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모든 일은 저절로 발생한다...아이 앰 댓 상권
문: 깨달은 사람도 죽습니까?
M: 깨달은 사람은 삶과 죽음을 넘어서 있어요. 우리가 불가피하다고 여기는 출생과 사망은, 깨달은 사람에게는 움직일 수 없는 것 속에서의 움직임, 변화 없는 것 속에서의 변화. 끝없는 것 속에서의 끝이 표현되는 방식의 하나입니다. 깨달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태어나지 않고 죽지도 않으며, 아무것도 지속되는 것이 없고 아무것도 변화가 없으며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시간과 관계없이 존재한다는 이러한 사실이 명백한 것입니다.
문: 깨달은 사람은 초월하였다고 자주 말씀하시는데 무엇을 초월한 것입니까? 지식을 넘어선 것인가요?
M: 지식은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는 것이고, 의식은 생겨났다 없어집니다. 이런 일들은 날마다 생겨나고 모두에게 관찰되는 일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때로는 의식이 있고 때로는 의식이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의식이 없을 때에는 마치 어둠이나 여백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들은 자신이 의식적이지도 무의식적이지도 않으므로 순수하게 자각하고 있음을 알며 마음과 그 내용물의 상태를 관조하고 있는 자임을 알고 있지요.
문: 그런 관조는 언제 시작됩니까?
M: 깨달은 자에게는 그 어떤 일에도 시작과 끝이 없어요. 소금이 물 속에 녹듯이 그렇게 모든 것은 순수한 존재 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지혜는 언제나 비실재적인 것을 부정하는데 비실재를 보는 것이 바로 지혜지요. 이것을 넘어서면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합니다.
문: 제게는 "나는 육체이다." 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무지로부터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자신이 육체라고, 육체와 마음, 마음- 몸, 또는 순전히 마음이라고 느끼는 상태는 언제 시작됩니까?
M: 의식의 시작을 말할 수는 없어요. 시작과 시간에 관한 생각들은 의식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의 시작에 관해 의미를 두지 않고 말하려면 거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벗어나는 순간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랬던 일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존재하는 것은 유일한 실재뿐입니다. 파도가 대양과 분리될 수 없듯이 모든 존재는 표현될 수는 없는 "있음" 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지요.
문: 분명한 사실은 지금 여기에서 제가 선생님께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몸" 이라는 느낌은 언제 생겼습니까? 제가 태어날 때였습니까? 아니면 오늘 아침에 그랬습니까?
M: 지금입니다
문: 그러나 어제도 그런 느낌이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M: 어제의 기억은 오직 현재에 있을 뿐입니다.
문: 하지만 확실히 저는 시간 속에 존재합니다. 제게는 과거와 미래가 있어요.
M: 그건 선생이 지금 하고 있는 상상이오.
문: 틀림없이 시작이 있었습니다.
M: 지금이오.
문: 그럼 마지막은 어떻게 됩니까?
M: 시작이 없는 것은 끝날 수도 없어요.
문: 그러나 저는 제 질문 내용처럼 의식하고 있습니다.
M: 잘못된 질문은 대답될 수도 없어요. 또 알지 못하면 잘못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어요.
문: 제겐 그게 현실입니다.
M: 그것이 언제 현실로 나타났습니까? 지금이 아니예요?
문: 예 그건 제게 정말 현실입니다. 지금요.
M: 선생의 질문에서 실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건 마음의 상태에 불과해요. 마음 자체보다 마음의 상태가 더 실재적일 수는 없어요. 마음이 실재하는 것인가요? 마음은 일시적인 마음의 상태들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어떻게 일시적인 상태들의 연속이 참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겠어요?
문: 실에 꿰어진 구슬들처럼 사건들은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집니다. 영원히 말입니다.
M: 그것들은 모두 "내가 육신이다." 라는 근본적 생각 위에 꿰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하나의 정신적 상태일 뿐 이예요.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상태들처럼 왔다가 가는 것입니다. 몸-마음이 있다는 환상이 생기는 것은 그것이 검토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잘 살피지 않으면 모든 마음의 상태가 꿰어지는 실과 같아요. 그것은 마치 닫힌 방 속의 어둠처럼 얼핏 생각하면 존재하는 것 같으나 방문이 열리고 나면 어디론가 가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사실은 있던 적이 없으므로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에요. 마음의 모든 상태들, 모든 존재의 이름과 형태들은 탐구하지 않음 속에, 상상 속에 있는 겁니다. 상식을 의심해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식을 의심해 보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지요. 나를 고집하는 것은 탐구하고 조사하지 않는 정신의 허약함 때문이오.
문: 만약 모든 것이 빛이라면 어둠은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빛 속에 어떻게 어둠이 있을 수 있나요?
M; 빛 속에 어둠이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 망각이 어둠입니다. 우리가 다른 일들이나 자기 속에 빠져 있을 때에는 자기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건 뭐 당연한 일이지만 어째서 그렇게 집착해서 자신을 잊어 버려요? 지혜는 체험자와 체험 양자의 창조하는 근원인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문: 지금 현재의 저의 상태로서의 "내가 몸" 이라는 생각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지만 " 내가 순수의식" 이라는 생각은 옳은 말이긴 하지만 체험되지 않은 것으로서 일부러 마음에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M: 그래요. 수행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부여한 것일 뿐입니다. 특정한 어떤 것도 아니며 특정한 것들의 집착도 아니고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개별적인 것들의 총체인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은 마음속에 존재하며 심지어는 육체라는 것조차 대단히 많은 숫자의 감각적 지각들이 마음속에서 통합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하나하나의 지각은 또 하나의 정신의 상태입니다. 만약 "내가 육신이다." 라고 끝까지 고집한다면 그것을 보여 보세요.
문: 여기 있지 않습니까?
M: 그건 선생이 육신을 생각할 때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은 모두 끊어져 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순간순간의 이미지를 모아 놓으니 존재한다는 환상이 생기지요. 덧없는 것 속의 영원, 실재하지 않는 것 속의 참존재를 찾아봐요. 그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문: 분명한 사실은 제가 제 자신을 육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M: 어떻게 해서든 자기 자신을 생각하도록 해요. 육신에 관한 생각을 떠올리진 마세요. 우리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육신은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구하는 우리들의 경향에 의해 창조된 추상에 불과해요.
문: 저는 <내가 육신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음속의 때다.> 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M: 왜 말을 그렇게 해요? 그런 표현들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자아가 모든 것의 근원이요 목적지입니다. 그 어떤 것도 바깥에는 없어요.
문: 육신에 관한 관념이 정신을 지배할 때에 그것은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닙니까?
M: 몸에 관해 생각한다든가 심지어는 "내가 몸이다." 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전혀 틀린 건 없어요. 하지만 자신을 오직 육체에 국한시키는 것은 잘못 이예요. 실제로는 모든 존재가. 모든 형태가 나의 것이며, 내 의식 속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말은 오직 내가 무엇이 아닌지를 말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에. 내가 무언지를 말할 수는 없어요. 그리고 내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난 의식 너머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의식 속에선 내가 무엇인지를 말할 수가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존재합니다. " 내가 누군가" 하는 질문에는 답이 없어요. 어떤 체험으로도 거기에 답을 할 순 없어요. 왜냐하면 자아라는 것는 체험을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에요.
문: 하지만 "내가 누군가?" 라는 질문은 틀림없이 쓸모가 있지 않습니까?
M: 그건 의식 속에 답이 없기 때문에 의식을 넘어가는 데에 도움이 되지요.
문: 여기 이 순간 속에 제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속에서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렇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제 질문이 틀렸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제 질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저를 어디로도 이끌어주지 못합니다.
M; 선생의 질문은 틀린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입니다. 선생은 "지금 여기에 내가 존재한다" 고 하지 않았어요? 거기서 멈추어요. 그게 참된 거예요. 사실을 질문으로 바꾸지 말아요. 그게 바로 선생의 실수입니다. 사람은 앎도 아니고 알지 못함도 아니에요. 마음도 물질도 아니니 마음과 물질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묘사하려고 하지 말아요.
문: 예를 들어 바로 지금 사내 아이가 하나 와서 문제를 말하는데 선생님께서 몇 마디 말을 하자 그가 가버렸습니다. 그것이 선생님께서 그 아이를 도와주신 것이 됩니까?
M: 물론이지요.
문: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가 있습니까?
M: 돕는 것이 나의 본성이니까요.
문: 그럼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그걸 아시게 되었습니까?
M: 알 필요가 없어요. 저절로 작동되니까요.
문: 여전히 같은 말을 하십니다. 그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M: 사람들이 내게 말해 주는 것에 근거합니다. 그러나 증거를 요구하는 것은 바로 댁들이지 내겐 그런 것이 필요 없어요. 여러 가지 일들을 바로잡는 것은 나의 본성에 속한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선.미.이지요.
문: 어떤 사람이 와서 선생님께 조언을 구하면 조언을 해주시는데 그것은 어디에서 생겨나며 그것은 어떤 힘으로 도움이 됩니까?
M: 그 사람 자신의 참 존재가 그의 마음에 영향을 끼쳐 하나의 반응을 낳게 되지요.
문: 그러면 선생님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M: 내 속에서 그 사람과 그의 참 자아가 함께 옵니다.
문: 왜 그 사람의 참 자아가 선생님과 상관없이 그를 돕지 않습니까?
M: 내가 바로 자아입니다. 선생은 내가 분리되어 있다고 상상하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는 거예요. "나의 자아" 와 "그의 자아" 같은 건 없어요. 모든 것의 유일한 자아가 있을 뿐입니다. 이름과 형태가 많기 때문에 오도되어 선생이 여러 개의 자아를 상상하는 거예요. 우리 둘은 모두가 하나의 자아이건만 아마 확신이 없는 것 같군요. 개인적 자아와 보편적 자아를 따로 말하는 건 선생의 수준이니 그걸 넘어서서 이원성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해요.
문: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로 화제를 돌리지요.
M: 그런 사람이 오면 반드시 도움을 얻게 되어 있어요. 도움을 얻게 되어 있기 때무에 오는 겁니다. 이점에 관해서 뭐 별난 일은 없어요. 난 누군 돕고 누군 거절하곤 할 수가 없어요. 오는 모든 사람이 도움을 받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그런 것이 법칙이기 때문이지요. 단지 도움의 형태만이 필요에 따라 변화합니다.
문: 그런 사람들은 왜 여기로 와서 조언을 구해야 합니까? 내면에서 얻을 수는 없나요?
M: 마음이 바깥으로 향하고 있다보니까 내면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나 사실 모든 경험은 마음속의 것이며 그가 내게 와서 도움을 얻는 것도 모두 그의 내면에 있는 것입니다. 내면에서 답을 찾는 대신에 외부에서 오는 답을 상상하는 것뿐이지요. 내게는 나라는 것도, 준다는 것도 없어요. 이 모든 것이 마음속의 깜박임일 뿐이에요. 난 무한한 평화와 고요로서 그 내부에서는 아무것도 나타나질 않아요. 왜냐하면 나타나는 모든 것은 사라지니까 말입니다. 사실 도움을 구하러 오는 사람도 없고 도움을 주는 사람도 없고 도움을 얻는 사람도 없어요. 이건 모두가 의식 속의 전개일 뿐이지요.
문: 하지만 돕는 힘이 있고 그 힘을 펼치는 사람이나 사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라 하든 자아라 하든 그렇지 않으면 우주심이라 하든 말입니다.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M: 그건 몸- 마음이 취하는 입장이에요. 순수한 마음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즉 의식 속의 물거품 같은 것으로 봅니다. 이런 물거품들은 나타났다 사랴졌다 다시 나타났다 하는 것으로서 참된 자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는 없어요. 거기에는 어떤 특별한 원인이 부가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하나가 모두에 의해 생겨나고, 또 모든 것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하나하나의 거품이 하나의 육신이며 이 모든 몸들이 나의 것입니다.
문: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모든 일을 바르게 할 힘이 있으시다는 건가요?
M: 나와 분리되어 있는 것 같은 그런 힘은 없어요. 창조성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은 바로 나의 본성에 내재하는 것입니다. 금 덩어리로 많은 장신구를 만들 수 있지만 그 하나하나가 여전히 금이 아닌가요? 이와 비슷하게 내가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하든, 난 여전히 나일 뿐입니다. 움직여지지도 흔들리지도 다른 뭔가에 의지하지도 않는 "나 있음" 으로 머무르는 것이지요. 선생이 우주,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나"의 자발적인 창조성입니다. 발생하는 모든 일은 그저 발생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나의 본성이 워낙 그러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환희 속에 끝나는 것입니다.
문: 무지한 엄마가 메틸 알코올을 먹여서 봉사가 된 한 소년의 경우를 압니다. 제가 선생님께 그를 도와달라고 요구하면 선생님은 틀림없이 동정심으로 가득하여 도와 줄 마음이 간절하시겠지만 무슨 힘으로 그를 도와 줄 수 있습니까?
M: 그 소년의 경우는 의식 속에 장님이라는 것이 꽉 박혀 있어요. 지울 수 없게 말입니다. 그렇게 의식이 작용하게 되어 있어요.
문: 제가 도와달라고 하는 것은 그가 장님이라는 사실에 어떤 변화를 줍니까?
M: 선생의 요구는 그 소년의 맹목의 한 부분입니다. 그가 눈이 멀었기 때문에 선생이 그런 질문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선생이 추가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지요.
문: 하지만 선생님의 도움이 새로운 요소가 될까요?
M: 아니지요. 모든 것이 그 소년이 눈멀었다는 사실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어요. 모든 것이 그 속에 있어요. 엄마, 그 소년, 선생과 나, 그리고 다른 모든 것, 그것이 하나의 사건 이예요.
문: 우리가 그 소년의 경우를 논의하는 것조차 미리 예정되어 있다는 뜻인가요?
M: 다를 수가 있겠어요? 모든 일에는 미래가 담겨져 있는 거예요. 그 소년의 의식 속에 나타나고 난 의식 너머에 있어요. 내가 의식에 명령을 내리지는 않아요. 그리고 일들을 바로 잡는 것은 자각의 성질에 속하는 것을 알아요. 그러니 의식으로 하여금 자신이 낳은 것을 돌보도록 하면 되요. 그 소년의 슬픔, 댁의 연민, 내가 듣고 있는 의식이 작용하는 것, 이 모두가 하나의 단일한 요소로서 그런 식으로 쪼개지지 않으며 질문을 제기하지도 않아요.
문: 선생님의 마음은 정말 이상하게 작용하는군요.
M: 선생이 이상한 것이지 내가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난 정상이고 제 정신입니다. 난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그러나 선생은 진실을 두려워해요.
문: 왜 그렇지요?
M: 두려워하면서도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지도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선생 자신의 무지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애쓰지 말아요. 먼저 무지의 벽을 무너뜨려야 해요. 사람이 죽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깨달은 사람들은 죽기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지를 본 거구요. 자신의 본성을 아는 순간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돼요. 죽음은 자유와 힘을 줍니다. 세계 속에서 자유로우려면 세계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면 온 우주가 자기 것이 돼서 그것이 몸이 되고 하나의 표현이며 도구가 됩니다. 절대적 자유의 상태인 참 행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반면 자유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죽을 수가 없어요.
문: 그러면 죽을 수 없는 사람은 살수가 없다는 뜻입니까?
M: 어떻게 이해해도 좋아요. 어쨌든 집착은 굴레가 되고 벗어나면 자유로와 지는 겁니다. 그리고 애착이 생기면 노예가 되는 것이구요.
문: 그러니까 선생님께서는 구원받았으며 따라서 세계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자연스런 결론입니다.
M: 전체로 본 세계는 구원이 필요 없어요. 사람들이 실수를 하고 고통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그것이 자각의 들판 속으로 들어가면, 즉 깨달음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면 그러한 잘못이 바로 잡히는 겁니다. 그러한 것이 그것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문: 저희는 영적인 진보라고 불리는 일들을 봅니다. 이기적인 사람이 종교적으로 변해서 자신을 잘 다스리고 자신의 생각과 느낌들을 정화하며 영적인 수행을 하여 본성을 깨닫습니다. 그러한 과정은 인과관계에 지배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연인가요?
M: 나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일은 저절로 생깁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의 목적을 향해 일했기 때문에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돌아올 대가를 염두에 두고 그것을 위해 분투하지요.
문: 거칠고 진화되지 않은 사람은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보상이라는 미끼를 제공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까?
M: 그런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 미끼들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는 성장하는 것이 의식의 본성에 속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는 하나의 동기에서 또 다른 동기를 따라 움직이면서 자신의 욕망을 완수하기 위해 여러 스승들을 쫓아다닐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존재의 법칙에 의해 돌아갈 길을 발견하면 모든 동기들을 버리지요. 왜냐하면 세상에 대한 관심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모든 것에 대해서 죽고 그렇게 해서 모든 것 자체가 됩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창조입니다. 우주가 자신의 가슴속에서 나왔다가 꺼져가곤 하는 것을 보는 것은 하나의 경이지요.
문: 내적인 노력의 큰 장애는 싫증입니다. 배우는 사람은 곧잘 싫증을 냅니다.
M: 생기 없음과 불안은 함께 작용하며 명료함과 조화를 저해합니다. 조화가 나타나려면 생기 없음과 불안은 반드시 정복되어야 해요. 그러면 당연한 결과로써 자연히 조화롭게 됩니다.
문: 그러면 노력이 필요 없습니까?
M: 노력이 필요하면 노력이 나타나지요. 노력 없음이 필수적으로 되면 그것이 자신을 세웁니다. 생애를 밀어댈 필요가 없어요. 그냥 삶과 함께 흐르면서 현재의 과제에 완전히 자신을 던져요. 그것이 바로 현재에 대해 당장 죽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는 것은 죽는 것이고 죽음이 없으면 삶은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계와 자아가 하나이며 자신이 본래 완전하다는 점을 잊지 말고, 문제가 있으면 오직 자신의 태도에 결함이 있음을 알고 다시 조정해야 합니다.
이런 재조정의 과정이 바로 수행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나태함을 중지하고 명증함과 자비심을 위한 길을 열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그것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런 것들 모두가 성장의 불가피한 신호들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저항하지도 말고 늦추지도 말아요.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남도록 하세요. 두려워 할 게 없어요. 믿고 해봐요. 정직하게 실험을 해봐요. 자신의 본성이 인생을 꾸미도록 기회를 주세요. 선생은 빠지구요. 그리하면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