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잘 살펴보는 일이 초연함을 낳는다....아이 앰 댓 상권
M: 자넨 소나기 때문에 흠뻑 젖었군. 나의 세계는 날씨가 항상 좋아. 밤낮이 없고 추위 더위도 없으며 조심 걱정 후회도 없어. 내 마음은 생각에 끄달리지 않아. 왜냐하면 욕망자체가 없으니 말이야.
문: 그럼 세계가 둘인 것입니까?
M: 자네들의 세계는 덧없고 무상한 것이지만, 나의 세계는 완벽하고 변화가 없어. 자네들이 자신의 세계에 관해 좋은 것을 이야기하면 난 아마 잘 듣고 있을 거야. 때로는 흥미롭게 듣기도 하겠지. 하지만 난 그 세계는 한 순간도 존재하지 않으며 자네들이 꿈을 꾸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거야.
문: 선생님의 세계와 저희의 세계를 다르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M: 나의 세계는 형용할 표현이 없어. 그에 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지. 나 자신이 바로 나의 세계요, 나의 세계가 바로 나 자신이야. 그것은 완전한 것이야. 모든 인상이 지워지고 모든 경험이 거부되지. 난 아무것도 필요가 없어. 심지어는 나 자신도 필요하지 않아. 왜냐하면 나 자신을 상실할 수가 없기 때문이야.
문: 하나님도 필요 없으신가요?
M: 그런 생각이나 명칭들은 자네들 세계에나 있는 거야. 나의 세계에는 그런게 없고 단일하고 매우 단순해.
문: 그러면 거기서는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는 건가요?
M: 자네들의 세게에서 생기는 일은 오직 거기에서만 타당성이 있고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야. 나의 세계에서는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아.
문: 선생님께서 자신의 세계를 체험한다는 사실 자체가 모든 경험에는 이원성(경험자와 경험)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되지 않습니까?
M: 말로는 그렇지. 그러나 자네들 말은 나의 세계를 터치할 수가 없어. 나의 세계는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세계야. 자네의 세계 속에서는 말로 안 되면 없다는 식이 되지. 하지만 나의 세계 속에서는 말과 말의 내용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해. 자네들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머물러 있지 않지만, 나의 세계 속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를 않아. 나의 세계는 참된 것이나 자네들의 세계는 꿈으로 된 것이야.
문: 하지만 지금 대화가 이뤄지고 있지 않습니까?
M: 말이란 건 자네들의 세계 속에 있는 거라니까. 나의 세계 속에는 영원한 침묵만이 있을 뿐이야. 나의 침묵이 노래를 하고 나의 비어있음이 가득하니 난 아무것도 부족한 게 없어. 자네가 직접 여기에 이르지 않으면 나의 세계를 알 수가 없어.
문: 마치 선생님 한 분만이 그 세계 속에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M: 혼자다 아니다 하는 말을 할 수가 있나? 말이 적용이 안되는데? 물론 내가 모든 것이니까 나만 있을 수밖에 없지.
문: 언제 한 번 우리들의 세계로 오실 건가요?
M: 오고 간다는 게 뭐야? 그것도 역시 말이지. 나는 그냥 존재하는 거야(I am).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겠어?
문: 선생님의 세계가 제게 무슨 소용이 됩니까?
M: 자신의 세계를 좀 더 면밀히 검토해 봐. 철저히 자신의 세계를 검토하다 보면 어느날 갑자기 자신이 나의 세계 속에 있다는 걸 깨닫게 될거야.
문: 그럼으로써 얻어지는 건 뭔가요?
M: 얻는 건 없어. 단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던 것을 버리게 되고 한시도 잃어버린 일이 없던 것, 즉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게 되지.
문: 선생님의 세계의 통치자는 누구입니까?
M: 통치같은 건 하는 사람도 없고 받는 사람도 없다니까. 도무지 이원적인 구조라곤 전혀 없어. 자넨 지금 자신의 생각을 투사하고 있을 뿐이야. 여기서는 자네가 읽은 경전이나 신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문: 그렇지만 선생님도 여전히 이름과 형태를 지니고 계시고 의식하며 활동을 보여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M: 바로 그게 자네들 세계 속에서 그래 보이는 거야. 나의 세계 속에서 난 그냥 존재 할 뿐이야. 다른 건 전혀 없어. 보통 사람들은 뭘 가졌다는 양과 질의 개념들을 갖지만 난 완전히 개념과는 거리가 멀어.
문: 저의 세계 속에는 마음의 동요라든가 고민 혹은 좌절감 같은 것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먹고 살기 위해 고생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선생님은 일종의 보이지 않는 수입에 의존해서 사는 것 같습니다.
M: 마음대로 해봐. 나의 세계를 향해서 너의 세계를 떠나는 데에 말릴 사람은 없으니까.
문: 어떻게 하면 그런 이전이 가능합니까?
M: 자신의 세계를 상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봐. 잘 분별을 하면 초연함을 얻을 수 있어. 초연함, 그러니까 집착을 벗게 되면 바른 행동이 나오고, 바른 행동이 자신의 본성에 이르는 내부의 다리를 놓아주는 거야. 행동이야말로 진지함의 증거야. 자네가 듣는 말을 부지런히, 그리고 충실히 행하면 모든 장애가 해소되게 되어 있어.
문: 선생님은 지금 행복하신가요?
M: 자네 세계 속에서라면 아마 가장 비참하다고 해야 할 거야. 일어나야 되고, 먹고, 말하고, 또 자고, 이 무슨 짓인가!
문: 그러면 아예 살고 싶지도 않으신가요?
M: 살고 죽고 하는 건 참으로 무의미한 말들이야. 자네들이 나를 산 사람으로 볼 적엔 난 죽었고, 죽었다고 생각할 땐 난 산거야. 그러니까 사람들이란 게 얼마나 뒤죽박죽이야?
문: 그러면 참으로 무관심하시겠군요. 우리들의 이 모든 고통이 선생님께는 아무런 일도 아닐 것 아닙니까?
M: 그래도 그런 여러가지 문제를 잘 알고 있어.
문: 그러시면 그 일들에 대해 어떤 일을 하십니까?
M: 내가 해야할 필요가 있는 일은 없지. 그것들은 그냥 왔다가 가는 거니까.
문: 선생님께서 거기에 관심을 주는 바로 그 행동에 의해 가버리는 겁니까?
M: 그렇지. 소위 문제라는 건 육체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감정의 문제, 정신의 문제 등등 여럿일 수도 있는데, 그런 건 언제나 개인적인 것이야. 대규모의 불행이라는 건 무수한 개인들의 운명의 합계이고 해결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지. 하지만 죽음은 재난이 아니야. 그렇지 않아?
문: 살해당할 때에도 그렇습니까?
M: 죽인 사람이 문제지.
문: 그렇지만 여전히 두 개의 세계가, 그러니까 저의 세계와 선생님의 세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M: 나의 세계는 참으로 존재하고 자네의 세계는 마음의 세계야.
문: 예를 들어서 한 번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여기 지금 바위가 하나 있는데 바위 속에 구멍이 하나 있습니다. 그 속에 개구리가 한 마리 있는데 그 개구리는 평생을 완전한 축복 속에서 한눈 팔 일도 없이 혼란 없이 보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위 바깥의 세계는 계속 흘러갑니다. 바위 속의 개구리가 바깥세계에 대한 말을 듣는다면 "그런 건 없어. 나의 세계는 평화와 축복으로 가득해. 너의 세계는 말장난일 뿐이야." 이렇게 말할 겁니다. 지금 선생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저희의 세계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씀해 버리면 대화의 토대가 없어져 버립니다. 가령, 또 하나 예를 들어서 제가 의사한테 가서 복통을 호소하는데 의사가 검사를 해보고는 "괜찮아요"라고 말하는데 "아뇨, 정말 아픕니다. "라고 제가 말한단 말이죠. 그런데 이 의사가 "그건 정신적인 문제겠죠."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면 제가 "그건 저한텐 도움이 안됩니다. 선생님은 의사시니까 저의 통증을 없애주십시오. 이걸 못 고쳐주시면 의사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M: 그렇겠지.
문: 선생님은 철로를 건설해 놓지만 다리가 없어서 열차가 가지를 못 합니다. 다리를 놓아주세요.
M: 다리가 필요치 않아.
문: 틀림없이 선생님의 세계와 제 세계 사이에 연결점이 있지 않겠습니까?
M: 참세계와 상상의 세계 사이에 연결점은 필요치 않아. 그런게 있을 수가 없거든.
문: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M: 자네들 세계를 잘 살펴봐. 자신의 마음을 거기에 잘 쏟아보라구. 그래서 그 세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에 대한 모든 생각을 낱낱이 검토해 보는 거야. 그걸로 충분하지.
문: 세계는 조사해 보기에는 너무 큽니다. 제가 아는 거라곤 제가 있고, 세계가 있고, 세계가 저를 어렵게 하고, 제가 세계를 어렵게 하고 있다는 사실밖에 없어요.
M: 내 체험으로는 모든 것이 축복이야. 그러나 축복에 대한 욕망은 고통을 낳지. 그래서 축복은 고통의 씨가 되고 마는 거야. 고통의 전 영역은 욕망에서 생겨난 거야. 즐거움을 바라는 욕망을 버리면 고통이 뭔지도 모르게 돼.
문: 왜 즐거움이 고통의 씨가 될 수밖에 없습니까?
M: 기쁨을 위하여 많은 죄를 짓거든. 그리고 그 죄악의 열매가 고통과 죽음이야.
문: 선생님은 세계가 저희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저 말썽의 씨가 될 뿐이라는 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제 느낌으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바보일리가 없단 말입니다. 세계가 제게는 잠재적인 것을 실제의 것으로, 물질을 생명으로, 무의식을 완전한 자각으로 이끄는 대단한 시도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궁극적인 것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반대되는 것들을 체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원을 하나 지으려면 돌과 회반죽, 나무와 쇠와 유리 그리고 타일 등이 필요하듯이, 사람을 하나의 신인(神人)으로 삶과 죽음에 통달한 이로 만들려면 모든 경험이라는 재료가 필요합니다. 여인이 시장에 가서 온갖 종류의 물품을 사가지고 와서 요리를 하여 식구들을 먹이듯이 우리는 삶의 불 속에서 우리들을 잘 구워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M: 글쎄. 그렇게 생각하면 거기에 따라 움직여 봐. 모든 수단을 써서 자네의 하나님을 공양해보는 거지.
문: 아이가 학교에 가서 배우는 여러 가지가 나중에는 아무 쓸모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배우는 사이에 그 아이가 성장을 합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여러 가지 체험을 거치면서, 그런 걸 모두 잊어버립니다만, 그 사이에 우리는 계속 성장을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사실 깨달은 사람이란 진리에 대한 천재성을 지닌 사람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저의 세계가 우연일 수가 없다고 저는 봅니다. 틀림없이 거기에는 의미가 있고 그 뒤에 숨은 계획이 있을 겁니다. 저의 하나님은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M: 세계가 허위라면 그 계획과 세계의 창조주 역시 허위일 뿐이야.
문: 선생님은 다시 세계를 부정하시는데요. 그러면 우리들 사이의 연결점이 없습니까?
M: 연결점 같은 게 필요하질 않아. 자넨 지금 자신이 태어났다고 믿고 있는데 그게 바로 자네의 착각이지. 자넨 태어난 일도 없고 죽을 일도 없어. 그런데도 자넨 자신이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다고 믿고 어느 육체가 자기 것이라고 믿고 있는 거야.
문: 세계는 존재하고, 저도 있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M: 자신을 돌아보기 전에 왜 세계를 염려하나? 자넨 지금 세계를 구하려는 모양인데 자신을 구원하기 전에 세계를 구원할 수 있을까? 그러고 또 구원을 받는다는 게 무슨 뜻이야 ? 무엇으로부터 구원 받는다는 건가? 환상으로부터 구원받는 거야. 진정한 구원이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거야. 난 정말로 나 자신을 어느 육신이나 어느 물건과 연관시켜 볼 수가 없어. 심지어는 자아라는 것도 그래. 나는 그냥 영원히 정의되지 않은 채 머무르는 거야. 난 내부에 있으며 초월해 있어. 친근하다고도 도달할 수 없다고도 할 수 있지.
문: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셨죠?
M: 나의 스승을 믿었지. 그분이 "오직 너만이 존재 한다"고 말씀하셔서 난 그렇게 믿었어. 무슨 말인가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결국 그 말이 절대로 옳다는 걸 깨달았지.
문: 반복에 의해 설득 당하신 게 아닙니까?
M: 스스로 깨우친 거야. 난 내가 절대의 의식과 행복이라는 것을 깨닫고 내가 육신과 육신의 세계에 사치다난다(satchidananda, 절대적 존재와 의식 및 축복)를 빚지고 있다는 건 오해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어.
문: 선생님은 많이 배운 분은 아닌 줄로 알고 있습니다. 책을 많이 읽지도 않으셨기 때문에 읽고 들으신 것이 아마 모순을 일으키지 않을 겁니다. 저는 교육을 꽤나 잘 받았고 책을 많이 봤고, 또 그러다 보니 여러 책과 선생들이 모순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저는 읽거나 듣는 모든 것을 의심의 상태 속에서 받아들입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지."라는 게 저의 최초의 반응입니다. 그리고 저의 마음은 무엇이 참이고 아닌지를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저는 의심으로 붕 떠 있게 됩니다. 요가에서는 의심하는 마음이 몹시 불리한 것으로 들었습니다.
M: 그 말을 들으니 반갑군. 그러나 나의 스승도 의심하라고 가르치셨어. 모든 것을 완전히 의심하라고. 이렇게 말씀하셨지. "너 자신만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라"고, 욕망 때문에 고통과 기쁨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만들어 놓은 거야.
문: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까?
M: 딴 도리가 있겠어? 그 본성상 기쁨이라는 것은 제한되어 있고 일시적일 수밖에 없어. 고통에서 욕망이 생겨난 거야. 그리고 고통 속에서 욕망은 충족을 구하고 좌절과 절망의 고통 속에서 끝나지. 고통은 기쁨의 배경이고 모든 기쁨의 추구는 고통 속에서 태어나고 고통 속에서 끝나는 것이지.
문: 그 말씀들 모두가 잘 이해됩니다. 그렇지만 육체적 정신적 어려움이 생기면 제 마음은 빛을 잃고 간절히 위안을 구합니다.
M: 그게 뭐 문젠가? 빛이 바래고 불안해지는 건 자네 자신이 아니고 자네의 마음이야. 보라고, 이 방안에서 온갖 일들이 발생하고 있어. 내가 그렇게 되라고 시킨게 아니고 그 일들은 그냥 그렇게 발생하는 거야. 자네 자신의 경우도 마찬가지야. 운명의 실타래는 그냥 풀려가면서 불가피한 것들을 현실화시키게 되어 있어. 그런 사건들은 진행 방향을 변경시킬 수 없어. 그러나 자신의 태도를 바꿀 수는 있는 거야. 그리고 정말 중요한 건 오히려 태도 쪽이야. 세상은 어차피 욕망과 공포로 만들어진 거라구.
그 속에서 평화를 발견할 순 없지. 평화를 얻으려면 세계를 넘어서야 해. 세계의 근본원인은 자기 애착이야. 그 때문에 우리는 즐거움을 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거라구. 자기 애착을 참자아에 대한 사랑으로 바꿔봐. 그러면 전체 구도 자체가 바뀌지. 창조주인 브라마는 모든 욕망의 전체를 합친 것이고, 세계는 그 욕망들을 충족시켜주는 도구야. 여러 영혼들이 자기들의 욕망대로 즐거움을 취하고는 눈물로 그 대가를 치르지. 시간이 모든 걸 판단해 주잖아. 모든 건 균형을 이루게 되어 있어.
문: 초월자가 되려면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다움이야말로 무수한 체험의 열매가 아닙니까? 욕망은 체험을 낳으니까 때와 수준에 따라서는 욕망이 정당하지 않겠어요?
M: 어떻게 보면 이 모든 것이 옳아. 그러나 자네 자신이 충분히 쌓아 놨기 때문에 집을 짓지 않으면 안될 때가 와. 그리되면 고르고 버리는 것이 불가피하지. 모든 것이 하나하나 검토되어서 불필요한 건 냉정하게 버려지지. 날 믿어봐. 진실에 있어서 지나친 파괴라는 말은 성립하지도 않고 가치 있는 것도 없어. 진정으로 냉정하져 보라구. 그러면 알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