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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간증

예화 모음 - 감사하는 사람은 감사할 것이 계속 생긴다

작성자靑野|작성시간13.06.12|조회수459 목록 댓글 0

 

감사하는 사람은 감사할 것이 계속 생긴다

 

아주 맑은 연못에 개구리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개구리들은 행복한 삶에 대해 지루함을 느꼈다.그래서 하늘을 향해 간구 했다.“저희들에게 왕을 보내 주십시오” 하늘은 연못에 커다란 통나무를 던져주었다.그때부터 개구리들은 통나무를 왕으로 섬겼다.통나무 주변에 몰려드는 애벌레,딱정벌레,지렁이들은 아주 맛있는 먹이였다.
그러나 개구리들은 몇 달이 지난 후부터 반응이 없는 통나무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그래서 다시 하늘을 향해 빌었다.“좀 더 강력한 왕을 보내주소서” 하늘은 연못에 식욕이 왕성한 큰 물뱀을 던져주었다.개구리들은 물뱀을 크게 환영했다.그런데 그날부터 물뱀은 개구리를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다,몇 달 후,연못에는 단 한 마리의 개구리도 살아남지 못했다.
불평은 불행의 시작이다.불평과 불만이 많은 사람이 인생의 물뱀을 만나기 쉽다. 감사하는 사람은 감사할 것들이 계속 생긴다.

 

한국 사람은 언어에 탁월한 능력이 있습니다.

기독교 선교하기 위해서 한국 사람들의 장점은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언어 능력입니다.
한국말로 잘모르겠다 라는 말을 일본 사람에게는 "아리까리"
인도 사람에게는 "알간디 모르간디"
프랑스 사람에게는 "알송달송" 아프리카 사람에게는 "긴가 민가"
이렇게 하면 4개국어는 그냥 하는 것입니다.

 

이혼한 사람

 

주님과 나는 거대한 집회장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천 명에서 천 오백 명은 족히 될 듯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커다란 강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연단 위에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특별 세미나』라고 씌어있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연단에 서 있는 남자가 청중들에게 강연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흥분이 절정에 달한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흘러 넘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오른쪽 뒷벽에 기대섰습니다.
그때 그 강사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이라는 주제로 강연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갑자기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기독교인의 가정을 보호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을 강구하고 싶으시다면 이혼한 기독교 지도자와 작가들이 기독교계의 방송 프로그램에 등장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제 우리는 이혼한 사람들이 복음에 대한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결혼과 가정에 관한 한 더 그래야지요!"
청중들 속에서 우레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심지어 연단 앞쪽에 있는 이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슬프게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나는 내 백성이라는 저 사람들이 내 복음의 이름으로 하고 있는 저런 율법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를 용납하기가 몹시 힘드는구나."
"잠깐만요." 나는 그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물었습니다. "저는 항상 이혼이 그리스도인 가정을 파괴하는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아니다." 슬픈 어조로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이혼이 아니라 죄가 가정과 교회를 진짜 위협하고 있지. 이혼은 죄로 인한 증상이자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죄를 처리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성경에 분명히 기록해 놓았다! 만일 어떤 기독교인 부부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두 사람이 서로 솔직하게 대면하여 자신들의 죄와 고통에 대해 얘기하고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필요할 경우 다른 사람들에게 조언을 요청한다면 이미 이혼한 수백 명의 기독교인들도 이혼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를 숨기는 것은 결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게 하지도, 또 회복시켜 주지도 못한다.
"그리고 끝내 이혼을 했다 해도 (그 일로 내 가슴은 찢어지는 듯이 아프긴 하지만) 나의 용서와 화해의 통로는 그 사람들한테 계속 열려져 있다. 나는 그들을 완전히 용서해 준다. 그리고 나의 관점에서는 이혼한 자들이라고 해서 '2등급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않는다. 또 그들 중에는 죄로 인한 고통과 외로움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더욱 새롭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천천히 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여러 해 동안 주님을 따라다녀 누구보다도 주님을 잘 알고 있었을 베드로가 죄를 범하고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후에도 그를 교회의 주요 지도자로 세우신 것을 말씀하시는군요?"
"그래, 그것과 같은 원칙이지. 그러나 나는 죄를 미워하고 이혼을 싫어한다. 어느 누구도 그걸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으며, 첫 번째 실패가 아무리 크다 해도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난 네가 이 말을 내 백성들에게 꼭 전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율법주의적인 사람들은 나의 말을 채찍질하는 도구로 삼기에 내가 가슴아파 죽을 지경이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은, 이혼을 한 후 자신의 죄를 깨우쳤다고 고백한 뒤에 내 안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죄와 이기심을 볼 줄 모르는 저 독선적인 그리스도인이란 말이다!
"내 백성들의 정죄와 사랑의 결핍, 그리고 몰이해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는 사람들은 비단 이혼한 사람들만이 아니다. 크고 유명한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 중에는 교회 안에 나의 사랑과 관용이 없다는 이유로 거리로 뛰쳐나오는 이가 많다. 그러나 정작 교인들은 흔히 가난한 자, 못난 자, 재능이 없는 자, 그리고 회중석에서 그들과 멀찍이 떨어져 앉는 못생긴 자들을 무시하고 묵살해 버린다. 성경에서 나는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내가 가장 가깝게 여기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네가 그들을 위해서도 말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

 


교만한 사람과 겸손한 사람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생각한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장점을 먼저 생각한다. 십계명을 대할 때에도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명하신 것을 지켰으므로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겸손한 사람은 하라고 명하신 안식일을 지키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부모를 공경하라를 충실히 지켰는가를 생각하면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다. 겸손한 사람은 나보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한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은 언제나 자기 뒤로 밀어내고 자기 위주다. 내가 있기 때문에 나라도 있고 이웃도 있다고 생각한다. 교만한 사람은 우선 당장 코앞의 것, 보이는 것만 생각한다. 겸손한 사람은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나를 돌아보아 체질이 진토임을 시인하는 사람이다(시 103:14). 교만한 자는 나를 이런 식으로 대접하다니! 하고 항상 불만 속에서 사는 사람이다. 겸손한 자는 상대방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다. 교만한 자가 지도자가 되면 권력이 얼만큼 휘둘러지나 얼마나 강한가를 꼭 시험하고 만다. 겸손한 자가 지도자가 되면 자신을 녹여서 한 시대의 어두운 길을 밝히는 촛불과 같은 인도자가 되고자 할 것이다.

 


돕는 손길을 넓히는 사람

 

스스로 회복되고 하나님의 관계가 다시 세워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돕는 손길을 넓힐 수 있었다. 일그러진 사회의 상처 입은 자들과 궁핍한 자들은 기쁨의 근원을 찾고,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한 사람들에 의해 만나질 수 있다. 어네스트 베이커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건강한 영적인 삶에서 개인과 사회의 영적인 필요와 일시적인 필요는 함께 나아간다. 죠지 뮬러는 위대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고아들을 똑같이 위대하게 돌보았다. C. H. 스펄젼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하였다. 그러나 그도 역시 양로원과 고아원을 세웠다. 부스(General Booth)는 타락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큰 규모로 구호사업을 조직했다.
진정한 기독교는 내세뿐만 아니라 현세의 사람들을 위해 관심을 가진다. 영혼의 상태에 대해 가장 깊은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현세의 사람들을 위해 최고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영혼의 가치에 대한 깨달음은 그것이 내주하고 있는 육체에 대한 존중을 계속 증가시켜왔다. 우리는 사람의 전체성을 보살펴야만 한다.
여호와의 기쁨은 우리가 용서받았기 때문에, 선하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게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온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면 감정적이고 의지적인 결단은 따라오게 된다. 이 순서가 뒤바뀔 때 큰 어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부지런한 사람

 

잠언서에는 지혜로운 사람과 미련한 사람이 한 성경 구절에 나왔듯이 부지런한 사람과 게으른 사람도 한 성경 구절에서 표현을 했습니다.
부지런한 사람


1. 사람을 다스리게 됩니다.
지도자의 덕목 가운데 가장 기본이며..
가장 중요한 덕목이 부지런한 사람 입니다.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잠12:24)
이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가 사람을 다스리는 일입니다. 부지런해야 이 일을 감당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부귀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 들이 부자 되기를 희망 합니다.
그래서 금년 초에 부자 되세요....^^ 하는 말이 크게 유행 한 적이 있으며 인터넷 상에서도 아기 목소리로 부자 되세요..^^를 모두 사이트에서 활용한 것을 보았습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단순이 부자가 되는 것 뿐이 아니고 귀하게 된다고 한것 입니다.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잠12:27)

 

3.풍족함을 얻습니다.
우리 인생에서의 기본은 마음을 다스림에서 부터 출발 하는데 그 마음의 풍족 함을 부지런한 사람이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의 풍성함은 매사를 여유와 평화로 시작 됨으로
안되는 일도 되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 (잠13:4)

 

4. 경영의 풍부함에 이릅니다.
하는 모든 일 속에서..경영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부지런한 사람에게는 풍부함이 뒤 따른다고 합니다.
이지음 같이 복잡 하고 다양 함 속에서 내일의 예측이 불 확실한 속에서의 경영은 너무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부지런한 사람에게는 경영의 풍부함이 함께 한다는 것 입니다.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잠 21:5 )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 10:4 )
잠언서의 말씀 가운데 부지런한 사람에 관한 말씀 보다는
게으른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 약 2배 이상이나 됩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이 게으름에서 많이 헤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게으름에 속해 있음으로 주신 말씀 같습니다. 어느 부분에서 어느 방면에서 일하든 간에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부지런하셔서 부지런한 사람이 받는 복을 꼭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가장 미워한 사람

 

본문: 마태복음 6장 1-4절, 23장 27-28절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이 쓴 명작 "지킬박사와 하이드"(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란 책에 보면 어느 곳에 마음이 착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의사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흠모한 나머지 저 사람이 혹시 천사가 사람이 되어 내려오지 아니 하였는가? 이렇게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에는 밤마다 무서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살인, 방화, 절도, 소녀 유괴등 끔찍한 범죄사건이 밤마다 일어나서 모든 사람이 범인이 잡히기를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 칼경이란 유명인사가 살해되었는데 단장(지팡이)에 얻어맞아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단장을 조사해보니까 앤더슨이란 변호사가 지킬박사에게 준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지킬 박사를 찾으려 했으나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어서 지킬박사의 집 문을 부수고 들어가 보았더니 지킬 박사의 옷을 입고 자살한 하이드란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천사같이 착한 사람 지킬 박사와 악마같이 악한 사람 하이드란 사람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지킬박사는 이상한 약을 먹고 마음도 얼굴도 흉악해져서 하이드란 사람이 되어 밤마다 그런 끔찍한 죄를 범하다가 결국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 소설이 왜 명작으로 불리우는가 하면 누구나 사람의 마음속에 이 두 가지 요소, 지극히 선한 성품과 지극히 악한 성품이 있어서 이중인격자(二重人格者)혹은 위선자가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스티븐슨이 쓴 "브로디 목사"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이 책에도 브로디 목사가 낮에는 거룩한 목사 노릇을 하고 밤에는 도둑질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이중인격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입니다.
우리 모두가 조심할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선한 지킬박사도 될 수 있고 악한 하이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다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두려워하고 항상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심지어 대 사도 바울도 로마서 7장에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서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8장에 가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런 갈등을 해소하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1. 가장 미워하고 저주하신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러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시면서도 원수를 용서해 달라고 하신 예수님인데도 뜻밖에 몹시 미워하시고 일곱 번 저주한 사람들은 바로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외식"이란 말은 바로 "위선자"(hypocrite)란 뜻이며 "이중인격자"란 말입니다. 즉 겉과 속이 다르고, 말과 행실이 다르고, 남 앞에서 하는 말과 돌아서서 하는 말이 다른 사람입니다.
이런 위선자들 보다 차라리 강도나 창녀나 도둑놈들이 더 낫고 하나님나라에 더 가깝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똑같기 때문입니다. 속은 악한데 겉으로는 거룩한 체 하거나 착한 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회개할 가능성이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지만, 외식하는 자들 위선자들은 회개할 수도 없고 구원받을 가능성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아예 저주하시고 가증히 여기셨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를 받을 수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살인자, 강도,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온 사람도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가 있었지만 겉으로는 거룩한 체하고 착한 체하면서 속에는 흉악한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털어놓지 않기 때문에 회개할 수가 없고 구원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위선자 이중인격자 되지 않도록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거짓말하고 악을 선으로 가장하는 것이 사탄의 성품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3절 말씀에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사랑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하고 일곱 번이나 저주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23장 27절에 보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책망했습니다.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양의 가죽을 뒤집어 쓴 이리와 같이 겉과 속이 다르고 말과 행실이 다른 것입니다.
가령, 예수님 믿은지 얼마 않되서 아직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는 것이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큰 흠이 안됩니다. "믿음이 자라면 끊을 날이 오겠지"하고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고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었는데도 술 취하고 담배 피우는 것이 사람들의 눈에 띄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겉과 속이 다른 이중인격자의 생활을 해온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죄 자체를 미워하시는 것보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을 더 미워하십니다. 거룩하면 거룩한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겉과 속이 같으면 천국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가령 진실하고 거룩한 천사나 장로나 목사인줄 알았는데 몰래 도박하러 다니고 언젠가는 작은 마누라를 숨겨 두고 있다가 10살, 20살 난 아이가 여자와 함께 나타났다고 하면 얼마나 세상을 놀라게 하겠습니까? 누구나 시험에 들면 실수하여 무슨 죄라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겉과 속이 다른 이중인격자가 되어 계속 죄를 숨기는 생활을 한다면 이것은 저주의 대상이 안될 수가 없습니다.

 

2. 이 무서운 위선자가 되지 않으려면

이스라엘 나라의 가장 위대한 왕 다윗도 한때 시험에 들어 간음죄 살인죄를 지었지만 애통하며 눈물 흘리며 자복하고 회개하고 돌이켰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한 그 칭찬에 어긋나지 않게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뼈를 깎는 아픔이 있어도 회개하고 돌이키면 되는 것입니다.
"위선"(hypocrite)이란 말의 헬라어의 뜻은 "가면을 쓴 배우"(an actor who wears mask)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속 중심과 겉 행동이 다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겉과 속 사이에 차이(gab)가 생기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항상 불성실하고 부정직했습니다. 종교생활을 죄를 가리우는데 사용했습니다.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물질과의 관계에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늘 하나님의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칭찬을(applause) 목적 삼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영광만을 추구하기 위해 종교생활을 실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위선자가 되고 이중인격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외식하는 자, 위선자가 되지 않기 위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고 조심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① 항상 솔직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진실한 사람이라고 실수가 없다거나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을 해도 진실하고 솔직한 사람은 죄를 그대로 품고 있을 수가 없어서 토설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시편 51편 6절에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하나님은 죄가 있거나 없거나 하나님 앞에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진실성이 없는 모든 제사나 기도나 설교나 찬송은 하나님 앞에 통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남 보기에 큰 죄인이라도 솔직하고 진실한 사람은 용서받을 길이 있고 구원받을 가능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 외식하는 사람은 회개할 수도 없고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강도, 창녀, 도둑놈이 하나님나라에 가깝다고 했습니다. 살인 간음 도적질 죄보다 더 나쁜 것은 외식이요 위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강도 창녀 보다 더 미워하시고 일곱 번이나 저주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했는데 여기서 "청결"이란 말은 헬라어로 "카타로스"(καθαρο?)라고 하는데 "순수한" 즉 한가지 마음, 위선이 없는 마음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위선이 없는 사람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사람입니다. 많은 죄가 있어도 솔직하고 진실한 사람은 하나님나라에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도 양심이 마비되지 않도록 하고 양심이 흐려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양심은 영혼의 창문이라고 하는데 창문이 흙탕물로 더러워진 채 그대로 두면 햇빛이 들어올 수 없는 것 같이 양심이 더러워지고 마비가 되면,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 우리 심령에 들어올 수가 없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대신에 마귀의 소리가 들려오는 법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9절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양심을 버린 사람은 그 믿음이 파선한 배와 같아서 그 신자는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양심으로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회개 할 수도 없고 따라서 십자가의 보혈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깨달을 수 없고 영의 세계에 대해서는 캄캄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20절에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고 했습니다. 양심을 버린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과 책망이 우리 양심을 통해 들려 올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변명하고 합리화시키게 됩니다. 회개와는 거리가 멀게 됩니다. 시편 19편 14절에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다윗이 기도 했는데, 말로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 할 것이 아니라 남이 볼 수 없는 마음의 숨은 생각까지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생각을 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입니까? 마귀는 그 대표적인 속성이 "거짓말쟁이"요 "살인자"입니다.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일을 합니다.

 

② 철저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외식하는 자, 이중인격자, 성격이 굳어져버린 사람은 회개할 수도 없지마는 시초에 뼈를 깎는 아픔이 있어도 철저히 회개하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피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A. 애통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양심이 화인맞고 이중인격자로 굳어져버리면 죄에 대한 아픔이나 양심의 고통이 사라지고 뻔뻔스러워지고 양심의 고통이 사라지고 맙니다. 스바냐서 2장 1절-2절에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명령이 시행되기 전, 광음이 겨같이 날아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찌어다" 얼굴이 두꺼워져서, 수치를 모르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가 임하기 전에 어서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장 4절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죄에 대한 애통이 있을 때에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이 있게 됩니다.
이사야 57장 15절에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고,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지만 통회하는 자와 함께 하시고 통회하는 자의 영을 소성케 하신다고 했습니다.

 

B. 죄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아시는 죄는 하나님께만 자백하면 되지만 때로는 철저한 회개를 위해서 내 자신의 회개의 확신을 갖기 위해서 믿을만한 사람에게 자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신부에게 고해성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faithful)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자백할 때 모든 죄와 불의를 깨끗이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기도 시간에나 예배시간 "참회의 기도"시간에 가만히 있지 말고 비록 조용한 목소리로 기도할지라도 애통하는 마음,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 자복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몰라서 자백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복할 때 우리 죄를 인정하는 것이 되고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는(agree with)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나 신부나 어떤 믿을 만한 사람에게 자백했는데 그 자백을 듣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유포시킨다면 그 죄를 지은 사람보다 열 배, 백 배 더 악한 것입니다. 살인 도적질 간음죄보다도 위선자 이중 인격자 되는 것이 더 큰 죄요, 위선과 외식의 죄보다 더 큰 죄는 남이 회개 자복한 죄를 유포시키는 죄로 이는 더 큰 심판을 받을 무서운 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데모하다가 명동성당이나 교회에 들어가 숨어도 공권력을 투입하지 못하는 것도 이런 성역을 인정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C. 죄를 끊고 돌아서는 것
아무리 슬퍼하고 울고불고 난리를 쳐도 그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다면 회개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큰 손해가 나고 뼈를 깎는 아픔이 있어도 죄를 끊고 돌아설 때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55장 7절에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죄의 생각까지도 버리고 돌아서서 하나님께 나아올 때 그 어떠한 죄라도 다 용서해 주시고 긍휼히 여기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개가 토하였던 것을 다시 주워 먹듯이 말로만 회개한다고 하면서 죄를 계속 하면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외식자, 위선자가 되는 것입니다. 한 번, 두 번 안되면 다섯 번, 열 번이라도 노력하면 이루어집니다.


 

날마다 다리를 건너는 사람

 

상고를 졸업하고 전자회사 영업 사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김우준 씨는 십 년 동안 성실히 일하여 모은 돈과 주변 사람들의 돈을 빌려 조그만 가전 제품 대리점의 사장이 되었다. 그런데 사업이 안정되고 빌린 돈도 거의 다 갚아 갈 즈음 사기를 당해 전재산을 날릴 위기에 처했다.
남은 것이라고는 아는 사람으로부터 빌린 빚뿐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 빚을 갚아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가전제품 외판원으로 나섰는데, 날마다 방문 판매를 하면서 버는 돈중에서 하루에 오천 원씩 빚을 갚아 가기로 했다.
매일 저녁 그는 오천원을 주머니에 넣고 한강다리를 건너 용산까지 돈을 빌려 준 사람의 집을 찾아가 돈을 갚은 뒤, 온 길을 되돌아 집으로 왔다. 하루도 빠짐없이 강바람을 맞으며 한강대교 위를 걸어다니면서 그는 언제가는 반드시 사업을 다시 일으키리라는 희망의 싹을 가슴속에 키워갔다.
몇 년이 지나 드디어 빚을 다 갚은 그는 재기할 계획을 차곡차곡 진행시켰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성실성을 눈여겨본 전자회사 판매이사가 그의 신용을 믿고 물건을 대줄테니 다시 유통업을 해보라고 권했지만, 자금이 부족했던 그는 돈이 좀더 모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 즈음 우연히 예전에 오천 원씩 돈을 갚았던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둘은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얘기 끝에 김우준 씨의 처지를 알게 된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당신이 오천원씩 빚을 갚기 시작했을 때, 나는 며칠 지나면 그만둘 거라 생각했소, 하지만 당신은 끝까지 해냈고, 그 사이 당신에 대한 내 믿음도 쌓여갔소. 나는 언젠가 당신이 꼭 재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오. 새로 출발한다니, 내게도 출자할 기회를 주겠소?"
그 동안 그는 돈을 갚은 게 아니라 신용을 쌓은 것이었다.

 

말로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가 없어서..

 

한 부인이 그리스도교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하루는 한 남자가 보리밭을 밟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자세히 내려다보았더니 그는 다름 아닌 병원의 원장이었다. 그때 그녀의 놀라움은 실로 컸고 비로소 말이 적은 원장이 웅변가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인물임을 알았던 것이다. 병원의 원장인 그가 정원사나 하는 보리밭을 밟고 있는 성실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지극히 적은 일에 최선을 다했던 그 원장은 바로 목사이자 신학자이며 의사인 동시에 음악가이기도 한 '시바이쩌'였다. 한번은 누군가 시바이쩌에게 '당신은 왜 의사가 되었습니까?'라고 질문하자 그는 '나는 말로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가장 겸손한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

 

저는 겸손이라는 말을 생각할 때마다 꼭 생각나는 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 프란치스입니다. 성 프란치스의 제자가 환상중에 하늘나라에 가서 천국 구경을 했는데 거기에 보좌가 쭉 있는데 가장 높은 보좌가 있더래요. "이건 누구겁니까?",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성 프란치스가 앉게 될 의자라'고 그랬습니다. 아무리 스승이 지만은 너무 높아 진다니까 좀 질투가 났어요. 질투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 다음에 성 프란치스를 만나가지고 조용한 시간에 "선생님은 선생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답하시는데 "나, 나는 세상에서 제일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그 때 제자는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건 위선입니다. 선생님은 성자입니다. 세상에 강도, 살인, 뭐 도적질, 많은 악한 사람들이 많은데 선생님이 세상에서 제일 악하다면 그게 말이 됩니까?"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그건 자네가 나를 몰라서 그래. 나는 참으로 악한 사람이거든. 그러나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있어서 그 은혜로 인하여 내가 있는 거야. 내게 주신 은혜를 다른 그분들에게 하나님이 주셨다면 그분들은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거라고" 이렇게 말할 때에 제자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고 합니다. 여러분, 가장 겸손한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에요. 가장 높은 사람이요, 가장 의의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쿠키 채가는 사람

 

 한 부인이 비행기의 탑승 시간을 기다리며 대합실에 앉아 있는 동안 신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자리에 앉기 전에 대합실에 있는 간식 파는 상점에서 비행기에 탄 뒤에 먹으려고 한 봉지의 쿠키를 샀습니다. 신문을 읽으며 옆눈질을 해 보니 자기 곁에 앉아 있는 신사가 그것을 먹고 있었습니다. 부인이 내려다 보자 그녀가 산 쿠키 봉지가 열려서 그 신사가 그것을 먹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부인은 그 신사가 남의 쿠키를 먹을 만치 염치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인은 자기의 쿠키를 그 사람에게 다 빼앗길 수가 없어서 봉지에 손을 넣어 자기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 신사가 계속해서 쿠키를 갖다 먹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더욱 안달이 나서 부인의 봉지 속의 쿠키를 하나만 남겨 놓고 모드 한 주먹에 먹어 치웠습니다.
그 때 옆에 앉은 신사는 손을 넣어 마지막 쿠키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 먹기 전에 하나를 반으로 쪼개어 그 반 조각은 남겨 놓고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있자 이 부인은 더욱 화가 나서 반 조각이 남아 있는 빈 봉지를 낚아채서 그녀의 가방에 쑤셔 넣었습니다.
그러자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 가방 속에 열지 않은 쿠키 봉지가 그대로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성실한 사람

 

우리나라의 '국민교육헌장'과 같은 것이 미국에도 있는데 '성실한 사람이 되자'는 항목을 보면 성실이 무엇인지 열 가지로 정의를 내려놓았습니다.

1.한마디의 약속도 잘 지키는 사람
2.의지가 견고하여 매사에 변심치 않는 사람
3.어떤 문제든지 일정한 소견을 가진 사람, 즉 삶의 철학이 있는 사람
4.작은 일도 큰일처럼 정직하게 처리하는 사람
5.이기적인 야심을 버리고 사회나 인류를 위하여 포부에 불타는 사람
6.기회를 포착하는데 민첩하고 지혜로운 사람
7.용기와 결단력이 있는 사람
8.많은 사람 앞에서도 자신의 특성을 잃지 않고 자세가 뚜렷한 사람
9.힘들고 어려운 일도 고생으로 여기지 않고 감수하는 사람
10.실패가 와도 낙담하지 않고 잘 인내해 내는 사람

 

영으로 사는 사람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식 때,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케네디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 당신은 세계에서 가장 큰 권세를 쥐고 있다. 당신 손에 있는 권세로 세계의 역사와 운명이 좌우된다. 당신은 노련한 전문가인 수 많은 보좌관을 데리고 있다. 만일 문제가 생기면 그 많은 보좌관들이 제각기 자기의 전문적인 지식을 당신에게 말할 것이고, 당신은 이 사람, 저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게 된다. 당신은 당신을 보좌하고 있는 사람들의 말을 모두 경청해야 한다. 그러나 판단을 내려야 할 때에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하나님 앞에 묵상하고 가슴 곳에서 울려나오는 음성을 들어라.`

우리의 마음은 보좌관입니다. 마음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수학적이고 논리 정연하고 사회학적이며 통계적인 것들을 내놓습니다. 그러나 판단을 내릴 때는 영(영)이 해야 합니다. 묵상하고 기도하는 중에 우리의 영이 하나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판단을 얻어서 행하게 되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성공적인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영으로 사는 사람이며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식을 삼 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

 

로마의 디오클레티안 황제가 기독교를 심히 핍박할 때에 있었던 일이다.
그때에 예수를 진실하게 믿는 부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박해를 피하여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그곳에다 깊은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앉아 옷을 깨끗이 보관하기 위해 벗어 놓고 성경을 읽으며 날을 보냈다. 몇 년이 지나고 디오클레티안 황제가 죽었고 기독교 박해도 훨씬 완화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래서 두 부자는 옷을 챙겨입고 세상 마을로 나왔다. 때는 봄철이라 농부들이 밭에서 일하기에 분주하였다. 이 모습을 본 부자는 농부들이 너무 세상일에만 열중하고 신령한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하며 농부들을 책망하였다.
그러자 그들의 머리 위에서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면서 `너희는 내가 만든 세상을 파괴하려 하는 자이니 속히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라 `는 준엄한 음성이 들렸다는 것이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

 

오래 전에 "래리 에르진"이란 배가 해상에서 파선되어 가라앉을 때 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마다 날 좀 살려 달라고 아우성을 쳤으나 모든 사람들은 자기 하나 살기에 바빠 그들을 도외시하였습니다.
그때 "스펜서"라는 젊은 학생이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건져 내어 모두 17명을 구출하였다고 합니다.
스펜서가 노인이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묻기를 "선생님은 해상사고에서 17명을 건졌다지요. 선생님에게 몇 사람이 찾아와 감사하다고 했는지요?"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라고 침통하게 대답했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17:17)

 


호스를 밟고 있던 사람

 

집안의 수도에 긴 호스를 연결하여 잔디밭에 물을 주고 있던 어느 사람이 감깐 쉬었다가 다시 호스를 당겨 물을 주려고 하는데 물이 잘 나오지 않자 당황하여 저만치 떨어져 있던 손자에게 "얘 들어가서 수도를 틀도록 하라" 하고 소리쳤다. "할아버지께서 호스를 밟고 계시잖아요"하고는 웃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아래를 보니 자신이 호스를 밟고 있는 것을 보고 얼른 발을 옮겼더니 물이 뿜어져 나왔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기도의 통로가 막힘으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원활한 친교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의 영적 생명의 교제가 온전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막힌 통로를 뚫어야 한다.

 

사람 목숨보다 결혼식 비용이 더 중요한 세상

 

검소

딸의 혼숫감 장만을 걱정해 오던 50대가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 3월21일 인천시 중구 항동 7가 수협 경기도지회 2층 제빙실에서 수협 직원 김승태씨가 전깃줄로 목을 매 숨져있는 것을 동료직원이 발견한 것이다. 동료직원에 따르면 야간 당직을 하는데 김씨가 사무실에 들어오지 않아 찾아다니던 중 제빙실에 불이 켜져있어 들어가 보니 김씨가 냉동파이프에 전깃줄로 목을 매 숨져 있었다는 것이다. 경찰은 김씨가 이달 말로 예정된 딸의 결혼식을 앞두고 평소 혼숫감 장만에 대해 심하게 고민해 왔었다는 직장동료들의 말에 따라 이를 비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사람 목숨보다 결혼식 비용이 더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혼례문화의 병폐로 지적됐던 호화 혼수문제는 호화 결혼식이라는 날개를 달고 결혼비용의 공동화라는 현상을 빚고 있다. 결혼식장을 꾸미는 품목이 세분화 예식 자체에도 엄청난 돈을 쏟아 붓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일부 특수계층에 국한된지 않고 점차 그 범주가 넓혀지고 있어 문제이다. 이러한 현상은 ‘일생에 오직 한 번뿐인 결혼에 ‘남들이 다 한다는데’라는 생각과 이를 파고드는 능란한 상술이 하룻동안 해프닝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
외국의 경우를 보면 미국렝?느?결혼식이 점차 간소화해지는 추세이다. 직계가족과 친지, 가까운 친구들만이 참석한 채 조용히 치러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시청에서 신랑렘탄?둘만이 법적신고로 식을 끝내는 수도 있다. 다행히 우리나라에서도 호화결혼식이 판치고 있는 요즘에 실속파 신랑 적지 않다고 한다. 소득수준이 높은 고객도 하룻동안 필요한 예식에 많은 돈 쓰고 싶지 않다며 값싸게 예식을 준비할수 있는 곳으로 쫓아다닌다고 한다.
결혼!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들 사이에서 허락한 최고의 선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그 본래의 의미를 잊고 갈수록 외식적이고 이기적으로 되어간다면 기쁘고 즐거워야할 결혼식이 오히려 좌절과 절망을 가져다 주는 아픔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축복된 결혼이 결코 많은 혼수와 화려한 예식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새롭게 시작하는 부부에게 맞는 검소하고 알뜰한 결혼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결혼의 의미를 잘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결혼 문화를 창조하고 또 세상사람들에게 도전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무고한 일을 당한 사람의 감사

 

루이 14세의 장례식이 끝난 뒤, 그의 정치 행적을 비판하는 팜플렛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 중에는 「나는 보았다」라는 작은 시집이 있었는데 그 끝말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습니다‥‥‥나는 이런 악을 보았다. 아직 20세도 되지 않았는데‥‥‥‥ 이 불온스러운 시는 볼테르가 그 시를 지었을 것이라는 혐의를 받고, 그는 바스러유로 송치되어 그곳에서 1년 남짓이나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 후, 「나는 보았다」의 진짜 작가가 자수함으로써 볼테르는 비로소 혐의가 풀려 석방되었습니다. 볼테르가 출옥한 다음 날, 오르레망 공은 그를 불러들여 위로했는데 그때, 볼테르는 태연하게 하는 말이 "전하께서는 우리가 먹을 양식을 걱정해 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하오니, 주택까지는 염려하시지 말라 전해주시오."라고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착각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백이(伯夷)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은나라 말기와 주나라 초기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원래 숙제와 함께 고죽국의 왕자였다. 그런데 부왕이 죽으면서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숙제는 그 자리를 형에게 양보했다. 백이또한 부왕의 유지를 어길 수 없다고 끝내 사양하자 둘은 함께 왕위를 버리고 주나라 문왕의 신하가 될 요량으로 중국땅을 밟았다.
그러나 그 당시 중국의 상황은 문왕이 죽고 그 아들 무왕이 군사를 일으켜 포악무도한 은나라 주왕을 멸하고 중국 천하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 일들이 모두 옳지 않다고 통박한 다음 자기네는 주나라 영향권 밖에서 살겠다고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으며 생활했다는 인물이다.
그는 참다운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않고 진정한 벗이 아니면 사귀지 않으며 악인이 있는 조정에서는 함께 벼슬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아예 그들과 더불어 말도 하지 앟았다. 이런 그였기에 비록 제후들이 정중하게 초대하는 글을 보내와도 받기를 거절했다. 제후들이 더러운 존재라고 단정했기 때문이다. 고고한 선비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을 것이다.
한편 유하혜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더러운 임금을 부끄러워 하지않고 작은 벼슬이라고 하찮게 여기지도 않았으며 관직에 나아가면 능력껏 소신대로 이를 처리해 나갔다. 이런 사람이기에 버림을 받아도 원망치않고 가난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던 것이다.그는 종종 "나는 나, 너는 너다,네가 비록 내 곁에서 벌거벗고 있다고 한들 자네가 어찌 나를 더럽힐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그에게 실제로 닥친 것이다.
심하게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이었다. 폭유로 인하여 집이 허물어져 버린 옆집의 젊고 예쁜 과부가 혼자사는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유하혜는 즉시 방문을 열어주었고 둘은 한 방에서 지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모종의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세번이나 벼슬길에 올랐는데 높은 지위에 앉았다고 즐거워하는 법이 없었고 낮은 지위에 앉았다고해서 원망하는 일도 없었다.그는 그저 자기가 맡은일에 최선을 다했고 부지런히 살았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생애를 보면서 깨닫는 바가 있다.
백이의 삶을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칠한 무덤을 연상하게 된다.
유하혜의 일생을 통해서는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정정당당했던 용감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은 말했다.
세상이 악하고 더럽다고 부정적인 자세를 지닌 사람들을 향하여 그런 사람들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고전 5:10)고,
지구를 떠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도 그와같이 부패한 인간임을,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나 외에는 모두 죄인이요 부정한자라고 떠들며 백이와 같이 산에 들어가 고사리나 캐먹고 사는 못난 바보가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한 젊은이가 농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소 49마리가 모두 있는지 만을 확인하고는 다른 일들을 하곤 했습니다. 하루는 이웃집 농부가 찾아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소의 숫자만을 세는 것으로 소에 대한 당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이 농장은 머지않아 문을 닫게 될 것이오... ” 아니나 다를까 며칠 뒤 젊은이는 소 한 마리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는 비로소 농부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즉, 소가 아플 수도 있으므로 소의 눈도 들여다보고, 털이 윤기가 나는지도 살펴보라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종종 이 젊은이와 똑같은 오류를 범합니다. 예를 들면, 주일학교 교사가 학생들의 영적 상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이 몇 명 나왔는지에만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우리는 숫자보다는 “사람”에 관심을 두고 그 사람의 “필요”를 살펴야 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맡겨진 영혼들의 숨은 필요를 알 수 있을 만큼 그들을 사
랑할 수 있도록 저희를 도와주시옵소서.”
⊙ 당신에게 맡겨진 영혼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일이 아니라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여라.

 

용기를 주는 사람

 

"내가 너희를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곧 내가...안위함을 얻으려함이라" (롬1:11-12)
낙심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건강이나 가정 또는 직장에 대해서는 근심하지 않는 반면, 자신의 영적봉사에 대해서는 낙심을 합니다. 그들은 음악적인 재능이나 성경을 잘 가르치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또 자기보다 더 많은 헌금을 하거나 기도의 응답을 받는 사람을 보면서 자기만 이렇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자기는 하나님께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적어도 한가지 도움이 되는 목회 사역 즉 격려를 주는 사역을 할 수 없는 자격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 로버트 데일씨가 하루는 자기가 목회하고 있는 유명한 카르 레인 교회가 있는 영국의 버밍햄 도시를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먹구름 같은 우울에 잠겨있었는데 그때 한 여인이 다가와서는 "데일 목사님 하나님의 은총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목사님께서 저에게 얼마나 용기를 북돋아 주셨는지 모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부리나케 지나갔습니다. 후에 목사님은 "안개가 걷히고 태양이 비치는 기분이 되어 저는 하나님의 그 값없이 주시는 무한한 공기를 들여 마셨습니다"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바울사도는 다른 사람들로부너 격려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빌2:19) 다른 사람들에게 격려를 주는 것도 (행20:2,27; 전:35-36)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동참할 수 있는 사역입니다.
한 두마디 건네는 말들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 한 두 마디가 격려의 말이 될 경우
얼마나 훌륭한 사역을 할 수 있는지!
명상: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격려는 언제나 줄 수 있다.

 

믿는 사람의 가정

 

본문 : 베드로전서 3장 1 절- 7 절

오늘 우리가 생각하게 될 말씀은 고난에 처한 때의 가정 생활에 대한 것입니다. 고난받는 시 대 속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모습의 가정 생활을 해야 하는가 를 말씀하고 있습니 다. 지난 시간에는 고난받는 사회 속에서, 고난받는 정부 아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지고 이 고난을 극복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회, 이런 정부 의 제도나 체제를 떠나서 3장에서는 이제 우리 가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셨 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행복한 가정 을 자동적으로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그 사실 안에 행복한 가 정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므로 아무런 노력 없이도 행복한 가정 생활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믿지 않는 남편과 사 는 믿는 아내의 어려움은 형언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이 편지를 쓸 당시 로마 사회에서의 여성들의 지위라는 것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아내를 빌려줄 지언정 돈을 빌려줄 수는 없다 고 말 할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여성의 지위가 형편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런 사회 속에서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핍박과 고난을 받는 사회 속에서 불신자인 남편과 같이 살면서 신앙 생활과 가정 생활을 어떻게 영위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로 제기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특 별히 그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아내들에게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6절 까지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는 아내가 믿지 않는 남편을 향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여전히 순종하라 고 강조합니다. 만일에 성경을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 이런 분위기 아래 있는 아내들에게 편지를 쓴다면 저항하 라 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성경은 순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것 을 순종의 미학 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순종의 미학입니다. 순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오늘 말씀 1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하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는 억울한 고난, 애매한 고난을 받으시면 서도 원망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 말씀에 이어서 3장 1 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면서도 성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던 것처럼 이와 같이 아내들도 남편에게 순복하라 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순복 이란 본래 어떤 지위나 위치 아래에 자신을 두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 므로 순복이란 말은 질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하 나님께서 여성을 향해서 남편에게 순복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질서를 사랑하시고 아내의 심리를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아내의 순복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말씀하는 남편은 예수 믿는 남편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남편이라고 할지 라도 그 남편에게 순복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가운데 믿지 않는 남편을 모시고 계신 여성도님께서는 이 말씀을 잘 읽으시고 묵상하시면 좋겠습니다. 아내가 남 편에게 순복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절을 보세요.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 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것은 명령입니다. 이것은 남편의 명령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입니 다. 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까?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성이 열등하기 때문은 절대로 아닙니다. 창세기 1장 27∼28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 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혹 어떤 이들은 여기에 그들에게 라고 말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 은 아담과 하와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창조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복수로 표현 된 것은 아담과 하와 둘 다에게 복을 주셨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남자와 여자에게 꼭같은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권한을 똑같이 부여하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 말씀을 보세요.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나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여성이 남성보다 열 등하다고 말한 곳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질서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한 가정의 머리로 세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것 은 남편이 아내의 독재자가 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한 가정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이 가정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담을 이 가정의 지도자로 삼 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7절을 보세요.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했습니 다. 남편과 아내는 생명의 은혜를 받는 일에 있어서 전혀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성이 여 성보다 결코 우월하다고 성경이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 하나님을 보내시고, 보내신 바 아들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든지 아버지의 뜻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취한 모든 것에 대한 영광을 다 아버지께 돌리셨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경륜 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주를 주관하시는 질 서입니다.그러므로 작은 우주라고도 말할 수 있는 가정에서도 주님께서는 똑같이 질서를 요구하 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내들아, 남편에게 순복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구시대적인 말씀으로 들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이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명령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 명령 따르는 사람에게 손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축복해주실 줄 믿습니 다.둘째로, 복음 증거의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2절만을 보면 그 순종의 태도가 복음 증거의 상황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태도를 통해서 남편에게도 전도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가령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의 성미를 계속 건드려 보세요. 전도의 기회가 막히고 말 것입니다. 아마 남편이 화가 나서 죽어도 예수 믿지 않겠다 고 맹세를 거듭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남자의 오만한 자존심이지만 하나님이 남 자를 그렇게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남편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라도,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라 도 아내는 남편에게 순복해야 합니다. 인간 관계가 가까울수록 설교가 잘 통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감동이 필요합니다. 그 감동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에게 순복해야 합니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 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 나 오는 말 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 이라는 단어 앞에는 정관사가 빠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떤 특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수다 를 말합니다. 아내의 떠들썩하는 소리, 잔소리가 남편을 구원시키지는 못한다는 말입니다. 어느 여신도는 믿지 않는 남편에게 전도하기 위해서, 남편에게 설교를 들려주기 위해서 기독 교 방송을 크게 틀어놓고 자기는 열심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를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요새는 제 남편이 아예 집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열심은 좋은데 무식한 열심입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를 기억하시지요. 모니카는 아들 어거스틴 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오랜 세월 동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방황했던 남편도 죽기 직전에 주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것도 모니카의 간절한 기도가 영광스럽게 응답된 것입니다. 아버 지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아버지를 극진히 섬기는 어머니의 이러한 모습이 아들에게 아주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의「참회록」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 어머니는 어버지를 마치 주님을 모시듯 하였습니다. 모니카의 이런 삶의 태도가 깊은 감동을 주어서 마침 내 그 남편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 증거의 열 매를 맺게 할 수 있습니다. 가까울수록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위가 중요합니다. 어떤 행위요? 오늘 주신 말씀 2절을 보세요.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했습니다.여기서 두려워하며 라는 것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두 려워하는 신앙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그 다음 정결한 행위 는 도덕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이렇 게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도덕적으로 정결한 아내의 태도야말로 남편에게 무언의 설교 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감동스러운 설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1∼2절을 같이 읽읍시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 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셋째로, 인격의 단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그 태도가 바로 아내의 인격적 단장입니다. 믿지 않는 남편에게 순종하면서 그의 신앙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아픔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인격을 형성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들이 예수님의 학교에 들어오자마자 배워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순종의 교훈입니다. 그것이 하 나님을 향한 순종이든, 권위자에 대한 순종이든 순복의 태도처럼 귀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훌륭한 인격으로 단장시키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4절을 보세요.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했습니다. 모든 예수 믿는 부인들이 반드시 가져 야 할 두 가지 인격적인 덕목이 이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그 하나가 온유함 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온유 는 힘이 다스려지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펄펄 뛰는 야생마들을 데려다가 길을 들였습니다. 그 힘이 잘 다스려집니다. 고분고분 말을 잘 듣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바로 그런 상태를 온유해졌다 고 말했습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잘 통제되고 있는 인격 을 말합니다. 그러 므로 남편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같이 펄펄 뛰고 성질 내면 안됩니다. 한편 온유함이야말로 예 수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성품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마음이 온유 하고 겸손하니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성품 가운데 가장 먼저 강조된 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안정 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안정 이란 말은 고요하다 는 말입니다. 고요 한 태도 를 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고요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떠들썩하면 안됩니 다. 저 여자 예수 믿더니 말만 많아졌다 는 말을 들어서는 안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말을 오 히려 적게 해야 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남편과 사는 부인은 남편에게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 남편에 대해 많이 말씀하세요. 사람에게 하는 말은 오히 려 번거로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부인은 고요하게 삶을 살아가는 태 도로써 인격을 단장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3절을 보세요.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 모로 하지 말라 고 했습니다. 그 당시 로마 사람들은 단장하기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로마의 여 자들은 머리 위에 장식품을 엄청나게 하고 다녔습니다. 지금도 로마 사람은 세계에서 제일 멋을 부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 말씀에 보면 금을 차고 다녔다 고 했는데 이 말씀의 본래의 뜻은 금으로 둘러싸고 입니다. 머리를 예쁘게 꾸미고 금반지를 끼는 것에 대해 성경이 시비하려 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지나치게 사치한 옷을 입는 그러한 단장보다 더 중요한 단장은 내적인 인격의 단장이라는 것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단장 이란 말은 헬라어에서 코스모스 라 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코스모스란 우주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 코스모스란 말은 질서 있는 우 주를 의미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영어로 화장품이라는 말이 코스모스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것입 니다. 그러니까 화장은 질서 있게, 아름답게 해야지 질서 없이 마구 하면 안됩니다. 아름다움은 질서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세요.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겉으로 아무리 화려하게 단장해도 그것은 다 썩 어져갈 아름다움입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감동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원히 감동시킬 수는 없습니다. 결국 아내가 얼마나 내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에 남편이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는 최후의 기쁨을 얻을지 못얻을지의 여부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왜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까? 그것이 아내의 인격적 단장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11장 22절을 보세요.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코에 금고리 같으니라. 이 말씀은 내적인 아름다움이 없이 외적으로만 단장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가를 해 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가지 아니한다 는 말은 온유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아름 다운 태도를 갖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고리 같다는 말입니다. 넷째는, 믿음의 선배의 모본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것은 바로 믿음의 선배들의 모본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5절을 보세요.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했습니다. 그러면서 6절 말씀을 예로 들었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 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므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 면 사라는 믿음의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이 사라도 아브라함을 주 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남편에게 복종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본입니까? 사라 라는 이름에는 여왕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자기 남편을 왕으로 모시지 못하는 사람은 여왕으로 대접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자기 남편을 왕으로 모시는 사람이라야 여왕으로서의 대접 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가정의 남편을 왕으로 모시세요. 모든 여성들의 마 음속에는 여왕이나 공주가 되고 싶어하는 의식이 있습니다.이것을 심리학자들은 여왕 콤플렉스, 공주 콤플렉스 라고 합니다. 모든 여성들의 밑바닥에는 여왕으로 대접받고 싶어하는 심리가 깔 려 있습니다.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여러분의 남편을 왕으로 대접해 주셔야 합니다. 술을 잔뜩 마시고 들어와도 신경질 내지 마세요. 아유, 저 지긋지긋한 인간, 또 술 처먹고 들어 오네. 에이, 저 마귀 자식. 그러지 마시고 폐하, 이제 오시나이까. 약주 드시느라고 얼마나 고 생이 많으십니까? 라고 말하세요. 한 달만 왕으로 모셔 보세요. 감동 받지 않을 남편이 어디 있 습니까?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이 렇게 말하는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여보, 하나님이 우리더러 여기를 떠나라고 하셔. 어디 로 가라시는데요? 글쎄… 그것은 모르겠고 아무튼 여기를 떠나라고 하시네.갈 곳은 지시하신대. 그때 만일 사라가 아니, 여보 당신 정신 나갔어요? 갈곳도 모르면서 어디로 간다고 하세요? 했 다면 어떻게 떠날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브라함도 훌륭하지만 사라도 정말 훌륭합니다. 그러므 로 위대한 믿음의 조상의 곁에는 믿음의 아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 되신 여러분. 그리고 아내 되실 여러분. 앞서간 믿음의 여성들의 본을 따라 남편을 향한 이 순복의 태도의 중요성을 꼭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사라의 딸이 될 것을 믿습 니다. 사라처럼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여왕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남편은 아내에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먼저 오늘 주신 말씀 7절에 남편 된 자 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하는 말이 나옵니다. 지적인 면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 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남편들은 일반적으로 아내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남편 된 여러분. 아내의 생일을 아십니까? 결혼 기념일을 아십니까? 아내의 건강 상태가 지금 어떤지 아십니까? 아내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떻게 하면 아내를 알 수 있겠습니 까? 지속적인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 다. 그리고 신체적인 면으로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성생활의 책임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동거한다는 말 속에는 시간을 낸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말 동거하려 면 시간을 내야 합니다. 아내를 위해서 시간을 내십니까? 뿐만 아니라 동거한다는 것은 문자 그 대로 삶을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거한다는 것은 하룻밤 잠이나 자고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정이 하숙집은 아닙니다. 아내와 함께 삶을 얼마나 나누십니까? 남편 되신 여러분. 가정이 무엇입니까? 하룻밤 머물다 가는 곳입니까? 아닙니다. 가정은 정말 삶을 나누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서적인 면으로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라고 했습니다. 연약한 그릇이란 깨지기 쉬 운 그릇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내들은 깨지기 쉬운 그릇입니다. 깨지기 쉬운 그릇을 한번 놓쳐 보세요. 그 깨지는 소리가 얼마나 요란합니까? 그러므로 조심스럽게 잘 다루어야 합 니다.다시 말하면, 아내들은 정서적인 민감성에 있어서 남편들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이런 아내의 정서적인 민감성 앞에 남편은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아내의 행복은 큰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작은 것을 통해서 옵니다. 남편이 집에 돌아오기 전에 아내가 집안 장식 하나를 바꿔 놓아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멍청한 남편들이 집에 들어서면서 달 라진 분위기를 아는 척이나 합니까? 밥 줘. 자자 라고 하지는 않습니까? 그때 아내들이 얼마나 실망하겠습니까? 남편이 아내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그러한 아 내를 귀히 여기라 고 했습니다. 영적인 면으로는 어떻습니까? 7절 말씀을 계속 보세요.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 려 함이라 했습니다. 지금까지

 


왜 이런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까?

 

본문: 마 21:28-32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세계의 많은 민족들이 예수님을 믿고 축복을 받고 있는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유대인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무시하고 은혜를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이유는 '교만'입니다. 이 교만 때문에 오늘날 유대인이 세계에 흩어져 살게 되었고, 금번 미국에서 일어난 테러사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유대인의 교만은 선민의식입니다. 자신들이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킴으로 자신들의 의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교만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죄사함의 진리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교만의 배후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또한 교만은 한마디로 알지 못하는 무지함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생명은 겸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시고 보여주신 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마굿간에 오셨습니다. 나라이셨지만 군인도 없고, 돈도 없으셨습니다. 내각도 고기 잡는 어부로 구성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 때도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겸손입니다. 겸손해야 은혜를 받고 주님을 만납니다. 구원의 은혜는 나의 공로가 아니라 겸손하게 주 예수를 영접할 때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은혜를 못 받았지만 오히려 창기나 세리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영접하는 자가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가 필요하다고 찾는 자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님을 거부하는 유대나라를 떠나 이방나라로 건너가 이방 땅을 풍성하게 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와 은혜는 겸손한 자를 찿습니다. ♬ 겸손한 자 찾도다 모시어 들이세 가시관을 쓰셨네 모시어 들이세 ♬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기도가 응답을 받습니다. 겸손한 마음을 갖고 말씀을 들을 때 은혜가 됩니다. 겸손할 때 봉사할 수 있습니다. 겸손할 때 감사가 나옵니다. 겸손할 때 기쁨이 옵니다. 이사야 29장에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잠언 22장 4절에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겸손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재물을 주십니다. 영광을 주십니다. 생명을 주십니다. 시편22편 26절에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이 영원히 살지어다"고 말씀하십니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르고 언제나 샘솟는 기쁨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겸손이 생명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고생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교만입니다. 교만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어떤 개인이든지 기업이든지 권력이든지 교만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인류역사를 돌이켜 보면 나라를 망치는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교만이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도 교만한 지도자 하나가 들어와서 온 나라를 망친 것입니다. 천가지 은혜를 받았다 하더라도 교만하면 은혜가 다 떠납니다. 교만은 모든 축복의 문을 닫습니다. 교만은 좋은 친구도 다 떠나가게 합니다. 겸손해야 친구도 늘 옆에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도 선배 대통령을 존경할 줄 아는 겸손한 대통령이 나와야 우리나라가 잘 될 수 있습니다. 겸손이 생명이고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길이길이 겸손하여 만대에 축복 받는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


소외된 사람을 사랑

 

뉴욕의 그랜드 센트럴 정거장에는 랠스톤 크로스비라는 짐꾼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늘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다리를 절며 벽에 기대어 흐느끼는 한 부인을 본 크로스비는 평소처럼 그녀에게 다가가 위로하며 친절하게 기차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1년 뒤 한 소녀가 할아버지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제 어머니는 한달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세상을 떠나시기 전 뉴욕에 들러 할아버지를 찾아 이 말을 꼭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할아버지 말씀대로 하나님이 어머니를 사랑해 주시고 언제나 곁에 계시다는 것을 믿다가 천국에 가게 되었다고요." 오랜 투병으로 절망의 포로가 되었던 그 부인은 잠깐 동안 소망을 속삭여 준 크로스비에 의해 희망의 삶을 되찾았던 것입니다.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그의 버려진 육체를 사랑하는 것이지만 죽어 가는 영혼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소외된 그의 전 인격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죽어 가는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이 계명을 반드시 지켜야 할 것입니다.
성경: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
* 기도: 사랑의 주님, 예수님처럼 버려진 영혼들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근면한 사람

 

잠11:16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 "
'신화는 없다'의 저자 이명박씨는 가난과 근면을 인생의 2대 자산으로 여겼습니다.그의 청소년기는 매우 불우했습니다.그는 밥 대신 술찌끼를 먹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등교해 선생님에게 꾸지람을 들었습니다.고등학교때는 극장 앞에서 리어카 과일행상을 했습니다.대학시절엔 간염으로 절망의 세월을 보냈습니다.그러나 새벽 다섯시면 어김없이 일어나는 근면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새벽 다섯시면 눈을 떴다.어머니는 그 시각에 우리를 깨워 가정예배를 드렸다.어머니에게 배운 근면이 고속승진의 밑거름이 됐다”
30대 사장,40대 회장을 지낸 이명박씨의 출세는 우연이 아닙니다. 현대 사장 재직시 그는 미국에서 생산되는 자동차중 금요일에 불량품이 가장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주말 기분에 들떠 일을 대충대충 처리하기 때문이었습니다.그래서 그는 토요일에도 반드시 정장을 입고 직원들에게도 이를 실천하도록 했습니다.
"성공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종달새형'의 생활습관을 가진 근면한 사람에게 미소짓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모으게 된다고 성경에서도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근면으로 하나님 앞에 성실히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복을 누리시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의 빈자리

 

사람은 없어 봐야 그 빈자리를 안다.
있던 가구를 치울 때면 오히려 그 자리가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사람의 빈자리가 드러나면서 다가오는 서글픔과 불편 함....
그것은 때론 그리움으로까지 이어지지 않던가. - 한 수산의 《거리의 악사》 중에서 -
*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이 남긴 빈자리의 넓이와 깊이로 가늠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별의 경험도 값이 있다.
사람의 ‘빈자리’를 알게 될 때 진정한 사랑도 느끼게 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 힘으로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어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게 된다. 중보 기도야말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간구에서 중보로 기도를 바꾸는 것은 우리의 무게 중심을 우리 자신의 필요에서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관심사로 옮기는 것이다. 중보 기도는 이기심이 없는 기도이며, 심지어 자신을 내어주는 기도이다. 하나님 나라의 계속적인 사역 가운데 중보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중보 기도는 제사장적인 사역인데, 신약 성경의 가장 도전적인 가르침 중 하나가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만인 제사장직이다.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아 제사장으로 임명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대신하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영예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신성한 의무요, 귀중한 특권이다. 중보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그분의 이름이 새겨지고 하나님께서 손수 기록한 초청장을 주시며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수고하는 일에 직접 관여하게 하신다.

 

사귀어도 될 사람

 

맥스 루케이도는 “말과 행동이 일치되게 하십시오. 사람들은 우리가 말하는 것을 듣기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고 그의 책에서 권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의 신실성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말과 행실이 늘 모니터 당하고 있습니다. 말과 행동의 일치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그 사람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도덕적인 사람입니다. 신실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귀어도 유익이 될 사람입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

 

본문: 딤전 6:11-19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공포의 대상으로 느끼는 병 가운데 '치매'라는 병이 있습니다. 이 병은 암보다 더 큰 질병으로 인식되어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임종이 가까워 오면서 걸리는 병이었지만 지금은 50대에도 많이 생긴다고 합니다. 치매라는 병이 무서운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들, 며느리도 알아보지 못하고 집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인간들도 건강하고 지식이 많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누가 창조했는지를 모르거나 잘못 생각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우리의 삶을 바꾸고 가치있게 하며 존엄하게 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조상을 원숭이라고 믿게 만들었던 진화론도 이미 많은 부분에서 오류가 발견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최고의 영광스러움과 거룩함으로 창조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송영옥씨는 '세뇌된 사람들'이란 책에서 사람이 동물과 다른 다섯 가지의 원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 동물은 죽여도 되지만 사람은 죽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동물은 팔아도 되지만 사람은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셋째, 동물은 실험해도 사람을 실험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넷째, 동물은 철저히 약육강식이란 법칙으로 살아가지만 인간은 약하고 힘없는 이들을 보호하고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사람은 도덕과 윤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주 큰 충격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두명의 청년이 다섯명이나 되는 아가씨들에게 돈을 빼앗고 죽여서 그 시체를 차에 싣고 다니다가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더구나 자기의 애인도 죽여서 산에 묻었다고 합니다. 세계가 경악할 일들을 우리는 태연하게 보고 있습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인간은 하나님의 경고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세상을 살아야 됩니다.
자녀를 잘 양육하려면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고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도록 가르쳐야 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자녀들을 세계적인 큰 인물로 기르는 길은 잘 입히고 잘 먹이고 좋은 학교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사람으로 길러야 할 줄 믿습니다. 서울대 의대학장을 지낸 김승진 박사님의 수필집을 보면 어떤 환자가 치료받고 퇴원하면서 그림 한 점을 기증했다고 합니다.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고 값비싼 것이라 하여 그림의 내용은 잘 모르지만 벽에 잘 걸어 두었다고 합니다. 3년 뒤, 그 사람이 병원을 다시 찾았을 때 벽에 걸린 그 그림을 보자마자 화를 내면서 그림을 거꾸로 걸어둔 것을 책망했다고 합니다. 그 동안 수 천명의 사람이 병원을 다녀갔지만 그림이 거꾸로 걸려있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 현대인들도 인생이 거꾸로 달려왔고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데 모르고 있습니다. 시편에 기록된 대로 인생들은 어리석게도 창조자를 잊어버리고 하나님 아버지를떠나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기술이 있다고, 재주를 부린다고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있으며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기쁨이 있고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의 삶에는 행복이 있습니다. 존귀하고 부유한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힘있고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성경암송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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