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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하고 깨달은 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아이 앰 댓 상권

작성자이니그마|작성시간26.06.13|조회수30 목록 댓글 0

질문자는 끝 없이 자신을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개체라는 입장, 관점에서 질문합니다. 그리고 마하라지는 모든 질문에 대하여 끊임 없이 "당신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개체가 아니고, 몸과 마음을 가능케하는 의식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깨닫지 못한 이와 깨달은 이의 대화는 모두 이 이야기입니다. 그내용이 뭐든 말입니다.

그리고 수행자가 자신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가능케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받아들이는 순간, 인간으로써 해야만 하는 모든 숙제는 끝이 나고, 할 일이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이 몸뚱이를 먹여 살리는 것이고, 본질적으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마음을 영속케하는 것이니까요. 

이후에는 모든 일들이 자동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바라볼 뿐입니다. 단지 "봄"이 되어서 말입니다.

24.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하고 깨달은 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아이 앰 댓 상권

문: 몇몇 성자들께서는 세계가 우연한 사건인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유희도 아니며, 전 우주를 일깨우고 의식을 개발하려는 거대한 계획의 결과요, 그 표현이라고 주장하십니다. 무생물로부터 생명에 이르기까지, 무의식으로부터 의식에까지, 이 우둔함으로부터 밝은 지성으로, 이해부족으로부터 밝은 통찰로 --바로 이것이 세계가 끊임없이 그리고 냉정하게 움직이는 방향입니다. 물론 휴식과 외형적인 어둠의 순간들이 있으며, 그 때에는 우주가 마치 잠을 자는 듯 하지만 그 휴식은 끝나게 되어 있고 의식의 작업은 재개됩니다. 

우리들의 관점에서 볼 때에 우주는 눈물의 계곡이고 벗어나고픈 곳입니다. 가능하면 빨리, 그리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말이죠. 깨달은 분들에게는 세계가 살기 좋고 세계가 좋은 목적에 봉사해 준다고 합니다. 이들은 세계가 하나의 정신적 구조물이며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하나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런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며 그 구조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아주 바람직한 목적에 봉사를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지라고 부르는 것은 장난기 어린 신의 변덕스런 채찍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 그리고 힘을 키우기 위한 또 생명과 의식의 무한한 잠재력을 현실화하기 위한 절대적 필요의 표현입니다. 정원사가 작은 씨앗을 화창하게 열매 맺도록 키워내 듯이 하나님도 그의 정원 안에서 사람들을 초인으로 키웁니다. 하나님 자신과 함께 알고 사랑하고 일하는 존재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휴식을 취하실 때에, 성장이 끝나지 않은 사람들은 한동안 무의식으로 되고, 완성되어서 의식의 모든 형식들과 내용들을 넘어선 사람들은 우주적 침묵을 아는 상태로 머무릅니다. 

그러다가 새로운 우주가 나타날 때가 되면 잠자던 사람들은 깨어나서 그들의 일을 시작합니다. 보다 더 진보한 사람들은 먼저 일어나서 덜 진보한 사람들을 위해 토대를 마련합니다. 그러면 진보에서 뒤쳐진 사람들은 자신의 성자에 알맞은 형식과 패턴을 발견하게 되지요.

제가 드리는 말씀의 요점은 이겁니다. 선생님의 가르침과 이 내용에는 차이가 있는데 선생님은 세계가 전혀 좋은 것이 아니며 따라서 기피되어야 할 것으로 보십니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은 세상을 싫어하는 것은 과도적인 상태로서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는 일시적이어서 조만간 편안한 사랑으로 대체되어, 곧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꾸준한 의지를 지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M: 선생이 하는 말은 밖으로의 길에는 전적으로 맞지만 근본으로 돌아가는 길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무(無)로 돌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는 나의 입장을 무(paramakash)에서 취하고 있어요. 여기에는 말과 생각이 얼씬거리지 못합니다. 마음에게는 이것이 완전한 어둠과 침묵이지요. 여기서 의식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세계를 투사하고 있는 기억과 상상으로 이루어진 마음을 일깨웁니다. 

일단 세계가 나타나면 선생의 말이 옳을 수가 있어요. 목적을 상상하고 그것을 성취하려고 하며, 수단과 길을 찾고 비전을 보여주며 힘과 용기를 북돋우는 것이 바로 마음의 본성이지요. 그런 여러 가지 성질들은 바로 신적인 속성들이기 때문에 난 그것을 부정하지 않아요. 그러나 나의 입처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곳에 있고, 거기엔 사물과 사물들을 만든 마음도 없어요. 바로 거기가 내 집인 셈이오.

무슨 일이 생겨도 나하고 관계가 없어요. 사물들이 다른 사물들에게 작용하고 있을 뿐이에요. 기억과 기대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난 언제나 참신하고 순수하고 진심이라 이거에요. 마음이라는 건 대단한 일꾼입니다. 마음은 휴식이 필요해요. 그러나 난 아무것도 필요한 게 없기 때문에 두려운 게 없어요. 뭘 두려워 하겠어요? 분리라는 건 없어요. 우리들은 분리된 자아들이 아니에요. 오직 하나의 본래적 자아, 궁극적 진리가 있을 뿐이고 그 속에서는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이 바로 하나예요.

문: 저는 오직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M: 못 돕는다는 게 아닙니다. 선생은 지금 도움이 뭔지, 무슨 도움이 필요한지를 스스로 정해놓고,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 사이의 갈등에 빠진 겁니다. 필요와 능력의 갈등이지요.

문: 그러면 저희는 왜 이렇게 됩니까?

M: 마음이 하나의 틀을 그려내면 사람들은 그 틀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됩니다. 마음으로 하여금 하나의 세계를 만들게 하는 것은 욕망이 그 자신을 성취하려는 본성이에요. 아주 작은 욕망 하나도 긴 세월의 행동을 낳을 수 있는 법인데, 욕망이 강하면 그게 오죽 하겠소? 욕망은 하나의 우주를 낳을 수도 있고, 그 힘은 상상하기 어려워요. 작은 성냥 하나가 큰 산불을 일으킬 수 있듯이 하나의 욕망이 눈에 보이는 수많은 일들을 일으킬 수 있어요. 

창조의 목적 자체가 바로 욕망의 성취입니다. 욕망은 고귀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공간은 중립적인 거예요. 물론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채울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욕망을 선택할지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해요. 그리고 도와주려는 사람들에 관해서는 그들 각자가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한 자기들대로의 세계 속에 있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욕망을 통하지 않고는 그들을 도울 길이 없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그들이 바른 욕망을 지녀서 그 욕망을 넘어서고 욕망의 세계 즉 고통과 기쁨의 마당을 만들려는 충동으로부터 해방되게 가르치는 길밖에 없어요.

문: 쇼가 끝나고 사람은 죽고 우주가 끝나는 날이 오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M: 잠자는 사람이 모든 걸 잊어 버렸다가 다음 날 일어나듯이 또 달리 표현하면 죽고 나서 새 삶을 살게 되듯이 욕망과 두려움의 세계들은 해체되고 사라져요. 그러나 우주적인 관조자, 즉 궁극의 자아는 결코 잠을 자는 일도 죽는 일도 없어요. 이 위대한 심장은 영원히 박동을 하고 한 번 박동이 있을 때마다 하나의 새 우주가 탄생하게 되지요.

문: 그럼 그 궁극의 자아에도 의식이 있습니까?

M: 그는 마음이 꾸며대는 모든 것의 너머에 있어요. 존재(being)와 비존재(non being)를 넘어 있어요. 예스인가 하면 노우인데 모든 일에 대해 그래요. 내면에 있으면서 모든 것을 초월하며 창조와 파괴를 동시에 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실제적인 것이오.

문: 하나님과 성인들은 둘입니까 하나입니까?

M: 하나예요.

문: 그래도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M: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하시고 깨달은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아요. 물론 하나님 자신이 "내가 모든 일을 하고 있다."라고 하진 않아요. 그에게는 모든 일들이 그저 저절로 발생할 뿐이지요. 그리고 깨달은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하나님에 의해 행해지는 일일 뿐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자연 간의 차이를 모릅니다. 하나님과 깨달은 사람은 둘 다 자신들이 움직일 수 있는 것들의 부동의 쎈터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덧없는 것들을 지켜보는 영원한 관찰자이지요. 중앙은 비어있는 점이고 관찰자는 순수한 자각의 한 점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무(無)임을 알고, 그렇기 때문에 무(無)가 그들에게 간섭 되지 않는 것이지요.

문: 그런 것들이 선생님 자신의 개인적 체험 속에서는 어떻게 보이고 느껴지십니까?

M: 난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곧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나이고 또 나의 것이지요. 내가 그저 움직이려는 생각을 하기만 해도 몸이 움직이듯이 내가 여러 일들을 생각하면 그 일들이 발생을 하는 것입니다. 잘 알아둬요. 난 아무일도 하지 않아요. 나는 그저 일들이 발생하는 걸 볼 뿐이오.

문: 그럼 그 일들이 선생님께서 바라시는대로 발생하는 겁니까? 아니면 선생님께서는 그 일들이 자기 좋을대로 발생하길 원하십니까?

M: 둘 다입니다. 난 받아들이기도 하고,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난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은 나입니다. 내가 세계이기 때문에 난 세계를 두려워하지 않아요. 내가 모든 것인데 뭘 두려워하겠어요? 물은 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은 불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또한 나는 내가 무이기 때문에 두려움을 체험할 수도 위험에 처할 수도 없기 때문에 또한 두려움이 없어요. 난 형태도 없고 이름도 없습니다. 두려움을 낳는 것은 이름과 형태에 대한 집착인데 난 집착이 없어요. 난 무라구요. 무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모든 것은 무(nothing)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사물이 무를 건드리면 그것이 무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밑이 없는 샘과 같아서 그 속으로 떨어지는 건 모두 사라져 버립니다.

문: 하나님은 한 개인이 아니신가요?

M: 본인이 스스로를 한 인간으로 여길 때에는 그 분도 역시 한 인간이고 자신이 모든 것이 되면 하나님도 모든 것으로 보입니다.

문: 태도를 바꾸어서 사실이 바뀝니까?

M: 태도가 바로 사실입니다. 화내는 걸 예로 들어볼까요? 화가 나서 온 방을 왔다 갔다, 오르락 내리락 한단 말입니다. 동시에 난 내가 누군지를 압니다. 지혜와 사랑의 중심, 순수한 존재의 원자이지요. 이걸 돌이키는 순간 모든 것이 가라앉고 마음이 침묵 속으로 녹아듭니다. 이렇듯 태도가 모든 것을 바꾸는 겁니다.

문: 그렇지만 선생님도 가끔 화가 나시잖습니까?

M: 나는 화를 낼 사람도 없고 이유도 없어요. 화라는 건 왔다가 내가 나 자신을 상기하면 눈 녹듯이 없어져 버리는 겁니다. 그건 모두 우주적 물질들의 유희인 거죠. 그들과 나 자신을 동일시 할 때에는 그들의 노예가 되지만 내가 분리되면 그들의 주인이 됩니다.

문: 선생님께서는 태도를 바꾸어서 세상에 영향을 끼치실 수가 있습니까? 자신을 세계와 분리시키면 세상을 도울 수 있는 모든 희망이 없어지지 않나요?

M: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모든 것이 내 자신인데, 어떻게 내 자신을 도울 수가 없겠어요? 난 특정한 개인과 나를 동일시하지 않아요. 나는 모든 것, 즉 특정하고 보편적인 것 모두입니다.

문: 그러시면 저라는 특정한 인물도 도우실 수가 있습니까?

M: 사실은 언제나 돕고 있어요. 내면에서 말입니다. 나 자신과 선생 자신은 하나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걸 알지만 선생은 몰라요. 그게 차이입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문: 그러시면 전세계를 돕는다는 건 어떻게 하시는 겁니까?

M: 간디는 죽었지만 그의 마음은 지구의 곳곳에 가득 합니다. 한 사람의 성인의 생각은 인류 전체에 퍼지고 끊임없이 선을 행하게 합니다. 이름이 없이 내면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그것은 더 강력합니다. 그런 식으로 세계는 개선되는 것이지요. 내면이 바깥을 도우며 축복하는 것입니다. 깨달는 이가 죽고 나면 그는 더 이상 존재치 않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강이 바다에 합류되어 사라지듯이 말이죠. 그러나 이름과 형태는 더 이상 없지만 물은 여전히 남아 대양과 하나가 됩니다. 한 사람의 깨달은 사람이 보편적인 마음과 합류될 때에 그의 선과 지혜는 인류의 유산이 되어 모든 인류를 향상시키는 겁니다.

문: 저희는 저희들 자신의 개성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개성, 남들과 다른 여러가지 사실들을 우리는 매우 높게 평가합니다. 선생님은 이런 것들을 모두 쓸모없는 것으로 보시는 것 같은데 드러나지 않은 선생님의 모습이 우리들에게는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M: 드러나지 않은 것, 드러난 것, 개성, 인성, 등등의 모든 것이 말이나 정신적 태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속에는 알맹이가 없습니다. 진리는 침묵 속에서 체험되는 것입니다. 선생은 개성(person)에 집착을 하는데, 그러나 사실 자신이 사람이라는 걸 의식 하는 건 문제가 생겼을 때 뿐이 아닐까요? 어려움에 처해 있지 않을 때는 자신을 생각하지 않잖아요.

문: 드러나지 않은 것의 쓸모를 말씀해 주셔야죠.

M: 좋아요. 우린 일어나기 위해서 자야하고, 살려면 죽어야 합니다. 새 모양이 되려면 녹아야 하는 것이지요. 짓기 위해선 무너뜨려야 하고 창조하려면 먼저 없애야 합니다. 그래서 초월자는 뭐든지 녹입니다. 내용물은 뭐든지 깨부수고 모든 장애를 태워 버리지요. 모든 것을 철저히 부정하지 않으면 사물들의 독재가 필연적으로 따릅니다. 궁극적인 존재는 뭐든지 조화를 이루어내면서 자유로운 삶을 위한 궁극적이고 완전한 균형을 보장해 줍니다. 그것이 바로 선생을 해체해서 참된 존재로 되만들어 주는 겁니다.

문: 그러한 초월적 수준에서는 모든 것들이 잘 되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일상생활 속에선 어떻게 작용합니까?

M: 일상생활은 활동의 생활입니다. 선생이 그 생활을 좋아하든 않든 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은 뭐든 쌓여서 폭발하게 됩니다. 그것이 쌓여 어느 날 폭발해선 선생과 선생의 세계에 참변을 일으키고 맙니다. 만약 선생이 스스로 모든 이들의 행복을 위해 일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속이면 사태는 더 나빠집니다. 왜냐하면 타인에게 선이 되는 것이 선생 자신의 생각으로 인도되어선 안 되기 때문이에요. 타인에게 뭐가 도움이 되는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위험해요.

문: 그러면 일을 할 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M: 자신을 위해서도 하지 말고 타인을 위해서도 하지 말고, 일 자체를 위해 하는 겁니다.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은 그 자체가 목적이고 의미입니다. 어떤 일이라도 다른 일의 수단으로 삼지 마세요. 묶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어느 하나에 봉사하도록 하려고 다른 하나를 만드는 법이 없어요. 모든 것이 그 자체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 자체를 위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다른 일에 지장을 주지 않아요. 선생은 어떤 목적들을 위해 사람과 사물들을 이용합니다. 그러면 세계와 자신에게 큰 불행을 낳는 셈이에요.

문: 우리들의 참된 존재는 언제나 우리들과 함께 있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까?

M: 사실 선생은 언제나 초월해 있어요. 그러나 선생의 관심이 사물들에 고정되어 있거든요. 육체이든 정신적인 문제든 말입니다. 관심이 사물을 떠나고 다른 것에 고정되지 않은 그 순간 선생은 참된 존재입니다. 분별과 집착을 버리는 연습을 통해 감각적 정신적 상태들을 보지 않게 되면 참된 존재가 자연스런 상태로 나타나게 돼요.

문: 그럼 이런 분리감을 끝내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M: 마음을 "내가 있다"는 존재감에 맞추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 무엇"이라는 것이 해체되지요. 그렇게 되면 "난 관찰자일 뿐"이라는 것이 남고 그것도 "내가 모든 것"이라는 것 속으로 잠기게 돼요. 그리되면 그 모든 것이 하나가 되고 그 하나는 바로 선생 자신이 되는데, 그것이 지금 말하고 있는 나(Maharaj)와 다르지 않아요. 분리된 "나"라는 생각을 포기하세요. 그러면 "누구의 체험인가?"라는 질문은 생기지 않습니다.

문: 선생님은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시는데 제가 어떻게 그것을 제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까?

M: 선생은 지금 나의 체험을 선생 자신의 체험과 다른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그건 우리가 분리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깊은 곳에서는 나의 체험이 바로 선생의 체험입니다. 선생 자신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세요. 그러면 쉽고도 간단히 찾을 수 있어요. "내가 있음"의 방향으로 들어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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