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아이 앰 댓

34. 마음 자체가 불안이다...아이 앰 댓 상권

작성자이니그마|작성시간26.06.21|조회수41 목록 댓글 0

34. 마음 자체가 불안이다...아이 앰 댓 상권

문: 저는 스웨덴 태생인데 지금 멕시코와 미국에서 하타아요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M: 어디서 배웠나요?

문: 미국에서 인도 승려에게서 배웠습니다.

M: 그게 어떤 도움이 되던가요?

문: 건강에 좋고 생활 수단이 됩니다.

M: 그거 좋군요. 그래 그게 원하는 것 모두인가요?

문: 저는 마음의 평화를 원합니다. 저는 소위 크리스찬에 의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잔인한 일들에 넌더리가 났습니다. 한동안 종교 없이 지내다가 요가에 끌리게 되었습니다.

M: 뭘 얻었습니까?

문: 요가 철학을 공부했더니 제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M: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되었지요? 어떤 것이 나타났기에 자신이 도움을 얻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나요?

문: 건강이 좋다는 것은 손에 잡히는 것과 같은 선명한 것입니다.

M: 물론 건강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매우 유쾌한 일이지요. 즐거움이 요가에서 기대한 모든 것인가요?

문: 건강의 기쁨은 하타아 요가의 보답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요가는 그 이상입니다. 많은 의문에 답을 주지요.

M: 지금 요가라는 말을 어떤 뜻으로 쓰고 있어요?

문 인도의 가르침 전체를 말합니다. 진화 윤회 카르마 등등 말입니다.

M: 좋아요. 이제 선생이 바라던 모든 지식을 얻었군요. 그런데 어떤 식으로 그것에 의해 도움을 얻고 있습니까?

문: 제게 마음의 평화를 주었습니다.

M: 그래요? 마음이 편합니까? 탐구가 끝났어요?

문: 아닙니다. 아직 아닙니다.

M: 당연하지요. 거기에는 끝이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평화 같은 것은 없으니까요. 마음은 곧 불안을 뜻하는 것입니다. 안정되지 못한 상태, 이것이 바로 마음이에요. 그러나 요가라는 건 마음의 한 속성이 아니고 마음의 상태도 아니에요.

문: 몇 가지 평화의 수단을 저는 요가에서 얻었습니다.

M: 잘 조사해보면 마음이 생각으로 들끓고 있음을 알게 될 겁니다. 마음은 때로 공백의 상태가 되긴 하지만 한동안 그러할 뿐이며 다시 그 원래의 불안한 상태로 돌아갑니다. 고요해진 마음은 평화로운 마음이 아니에요. 지금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고 싶다고 말하는데 마음을 평화롭게 하고 싶은 사람은 그 자신이 평화로운가요?

문: 아닙니다. 전 평화롭지 않습니다. 저는 요가의 도움을 입고 있습니다.

M: 그 모순을 모르겠어요? 여러 해 동안 선생은 마음의 평화를 구해 왔습니다. 그런데 발견하지 못했지요? 그건 근본적으로 불안한 것은 평화로울 수가 없기 때문이오.

문: 향상되는 것은 있습니다.

M: 선생이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평화는 매우 연약한 것이라 아주 작은 것도 그것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지금 선생이 평화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혼돈이 없는 상태일 뿐입니다. 그건 평화라고 할 수가 없어요. 참된 평화라는 것은 방해받지 않는 겁니다. 침해받을 수 없는 마음의 평화를 주장할 수 있어요?

문: 전 분투하고 있습니다.

M: 분투하는 것도 불안의 한 형태일 뿐입니다.

문: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M: 자아는 휴식을 취할 필요가 없어요. 그것은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 평화 그 자체입니다. 오직 마음만이 안정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아는 것은 오직 불안뿐입니다. 그 형태와 단계가 많더라도 말입니다. 즐거운 건 좋은 것으로 여겨지고 고통스러운 건 값이 싸게 매겨지지요.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불쾌감에서 유쾌한 데로 옮아가는 변화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변화 자체가 우리를 변화없는 상태로 데려다 줄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시작이 있는 것은 끝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것은 시작되지 않으며 오직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으로 나타나며, 어디서나 있고 전능하며 시간도 없고 변화도 없는 부동의 원동력인 것입니다.

문: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M: 요가를 해서 선생은 지식과 경험을 축적했습니다. 그건 부정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게 선생에게 무슨 소용입니까? 요가는 통합을 의미하는데 뭘 다시 통일 시켰어요?

문: 저는 인성을 본성에게 통합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M; 인성은 상상의 산물일 뿐이고 참자아는 이 상상의 희생물입니다. 지금 선생을 구속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닌 것을 자신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스스로 존재한다고 할 수가 없어요. 인간이 있다고 믿고 그것임을 의식하는 것은 자아입니다. 그 자아를 넘어서면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야말로 모든 것의 원인 없는 원인입니다. 인성을 본성과 재결합한다고 말하는 것조차 옳지 않아요. 왜냐하면 인성이란 건 본래 존재하지 않으며 믿음에 의해 참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 정신의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본성은 나누어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문: 요가는 자아를 찾고 발견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M: 잃어버린 것은 찾을 수가 있지만 잃어버린 적이 없는데 뭘 찾겠어요?

문: 제가 뭔가 버리지 않았다면 아마 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전 그렇지 못합니다. 전 지금 깨달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찾고 있다는 사실이 벌써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M: 그건 잃어 버렸다고 스스로 믿고 있음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러나 그걸 믿는게 누군가요? 그리고 잃어 버렸다고 믿어지는 게 뭔가요? 선생 자신과 같은 한 인간을 잃어 버렸나요? 또 선생이 지금 찾고 있는 자아는 무엇인가요? 정확하게 뭘 발견하길 기대하고 있습니까?

문: 자아에 대한 참지식 입니다.

M: 자아에 대한 참지식은 지식이 아닙니다. 그건 어디서 찾거나 바라본다고 발견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시간이나 공간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지식이란 건 일종의 사고 패턴이며 기억이고 정신의 습관 이예요. 이 모든 것들이 즐거움과 고통에 의해 촉발되는 것입니다. 지금 선생이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즐거움과 고통에 자극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자기로 존재하는 것은 동기 같은 건 완전히 넘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는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인데. 선생이 선생 자신임에는 어떤 이유도 필요하질 않아요.

문: 요가를 함으로써 저는 평화를 발견할 것입니다.

M: 자기 자신과 별도로 평화가 있을 수 있나요? 지금 선생이 말하는 것은 경험을 말하는 겁니까? 그렇지 않으면 단지 책에서 읽은 것을 말하는 겁니까? 책에서 배운 지식은 시작할 때에는 도움이 되지만 직접 체험을 위해서 조만간 포기되어야 해요. 원래 직접체험은 그 본성상 표현할 수 없는 겁니다. 말이란 건 파괴를 위해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미지들은 말로 이루어져 있고 또 말에 의해 파괴됩니다. 지금 선생이 지금의 상태로 자신을 만들어 놓은 것은 말로써의 사고에 의한 것이니 같은 방식으로 빠져 나와야 합니다.

문: 저는 어느 정도의 내적인 평화를 성취했습니다. 그걸 파괴해야 합니까?

M: 획득된 것은 다시 상실될 수 있어요. 참된 평화를 깨달을 때만이. 그러니까 한번도 상실한 일이 없는 평화를 깨달을 때만 그 평화가 자신과 함께 머무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번도 멀어져 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니지 않은 것을 찾지 말고 자신이 한번도 상실해 본 일이 없는 것을 발견하도록 해요. 모든 것은 시작 전에 존재했고, 종말 후에도 존재하는 것, 출생도 사망도 없는 것, 저 부동의 상태, 육신이나 마음, 또 생사에 영향 받지 않는 그러한 상태를 깨달아야 합니다.

문: 그러한 깨달음의 수단은 무엇입니까?

M: 인생에서 장애를 극복하지 않고 얻어질 수 있는 것은 없어요. 우리가 본성을 뚜렸이 알아보는 데에 장애가 되는 것은 즐거움에 대한 욕망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장애가 되는 것은 '즐거움-고통'이라는 동기부여입니다. 모든 동기부여로부터 자유롭고 욕망이 전혀 생기지 않는 상태가 자연스런 상태입니다.

문: 그런 식의 욕망의 포기에는 시간이 필요합니까?

M: 만약 시간에 맡겨 둔다면 수백만 년이 걸릴 거예요. 욕망을 하나씩 포기한다는 것은 그 종말이 결코 오지 않게 될 긴 여정입니다. 욕망과 두려움은 놔두고 모든 관심을 주체, 즉 욕망과 두려움의 체험 너머에 있는 자에게 돌리도록 하세요. 놔두고 모든 일에 관심을 주체, 즉 "누가 욕망 하는가?" 라고 질문하세요. 그렇게 하나하나의 욕망을 자기 자신에게 되돌리도록 하세요.

문: 모든 욕망과 두려움의 뿌리는 행복에의 갈망입니다.

M: 선생이 생각하고 갈망할 수 있는 행복은 단지 육체나 정신의 만족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감각이나 정신의 즐거움은 실재하는 절대적인 행복이 아닙니다.

문: 감각과 정신의 즐거움들, 그리고 육체적 정신적 건강과 함께 생겨나는 행복감의 전체적 감각조차 실재로 뿌리를 두는 것이 틀림없지 않습니까?

M: 그것들은 상상에 근거하는 겁니다. 돌멩이 하나 받은 사람이 그것이 매우 값비싼 다이아먼드라고 주입 받으면, 자신의 착각을 깨달을 때까지는 대단히 기뻐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참자아를 알게 되면 선생이 생각한 즐거움은 그 맛을 잃고, 감각과 정신의 즐거움이 걸고 있는 낚시 바늘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즐거움이나 고통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조건에 따른 응답, 단순한 반응, 기억이나 선입관에 기초한 단순한 끌림이나 거부감 등으로 말입니다. 보통 즐거움과 고통은 기대될 때에 체험됩니다. 그것은 모두가 후천적 습관과 확신에 관한 문제입니다.

문: 글쎄요. 즐거움은 가상일지도 모르지만 고통은 현실입니다.

M: 고통과 즐거움은 언제나 함께 다니는 겁니다. 하나로부터의 자유는 둘 모두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만약 선생이 즐거움을 바라지 않는다면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그러나 그 둘 모두는 실재가 아니며 완전히 그 둘을 넘어선 행복이 있어요. 지금 선생이 아는 행복은 묘사할 수도 있고 측정할 수도 있어요. 일테면 객관적인 것이지요. 그러나 객관적인 것은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어요. 뭔가 외적인 것과 자신을 동일시한다면 그건 중대한 실책이 될 것입니다. 여러 차원들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해요. 실재는 주관과 객관을 넘어서 모든 차원과 구분을 넘어선 자리입니다. 확실하게 단언하는데 실재는 즐거움이나 고통의 근원이나 뿌리가 아닙니다. 즐거움이나 고통은 진리에 대한 무지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묘사할 수 없고 존재와 비존재를 넘어선 진실 자체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에요.

문: 여러 선생님들을 제가 따랐었고 많은 가르침을 공부해 봤지만, 그 어느 것도 제가 원하는 것을 주지 못했습니다.

M: 자아를 발견하려는 바램이 간절해서 다른 것은 전혀 바라지 않는다면 반드시 성취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솔직해야 하고 참으로 다른 것을 전혀 바라지 말아야 해요. 만약 다른 많은 일들을 원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데에 몰두한다면 선생이 얻고자 하는 바램은 모순된 충동 사이에서 찢기지 않을 때까지 미루어질 것입니다.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말고 절대 바깥은 보지 말고 내면으로 들어가도록 해요.

문: 그러나 저의 욕망과 두려움은 여전합니다.

M: 그것이 기억 속 이외에 어디에 있겠어요? 그 욕망과 두려움의 뿌리가 기억에서 생겨난 그대 속에 있음을 깨달으세요. 그리하면 욕망과 두려움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지는 않아요.

문: 개선과 낙후, 진보와 후퇴는 함께 진행되는 것이므로 사회적 봉사라는 건 끝없이 되풀이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M: 일단 착수한 일은 완성하시고, 새로운 일은 고통과 고통으로부터의 구제라는 구체적 상황에 의해 하게 되는 것이 아니면 일부러 일을 만들지 말도록 하세요. 먼저 자신을 발견하고 나면 끝없는 축복이 뒤를 잇습니다. 이익을 포기하는 것만큼 세계를 이롭게 하는 게 없어요. 더 이상 이익과 손해의 관점에서 생각지 않는 사람이 진정 비폭력적인 사람 이예요.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모든 갈등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지요.

문: 그렇습니다. 저는 언제는 비폭력이라는 관념에 끌렸습니다.

M: 기본적으로 아함사(ahimsa, 비폭력) 라는 것은 말 그대로 "해치지 않는다." 는 뜻이지요. 우선, 해야 할 일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해치기를 멈추고 고통을 더하지 않는 것이에요. 비폭력은 타인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 저는 남을 즐겁게 만드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게 아니라 타인을 돕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M: 줄 가치가 있는 유일한 도움은 더 이상의 도움에 대한 필요를 없애주는 겁니다. 계속되는 도움은 진정한 도움이 될 수 없어요. 만약 타인을 모든 도움의 필요로부터 넘어서게 할 수 없다면 남을 돕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아요.

문: 어떻게 하면 우리가 도움의 필요를 넘어설 수 있나요? 그리고 타인이 그렇게 되도록 어떻게 도울 수가 있습니까?

M: 분리되고 한계 지워진 모든 존재가 고통의 씨앗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모든 생명과 하나 되어 순수한 생명으로서 살 의사가 있고 또 그리할 수 있으면 모든 도움의 필요를 넘어선 것이지요. 그렇게 돼서 타인을 도울 때에는 계율로써 도울 수 있고 보기로써 도울 수 있고 그 무엇보다 우리들의 존재 자체로서 도울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가졌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넘어서 체험한 것 외에는 지닐 수가 없어요. 되어본 것만을 줄 수 있어요. 그러한 자신의 참존재는 무한히 줄 수 있습니다.

문: 모든 존재가 고통스럽다는 것은 사실입니까?

M: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이처럼 모든 우주가 행복을 구하고 있나요? 행복한 사람이 행복을 구하나요? 사람들은 얼마나 불안해하며 얼마나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습니까? 그렇게 끊임없이 움직이며 즐거움 속에서 위안을 구하는 이유는 그들이 고통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행복은 즐거움이라는 달콤한 환상에서 느껴질 뿐입니다.

문: 만약 지금의 저와 같은, 현재 제가 저라고 여기고 있는 한 인간이 행복할 수 없다면 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M: 현재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존재로 남기를 멈추는 방법만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절대로 잔인한 말이 아니예요. 악몽에서 잠을 깨우는 것은 동정심이고, 지금 선생이 여기에 온 것은 선생이 고통에 처해 있기 때문이니 내가 하는 말은 깨어나라. 자기 자신을 알라, 자기 자신이 되라는 말입니다. 고통의 목적은 즐거움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은 고통과 즐거움 모두를 넘어서 있으며 그것을 시비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 행복의 추구는 끝나고 행복의 결과인 고통도 멈출 것입니다. 고통은 즐거움을 향하고 있으며 즐거움은 언제나 고통으로 끝날 뿐입니다.

문: 궁극의 상태 속에서는 행복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M: 고통도 없어요. 오직 자유만이 있어요. 행복은 뭔가에 의존하기 때문에 상실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란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상실될 수가 없어요. 고뇌로부터의 자유는 인과로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파괴될 수 없어요. 그런 자유를 깨닫도록 해요.

문: 저는 제 과거의 결과로서 고통을 겪도록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자유라는 게 가능하긴 한 겁니까? 제가 제 자신의 의지로 태어났습니까? 저는 단지 하나의 피조물이 아닌가요?

M: 출생과 사망이라는 것은 단지 의식 속에서 여러 사건들의 흐름이 시작되고 끝나는 것뿐이 아닐까요? 분리와 한계라는 관념 때문에 사망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고통으로부터의 일시적인 안락을 우리는 즐거움이라 부릅니다. 그리고서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끝없는 즐거움을 구해서 허공에 집을 짓습니다. 이건 모두 오해요. 오용입니다. 깨어나서 미망을 넘어서서 참으로 살도록 하세요.

문: 제가 아는 것은 작고 저의 힘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M: 자아는 그 둘의 근원이므로 지식과 힘을 넘어서 있습니다.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은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지요. 자아의 본성은 순수한 자각이요, 순수한 관조로서, 지식이나 좋고 싫어함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자신의 바탕을 태어나고 죽는 육신을 넘어 지니게 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미망에서 깨어나 자유로워지세요. 선생은 분리된 개아(個我)가 아닙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