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앰 댓'... 이 책은 1993년에 출판되었습니다. 출판되자마자 책을 사러 정신세계사에 갔었는데 책을 집는 순간 몸에 진동이 왔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마흔살 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5년 전 경부터 지금까지 대략 네번정도? 올리는 것 같습니다. 제가 올리는 글은 허철씨 번역본입니다.
올릴 때마다 모두 올린 적은 없고, 상권을 올리는 중에 모든 글을 삭제하곤 했습니다. 아마도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번이 다섯번째 올리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각각 올릴 때마다 조회 수가 줄어들고 사람들의 관심이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명상"에 대한 부풀었던 거품이 꺼지는 현상으로 봅니다. 물론 사회에는 여전히 "명상"에 대한 관심이 많지만 그 명상들은 진리로 가기 위한 명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명상'으로 보입니다.
하긴 누군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 '아이 앰 댓'에 깊은 관심을 갖고 이해하기 위해서 읽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당신은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오래지 않아서 모든 고통이 끝나는 지점에 도달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20. 초월자..."아이 앰 댓" 상권
문: 선생님께서는 진리는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라는 것은 사람의 속성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라는 것은 하나의 사람으로서 우주를 그의 몸으로 삼는 것입니까?
M: 말은 어떻게 하더라도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한 것입니다. 말이란 건 어차피 마음 너머에 이르지 못하니까요.
문: 저는 그냥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인간(person)과 자아(self) 그리고 초월자(supreme)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자아 속의 순수한 자각의 빛인 "내가 있음"으로 마음을 비추고 있고 생명으로서는 육체를 활력있게 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이 말로서는 선명하게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제 안에서 자아로부터 인간을, 초월자로부터 자아를 구분하고자 하면 혼란스러워 집니다.
M: 사람이라는 건 주체가 아닙니다. 우리가 사람을 보는 것이지, 당신 자신이 사람인 것은 아니지요. 당신은 언제나 주어진 시공에 하나의 관찰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순수한 자각으로 나타나는 초월자일 뿐입니다.
문: 제 자신을 보면 육신을 사용하기 위해 서로 싸우고 있는 여러 사람을 느낍니다.
M: 그것들이 바로 마음의 여러가지 경향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문: 그들 사이의 평화를 이룰 수가 있습니까?
M: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그들은 원래 아주 모순적이라구요. 그들을 볼 때에는 그냥 있는 그대로 보세요. 그들은 여러가지 생각들과 느낌들로 된 습관, 기억과 충동의 덩어리일 뿐입니다.
문: 하지만 그들 모두가 "내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M: 그건 자신을 그것들과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신 앞에 나타나는 것은 무엇이든 자기 자신일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자신의 여러 "인간들(persons)"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또 그들의 요구로부터 해방되지요. "내가 있다"는 느낌이 당신 자신의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는 그것과 분리될 수 없지만 다른 뭔가에 자신을 떼어줄 수는 있어요. "나는 젊다. 나는 부자다."등등으로, 하지만 그러한 자기동일시들도 모두 명백히 거짓이고 속박의 원인입니다.
문: 이제 저 자신이 사람이 아니고 사람 속에 비추어졌을 때에 존재감을 주는 뭔가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러면 초월자라는 건 무엇입니까? 어떤 식으로 저는 제가 초월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M: 의식의 원천이 의식 내부의 대상이 될 수가 없어요. 원천을 안다고 하는 건 곧 바로 원천이 된다는 거지요.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순수하고 고요한 주시자라는 사실과 두려움없는 자각이 여러분의 존재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 여러분은 이미 바로 그 존재인 것입니다. 그것은 근원이므로 소진될 수 없는 가능성인 셈이지요.
문: 여러 개의 근원이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에 하나의 근원이 있는 것입니까?
M: 그것은 당신이 그걸 어떻게 보느냐에 달렸어요.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지요. 세상의 사물들은 많지만 그것들을 보는 눈은 하나입니다. 위에 있는 것은 아래 쪽에 있는 것들에게는 하나로 보이지만 높은 곳에 있는 사람에게는 낮은 것들이 많아 보이지요.
문: 여러 형태와 이름들 모두가 하나의 같은 신의 형태와 이름인가요?
M: 그것 역시 여러분이 어떻게 보느냐에 달렸어요. 언어적 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상대적일 뿐입니다. 절대적인 것들은 실제로 체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토론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문: 절대적인 것의 체험은 어떻게 합니까?
M: 그것은 인식되어 기억 속에 저장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 속에, 느낌 속에 있다고나 할까요? 그것은 "무엇"과 관련이 있다기 보다는 "어떻게"와 더 많은 관계가 있지요. 그것은 질(質)적인 문제로서 가치 속에 있다고 해야 하겠지요. 모든 것의 원천으로서, 모든 것 속에 있는 것입니다.
문: 그것이 원천이라면 왜, 그리고 어떻게 지신을 드러냅니까?
M: 그것은 의식을 낳고 나머지 모든 것은 의식 속에 있어요.
문: 그러면 의식의 중심들은 왜 그렇게 많습니까?
M: 객관적 우주는 끊임없는 운동 속에서 무수한 형태들을 만들고 없애고 하는 것이며, 하나의 형태에 생명이 불어넣어질 때마다 자각이 물질 속에 반영됨으로써 의식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문: 초월자는 어떻게 영향을 받습니까?
M: 무엇이 거기에 영향을 줄 수 있겠습니까? 원래 원천은 강물의 흐름과는 무관하고, 귀금속은 세공한 물건의 형태와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빛이 영상 위의 그림에 영향을 받나요? 초월자는 모든 것을 가능케할 뿐입니다. 그것이 모두입니다.
문: 그러면 어떤 일은 발생하고 어떤 일은 발생하지 않는 것은 왜입니까?
M: 내가 말하는 건 의식 속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의식 속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지요. 만약 당신이 여러 개의 원인을 원하면 당신의 세계 속에서는 가질 수 있어요. 또 어떤 사람은 하나의 원인, 즉 하나님의 의지로 만족할 수도 있을 겁니다. 모든 것의 근본의 원인은 "내가 있다"입니다.
문: 자아(Vyakta)와 초월자 사이를 결합시키는 것은 무엇입니까?
M: 세계는 자아의 관점에서 보면 알려진 것이고 초월자의 관점에서 보면 미지의 것입니다. 미지의 것이 알려진 것을 낳지만 미지의 것은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남지요. 그리고 알려진 것도 무한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것은 무한한 것들의 무한성입니다. 마치 빛줄기가 먼지가루와 닿지 않으면 보이지 않듯이, 초월자도 모든 것을 알려지게 하지만 그 자체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남습니다.
문: 그 말씀대로라면 알려지지 않은 그것은 접근불가능한 것입니까?
M: 아니, 그렇지 않지요. 초월자는 가장 이르기가 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당신 자신의 존재이니까요. 오직 초월자만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생각과 욕망을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문: 그러면 제가 아무것도 바라지를 않는다면, 그러니까 초월자 자체도 바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M: 그리되면 죽은 거나 다름없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 자신이 초월자이든가요.
문: 세상은 욕망으로 가득합니다. 모든 사람은 뭔가를 욕구하고 있습니다. 욕구하는 그 자는 개아(person)입니까? 자아(self)입니까?
M: 자아이지요. 모든 욕망은 신성하든 아니든 자아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가 "내가 있음"의 감각에 달린 것이지요.
문: 신성한 욕망들이 자아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은 이해하겠습니다. 사치타난다(Satchitananda)에서 축복(ananda)의 표현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성하지 않은 욕망들은 왜 자아에서 나옵니까?
M: 모든 욕망은 행복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을 지향하는 형태와 성질은 심성구조에 달린 것입니다. 수동성(inertia)이 우월한 곳에서는 뒤틀린 욕망이, 에너지가 넘치는 곳에서는 열정이, 그리고 순수성이 강한 곳에서는 호의와 동정이 일어납니다. 자신이 행복해지려기보다는 행복을 만들어 내려는 충동이지요. 그러나 초월자는 그 모든 것을 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초월자의 무한한 침투성 때문에 설득력있는 욕망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문: 설득력 있는 욕망은 어떤 것입니까?
M: 행위 주체나 대상을 파괴하는 욕망, 그리고 만족을 낳지 않는 욕망들은 모순된 것이라 이루어지지를 않아요. 오직 사랑과 호의 그리고 동정심에 의해 유발된 욕망들이 행위자와 대상 모두에게 득이 되므로 이루어집니다.
문: 모든 욕망들은 성스럽고 말고를 떠나 모두 고통스럽습니다.
M: 욕망도 모두 같지 않고 고통도 모두 달라요. 열정은 고통스런 것이지만 동정은 아니지요. 자비에서 생긴 욕망은 온 우주가 이루어내려고 애쓰는 겁니다.
문: 초월자는 자기 자신을 압니까? "나"라는 것이 없는 존재는 의식이 있나요?
M: 모든 것의 근원은 모든 것을 지니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이미 씨앗의 형태로 거기에 있어요. 하나의 씨가 무수한 씨앗들의 경험의 끝이어서 무수한 숲들의 경험과 미래를 담고 있듯이, 미지의 그것도 과거에 있었던 그리고 있을 수 있었던 것들과 앞으로 있을 것 그리고 있을수 있는 것 모두를 담고 있어요. 생성(becoming)의 모든 장이 개방되어 있고 접근가능한 것이며 과거와 미래는 영원한 현재 속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지요.
문: 선생님은 지금 미지의 초월상태에 속해 사십니까?
M: 그럼 어디 살겠나요?
문: 어떻게 해서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죠?
M: 어떠한 욕망도 내 마음 속에서 솟지 않으니까요.
문: 그러시면 의식이 없으신가요?
M: 그럴리가 있나요. 난 완전히 의식뿐이지요. 그러나 욕망이나 공포가 내 마음에 없으니 완전한 고요만이 있지요.
문: 그 고요함을 아는 것은 누구입니까?
M: 고요함 그 자체가 알지요. 열정과 욕망이 가라앉았을 때의 고요한 마음의 고요함이지요.
문: 혹시 선생님도 때때로 욕망을 느끼시는지요?
M: 욕망이라는 것은 마음 속의 물결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파도를 아는 것은 그것을 볼 때이지요. 하나의 욕망은 많은 사물들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난 그 욕망을 충족시킬 마음이 솟지를 않기 때문에 욕망에 기초한 행동이 나오질 않아요.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것은 그 욕망을 충족시킬 충동이 없는 것입니다.
문: 도대체 욕망이라는 건 왜 솟는 것입니까?
M: 그건 여러분 자신이 태어나서 살고 있다 하고, 또 만약 몸을 잘 돌보지 않으면 죽으리라는 망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지닌 채 존재하려는 욕망이 모든 말썽거리의 근본원인이지요.
문: 하지만 많은 영혼들이 몸을 빌어 태어납니다. 그것이 꼭 판단착오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뭔가 틀림없이 목적이 있을텐데, 그게 뭘까요?
M: 자신을 알기 위해 자아는 비자아와 만나야만 합니다. 욕망이 체험을 유도하지요. 체험은 분별과 집착을 버림, 자기발견, 나아가서 해탈을 낳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해탈이라는 건 뭔가 자신이 생사를 넘어서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리고 죽을 운명의 피조물이라는 착각에 빠져서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번민을 낳고 있으며 그런 악몽에서 깨어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탐구하는 것이 잠에서 깨게 해줍니다. 가만히 앉아서 고통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왜냐하면 그리되면 마음이 조화와 평화를 이루게 되니까요.
문: 궁극적으로 체험하는 것은 자아입니까, 아니면 미지의 그것입니까?
M: 물론 자아이지요.
문: 그러면 미지의 초월자의 개념을 끌어들이는 까닭은 뭔가요?
M: 자아를 설명하기 위해서이지요.
문: 자아 너머에 뭔가가 있는 것입니까?
M: 자아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모든 것이 하나이고 모든 것이 "내가 있음"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깨어있거나 꿈을 꿀 때에는 그것이 개인(the per--son)이고, 깊은 잠 속과 우주의식 상태(turiya)속에서는 자아이지요. 우주의식의 깨어있는 상태 너머에, 저 위대한 초월자의 고요한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하나이고, 외견상으로는 관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뭘 모르다보니까 보는 사람이 보이는 대상이 되지만 지혜를 얻고 나면 보는 사람은 보는 행위 (seeing)가 됩니다. 그러면 초월자에 관심을 쏟지 않으며 아는 자를 알게 되어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