나는 정말 내 마음을 알아주고 외로움을 알아주고 함께할 수 있는 친구, 친구 하나를 발견했소 내가 이런 일을 당해보니까 정말 이 개 밖에는 나의 친구가 없소"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슬쩍 와이프를 쳐다보면서 "내가 이런 친구를 또 하나만, 내 인생의 길에서 친구 둘만 얻을 수 있다면 나는 내 인생의 아무리 어려운 상황도 돌파해 나가고 내가 극복해 나갈 수가 있을 것 같소" 하면서 와이프 얼굴을 딱 쳐다 보았단 말이죠. 그런데 와이프가 웃더니 "알았어요. Ok, 알았어요" 그러더래요. 그러더니 그날 저녁에 개 한 마리를 더 사가지고 왔다고 그래요. 하하하. 내가 오늘 개 얘기만 자꾸 하는지 아까도 얘기했는데. 하하.
진정한 친구가 누굴까 진정한 친구. 저는 오늘 이 시편을 통해서 진정한 친구의 자격이 있다면 세가지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실족할 때 넘어질 때 나를 비판하지 않고 일으켜 줄 수 있는 사람, 내 인생의 길에서 가다 보면 내가 돌을 차고 내가 넘어질 수도 있다 말이죠 실족할 수도 있어요. 내가 실족할 때 나를 비판하지 않고 다시 일으켜 세워줄 수 있는 사람.
두번째, 내가 그를 필요로 할 때 내 곁에 있어줄 수 있는 사람, 내가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그냥 내 곁에 있어줄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친구에요.
그 다음 세번째 하나만 더 첨부한다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할 수 있는 사람,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들 수가 있는 사람.
저는 오늘 이 시편의 순례자는 그런 행복한 순례자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수 있는 친구를 갖고 그들은 함께 순례의 길을 걷고 있었던 거에요. 그래서 아마도 이 순례자가 이제 거의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면서 그동안 걸어왔던 그 먼 장정 때문에 피곤을 느끼고 그의 발걸음은 흔들리기조차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그가 아파하고 피곤해 하다가 갑자기 눈을 들었을 때 저 앞에 바라보이기 시작하는 예루살렘 언덕에 둘러싸고 있는 병풍처럼 둘러싸인 시온의 산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이렇게 탄식처럼 아마 노래 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이렇게 하면서 정말 하나님을 향한 도움을 구하고 싶었을 때 옆에 함께 가던 순례자가 그를 쳐다보면서 노래했을 거란 말이죠.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치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그 분은 졸지 아니하신다고,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편이에요. 그렇게 함께 화답할 수 있는 순례자가 내 곁에 있어줄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인생의 길에서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이 신앙의 순례의 길에서 이런 친구의 도움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신약성경도 우리에게 역설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히브리서 10장을 한번 더 찾아보겠습니다.
히브리서10장. 한번 같이 찾아보겠습니다. 히브리서10장, 히브리서 10장입니다. 히브리서10장22절부터, 22절은 이렇게 히브리서 기자가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십자가의 그의 흘린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이제부터 우리 일생은 하나님을 향해서 계속 나아가는 삶이에요. 하나님을 향한 여정, 인생의 길은 결국 그 내 삶의 주인 되신 한 고향이 되신, 내 존재의 고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한 여정, 조니(journey) 그게 인생이라는 말이죠.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길 하나님께 나아가자!
그런데 그 다음절에 보시면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그 다음에 이런 말씀이 나오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자"
그런데 그 하나님께 나가는 동안에도 혼자 나갈 수가 없는 거에요. 친구들이 필요해요. 믿음의 친구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할 수 있는, 사랑을 격려하고 선행을 격려할 수 있는, 인생을 고통 속에서도 언제나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내가 실족하고 넘어질 때 나를 비판하기보다 다시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시며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그 분은 당신이 일어나기를 원하신다고, 그 분은 당신을 지키시는 거라고 여기까지 동행하셨다고 말씀하시면서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줄 수 있는 그 순례자의 친구를 갖는다는 행복, 저는 교회 공동체의 가장 커다란 축복은 교회 안에서 우리가 이런 친구들을 만날 수가 있다는 사실이에요. 그리고 이렇게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친구들을 가지는 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는 한, 우리 인생의 어떤 고난도 견딜 수가 있는 줄 믿습니다.
인생의 길이 어려워질 때 하나님의 도움을 기도하십시요.
그리고 두번째로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십시요.
그리고 세번째는 하나님의 지키심을 믿으십시요. 하나님의 지키심을 믿으십시요.
이 짤막한 본문에 보면 이 시편에 지킨다는 단어가 몇 번이나 나옵니까? 그래서 몇 절에 나옵니까?
몇 절에 나와요? 이것은 실력 없어도 시력만 있으면 대답할 수가 있습니다. 잘 보세요. 몇 절에 나와요?
3절 한번 나오고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
또 4절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
또 5절 녜,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5절 다음에 그 다음에 몇절 이에요?
7절, 7절에 두번 나오죠 너를 지켜,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또 그 다음에 뭐에요?
8절,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이 짤막한 시편에 몇 번씩이나 나옵니까? 모두 몇 번 나왔어요? 6번나왔나요? 네, 6번.
네, 이 짤막한 시편 가운데서 계속해서 함께하는 순례자가 그에게 주고있는 격려가 뭐냐하면 "하나님이 당신을 지키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지키시고 계십니다.
특별히 이 순례자 친구는 공동체의 고백을 개인적 고백으로 적용시키고 있는 것을 관찰해 보십시요.
여기 4절에서5절로의 전환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4절에서5절로 어떻게 전환하고 있는 것인가를 보세요. 4절에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 민족의 공동체. 선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을 지키시는 그 하나님, 지키시는 자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렇게 지키시는 하나님이 바로 누구를 지키신다? 5절에서는 "너를 지킨다"
교회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요. 우리 교회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또한 우리 개인의 인생의 길에서 우리 개인을 지키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 지키심의 영역이 이 시편에 보면 얼마나 포괄적인지 몰라요. 지키심의 영역이 아주 포괄적이에요. 우선 모든 때에 지켜 주십니다. 6절에 보면 낮에도 뭐에요? 밤에도.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않고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않도록 낮에도 밤에도 지키시는 바로 그 분.
또 7절에는 모든 형태의 환난에서 지키시는 그 분. 모든 형태의 환난에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그랬어요. 모든 형태의 고난에서 지키시는 하나님.
또 8절에는 모든 경우에서, 모든 경우에서, 8절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들어가는 일도 나오는 일도, 모든 케이스를 지켜주시는 하나님. 그 다음에 모든 기간동안 지금부터 해서 언제까지? 영원까지 모든 기간 동안에 지키시는 하나님.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고 약속하신 바로 그 하나님, 언제나 깨어 계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주무시는 법이 없습니다. 마치 입시 공부하는 어린 아들이 염려스러워서 그 공부하는 아들 곁에서 밤을 꼬박꼬박 지새우시는 어머니들처럼 그러나 엄마들은 그러다가 졸지만, 그러나 그 하나님에게는 주무시는 법이 결코 없으시는 그 하나님. 그렇게 언제나 우리를 항상 지켜주시는 그 하나님. 그 하나님.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 말씀이 그렇다고 해서 우리를 모든 환난에서 면제한다는 약속은 결코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그렇다면, 그렇다면 내 친구에게 왜 이런 어려움이 생겼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 왜 이런 고통이 생겼습니까? 아마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거에요.
그런데 가만히 읽어보시면 이 순례자도 이미 고난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래서 도움을 호소하고 있는 거에요. 왜 지키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어떤 고난은 허용하실까요? 그건 몰라요 나한테 묻지 말아요. 그 분이 아세요. 그러나 고난조차도 우리에게 유익이라고 판단하신 그 하나님이 어느 정도의 고난은 아마 허용하실 거에요. 그러나 고난을 허용하신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 반드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자, 뜨거운 사막의 태양은 여전히 내려 쪼이고 있어요.
그래서 이 태양 앞에 나는 아주 질식해 버리는가 했더니 어느새 드리우고있는 그늘을 보는 순간 얼마나 이 순례자는 기뻐했을까요. 그 하나님이 내 우편에서 내 그늘이 되신다. 사막의 오아시스를 준비하시고 사막의 그늘을 준비하시고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그 하나님 인생의 길은 확실히 고통이 있어요. 환난이 있어요. 눈물도 있어요. 아픔도 있어요. 어둠도 있어요. 그러나 그 고통 속에 다가오셔서 다시 나를 붙드시고 위로하시고 지켜주시는 그 하나님.
낮에 태양이 나를 공격하는가 하면 밤중의 달까지도 우리를 공격할 수가 있습니다.
이 사막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정신병에 걸릴 때 그것을 문 스트라이크, 그 달빛의 공격 때문에 정신병이 든다는 생각을 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달을 무서워했다고 그래요. 태양도 때로는 무섭고 달빛조차도 무서울 수가 있어요. 인생의 어느 한 순간에 우리를 둘러싼 삶의 환경이 다 나를 공격하는 세력처럼 보여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넉넉한 그늘로 나를 품에 안아주시는 그 분. 그 분이 있는 한, 환난은 있지만 그 환난 속에서 지키심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는 것을 믿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본문이 약속하는 궁극적인 지키심은 단순히 환경이나 육체에 대한 지키심이 아니에요.
영혼에 대한 지키심이예요. 이 단어를 주목해보세요.
7절, 다시 한번 7절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뭘 지키신다고요? "네 영혼" 네 영혼을.
때로 하나님이 우리의 육체 가운데 고통을 허용하시는 이유, 육체의 질병을 허용하시는 이유. 환경의 혼란을 허용하시는 이유. 그 환난과 고통을 통해서 내 영혼을 순결하고 아름답게 빚어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때때로 어떤 고난을 허용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허용되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 영혼만은 견고히 지키십니다.
내 영혼이 순결하도록 내 영혼이 아름다워 지도록 그리고 하나님 앞에 빛나고 아름다운 영혼으로 설 수 있도록 환난을 허용하시고 환난 속에 지켜주시는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을 부르는 자들은 인생의 순례의 길에 어둠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노래하는 자들이 될 수가 있다고 믿습니다.
스페인 격언에 이런 말이 있어요. 돌이 많은 시내가 아름다운 노래를 만든다. 다같이 "돌이 많은 시내가 아름다운 노래를 만든다" 네, 돌이 없는 시내에 가면 노래가 없어요.
그냥 쫄쫄쫄쫄, 돌이 많은 시내는 아름다운 노래를 만듭니다.
때로는 역경이 우리의 아름다운 영혼을 선물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시는 여러분 인생에서 역경이 올 때 그리고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그런 시련이 내 가슴을 아프게 할 때 시편 121편을 펼치세요. 이 시편을 읽어십시요. 그리고 이 시편을 노래 하십시요. 그리고 이 시편의 주인이신 그리고 산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주시는 넉넉한 도움을 경험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 노래하시겠습니다. 이 노래를 노래하시겠습니다. 우리 찬양 팀하고 같이 우리 지구촌 296장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찬양하시면서 헌금하겠습니다. 찬양하시면서 헌금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우편에 그늘 되시니
낮에 해와 밤에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환난을 면케 하시니
그가 너를 지키시리라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우편에 그늘 되시니
낮에 해와 밤에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환난을 면케하시니
그가 너를 지키시리라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출처: 하늘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