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강해/주석(신약)

요한계시록 제7장(G.K.B) 주석

작성자靑野|작성시간18.06.16|조회수143 목록 댓글 0




요한계시록 제7장(G.K.B) 주석

천사들은 신자들이 믿음을 잃지 않고

영적으로 보호받을 때까지 악의 세력이 땅에서 파괴 활동을

시작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7:1-8


7 1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2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3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4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5 ○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6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8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여기서 '인'의 의미는 무엇인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인침을 받은 십사만 사천은 누구인가? 십사만 사천은 문자 그대로 미래의 어느 시기에 사는 이스라엘 민족 집단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비유적으로 어떤 다른 집단의 사람들을 표상하는가? 7:9에서 "큰 무리가....보좌 앞에...서서"라는 언급은 6:17의 질문("누가 능히 서리요")에 대한 명백한 답변으로, 진노의 날에 설 수 있는 자를 가리킬 것이다. 7:9과 6:17도 보좌와 어린양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언급한다. 5:6에서 어린양이 보좌 앞에 서 있는 장면은 또한 그분의 부활 실존과 중요하게 연계되어 있고, 따라서 7:9의 보좌 앞에 서 있는 사람들, 곧 뒤에서 양으로 묘사되는 사람들은(17절) 성도의 부활 실존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린양을 언급하는 것과 직접 관련되어 있는 또 다른 사실, 곧 성도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 있는 것도 5:6에 나오는 어린양의 부활 실존을 반영할 것이다. (15:2주석참조)


 1. 7장에서 새로운 환상이 시작되는데, 그것은 '이 일 후에'라는 환상 소개말로 암시된다. 비록 요한이 6장의 환상을 보고 난 후에 이 환상을 경험했다고 해도, 이 환상이 묘사하는 장면은 연대순으로 보아 6장이 묘사하는 것보다 앞서 일어난다. 7:1-8은 하나님께서 교회 시대의 환난에서 신자들을 어떻게 안전하게 지켜 주실지를 설명하는 일종의 삽입구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 결과 신자들은 6:1-8의 처음 네 인 심판에 따라 가혹하게 엄습하는 환난을 겪을 때 영적으로는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요한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고" 있는 것을 본다.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서 있는 그들의 주권이 온 세상에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사11:12,겔7:2,계20:8) '사방의 바람'이 비유적으로 당시에 알려져 있던 온 세상을 가리킨다는 것은 예레미야 49:36, 다니엘 8:8, 11:4, 마태복음 24:31, 마가복음 13:27에서 동일한 문구가 이런 식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하다. '땅의 사방의 바람'은 6:1-8의 네 말 탄 자와 가장 잘 일치하며, 6:1-8은 분명히 스가랴 6:1-8의 네 병거를 토대로 형성되었다. 왜냐하면 스가랴 6:1-8이 네 말들은 스가랴 6:5에서 "하늘의 네 바람" (이 히브리어 단어는 '바람' 또는 '영'으로 번역될 수 있다. 70인역의 번역은 '바람'이다)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 경건한 천사들은 땅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악한 세력을 붙잡고 있다. 그런데 이 파괴가 6:1-8에서는 이미 일어난 일로 묘사된다. 바람이 해로운 활동을 못하도록 붙잡아 두어야 하는 것은 이 바람의 반역적이고 사악한 성격을 증명한다. 바람의 영향을 받는 땅이나 바다나 나무가 문자적인 개념인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들도 바람과 함께 6:1-8의 화를 표상하고, 또한 보편적인 심판 관점에 따라 이해되어야 하기 떄문이다. 아마 세 대상은 (환유법으로 또는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제유법, 곧 부분으로 전체를 표상하는 문학적 기법으로) 땅과 땅의 거민들, 곧 네 말 탄 자가 일으킨 화로 타격을 입는 자들을 표상할 것이다. 바람의 파괴적인 활동을 막는 이 지연 행동은 2-3절로 보다 분명한 것처럼 단지 잠정적이다. 

 

2-3. 네 천사가 말 탄 자들을 가로막는 이유가 여기서 주어진다. 이 가로막음은 오직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나오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있는 천사의 명령에 따라 경건한 천사들이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행하는 잠정적인 행동이다. 2-3절에서 땅의 땅의 거민들은 해를 입지 않으며, 그들이 해를 입기 전에 하나님의 종들에게 보호의 인이 주어져야 한다. 따라서 7:1-8은 6장의 환난 이후에 펼쳐지는 최후의 환난 기간에 아직 임하지 않은 미래에 일어날 일련의 새로운 사건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최후의 심판과 상급 이전에 임하는 교회 시대 전체에 걸친 환난과 관련된 문제를 다룬다. 이러므로 이 부분은 6장 이후에 막간으로 들어가 있다.


 하나님이 자기 종들의 이마에 '인치시는'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논란이 있다. 이에 대한 주요 견해는 물리적 해로부터의 보호, 귀신들로부터의 보호, 믿음을 잃지 않고 구원을 유지하게 하는 보호 등과 같다. 여기서 '인치심' 장면은 에스겔서에서 에스겔이 본 장면, 곧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성읍을 심판하시기 전에 천사에게 죄를 미워하는 자들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고 명령하는 장면과 동일하다.(겔9:4-6) 신자들은 이 표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보호를 받고, 또한 물리적으로 장차 임할 심판에서 보호를 받는다. 이것은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문설주에 피를 발라 표를 해둠으로써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보호를 받은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출12:7,13,22-28) 신자들이 이 표로 말미암아 나팔과 대접 심판이 있을 때에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앞으로 살펴볼 것처럼 나팔과 대접 심판의 재앙에 대한 묘사는 면밀하게 애굽에 내린 재앙에 따라 구성된다.


 마귀의 세력들은 이마에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은 자들을 해하는 것이 금지된다. 여기서 요한이 가장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물리적인 안전이 아니고, 사탄이나 사악한 땅의 대행자를 막론하고 신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다양한 고난과 박해에서 그들의 믿음과 구원을 보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인치심으로 말미암아 환난을 겪을 때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고, 그리하여 환난은 오히려 그들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도구가 된다.(6:1-8주석) 이 인치심이 보호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은 9:4로 보아 분명하다. 거기 보면 사악한 세력에게 "땅의 풀...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는 명령이 주어진다(9:4이7:3과 문자적으로 거의 동일한 평행 관계에 있음을 주목하라. 16:2은 인치심의 보호 국면을 함축한다). 이 보호가 영적이라는 사실은 신자와 비신자가 비슷한 물리적 고통을 겪는 것으로 보아 명백하다. (6:1-8주석참조)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을 연단시켜 순결하게 하는 환난은 경건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도리어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어 하나님께 반응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9:19-21참조)


 '인침'을 받은 자들, 곧7:4에 언급된 십사만 사천은 14:1에서 이마에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름이 새겨진 표를 가진 자로 다시 언급된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름이 새겨진 인을 받은 신자들은 하나님 및 어린양과 거역할 수 없는 구원 관계 속에 있고, 이 관계로 말미암아 보호받는다(그들은 대속에 따라 '속량함'을 받는다). (14:3-4) 이마에 짐승의 표, 곧 짐승의 이름을 갖고 있는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정반대 상황이 적용된다. (13:17,14:9-11)

인은 또한 '진짜'임을 입증하거나 '소유권'을 가리키는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이는 모두 2-3절에 나타난 보호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역경 속에서 인내하는 능력을 받을 때 성도들의 고백의 진정성이 입증디고, 그들이 진실로 하나님께 속해 있는 자로 증명된다. 인침을 받은 자들이 "우리 하나님의 종들", 곧 노예로 불리는 것은 소유권 개념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고대 세계에서는 노예의 이마에 소유권과 그들이 섬기는 자를 표시해 두는 것이 통상적인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인이 진정성을 입증하고 소유권을 함축한다는 것은 요한이 14:1과 22:4에서 인침과 그리스도 및 하나님의 이름과의 동등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하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도 그들[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이 말은 계9:3, 14:1, 22:4에서만 나타난다. 딤후 2:19에서는 하나님의 '인침'과 '이름'이 함께 사용되어 하나님께 속해 있는 자들을 확증하는 역할을 한다) 기록되었다.


 인침과 하나님의 아름을 동일시하는 것은 비신자들의 이마에 있는 짐승의 '표'(13:17)를 '짐승의 이름'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그리고 14:9-11에서 "그[짐승 숭배자]의 이마의 표"가 또한 "그[짐승]의 이름의 표"로 불리는 것으로 확증된다. 따라서 십사만 사천은 인침을 통해 참 이스라엘이 의무적으로 감당할 증인의 역할을 수행할 능력을 얻는다.(사42:6-7, 49:6, 51:4-8등) 그러므로 '새 이름'과 '인침'은 구속받은 자로 구성된 공동체의 참된 지체 자격을 상징하는 표로,이 표가 없으면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갈 수 없다. 그리고 2:17에서 확인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새 이름과의 동일화는(3:12)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계시하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할 때 시작된다. 이 일이 있으면 그들은 새로운 영적 지위를 얻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을 능력을 가지며,(3:8) 최후의 환난을 거칠 때 인내하게 된다. (2:13a,3:8-10참조) 요한복음 17:6-26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신자들에게 계시하는 것이 그들이 지금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임재 속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눅10:17-22참조)


 성도들의 이마에 새겨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이름' (14:1)과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의 지체로서 자격을 표시하는 '인침'이 동등하다는 것은 또한 출애굽기(특히70인역)에 비슷한 동등성이 나타나 있는 것으로도 확인된다. 출애굽기(특히70인역)에 비슷한 동등성이 나타나 있는 것으로도 확인된다. 출애굽기 28:17-21을 보면 제사장의 흉패에 달린 열두 보석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이름을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새겨 넣었다. (출28:21) 열두 지파 각각의 이름이 각각의 보석 위에 새겨져 누가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의 일원인지를 증명하는 역할을 했다. 의미심장하게도 "아론의 이마에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순금 패가 두어졌고,(출28:36,38) 그 패 위에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말이 새겨졌다.(출28:36) 이 인침은 아론이 성결하게 되어 여호와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함축했고, 아론은 성전에서 이스라엘의 대표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에 대한 동일한 성결 관념이 그들에게 전달되었다. 또한 출애굽기 28장의 대다수 보석들이 새 예루살렘과 관련하여 요한계시록 21:19-20에서 다시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2-3절에서도 하나님의 인치심은 하나님의 백성을 확인하는 역할을 하고, 또한 천상의 성전에서 어린양이 대제사장으로서 뿌린 자신의 피의 효력이(히8:1-10:22) 하나님의 백성에서 적용됨으로써(7:14주석 참조) 그들을 세상과 타협하는 악한 죄악과 구별시키는 역할도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불신앙적인 세상이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을 것이다. 신자들이 또한 천상의 장막에 들어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사역해야 한다는 사실은 이어지는 구절들로 분명하게 될 것이다.(7:13-15주석 참조) 앞에서 언급한 출애굽기 배경은(출28:17-21) 요한계시록 21:122-20과 7:3-8사이에 연계성을 제공한다. 즉,출애굽기의 보석들과 도장 새기는 법은, 사람들이 어린양의 속죄 제물을 통해 거룩하게 됨으로써 이 보석들을 기초석으로 삼아 그 위에 세워진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상징한다.


 7:3-8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 곧 '구속받은 자'의 공동체는 앞에서 지적한 축자적 평행 관계와 개념들로 보아 14:1-4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과 동일하다. 14:3-4에서 십사만 사천은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자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다. 그리고 14:4과 5:9b 사이에 평행 관계가 있는데, 그것은 두 본문에서 '속량함을 받은' 자로 언급된 집단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매우 밀접하기 떄문이다(어린양은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다").5:9b 이것은 14:1-3에서 십사만 사천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일부 소규모의 남은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세상 전역에서 속량하신 대규모의 남은 자 집단에 대해 말하는 또 다른 표현임을 의미한다. 만일 이 동일성이 정확하다면 7:3-8의 십사만 사천도 똑같이 땅 전역에서 나온 구속받은 남은 작 전체를 가리켜야 한다. 그렇다면 7:9은 7:3-8의 집단을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오는 큰 무리로 해석하는 것이다.(7:9주석 참조) 이것은 사실상 5:9b의 문구와 같은 말로, 둘 다 다니엘3-7장의 공식에 기초가 두어져 있다. 이 집단은 수가 십사만 사천으로, 7:9-17의 큰 무리 환상이 증언하는 것처럼 구속받은 교회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 수에 대한 그림이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강조한다(십사만 사천의 정체성에 대해선느 4-8절에 대한 주석을 추가로 보라).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이유로 보아 분명하다.


* 요한계시록 다른 곳에서 '종doulos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종들을 가리킬 때에는 그 안에 구속받은 모든 신자가 포함된다. (2:20,19:5, 22:3)


* 에스겔 9장의 구약 배경 역시 인침 받은 집단이 하나님의 참된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는 것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에스겔 9장의 문맥은 신실한 자들의 주요 집단 사이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참 신자와 비신자 사이를 구별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 사탄이 자신의 인침, 표, 이름을 자기를 따르는 모든 자 위에 둔다면,(13:16-17,14:9-11) 추론해 볼 때 하나님도 자신을 따르는 자들 가운데 단순히 일부가 아니라 전체에 대하여 똑같이 하신다고 볼수 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인과 이름으로 그리스도에게 충성하고, 우상 숭배하는 세상 구조를 받아들이고 타협하라는 압력에 맞서는 능력을 갖는다. 성도들은 17장의 음녀에게 저항하고 짐승의 표 받기를 거부한다. (20:4) 비록 고난을 당하고 심지어는 육체적인 목숨까지 빼앗길지라도, 인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영적 생명을 상실하지 않도록 성도들을 보호한다. 이것이 인이 성도들에게 오직 자신만이 가지고 계신 영생을 나누어 주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으로 불리는 이유다(성도들이 이런 종류의 '생명'을 미래의 기업으로 얻는 것에 대해서는 2:7,10:11, 3:5, 11:11, 20:4, 6, 21:6,27,22:12,14,17을 참조하라. 1:18, 4:9-10, 10:6, 15:7에서 하나님의 생명 또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속성을 주목하라). 그러므로 인은 또한  6:17에서 언급된 최후의 심판날로부터의 보호도 포함한다. 인은 어린양이 자신들을 대신해 사망을 패배시키신 것을 믿는 자들에게 이 진노로부터의 보호를 보장한다. (1:5, 5:6-9, 12) 인이 없고, '짐승의 표'를 가진 자들은 보호를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경험한다. (14:9-11) 그들은 속임을 받아 악의 세력을 섬긴다. (13:8,19:20) 이것이 그들이 어린양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에서 배제되는 운명이 된 이유다. (13:8,17:8,20:15참조)


고린도후서 1:22과 에베소서 1:13,4:30에 비추어 보면, 인은 성령과 동일시되어야 한다. 물론 요한계시록에서 이것이 명시적으로 진술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2-3절에서 요한이 가장 크게 염두에 두고 있는 사실은 확실히 물리적 안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탄을 통해서나 사탄의 사악한 땅의 대행자들을 통해 일어나는 다양한 고난과 박해로부터 신자들의 믿음과 구원을 보호하는 것에 있다. 즉, 영적 보호가 초점이다.


 따라서 인침을 받는 집단은 증언할 기회를 가질 때까지 육체적인 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받는 특별한 순교자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 될 수 없다(요한이 순교 언어를 어떻게 그리스도인 전체에 적용시키는지는 6:4,8,9에 대한 주석을 보라). 그렇다고 인침을 받는 집단이 세상이 끝나는 마지막 시점에 땅에 임하는 심각한 재앙으로부터 보호받는 마지막 세대에 신자들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환난 기간에 물리적으로 보호를 받고, 이후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모습을 보고 회심하도록 되어 있는 현재 회심하지 않은 유대인 남은 자를 기리킨다고 보는 것도 가능성 없는 사변에 불과하다(이 견해는 종종 롬11:25-29에 대해 비슷한 해석을 하도록 부추겼다). 이 관념을 거부하는 한 가지 이유는 7:9-17에 묘사된 이방인 신자들은 물리적인 환난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않는 데 반해 그들은 왜 물리적으로 보호를 받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에 있다. 요한계시록이나 신약성경 다른 곳 어디에도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 동안 유대인이 이방인보다 어떤 특권이나 이점을 갖고 있다는 사상은 나타나 있지 않다. 이것은 '종 (헬라어doulos)이라는 단어가 요한계시록 다른 곳 어디서도 배타적으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만을 가리키지 않고, 모든 성도를 가리킨다는 앞에서의 지적과도 일치한다.


 천사들이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쳐야"한다는 말은 인침을 받은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종이고, 그러므로 이미 신자라는 사실을 함축한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믿을 모든 자를 인치기로 정하신 신적 작정을 가리킨다. 이 작정은 각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취될 것이다. 이 개념은 또한 어린양이 죽임을 당하여 민족들 가운데서 택함 받은 사람들을 속량하심으로써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건이 잠재적인 거래가 아니라 직설적이고 실제적인 거래로 제시되는 사실에서도 암시된다.(5:9.14:3-4참조) 게다가 이 택함 받은 집단은 창세 이후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한 보호 능력으로부터 유익을 얻도록 결정되었지만 다른 이들은 이 유익을 얻지 못하도록 결정되었다. (13:8,17:8) 

4-8 이제 이 인침 받은 자들의 정체성이 더 깊이 설명된다. '십사만 사천'은 누구인가? 그들은 역사가 끝날 시점에 있을 혹독한 환난기간에 사는 문자적 이스라엘인들도 아니고, 첫 세기에 예루살렘 제2성전이 치욕을 당한 시기에 살았던 문자적 이스라엘인들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보호가 예수를 믿는 유대인신자를 포함해 모든 민족으로부터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민족적 유대인 - 그리고 그들 가운데 제한된 수 - 에게만 적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은 신약성경의 가르침과는 맞지 않는다(예컨대 갈라디아서를 읽어 보라).


 문맥을 살펴보면 더 나은 견해가 나온다. 5:9에서 어린양은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셨다"고 말해진다. 14:3-4에서 십사만 사천은 '땅에서' 속량함을 받고, 또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았다고 말해진다. 거의 동일한 두 문구는 이 두 집단이 동일한 집단, 곧 모든 시대의 교회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인치심 환상 직후에 요한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큰 무리의 사람들을 보게 되는(7:9)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다. 앞에서 살펴볼 것처럼 이것이 7:4-8에서 들은 사람들의 수를 해석하는 관점이고, 따라서 이 수는 인침을 받은 사람들의 수를 표상한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사탄을 따르는 모든 자는 사탄의 표나 이름을 지니고 있고, 어린양을 따르는 모든 자는 어린양의 표나 이름을 지니고 있고, 어린양을 따르는 모든 자는 어린양의 표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수는 인침을 받은 사람들의 수를 표상한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사탄을 따르는 모든 자는 사탄의 표나 이름을 지니고 있고, 어린양을 따르는 모든 자는 어린양의 표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모든 시대에 걸쳐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는 인침을 받고 십사만 사천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십사만 사천이라는 특정수에 대해 말하는가? 21:12-14을 보면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가 함께 새 예루살렘의 기초를 구성한다. 12에 12를 곱하면 144가 나오고, 144는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표상한다. 그리고 144에 1,000을 곱하면 완전성 개념이 강화된다.


 4-8절에 기록된 지파들의 명단을 보면 유다 지파를 가장 먼저 언급하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창세기 49:8-10과 다윗의 자손(따라서 유다의 자손)이 마지막 때에 메시야로 오실 것이라고 예언되는 구약성경 다른 곳에서(겔34:23,37:24-26,시16:8-11) 예언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유다(유대)지파의 자손이라는 사실을(5:5) 강조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5:5의 사상의 지속이고, 5:5을 보면 예수께서 유다 지파의 약속된 지도자의 성취로 간주된다. 나아가 유다 지파의 우선적 지위가 적절한 것은 창세기 49:10이 장차 오실 유다의 지도자가 모든 백성의 복종을 이끌어 낼 것이라고 예언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70인역은 창세기 19:10을 "그는 민족들의 희망이다"라고 번역한다. 그리고 바울도 로마서 1:5에서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롬1:3)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사실을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라고 언급하므로써(롬16:26참조) 창세기 49:10을 인유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유다 지파가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유다 지파에서 나온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이고, 이 새왕을 통해 유다가 민족들에게 복의 문이 되었기 때문이다.(5:5,9참조) 따라서 왕으로 오시는 다윗의 자손은 민족들이 이스라엘의 복에 참여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선택이 될 것이다.


 분명 하나님의 이름과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새겨진 이름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다.(3:12) 3:12에서 '새 예루살렘'의 이름은 그리스도의 '새 이름'과 동등하므로, 그리스도인이 '새 예루셀렘'과 동일시되는 것 역시 가능하다. 왜냐하면 이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동일시되기 떄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참 이스라엘이다. 마찬가지로 이사야49:3도, 이사야53:10 및 갈라디아서 3:16과 관련시켜 보면, 메시아를 참 이스라엘로 간주한다.

이스라엘의 메시아 '자손'으로서 예수는 (갈3:16) 모든 신자를 대표하고, 따라서 모든 신자 역시 이스라엘 '자손'의 일원이다. (갈3:29) 그러나 새 예루살렘의 이름은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사실은 참 유대인이 아닌 자들에게는 새겨져 있지 않다. (계3:9)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적용된 '새 예루살렘'의 이름은 개념상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나온 십사만 사천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따라서 4-8절에서 그리스도인은 1:6과 5:10, (출19:6적용) 5:9 (단7:18,22 적용) 2:17과 3:12, (사62:2,65:15적용) 3:9 (사49:23,60:14 적용) 에서처럼, 그리고 21-22장 (겔40-48장 적용) 의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에서와 같이, 참 이스라엘로 나타난다. 사실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일련의 예언이 7:9, 15-17에서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와 믿는 자들에게서 성취된 것으로 인용된다.이것은 신약성경 다른 곳에서 교회(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를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예언의 성취로 간주하는 것(롬9:24-26, 10:12-13, 고후5:17, 6:2, 16-18) 그리고 참 '유대인,' (롬2:28-29) 이스라엘', (롬9:6,갈6:15-16) 참 '할례',(빌3:3) '열두 지파',(약1:1) 흩어진 이스라엘 자손 (벧전1:1,2:9)으로 불리는 것과 일치한다. 이방인이 마지막 때에 참 이스라엘의 일원이 되는 것은 이미 구약성경에 예언된 사실이다. (시87편, 사19:18-25, 56:1-8, 겔47:21-23, 슥2:11,9:7)


 4-8절이 열두 지파를 문자적인 '이스라엘 자손'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결론은, 요한이 요한계시록 다른 곳에서 구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들을 인유할 때(11:8에서 소돔과 애굽, 14-18장에서 바벨론, 20:8에서 곡과 마곡) 이 모든 원수들도 문자적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믿는 괴상한 믿음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으면 더욱 강화된다.


 앞에서 교회를 참 이스라엘로 보는 견해는 리처드 보컴 (Richard Bauckham)은 [예언의 절정] The Climax of prophecy에서 정교하게 다듬어 제시했다. 보컴은 4-8절의 계수는 계수된 자들이 군대라는 점을 감안한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 이 견해에 대한 증거는 다양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지파 중에서' (from the tribe of)라는 말이 구약의 인구 조사에서(민1:21,23등) 반복적으로 사용된 '지파에서' (of the tribe of)라는 말을 상기시키는 것이 한 증거다. 민수기에서 인구 조사의 목적은 약속의 땅을 정복하기 위하여 군사력을 정비하자는데 있었다.


 따라서 교회는 군사적 관점에 따라 하나님을 위해 싸우도록 세상에서 불러냄 받은 남은 자로 묘사된다. 이 군대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고, 14절은 그들의 싸움 방식을 제시한다. 그들은 유다 지파의 왕이신 어린양이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것과 같은 역설적인 방법으로 원수를 역설적으로 물리친다. 즉, 그들의 고난을 통해 믿음과 증언을 유지함으로써 자신들의 원수, 곧 마귀와 그의 군대를 이긴다(14절에 대한 주석을 보라. 4-8절의 집단과 9-17절의 집단의 동일화에 대해서는 9-17절에 대한 주석의 서론 부분을 보라). 따라서 그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다.(14:4)


 4-8절에서 '지파 중에'라는 말은 믿지 않는 대규모 공동체로부터 싸움을 위해 불러냄 받은 남은 자로서의 교회 개념을 함축하지 않고, 단순히 교회를 새 이스라엘로 묘사하기 위해 구약에서 찾은 인구 조사 언어의 하나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의 반복된 공식은 믿지 않는 대규모 공동체(모든 족속과 민족의 사람들)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남은 자의 선택을 가리킬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침과 인침의 구속적 의미에 대한 요한계시록 문맥의 개념에 이로 말미암아 인침 받지 못한 다른 자들이 있었다는 함축 의미가 덧붙여진다.


 * 쿰란 공동체의 [전쟁 두루마리] 1QM 2-3, 5-6, 14에 공동체의 거룩한 군대와 관련하여 나타난 '남은 자' 관념이 있다.


 * 7:4-8의 '지파 중에' 와 7:9과 5:9의 '각 나라와 족속에서'사이에 유사성이 있다(두 문구는 땅의 대부분의 거민들로부터 나온 구속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 십사만 사천을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자와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은"자로 말하는 14:1-4과 평행 요소가 있다. 14:6에서 '땅'과 '백성'을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으로 정의한다.


 그러므로 구약의 인구 조사 명단의 군사 언어 선택은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발견되는 '남은 자' 신학에 적합한 추가 목적으로 작용하고, 그것을 보강할 수 있다.

7:1-8 묵상 제안

인침과 구원의 확신: 만일 '인침'이 하나님과의 구원 관계의 상실로 부터의 보호를 의미한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자신이 실제로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것과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때때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라는 난해한 문제로 나아간다. 요한계시록 자체의 문맥에 기초를 둔 다음 질문들은, 구원의 확신을 어떻게 얻고 강화시킬 수 있는지의 문제에 더 깊은 묵상의 초점을 맞추도록 돕는다.


* 그리스도인은 어린양이 그분의 핏값으로 자신을 속량하셨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가? (5:9,12:11)

*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를 소원하는가? (2:26,12:17,14:12,22:3)

* 우리는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길로 나아가는가? (2:4-5,3:17-19)

* 우리는 믿음을 양보하라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어린양을 기꺼이 증언하는가? (6:9,12:11,17,19:10)


 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을 종합하면 확신에 대해 점증적인 효과를 얻을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 요한계시록 7:3은 인침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종'(노예)이라고 말한다. 고대 세계에서 신실한 종은 온 몸이 주인의 소유였으므로 자신의 전 존재를 통해 주인을 기쁘시게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갈1:10,엡6:6,계22:3) 우리에게 그리스도께 복종시키지 않는 삶의 영역(경제적 요소나 성적 문제 등) 이 있는가? 바울은 우리의 전 존재와 몸을 그리스도께 '의의 종'으로 바쳐야 한다고 말한다. (롬6:16-19)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값으로 사셨기" 때문이다 (고후6:20) 그리스도의 참된 종은 그리스도에게 "마음으로 순종하기" 마련이다. (롬6:17) 하나님이 우리의 온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종은 "온 마음으로 차지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종은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자다. (왕상8:23,48,61)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순종은 단순히 의무에 불과한가, 아니면 마음으로 하나님께 복종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바라는가? 이상의 질문에 부정적으로 답한다면 요한계시록이 그토록 크게 우려하는 우상숭배의 면모를 드러내는 것이다.(2:12-23,9:20-21)


 참 이스라엘로서의 교회: 그리스도인이 구약성경을 통해 자신들이 참 이스라엘의 계승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가? 한 가지 매우 실제적인 의미는 구약성경이 그리스도인에게 전보다 휠씬 더 중요한 책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에 관한 매우 많은 예언을 담고 있고, 그 예언들의 성취가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교회 안에서 나타나기 떄문이다. 특히 본서의 주석으로 확인되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땅의 회복에 관한 예언은 믿지 않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 회복되고, 그래서 그들이 참 이스라엘과 새 예루살렘을 표상하는 자가 된 것으로 성취가 시작되었다. 예를 들어 이사야 40-66장의 예언은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더 깊이 조명된다. 교회가 참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이 갖는 다른 함축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오늘날 중동 지역의 국가인 이스라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어떻게 관련되는가?

그리스도인의 싸움의 본질: 앞에서 확인한 것처럼, 4-8절에서 여러 이스라엘 지파 가운데 인침을 받은 자를 열거하는 것은 거룩한 전쟁에서 싸우는 군인들의 점호를 표상하는 것으로 충분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부르심을 받아 인침을 받은 자들이 참 이스라엘로서의 교회를 표상한다면, 싸워야 할 이 싸움은 어떤 종류의 싸움일까?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7:14은 이 싸움의 방식을 제시한다. 그들은 어린양이 싸우신 방법으로, 곧 고난 속에서 인내하는 방법으로 싸워 이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이 싸움에 참여하는 다양한 방법은 무엇이 있는가?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사니'라는 찬송가는 요한계시록의 이 부분에 특별히 알맞다. 다음 가사를 주목해 보라. "세상 나라들은 멸망당하나 예수 교회 영영 왕성하리라. 마귀 권세 감히 해치 못함은 주가 모든 교회 지키심이라."


하나님과 어린양은 연단하는 환난을 통해

큰 무리를 보호하심으로써

그들의 구속을 이루신 것에 대하여 찬양을 받으신다   (7:9-17)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1-8절은 참 이스라엘로서의 교회를 상징적인 의미에 따라 묘사했다. 이제 요한은 9-17절에서 교회의 실제적인 측면을 살짝 들여다 본다. 첫 번째 부분, 곧 1-8절은 교회를 구원이 안전을 보장받은 참 이스라엘의 회복된 남은 자로 묘사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속의 인침을 받을 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결정하셨기 때문에 그 수가 얼마나 될 것인지 말해지고,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참된 종들의 엄밀한 수를 알고 계신다 (7:4,딤후2:19) 이로 말미암아 이전에 고난받고 높이들린 성도들은 6:11에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입증받기 위해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는 말을 듣는다. 두 번째 부분, 곧 9-17절은 이제 이 동일한 무리를 실제 그들의 방대한 수의 관점에 따라 이해한다. 이 무리는 구원받은 남은 자들일지라도, 또한 땅의 모든 지역에서 모이고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살았던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 무리는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살았던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 무리는 매우 방대한 집단이다. 3-8절과 9-17절에 나오는 사람들의 참 이스라엘(교회)로서의 정체성은,9-17절에 나오는 무리가 이사야서와 에스겔서의 이스라엘에 관한 회복 예언의 성취로 묘사되는 것과(16,17절 주석 참조) 다니엘 12:1에 예언된 것처럼 신실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임하는 환난 기간에 인내하는 자로 묘사되는 것으로 (14절주석참조) 추론할 수 있다.

7장 이 두 부분의 관계에 대한 이와 같은 관점은 다른 곳의 패턴을 확인해 보면 강화된다. 다른 곳을 보면 요한이 보는 것이 거기서 그가 직접 듣는 것에 따라 해석되거나 요한이 듣는 것이 거기서 그가 직접 보는 것에 따라 해석된다. 전자의 패턴을 확인하려면 5:6과 5:7-14, 14:1과 14:2-5, 15:2과 15:3-4, 17:1-6과 17:7-18을 비교해 보라. 후자의 패턴을 확인하려면 5:5과 5:6, 9:13-16과 9:17-21을 비교해 보라. 또한 7장 두 부분 사이의 관계가 5:5-6에서 사자와 어린양 사이의 관계와 엄밀하게 평행을 이루고 있는 것도 주목해 보라. 5장을 보면 요한은 먼저 사자에 관한 말을 듣고,(5:5) 이어서 그 말의 의미를 자기에게 나타나신 어린양을 보는 것을 통해 이해한다. (5:6) 마찬가지로 7장에서도 요한은 먼저 열두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의 수에 대하여 듣고, 이어서 그 의미를 자기에게 나타난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보는 것을 통해 이해한다. 유대 지파의 사자는(5:5) 유다(유대) 지파를 필두로 한 열두 지파의 인침 받은 자 명단과(7:4-8) 대응을 이룬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5:6) 각 족속과 나라 가운데에서 속량 받은 자와(5:9) 각 나라와 족속에서 나온 큰 무리,(7:9) 곧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7:14) 자와 대응을 이룬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인침은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땅에 거하는 자들(성도들을 박해하는 자들)을 시험하는"(3:10) '시험의 때'로부터 어떻게 지키실지 더 깊이 설명해 준다("땅에 거하는 자들"의 부정적 정체성은 3:10,6:10에 대한 주석을 보라. 환난에 관한 단 12:1 배경은 3:10과 7:14에 대한 주석을 추가로 보라.). 이 전후 관계는 모두 최후의 심판과 보상 이전에 일어나는 문제들과 관련되어 있고, 따라서 7장은 또한 미래의 국면, 특히 '끝'과 관련한 국면을 가지고 있다. (15-17절) 이 관점에 따라 7장은 다른 무엇보다 6:17의 결론적 질문인,최후의 심판의 진노를 겪지 않고 하나님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에 대한 답변이다. 이것은 6:17의 질문에 대한 명백한 답변이자 9-17절의 환상 내러티브가 이끄는 주된 요점이다.


 이 점에서 "큰 무리가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7:9)라는 언급은 6:17의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변일 수 있다. 이것은 다음 사실들로 암시된다. 6:17과 7:9의 가까운 문맥적 위치와 '서다'라는 말을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것, 두 본문 모두 보좌와 어린양 앞에 서 있음을 언급하는 것, 5:6의 보좌 앞에 '서 계신' 어린양에 대한 묘사는 어린양의 부활 실존과 깊이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이후에 양으로 묘사된 사람들이 (7:17) 7:9에서 보좌 앞에 '서 있는' 것도 그들의 부활 실존을 반영한다는 것, 15:2에서 성도들이 '유리 바다'가에 '서 있는' 것도 어린양에 대한 언급과 직접 연계되고 따라서 5:6의 어린양의 부활실존에 성도들이 참여함을 반영한다는 것(15:2 주석 참조) 등이다. 또 '서다'는 말은 다른 곳에서 각각 그리스도(그리스도로 추정되는 찬사).(10:5,8, 14:1) 성도 (여기서는 비유적 또는 영적 부활로 보인다) (11:11) 그리고 모든 인간 (20:12)과 관련하여 이 의미로 사용된다. 하지만 모든 인간에게 적용된다고 해서 이것이 부활한 모든 인간이 구원받으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7장은 6장의 심판 뒤에 임하는 마지막 환난 기간의 새로운 미래 사건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7장은 6장의 환상을 더 깊이 있게 설명하고 더 잘 이해하도록 포괄적인 배경을 제공하는 삽입구다. 7:1-8의 사건은 6:1-8의 사건 직전에 일어나고, 7:9-17은 6:12-17에 첫 국면이 묘사된 최후의 심판 이후 시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7:9-17, 특히 13-14절은 부차적으로 최후의 심판 이전 시기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7:9-17은 인내함으로써 하나님의 임재와 영원한 복락 속에 들어가 그것을 누리기 시작하는 자들의 '종합 과정'을 묘사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어질 사상의 흐름을 7장에서 식별할 수 있다. 즉, 하나님과 어린양은 그분들이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서 주신 천상에서의 구속적 안식의 상으로 (15-17절)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신다. (9-12절) 이상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보호의 인으로 말미암아(3-8절) '사방의 바람'(1-3절.6:1-8 참조) 이 일으키는 '큰 환난' (14절) 을 통과한 하나님의 백성의 인내의 결과다.

9. 1절과 요한계시록 다른 곳에서와 같이 '이 일 후에'(개념상 '이후에'와 동등하다)는 환상 속에 묘사된 사건이 반드시 1-8절의 이전환상 속의 사건 직후에 일어나리라는 것이 아니라 요한이 본 그 다음 환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개역개정판은 일률적으로 '이 일 후에'로 번역한다. - 옮긴이) 사실 이번 환상은 6:12-17의 최후의 심판에 대한 묘사 이후에 일어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9절에 묘사된 집단은 5:9에 묘사된 집단과 동일하다. 즉 다니엘 7:14,22,27에 예언된 각 방언과 나라에서 나온 마지막 때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이 성도들은 이미 영광 속에 들어간 하나님의 백성이다. 왜냐하면 이 장면은 하늘에서, 곧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환난을 겪을 때 신실하게 인내함으로써 상을 받은 그들은 이제 영원토록 주님의 임재를 누리고 있다.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아브라함의 약속된 자손, 곧 셀 수 없이 많은(창16:10,32:12) 여러 민족(창17:5)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에 따라 이처럼 방대해진 자손, 곧 '씨'는 민족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애굽에서 크게 번성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갈 미래의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킨다. 9절의 '큰 무리'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성취이고, 따라서 요한계시록이 세계 전역의 그리스도인을 참 이스라엘로 간주하는 또 다른 표현법이다. 이 큰 무리가 손에 들고 흔드는 '종려 가지'는 유대인이 절기 동안 거주할 초막을 종려 가지로 세웠던 초막절 행사를 암시한다(레23:40-43) 초막절은 광야에서 방황할 때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 주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현재 자신의 신실한 백성들을 인치신다. 원래 이스라엘에게 적용되었던 이 심상이 이제 요한을 통해, 박해자에 대한 승리를 즐거워하고 또 이후로 '큰 환난'을 거칠 때 광야 순례를 하는 동안 하나님이 보호해 주신 사실에 따라(12:6,14) 자신들의 마지막 때 출애굽 구속을 즐거워하는 모든 민족으로부터 나온 사람들에게 적용된다.(7:13-14 주석참조)


 10-12. 참 이스라엘 자손으로 영광 속에 들어간 이 성도들은 하늘에서 자신들의 마지막 때 구원을 즐겁게 기념하려고 종말론적인 초막절을 지키고, 그 구원을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돌린다. 그들의 구원은 그들의 믿음을 좌절시키려고 획책했던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한 것에 있다. (12:10-11, 19:1-2참조) 이기는 자는 그 승리를 진정 하나님의 승리로 인정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승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얻은 것이기 떄문이다. (12:10-11) 성도들의 믿음의 보존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는데, 그 이유는 흰 옷이 (9절) 시험을 거칠때 인내함으로써 얻은 순결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7:13-17주석 참조) 하나님은 자신이 성도들에게 베푸신 인치심에 따라 (1-3절) 환난에서 그들을 보호하신다. 이 구원의 승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의 믿음을 미혹하려고 획책하고 그들을 박해한 악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으로 완성된다. (6:12-17등) 영광 속에 들어간 성도들은 지금 "천사와 장로들과 네 생물"과 함께 하나님과 어린양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이 천상의 무리는 구속 사역에서 오직 하나님이 주권적 속성을 소유하고 계시고, 따라서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의 힘"을 세세토록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예증한다. '아멘'은 하나님이 베푸신 구속의 확실성과 진실성을 강력히 확증하기 위해 찬양 공식을 소개하고 끝내는 역할을 한다.

13-14. 장로 중 하나가 요한에게 흰 옷 입은 사람들의 신원을 알려준다. 이 큰 무리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을 가리킨다. 신약성경에서 요한계시록을 제외하고 '큰 환난'이라는 어구가 나타나는 유일한 본문은 마태복음 24:21이다. 마태복음 21:21과 요한계시록 7:14은 분명히 다니엘 12:1LXX을 언급하는 것이다. "환난에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14절에서 정관사를 사용해 '[그] 큰 환난'(the great tibulation)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 환난이 단순히 어떤 또 하나의 일반적인 환난이 아니라 다니엘이 예언하고 또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바로 그 마지막 때 환난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다니엘서의 환난을 보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가 하나님께 충성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한다. (단11:30-39, 44, 12:10) 이 박해로 말미암아 어떤 이들은 타락하게 되고, (단11:32,34) 심지어는 소아시아의 다섯 교회(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를 제외하고)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이다. 이 환난은 믿음을 양보하라는 종교 제도의 압력과 경제적인 박탈을 포함하는 세상의 압력으로 구성된다(2:9에서 "네 환난과 궁핍"을 보라)


 이 '환난'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으로 한정되지 않고, 교회가 탄생할 때 시작되어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계속된다. 우리는 이에 대해 최소한 다섯 가지 이유를 제시할 수 있다.


 * 요한은 요한계시록 다른 곳에서 다니엘서의 마지막 때 예언이 그리스도의 시대에 성취가 시작되어 이후로 계속 성취되고 있는 것으로 본다. (1:1,13,19 주석 참조)


 * 예수는 다니엘서의 부활 예언이 (단12:2) 처음에는 자기 자신의 사역에서 영적으로 성취가 시작되고, 이어서 자신이 재림하실 때에 육적으로 성취될 것으로 보신다. (요5:24-29) 따라서 다니엘 12:2에 예언된 성도들의 부활은 예수의 사역에서 성취가 시작된다 (이것은 우리가 '첫째 부활'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20:6 주석 참조)


 * 요한계시록 1:9과 2:9-10,22을 보면, 환난을 실재로 다룬다 (2:9-10,22은 거짓 선지자들을 언급한다). 3:10의 '시험의 때' 역시 다니엘 12:1,10을 인유하고, 이 시험의 때는 예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전체 기간을 망라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3:10은 '시험의 때; 개념을 전개하고, 그것을 이 동일한 시기에 적용한다. 특히 14절의 '[그] 큰 환난'이라는 말에서 정관사는 앞에서 언급한 환난을 가리키는 용법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부분적으로 1세기에 두아디라 교회에서 일어나도록 되어 있던 '큰 환난' (2:22)을 가리켰다.


 * 예수는 요한복음 16:33에서 환난을 현재적 실재로 여기신다.


 * 바울 서신에서 23회에 걸친 '환난'이라는 말의 사용 가운데 21회가 현재적 실재를 가리키고, 따라서 요한계시록 7:14의 시작된 마지막 때 환난 개념은 신약성경 다른 곳에서 사용되는 '환난'이라는 말 (헬라어thlipsis)의 용법과 양립된다.


 그러므로 큰 환난은 예수의 고난과 함께 시작되었고, 지금 요한과 함께 형제로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1:9) 모든 신자가 겪고 있다.



 

그들이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흰 옷을 설명해 준다. 그들의 옷이 흰색인 것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되었기 때문이고, 이 구약 은유는 죄사함에 대해 말할 때 사용된다. (사1:18,슥3:3-5) 요한계시록 19:13에서는 예수 자신이 피 뿌린 옷을 입고 계시는 것으로 묘사되고, 따라서 성도들의 옷은 그들이 십자가의 도를 따라 예수를 충성스럽게 따랐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6:9-11을 보면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자들에게 흰 옷(두루마기)이 주어졌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제거하고 구원을 제공한 어린양의 죽음을 믿고 계속 증언했다. 반면에 환난 때문에 타협하고 그리스도를 증언하지 않은 교인들은 그들의 옷을 더렵혔다. (3:4)


 환난은 오직 성도들의 믿음과 성품을 연단시키고 순결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롬5:3-5,벧전1:7 참조)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구약성경에서 성도들이 흰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는 본문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시작된 마지막 때의 성도들에 대해 말하는 다니엘 11:35과 12:10뿐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다니엘 11:35은 억압과 고난은 "연단을 받아 정결하게 되며 희게 되어[히브리어 labenm NASB' 순전하게 되어'] 마지막 때까지 이르게"하려고 임한다고 역설한다. 13-14절에 묘사된 모든 민족으로부터 나온 구원받은 무리는 다니엘의 환상에서 예언된 마지막 때의 이스라엘 자손이다. 따라서 마지막 때 모든 민족으로부터 나온 깨끗하게 된 신자들에 대한 묘사는 이스라엘의 관한 다니엘 11-12장의 예언의 성취하는 장면이고,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교회를 참 이스라엘의 계승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9절과 14절 그리고 요한계시록 다른 곳에서 깨끗학 되고 흰 옷을 입은 성도들에 대한 심상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죽음(어린양의 피)을 믿는 믿음을 보존하고, 또한 정화시키는 불의 연단을 받음으로써 증명된 순결함을 함축한다. 3:18도 거의 똑같이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또 "흰 옷을 사서 입으라"고 권면함으로써 순결함을 강조한다. 이 심상은 22:14에서 다시 나타난다. 거기 보면 이 심상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비신자들과 달리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모든 신자를 묘사하는 데 분명히 사용된다. 3:4-5에서 흰 옷을 입은 자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이것은 다니엘 12:1의 인유다. 이들은 구속받은 자 가운데 특별히 선택된 집단이 아니라 구속받은 자 집단 전체다. 왜냐하면 입은 옷이 이처럼 씻긴 자만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계22:14) 흰 옷을 피로 씻는 은유는 일차적으로 성도들이 환난을 통해 연단을 받고 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믿는 믿음을 지킴으로써 죄에서 깨끗하게 된 객관적 사실을 함축한다. 어린양의 피는 성도들의 피가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의 피를 가리키므로, 여기서 초점은 성도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의 깨끗하게 하는 효력에 있다. 요한은 성도들의 고난을 언급하고 싶을 때 '성도들의 피'와 같은 말을 사용한다. (17:6.6:10,18:24,19:2 참조) 그러므로 이 심상은 특별히 선백받은 순교자 집단이 아니라 구속받은 자 전체 집단 개념을 함축한다.


 15.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내하는 거소가 그 결과 그들에게 주어지는 순결함이 (13-14절) 그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임재 속에 들어가는 복의 (15-17절) 기초라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죄가 있는 사람들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임재에서 도망쳐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거룩하신 분으로, 죄에 대하여 진노를 쏟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6:16-17) 그러나 어린양이 자기들 대신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셨음을 믿음으로써 "깨끗하고 의롭다"고 선포된 (19:8b) 자신들은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나아가는 것이 허락된다.

그들은 어린양이 자기들 대신 고통스러운 죽음의 저주를 받음으로써 아담의 타락의 결과를 반전시키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장막의 임재 속에 들어가고, 거기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1:18,5:6,9,12,21:3-4,6,22:1-4 참조) 이 들어감의 자격 조건은 그들의 변함없는 믿음이며, 들어감 자체가 환난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킨 것에 대한 상이다. (22:14참조) 하나님과 어린양의 임재 속에서 안식을 누리는 최후의 상이 9-12절에서 성도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의 기초를 구성한다.


 이 신자들은 새로운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의 영원한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긴다. 피로 깨끗하게 씻긴 흰 옷을 입고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긴다" (레8:30을 보면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합당한 성결함을 상징하기 위해 제사장의 옷에 피가 뿌려진다). 요한계시록 1:5-6과 5:9-10의 연계성은 15절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대상이 단순히 순교자나 다른 특수 계층의 성도들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따라서 15절은 1:6과 5:10에 소개된 새로운 제사장 직분 개념을 전개한다.이 세 구절은 (7:15,1:6,5:10) 모두 출애굽기 19:6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서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신 약속을 인유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자는 고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이 약속을 성취한다. 또한 에스겔 37:26-28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성소를 이스라엘 가운데 세우시고,자신의 "처소[장막]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라고 하신 예언을 성취한다. 이 무리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는 그[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긴다는 언급은 분명히 에스겔 37:26-28의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을 반영한다. 에스겔서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내 성소를 그 가운데서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장막]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 가운데서 있으리니."


 에스겔서에 따르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 위에 장막을 치심으로써 나타난 결과는 열국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알게 된다는 것이다. (겔37:28) 그런데 이 약속이 지금은 분명히 기독교 신자들에게 적용된다. 에스겔 37:27의 예언을 교회에 적용시키는 것을 주목할 만한데, 그 이유는 에스겔이 이 예언이 성취될 때 주어질 직접적인 결과가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때]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을 열국이 알리라"(겔37:28) 는 것을 강조하기 떄문이다. 그러므로 에스겔 37장은 열국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예언이었지만, 지금 요한은 이 예언이 교회에서 성취된 것으로 이해한다(구약 예언의 이와 동일한 반전 적용에 대해서는 3:9에 대한 주석을 보라. 거기서도 '유대인'이라는 호칭을, 믿지 않는 문자적 유대인에게 적용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확인된다). 이처럼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예언을 교회에 적용하는 것은 에스겔37:27이 이스라엘을 '내 백성'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강화된다. 왜냐하면 이 말을 참 이스라엘의 계승인 교회에 다시 적용시키는 요한계시록 21:3에서, 에스겔 37:27을 더욱 충분히 인용하는 가운데 포함시킨 호칭으로 확인되기 떄문이다.


 15절 장면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지역 교회 건물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21:22참조) 오히려 15절 후반부가 보여주는 것처럼 지금 성전은 어린양과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는, 보좌에 앉으신 이"의 임재 속에 존재한다. (21:22참조) 하나님이 자기 백성 위에 장막을 치시는 것에 대한 언급은 또한 9절에 나온 구약이 '초막절' 주제를 계속하는 것이다. (레23:34-44, 신16:13-17등)

16-17. 하나님이 임재를 즐거워하는 구원받은 무리가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의 성취로 묘사된다. 그들은 회복에 한부분에서 약속된 하나님의 임재의 위로를 즐거워한다. 요한은 여기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임재 속에 들어가는 회복의 상태를 제시하는 이사야 49:10에 의존한다.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요6:35참조) 따라서 교회는 이사야49:10의 회복에 대한 예언을 성취한다. 요한계시록 22:17은 성도들이 현세에서 이 물을 마시기 시작한다고 주장한다.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과거의 고통(배고픔,목마름,극도의 뜨거움으로 표상된) 이 제거되는 것의 기초는 그리스도께서 "보좌 가운데서 계시는" 신적 지위에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신적 위로를 베푸실 수 있다.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목자이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양이므로, 목자가 자기 양을 지키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성도들을 보호하실 수 있다. 심지어는 "그들의 목자가 되시는 어린양" 심상도 이사야 49:9-10에서 나온다. 거기 보면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시는 이가 그들을 먹이고 풀밭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이사야 49장은 하나님을 목자로 묘사하고, 따라서 16-17절에서 그리스도의 목자로서의 역할은 신적 존재로서의 그분의 지위를 확대시킨다.


 17절에서는 이사야 49:10을 인유한 끝 부분에 이사야 25:8에 나온 회복 예언을 추가로 덧붙인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하나님은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 이므로 어떤 슬픔도 다시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는 말은 이사야 25:8의 서두에 나온다. 요한이 이사야 25:8 첫 부분을 제외하기는 하지만, 이 본문을 " 더 이상 눈물이 없으리라"는 약속의 기초로 삼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요한은 21:4에서 이사야 25:8의 첫 부분까지 포함시킨다. 즉,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음에 곧바로 "다시는 사망이 없고"라고 말한다. 요한은 이사야 49장과 같이 구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회복의 소망이, 그리스도를 위해 매우 충성스럽게 고난을 겪은 그리스도인 무리의 구원에서 성취된 것으로 본다.


 16-17절에서 목양과 관련된 언어는 이사야에서 발견되는 용어로, 거의 동의어인 '방목'을 대신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방금 15절에서 인유한 에스겔 37:24-28의 문맥으로 암시된다. 에스겔 37:24-28은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실 때에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실 때에 "내 종 다윗이 그들이 왕이 되리니 그들 모두에게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겔37:24) 어린양과 다윗 간의 연계가 자연스러운 것은 5:5에서 어린양의 과거 신원이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로 확인되기 때문이고, 또한 7:4-8지파들의 명단에서 유다 지파를 첫째 자리에 두는 것으로 강조되기 떄문이다. 16-17절 장면의 목적은 어린양과 그의 백성의 동일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어린양은 성도들의 연합적인 대표가 되신다. 그러므로 어린양이 먼저 고난을 받고 부활할때 상을 받으신 것처럼 그의 양인 성도들도 삶을 살면서 어린양과 동일한 길을 따른다(1:5,9,7:14주석 참조) 어린양은 땅에서 성도들을 성령을 통해 인도하셨지만 미래에는 친히 인도하실 것이다.


 7장 후반부의 초점은 9-12절과 15-17절에 있고, 그곳을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영원한 상을 누리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여기서 상을 받는 자는 단순히 일부가 아니라 (6:9-11에서처럼) 교회 시대 전 기간에 걸쳐 살았던 신실한 자 전부다. 이것은 7:9-17이 최후의 심판 환상(6:12-17)고 하나님의 인치심 환상 (7:1-8) 다음에 나오는 것으로도 암시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영원한 위로는 경건하지 않은 자의 처벌의 두려움과 대조되고, 환난을 견딘 것에 대한 상이 인침의 결과로 제시된다. 7:9-17이 모든 성도가 받는 최고의 영원한 상에 가장 큰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장면이라는 것은, 15-17절이 21:3-4, 6, 22:3의 영원한 상태에 대한 묘사와 문자적으로 공통적인 평행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도 확인된다. 13-17절에 묘사된 자들은 교회 시대 동안 이긴 자로, 증언을 마쳤을 때 흰 옷을 입고,(3:4-5) 하나님의 영원한 성전에서 안전한 자리를 차지하며,(3:12) 다시는 배고프지 않을 양식을 공급받게 될(2:7,17)자들이다. 이 점에서 보면 7:9-17은 부분적으로 완성 속에 들어가기 전 시기를 염두에 두었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지복 장면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포함된다는 결론은 9절에 언급된 흰 옷을 입은 집단이 13-17절에서 큰 환난에서 나와 흰 옷을 입고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간 집단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확인된다. 9절을 보면 이 집단은 능히 셀 수 없고,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자들이다. 9절과 5:9에 나오는 이 말은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구속받은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공식 문구다. (5:9-10주석 참조)

7:9-17 묵상 제안

'큰 환난'의 의미와 함축성: 본서의 주석에 따르면 7:9-17은 (성경의 다른 본문들과 함께) 교회 시대 전체를 '큰 환난'의 시대로 간주한다. 어째서 교회 시대가 큰 환난의 시대로 규정되는가? 우리는 이 규정을 승리하는 교회로서의 관점과 어떻게 결부시켜야 하는가? 현세에서 우리가 얻는 승리의 본질과 차원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환난의 때에 거룩한 정부를 세우는 것을 기대할 수 있는가? 본서의 주석에 따르면 우상숭배적인 관습이나 태도와 관련된 불경건한 정치 및 경제 제도에 순응하도록 그리스도인에게 가해지는 압력은 매우 일관적인 환난의 한 형태로 간주된다. 우리는 이것을 환난의 궁극적인 원인으로 간주해야 하는 것인가? 더 길거나 짧은 환난의 때가 있을수 있는가? 만일 있다면 왜 그렇게 되는가?


 '묵시적' 기대의 만연: 심리학의 한 분석은 사람들이 세상 종말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7:9-17과 같은 성경 본문을 이해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우리는 왜 '큰 환난'을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겪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심화될 어떤 환난으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 재림 직전에 일어날 사건으로 보기를 좋아하는가? 만일 우리가 큰 환난이 아직 임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이런 믿음은 우리가 실제로 사는 동안 겪는 환난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왜곡시키는가? 우리는 현재의 위험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묵시적 사건을 '과장'하고 있는지 않은가? 만일 우리가 지금 환난의 때에 있지 않다고 믿는다면, 이것이 세상에 순응하라고 실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재 압력의 위험을 감소시킬 수 있는가?


 교회를 통한 구약 예언의 성취: 7:9-17은 현재 교회에 적용된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적 언급으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교회가 구약 예언의 성취라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유대인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만일 위가 로마서 9-11장을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 본문으로 이해한다면, 유대인과 (세속적) 이스라엘 국가 사이를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 하나님은 (세속적) 이스라엘 국가를 윟나 구약의 예언적인 계획을 갖고 계신가? 사람들은 왜 그토록 자주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성경의 예언을 단지 이스라엘 국가와 관련된 사건 속에서만 성취된 것으로 간주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이스라엘 국가를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는가? 성경 예언의 성취로 유대인이나 이스라엘 국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하나님이 현세에서 자신의 교회를 위해 갖고 계신 기업에 대한 높은 관점에 따라 견지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유대인을 성경 예언의 중심에 두지 않고 어떻게 그들에게 동정적일 수 있겠는가?

<참자유를 위하여>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