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인상(personality), 장애물...아이 앰 댓 상권
문: 제 견해로는 세상이라는 것이 요가를 배우는 곳이고 인생 자체가 곧 요가수행입니다. 누구나가 완성을 지향하고 요가라는 건 결국 애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소위 '보통' 사람들과 그들의 '보통생활'에 대해 그들을 무시할 아무런 까닭도 없습니다. 그들도 요가수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애를 쓰고 또 고통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단지 그들은 자신들의 참 목적을 의식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M: 자네가 말하는 보통사람들은 어떤 점에서 요가수행자인가?
문: 궁극적 목적이 같습니다. 요기들이 포기를 통해 확보하는 것을 보통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실현합니다. 경험의 길은 무의식적인 길이며 그렇기 때문에 반복적이고 시간이 오래 걸리며, 요가의 길은 의도적이고 집중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보다 빠를 수 있는 것이지요.
M: 아마 요가와 보가의 시기들이 교차할 거야. 처음엔 보기. 그 다음은 요기, 다음에 보기, 그리곤 요기.
문 : 그 이유가 뭘까요?
M: 약한 욕망은 내관과 명상에 의해 없어질 수 있지만 강하고 뿌리깊은 욕망들은 채워지고 그 열매가 쓰든 달든 맛보아져야 하기 때문이야.
문: 그러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요기들에게 찬사를 보냅니까? 그리고 보기들을 가볍게 대하구요. 어떻게 보면 모두가 요기인데요.
M: 인간적인 가치기준에 따르면 의도적인 노력이 더 가치로운 것이야. 실재로는 요기와 보기가 모두 자신의 본성을 환경과 기회에 따라 따르고 있을 뿐이지. 요기의 생활은 단 하나의 욕망. 즉 진리를 발견한다는 욕망에 지배되지만 보기는 여럿의 스승들을 따르는 셈이야. 그러나 보기는 요기가 되고, 요기는 한 바탕의 보가 속에서 총정리를 할 수도 있어서 최종적인 결과는 마찬가지야.
문: 붓다는 깨달음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듣는 것만도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답니다. 완전히 거듭나기, 의식의 변형이 있다는 이 복음이 면화가 선적된 배에 불꽃을 일으키는 것과 비교될 정도여서 느리지만 가차없이 그 전체가 잿더미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깨달음의 복음도 머지않아 변형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M: 그래, 처음에는 그런 말을 듣고, 다음에는 기억하게 되고, 다음에는 사색하게 되고 하는 식이지. 그렇게 보면 우리 인도인들은 친숙한 토대 위에 있는 셈이야. 이 뉴스를 들은 사람은 요기가 되고 나머지는 그들의 보가를 계속하는 것이지.
문: 나머지는 보가를 계속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고 하는 평범한 인생이 쌓여 사람들을 진보시키는 것은 아닙니까? 마치 강물이 불어 바다로 가는 길을 찾게 되듯이 말입니다.
M: 세계가 있기 이전에 의식이 있었던 거야. 의식 속에서 세계가 존재하게 된 것이고 지속되고 순수한 의식 속으로 세계가 해체되어 가는 것이지. 모든 것의 뿌리에는 "내가 있음" 의 느낌이 있어. "세계가 있다." 는 마음은 이차적이라, 내가 존재하기 위해 세계를 필요로 할 이유는 없으며 오히려 세계가 나를 필요로 해.
문: 살려는 욕망은 대단한 일입니다.
M: 더 대단한 것은 살려는 충동에서 벗어나는 것이야.
문: 돌의 자유 같은 것입니까?
M: 그렇지. 돌의 자유일 뿐 아니라 그 이상이기도 하지. 무한하고 의식적인 자유야.
문: 사람이라는 건 경험을 축척해야 하지 않습니까?
M: 지금 자네가 그렇듯이 "나는 육신이다", " 나는 사람이다." 라는 건 장애물일 뿐이야. 육신이 자기라고 하는 것은 어린 아이한테는 좋을지 모르나 참된 성장을 위해서는 육신을 벗어나야 해. 정상적이라면 사람은 인생의 초기에 육체에 기초한 욕망에서 벗어나야 하는 거야. 심지어는 향락을 거부하지 않는 보기조차도 이미 맛 본 것을 갈망할 필요는 없는 것이라구, 습관, 반복의 욕망이라는 것은 요기와 보기 모두를 좌절시키는 것이야
문: 선생님은 왜 계속 인간이라는 것을 중요치 않는 것으로 왜 자꾸 무시하려고 하십니까? 인성이라는 것이 우리 존재의 기본적 사실입니다. 그것이 모든 단계를 점하고 있지 않습니까?
M: 그건 순전히 기억에 의존하고 욕망에 의해 야기된 습관에 불과해. 그걸 깨닫지 못하면 자넨 자신을 하나의 인간으로 여기게 될 거야. 그러면서 살고, 느끼고 , 생각하고, 행동하고, 받아들이고, 기뻣다. 슬펏다 하겠지. 스스로 질문을 해봐. "이게 진실인가?", " 난 누구인가?'", "이 모든 것의 뒤편에, 이들의 너머에는 무엇이 있나?" 그리하면 조만간 자신의 착각을 깨닫게 될 거야. 그리고 드러나고 나면 존재하길 멈추는 게 바로 착각의 본성이야.
문: 생활의 요가. 즉 삶 자체의 요가를 자연요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말이 리그베다서(書)에서 말하는 삶과 마음과의 결혼으로 묘사된 아디요가를 연상케 합니다.
M: 주의 깊게, 완벽한 자각 속에서 진행되는 삶은 그 자체로 자연 요가야.
문: 삶과 마음의 결혼이란 무슨 뜻입니까?
M: 자발적인 자각 속에서 사는 것, 무위적인 생활의 의식, 자신의 삶에 대한 완전한 관심, 이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문: 슈리 라마크리슈나 파라마한사의 아내인 샤라다 데비라는 분은 노력을 너무 많이 한다고 그의 제자들을 나무라곤 했습니다. 이 분은 제자들을 여물기 전에 꺽이는 망고 열매와 비교하곤 했는데 말인즉슨 "왜 서둘러요? 충분히 익어서 토실토실하고 단맛이 날 때까지 기다려요." 라고 말하곤 했답니다.
M: 거 말 잘 했네. 새벽을 낮으로 여기고 일시적인 체험을 충분한 깨달음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꽤 많아. 수행자에겐 아무리 깊이가 있어도 겸손함과 고요함이 필수적인 거야. 깨달음이 무르익은 자만이 완전한 자연스러움을 보여줄 수 있어,
문: 깨닫고 나서 7년 내지12년 , 15년, 길때는 25년까지 침묵을 지켜야 하는 요가 학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라마나 마하리쉬도 20년간이나 침묵으로 일관하고 나서야 가르치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M: 내면의 열매가 익어야지 그때까지는 자각속의 삶이 계속 되어야 해, 점차로 수행이 점점 더 미묘해지다가 통째로 형체가 없어지게 되지.
문: 크리슈나무르티도 자각속의 삶을 말합니다.
M: 그는 언제나 "궁극적인 것"을 직접 지향하지. 궁극적으로 보면 모든 요가가 아까 자네가 말했던 아디 요가로 끝나. 의식과 생활의 결혼이 이루어져야 해, 의식과 존재가 축복 속에서 만나는 거지. 축복이 솟아나려면 만남이나 접촉같은 이중성 속에서 단일함을 알아야 해.
문: 붓다도 열반을 얻으려면 삶의 현장으로 가야한다고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의식은 성장을 위해서 생활을 필요로 합니다.
M: 세계 자체가 접촉이야. 세계란 의식 속에서 실현된 모든 접촉의 총체야. 영혼이 물질에 닿으면 의식이 생겨. 그러한 의식이 기억과 기대의 때가 묻으면 구속이 된다구, 그냥 체험만 있으면 구속이 되지 않지만 욕망과 공포에 잡힌 체험은 순수하지 못하여 업을 낳지
문: 단일성 속에서 행복이 있을수 있습니까? 모든 행복이 필연적으로 접촉을 하니까 결국 이원성을 전제로 삼는게 아닙니까?
M: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면 이원성은 아무런 문제가 되질 않아. 투쟁이 없는 다양성은 즐거움이 돼, 순수한 의식 속에 빛이 있기 때문이야. 따뜻함을 위해서는 접촉이 필요해. 존재의 단일성 위에 사랑의 결합이 있는 거지. 사랑야말로 이원성의 의미와 목적인 것이지.
문: 저는 집에서 양아들입니다. 친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어머니는 제가 태어날 때 돌아가셨는데 제 양부께서 양어머니를 기쁘게 해주시려고 저를 입양 하셨죠. 어머니가 애가 없으셨거든요. 그러니까 거의 우연한 일이었던 건데. 지금은 아버님은 평범한 트럭 운전수이시고 어머니는 가정일을 돌보십니다. 전 지금 스물넷인데 지난 2년 반 동안에 안정되지 못하게 뭔가를 찾아 떠돌아 다녔습니다. 전 훌륭하고 신성한 삶을 찾고 싶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M: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도록 해, 그리고 부모님의 노후를 돌봐드려야지. 그리고 자네를 기다리는 아가씨하고 결혼을 해서 충실히. 소박하고 겸손하게 살아. 자신의 미덕을 감추고 조용히 살도록 해,
오감과 세가지 성질, 즉 사트바. 라자스, 타마스, 이 셋과 오감을 포함한 여덟 가지가 바로 자네의 요가 8지칙이야. 그리고 "내가 있다." 라는 것이 최고의 만트라가 되겠지. 거기에서 자네에게 필요한 모든 걸 배울 수가 있어. 주의 깊게. 끊임없이 탐구하면 그걸로 충분해.
사트바 : 조화로움, 라자스 : 활동성, 타마스 : 휴식, 게으름
문: 그냥 인생을 사는 것이 해탈을 준다면 왜 모든 사람이 해탈을 얻지 못합니까?
M: 모든 사람은 그렇게 되고 있어.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고 사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 하는 거야. 깨달음이라는 생각이야말로 가장 중요해.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기만 해도 그 사람 전체가 바뀌지. 톱밥더미에 불타는 성냥과 같은 것이야. 위대한 스승들이 한 일은 사실 다른게 아니야, 약간의 진리의 빛이 산더미 같은 거짓을 태울 수 있어, 그 반대로 진리의 태양은 육체를 자기와 동일시하는 구름 뒤에 숨겨져 있는 거야.
문: 이런 식으로 깨달음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몹시 중요한 것 같습니다.
M: 듣기만 해도 깨달음의 약속이 되고, 한 사람의 스승을 만나면 해탈을 보장 받는거야. 완전성은 생명을 주는 창조적인 힘이지.
문: 깨달은 사람은 "내가 깨달았나?" 라고 생각하는 적이 있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자기를 높이 평가해주면 놀라지 않습니까? 깨달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보통 사람으로 여기는지 어떤지 좀 말씀해 주십시오.
M: 보통도 아니고 보통이 아닌 것도 아니야, 그냥 자각이 있고 자비심이 있어, 아주 강렬하지. 자신을 어떻게 규정짓거나 다른 어떤 것과 동일시하지 않고 자신을 그냥 바라볼 뿐이야. 자신을 세계와 분리된 어떤 것으로 알지 않아. 왜냐하면 자신이 바로 세계니깐 말이야. 이 분들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전혀 없어, 그분들은 큰 부자가 끊임없이 자신의 부를 나누어주는 그런 부자와 같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부자는 아니지만 많이 나누어주므로 가난하지 않아. 깨달은 사람들은 그저 재산이나 소유물이 없을 뿐이야. 그분들은 에고가 없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과도 자신을 동일시할 수 없어. 또 시공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어디에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세계 너머 말과 생각 너머에 있는 것이지.
문: 정말 저 같이 단순한 사람에게는 대단한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M: 길고 복잡해서 불가사의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건 바로 자네야. 나야 자네에게 비하면 단순성 그 자체이지. 난 안팎으로 전혀 차별없는 있는 그대로야. 내것 네것, 좋고 나쁨이 전혀 없지. 세상이 곧 나이고 내가 곧 세상이니까?
문: 개개의 사람이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습니까?
M: 수많은 사람이 잠을 자고 있으면 각각의 꿈이 그 자신의 꿈이 되잖아. 깨어나서야 비로서 많은 꿈들의 문제를 알게 되고 그 꿈들 모두가 꿈인 것이 이해되면 문제가 스러지지 않아?
문: 꿈이라는 것도 근거가 있습니다.
M: 기억 속에 있지. 하지만 그런 경우라도 기억된 것처럼 또 하나의 꿈일 뿐이야. 잘못에 대한 기억이 잘못을 낳는 것이 아니듯 기억 그 자체에는 잘못이 없어, 잘못된 것은 그 내용일 뿐이지. 사실은 기억하고 의견은 잊어버려,
문: 사실이란 건 무엇입니까?
M: 욕망과 공포에 의해 침해받지 않는 순수한 자각 속에서 인지된 것이 사실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