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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욕망 없는 상태, 최고의 축복...'아이 앰 댓' 상권

작성자이니그마|작성시간26.06.05|조회수82 목록 댓글 0

16. 욕망 없는 상태, 최고의 축복...'아이 앰 댓' 상권

문: 전 깨달은 분들은 많이 만나봤습니다. 그런데 해탈한 사람은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 혹시 선생님께서는 해탈한 사람을 만나보셨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해탈이라는 말에는 육신을 버린다는 뜻이 담겨있는 겁니까?

M: 깨달음과 해탈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요?

문: 깨달음이라는 말은 평화와 선(善),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놀라운 경험을 말합니다. 세계는 여전히 의미를 지니고 물질과 본질 그 둘의 보편적 통일이 있습니다. 그런 경험은 지속되지는 않지만 잊혀지지도 않습니다.

기억이나 갈망으로 마음속에서 빛을 발합니다. 저는 그런 경험을 해 본 일이 있기 때문에 제가 말하는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해탈이라는 말은 항시 그런 상태에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여쭙는 것은 해탈이라는 것이 육신을 지닌 채로 가능한가 하는 점입니다.

M: 몸이 왜 문제가 되지요?

문: 육신은 너무나 여리고 지속력이 약합니다. 그리고 육신은 여러가지 요구와 갈망을 만들어서 우리들을 탐욕적으로 만듭니다.

M: 그럼 어때요? 육체적 표현들은 제한되든 말든 내버려 둬요. 하지만 해탈이라는 것은 자아가 오도된 자기 망상에서 벗어나는 걸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특별한 체험 속에 담겨있을 수가 없지요. 아무리 좋은 경험이라도요.

문: 해탈이라는 건 영원히 지속되는 겁니까?

M: 경험이라는 건 모두 시간에 묶인 겁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게 마련이지요.

문: 그러면 제가 생각하는 것 같은 해탈이라는 건 없는 건가요?

M: 그게 아니라 사람이 원래 묶임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은 의식도 있고 의식적인 자유도 있는 겁니다. 그 누구도 그러한 자유로움을 앗아갈 수 없어요. 언제 자기 스스로가 없거나 의식이 없었던 적이 있던가요?

문: 기억은 잘 안 납니다. 그렇지만 기억이 안 난다고 해서 제가 종종 무의식적으로 된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못하겠지요.

M: 왜 경험자 쪽으로 관심을 돌리지 않나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참된 말은"내가 있음"이니 거기에 담긴 뜻을 깨달아야 해요.

문: 어떻게 하면 그걸 깨달을 수 있습니까?

M: 거기엔 "어떻게"라는 게 없어요. 그냥 "내가 있음"의 느낌을 마음속에 유지 하고 그 속으로 잠겨들어 가는 거예요. 그러면 마음과 느낌이 하나가 됩니다. 자꾸 거듭해서 시도를 하게 되면 주의와 애정(affection)의 바른 균형 위에 서게 되고, 마음은 "내가 있음"의 느낌 안에 확고히 정착하게 됩니다. 그리되면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정감어린 존재감이 항상 마음의 배경으로 남게 돼요.

문: 선생님께서는 그런 상태를 해탈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M: 해탈이 아니라 정상이지요. 존재와 앎과 활동을 노력없이 행복하게 하는데 무슨 잘못이 있나요? 왜 그러한 것을 그처럼 비일상적인 것으로 생각해서 육신을 직접 파괴할 생각을 하는 겁니까? 육신이 죽게 되어 있다는 게 뭐 그리 문제가 있겠습니까? 육신에 대한 태도를 고쳐서 육신은 육신에 맡겨두십시오. 함부로 내돌리지도 말고 고문을 하지도 마십시오. 그냥 잘 흘러가게 하고, 가능한 한 항상 의식의 주의 경계 밑 쪽에 두십시오.

문: 놀라운 체험의 기억이 어른거려서 그 기억이 되돌아 왔으면 합니다.

M: 그걸 되가져 오려고 하니까 지닐 수가 없는 겁니다. 뭔가를 갈망하는 상태가 체험에는 장애가 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아는 마음에는 가치로운 일이 발생할 수가 없어요. 도저히 마음으로선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야말로 커다란 가치가 있는 것이지요.

문: 그러면 바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M: 최상의 것을 바라면 되지요. 최고의 행복, 최대의 자유, 그리고 욕망 없음이 최고의 축복이지요.

문: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는 제가 원하는 자유가 아닙니다. 전 저의 갈망을 채울 자유를 원합니다.

M: 당신에겐 그럴 자유가 있어요. 사실 당신이 하고 있는 게 그거 아닙니까?

문: 저는 하려고 해보지만 여러 가지 장애가 있어 저를 좌절케 하곤 합니다.

M: 극복을 해보세요.

문: 할 수 없어요. 전 너무 약합니다.

M: 누가 당신을 약하게 합니까? 약하다는 게 무엇입니까? 남들은 자신들의 바램을 성취하는데 당신은 왜 안된다는 건가요?

문: 전 에너지가 부족해요.

M: 에너지가 뭐 어쨌다는 겁니까? 어디로 갔어요? 온갖 모순된 욕망과 추구에 에너지를 흩어 놓았군요? 그러니까 무한한 에너지 공급이 안되지요.

문: 왜 그렇습니까?

M: 당신이 가진 목표들은 스케일이 작고 낮은 것들입니다. 많은 에너지를 요하는 일이 아니지요. 오직 신만이 에너지가 무한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신을 위해서 요구하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처럼 되면 아마 모든 원(願)이 성취될 것입니다. 목표가 높으면 원도 더 커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에너지도 더 많이 가지게 되지요. 모든 이들에게 도움 되는 일을 바라게 되면 전우주가 함께 움직여 줍니다. 그러나 자신의 즐거움을 바라면 어렵게 얻게 됩니다. 요구하기 전에 받을 자격을 갖추는 게 좋을 겁니다.

문: 저는 지금 철학, 사회학, 그리고 교육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가 깨달음을 소망하려면 보다 정신적으로 성숙해져야 하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이 옳은 건지요?

M: 먹고 살려면 조금 특별한 지식이 요구되고, 넓은 지식은 또 마음을 개발해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식을 축적하는 데에 인생을 소비한다면 자신의 주위에 벽을 쌓을 뿐입니다. 마음 너머로 가려면 지식이 풍부한 마음같은 건 필요치 않습니다.

문: 그럼 필요한 건 무엇입니까?

M:마음을 믿지 말고 넘어가야지요.

문: 마음 너머에서는 뭘 발견하는데요?

M: 존재와 앎, 그리고 사랑을 직접 체험하게 됩니다.

문: 어떻게 하면 마음을 넘어갈 수 있습니까?

M: 출발점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들 모두가 같은 목표에 이끌어 줍니다. 모든 행동의 결과를 포기하는 사심(私心) 없는 활동에서 시작할 수 있겠지요. 그 다음에는 생각을 포기하고 모든 욕망을 놓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놓고 포기한다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또 하나의 방식은 자신의 바램이나 생각, 혹은 행위에 상관없이, 언제나 생각과 느낌을 "참나가 있음"에 두고서 마음속의 "참나가 있음"에 확고히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체험이 오더라도 인식되는 것이 모두 일시적인 것이며 오직 "참나가 있음"만이 항상하는 것이라는 느낌 속에 변함없이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겁니다.

문: 저는 저의 인생 모두를 수행들에 바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M: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의무는 다하도록 하세요. 그러나 어떤 일을 하든 감정이 개입되지 않게 하세요. 그러면 모두에게 유익하고 고통도 낳지 않으며 자신을 구속 하지 않을 겁니다.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다방면의 즐거움을 느끼며 살더라도 괜찮지만 내적으로는 자유롭고 조용하게 거울같은 마음을 지니고 살도록 해요. 참마음은 모든 걸 비추면서도 어디에도 영향을 받지는 않는 것입니다.

문: 그런 상태가 실현가능한 것입니까?

M: 그렇지 않다면 내가 왜 말을 하겠어요? 내가 환상을 말하겠어요?

문: 경전을 인용하시는 게 아닌가 해서요.

M: 경전만을 아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진정으로 알려면 자기가 직접 그렇게 되어 봐야 합니다. 난 지금 당신이 말하고 있는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책을 봐서 안 것도, 들어서 안 것도 아닙니다.

문: 저는 지금 한 교수님 밑에서 산스크릿을 배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경전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전 깨달음을 구하고 있고 경전에서 필요한 안내를 받게 되었습니다. 제가 뭘 해야 될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M: 경전을 읽고 있다면 내게 물어볼 필요가 없어요.

문: 경전에는 일반적인 안내는 되어 있지만 사람마다 알맞는 지도가 필요한 게 아닙니까?

M: 당신 자신의 참자아가 궁극의 스승입니다. 외부의 스승은 이정표일 뿐이지요. 함께 목표점까지 걸어갈 사람은 내면의 스승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곧 목표이니까요.

문: 내면의 주인공과는 쉽게 만날 수가 없습니다.

M: 주인공은 우리들의 내면에 함께 있기 때문에 상봉에 심각한 어려움은 있을 수 없어요. 내면을 보게 되면 그를 발견할 수 있어요.

문: 전 내면을 보면 여러 가지 감각, 생각, 느낌, 욕망, 두려움, 기억, 기대 등등을 볼 뿐입니다. 이런 구름 속에 잠겨 있기 때문에 제게는 아무것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M: 그 모든 것을 보면서 그 어느 것도 아닌 것이 바로 내면의 스승입니다. 오직 그만이 존재하고 있고 나머지 모든 것들은 단지 있는 듯 보이는 것 뿐입니다.
내면의 스승이 바로 여러분의 본성이자 희망이며 자유를 보장해 주는 근본입니다. 그를 발견해서 그에게 달라붙어 보십시오. 그러면 구원을 받아 안전해질 겁니다.

문: 전 선생님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내면의 자아를 발견하는 문제에 봉착 하면 그것이 저를 피해가는 것 같습니다.

M: "그것이 나를 피해간다"는 생각은 어디서 납니까?

문: 마음속입니다.

M: 마음을 아는 건 누굽니까?

문: 마음을 지켜보는 자가 마음을 압니다.

M: 누군가가 와서 "내가 네 마음을 지켜보는 사람이다" 그랬다는 겁니까?

문: 물론 아닙니다. 아마 제 마음 속의 또 하나의 생각일 것입니다.

M: 그럼 지켜보는 자는 누구입니까?

문: 바로 저입니다.

M: 그러니까, 여러분이 바로 보는 자이니까 보는 자를 안단 말입니다. 꼭이나 눈앞에 두고 대상으로 볼 필요가 없어요. 여기서 다시, 되어봐야 안다는 것이 확인되지 않나요?

문: 좋습니다. 이제 제가 지켜보는 자라는 걸 알았습니다. 자각 그 자체라 이건데, 하지만 그게 저한테 무슨 이점(利點)이 있습니까?

M: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점(利點)이라니요? 자신이 뭔가를 안다면 그걸로 족하지 않아요?

문: 자신을 안다는 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M: 자신이 무엇을 아닌지를 이해하게 도와주며, 잘못된 생각, 욕망, 행동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지요.

문: 제가 관찰자일 뿐이라면 옳고 그른 것도 상관이 없는 게 아닙니까?

M: 자신을 알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옳은 것이고 그것을 막는 것이 그른 것이며,자신의 참된 자아를 아는 것이 축복이고 그걸 잊는 것이 곧 불행입니다.

문: 관찰자인 의식이 바로 본성입니까?

M: 그건 본성이 마음에 비친 것입니다. 본성은 그 너머에 있는 것입니다. 관찰자라는 것은 그것을 통해 넘어가는 문입니다.

문: 명상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M: 그른 것을 그른 것으로 보는 것이 바로 명상입니다. 그건 언제나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문: 명상은 규칙적으로 하라고 들었습니다만,

M: 참된 것과 그른 것을 분별하고 틀린 것을 포기하는 날마다의 주의깊은 연습이 바로 명상입니다. 많은 종류의 명상으로 출발하지만 결국은 하나로 귀착되지요.

문: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 어느 것인지를 좀 가르쳐 주십시오.

M: 짧고 긴 길은 없어요. 하지만 보다 더 진지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정성이 덜하지요. 나 자신의 경우를 말해보면 난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나의 스승을 신뢰했어요. 스승께서 하는 말씀 그대로 행했거든요. 그분께서 "내가 있음"에 집중하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렇게 했어요. 또 내가 모든 감각과 상상 너머에 있다고 말씀하셔서 믿었어요. 그분께 나의 마음과 영혼을 모두 바치고 내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하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의 모든 시간과 나의 모든 안식을 바쳤어요. 믿음과 진지한 실행의 결과 난 3년 안에 깨달을 수 있었지요. 여러분도 여러분한테 맞는 길을 골라서 정성을 기울이세요. 정성에 따라 진척의 속도가 정해질 겁니다.

문: 제게 주실 힌트는 없습니까?

M: "내가 있다"는 자각 속에 확실하게 자신을 세워두십시오. 이것이 시작이며 동시에 모든 노력의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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