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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최고의 스승은 당신의 내적 자아이다...아이 앰 댓 상권

작성자이니그마|작성시간26.06.22|조회수37 목록 댓글 0

35. 최고의 스승은 당신의 내적 자아이다...아이 앰 댓 상권

문: 사방에서 들어보면 욕망과 심리적 성향으로부터의 해방이 깨달음의 최초의 조건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느끼기엔 이 조건을 성취한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자기 본성에 대한 무지가 욕망을 일으키고 욕망은 무지를 지속시킵니다. 정말 완벽한 악순환이 아닙니까?

M: 깨달음에 있어서 충족 되어야 할 조건 같은 건 없어요. 행해야 할 일도 포기되어야 할 일도 없는 거예요. 지각되는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며, 자신이 지닌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보고 기억하도록 해요. 그것은 의식의 장 속에 있으나 선생은 장도 그 내용도 아니며 그 장을 아는 사람조차 아닙니다. 선생을 노력의 결과 속에 빠뜨리는 일을 선생이 해야 한다고 하는 건 선생의 관념일 뿐입니다. 동기, 욕망, 성취의 실패. 좌절감 , 이 모든 것이 선생을 있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발생하는 모든 일을 그냥 무덤덤하게 바라보고 자신이 그것의 너머에 있음을 알도록 하세요.

문: 제가 어떤 일을 행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는 뜻입니까?

M: 그건 불가능해요. 할 일은 해야지요. 만약 멈추면 깨져 버릴 것 아니겠어요?

문: 앎의 대상과 아는 자가 하나로 되는 일입니까?

M: 그 둘 모두가 마음 속의 관념이고 그 관념을 표현하는 말일 뿐 그 속에는 자아가 없어요. 자아는 그 사이에도 그 너머에도 없어요. 정신의 수준에서 그것을 찾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찾기를 멈추고 봐야 해요.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겁니다. 그것은 선생이 그처럼 잘 아는 "내가 있음" 이지요. 선생이 할 일이라고는 자기 자신의 의식 속에 있다고 여기는 착각을 중지하는 것뿐입니다. 만약 선생이 이 문제를 이미 신중히 생각해 본 일이 없다면 내 말을 한번 듣는 것으론 충분치 못해요. 과거의 경험이나 성취했던 일들을 잊어버리고 벌거벗고 서서 삶의 비바람에 자신을 드러내 놓는다면 기회가 있을 거예요.

문: 헌신(bhakti) 이 선생님의 가르침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까?

M: 건강하지 못할 때에 우리가 의사에게 가면 의사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치료방법은 무엇인지 말해줍니다. 환자가 의사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위험을 감수해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직접 약을 연구해야 할 겁니다. 어쨋거나 선생을 움직이는 것은 낫고 싶은 욕망이지 의사가 아닙니다.

신뢰가 없으면 평화가 없어요. 사람은 언제나 누군가를 신뢰하고 있는데. 어머니나 아내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사람들 중에서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 자유인이야말로 가장 믿을 만 합니다. 그러나 단지 믿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아요. 동시에 큰 발원(發願)이 있어야 해요. 

만약 자유에 대한 간절한 원(願)이 없다면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는 확신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바램과 믿음이 함께 가야 해요. 원(願)이 굳세면 굳셀수록 도와주기가 더 쉬워져요. 제자가 배우기를 갈망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뛰어난 스승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아요. 

간절함과 진지함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확신은 경험과 함께 생겨나는 것이니, 자신의 목표에 헌신하면 선생을 이끌어줄 수 있는 사람에 대한 헌신은 자연히 생겨날 거예요. 만약 원이 크고 믿음이 확고하다면 이것들이 선생을 목적지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주저하거나 타협함으로써 지체되는 일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지요. 최고의 스승은 내면의 자아입니다. 진정으로 그는 최고의 선생이지요. 오직 그 분만이 선생을 목적지로 데리고 갈 수 있고 그분만이 길의 끝에서 선생을 맞아줍니다. 

그를 믿으면 외면의 스승은 필요하지 않아요. 그러나 내면의 자아를 만나려면 발견하려는 간절한 바램이 있어야 하고 장애를 일으키고 지연시키게 될 일을 하지 말아야 해요. 그리고 후회하느라고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됩니다. 만일 실수하게 되면 그것으로부터 배워서 그것을 또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문: 사적인 질문을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M: 좋아요. 해봐요.

문: 지금 선생님께서는 영양의 가죽위에 않아 계십니다. 이건 비폭력과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M: 내가 일을 하고 살던 시절에 내 직업은 담배 만드는 거였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건강을 망치도록 도운 셈이지요. 우리 집 앞에서는 시에서 공중변소를 세워놨는데 그것도 내 건강을 망치고 있었어요. 이런 폭력적인 세상에서 어떻게 폭력과 무관할 수 있겠어요?

문: 그렇지만 피할 수 있는 폭력은 피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인도에서는 모든 성자들이 호랑이나 사자, 표범, 혹은 영양의 가죽에 앉아 있습니다.

M: 아마 옛날에는 플라스틱을 구할 수가 없어서 그랬을 거예요. 그리고 사실 가죽이 습기를 차단하는 데에는 최고입니다. 아무리 성자라도 관절염은 매력이 없어요. 그래서 오랜 명상에는 가죽을 쓰는 전통이 생겼을 거예요. 사원의 가죽 북처럼 요가 수행자에게는 영양의 가죽이 쓰이게 된 거지요. 그러나 우린 이런 건 거의 신경 쓰지 않아요.

문: 그러나 동물은 그 때문에 살해되게 됩니다.

M: 가죽을 얻기 위해 요가 수행자가 호랑이를 죽인다는 말은 듣지 못했어요. 죽이는 사람은 요가 수행자가 아닙니다. 요가 수행자들은 죽이지 않아요.

문: 가죽을 쓰고 말고, 살생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표현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M: 무슨 말이오. 난 온 우주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데 그저 가죽 하나만을 부인해야 한단 말인가요?

문: 우주가 무슨 문젭니까?

M: 자신의 본성을 잊어버리는 것이 가장 큰 손실입니다. 모든 재난이 거기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돌보게 되면 사소한 것은 저절로 돌봐지게 되지요. 어두운 방을 정돈하려면 창문을 먼저 열어야 합니다. 빛을 들여놓는 것이 모든 일을 쉽게 만들어요. 그러니 우리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때까지, 그래서 스스로 변화할 때까지 타인들을 도와주는 것은 보류하도록 합시다. 끝없는 질문 속에서 돌고 돌 필요가 없어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나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문: 본성으로 되돌아가려는 충동은 아주 드문 일입니다. 그게 과연 자연스런 일입니까?

M: 처음에는 밖으로 나가지요. 그러나 마지막에는 안으로 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될 거예요. 그러나 실제로는 들숨 날숨이 하나이듯이 하나인 것입니다.

문: 마찬가지로 몸과 몸속에 있는 자도 하나가 아닙니까?

M: 시공 속의 사건들, 즉 출생과 사망, 원인과 결과, 이들이 모두가 하나로 간주될 수 있지요. 그러나 육신과 육화된 것( the embodied) 은 같은 진리의 질서에 속한 것은 아닙니다. 육신은 시공 속에 속한 것으로 덧없고 한계 있는 것이지만 그 속의 거주자는 시간도 공간도 없는 것이며 영원하고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이 둘을 동일시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며 끝없는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마음과 몸을 하나라고 할 순 있지만 몸과 마음은 근본의 실체가 아닙니다.

문 누구든지 거주자가 육신을 통제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육신에 대해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M: 컨트롤을 하고 있으며 책임이 있는 우주적 힘이 있어요.

문: 그렇다면 저는 제 마음대로 행동해놓고 모종의 우주적 힘에 비난을 돌려도 된다는 말입니까? 정말 쉽군요.

M: 그래요. 아주 쉬워요. 움직이는 모든 것의 뒤편에 있는 유일한 나를 깨닫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도록 해요. 만약 서두르지 않고 속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진실로 가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욕망과 두려움 없이 서서 모든 통제와 책임을 포기하세요.

문: 정말 미친 짓이군요.

M: 그래요. 신성한 광기라고나 할까요. 개인적 통제나 개인적 책임이라는 환상을 버리는 게 뭐가 문제가 되겠어요. 개인적 책임이나 조정이라는 것은 오직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에요. 물론 자신을 통제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한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고 여기겠지요. 결국 스스로를 다스린다는 거나 책임이 있다는 거나 같은 말입니다.

문: 어떻게 보편적인 것이 특별한 것에 책임이 있을 수 있습니까?

M: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태양에 의존하고 있어요. 그러나 태양은 궁극적 원인이라고 하더라도 발생하는 모든 일에 대해 태양을 비난할 순 없어요. 빛이 꽃의 색깔에 원인이 되지만 간접적으로 통제하는 것도,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빛은 색깔을 가능케 하고 그것이 모두에요.

문: 알지도 못하는 우주적 힘 속으로 도피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듭니다.

M: 사실에 관해서는 논쟁을 할 수가 없어요.

문: 누구의 사실 말입니까? 선생님의 사실 말입니까? 저의 사실 말입니까?

M: 선생의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선생은 나의 사실을 부정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선생은 그걸 모르니까 말입니다. 만약 선생이 그걸 안다면 부정하지 않을 겁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어요. 선생은 자신의 상상은 사실로 여기고 나의 사실은 상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난 모든 것이 하나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어요. 선생은 아무것에도 책임이 없다든가 모든 것에 책임이 있든가 둘 중의 하나예요. 하나의 육신만 책임이 있고 또 다스리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마음- 몸의 착각일 뿐이지요.

문: 사악함의 모든 무게를 하나님께 지우지만 않는다면 전 만족합니다. 제가 아는 모든 것에는 하나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게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 의해 투사된 개념일 뿐입니다. 선생님께서 그것이 하나의 실체일 수도 있지만 제게는 하나님보다 사회가 더 사실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사회에 의해 만들어지고 사회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지요. 선생님의 가치는 지혜와 동정이고 사회의 가치는 교활한 이기심입니다. 저는 선생님과는 전혀 다른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M: 그렇게 강요하는 사람은 없어요.

문: 그렇게 선생님을 강요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저는 강요받고 있습니다. 저의 세계는 하나의 사악한 세계입니다. 눈물과 노동과 고통으로 가득합니다. 진화나 카르마에 관한 이론으로 이것을 회칠해 버린다면 상처에 모욕을 더하는 것밖에 안됩니다. 사악한 세계의 하나님은 잔인한 하나님입니다.

M: 선생 자신이 바로 자기 세계의 신이에요. 선생이 지금 우둔하고 잔인한 겁니다. 하나님(God) 이라는 것을 하나의 개념이 되도록 하세요. 하나님이란 것은 스스로가 만든 개념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해서 살게 되어 악으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진선미를 갈망하게 되었는지 알아보세요. 만약 선생이 하나님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신이 무엇에 대해 말하는 지 모른다면, 하나님에 대해 좋게 또는 나쁘게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두려움과 희망에 의해 생겨나 욕망과 상상에 의해 형상 지워진 그러한 하나님은 참으로 존재하는 유일한 힘, 우주심과 우주의 가슴일 수가 없어요.

문: 저는 제가 살고 있는 세계와 제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둘 다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 욕망에 의해 창조되었나요? 저는 어째서 세계가 이토록 고통스럽고, 하나님이 이토록 무관심하다고 생각을 합니까? 제게 무엇이 잘못 되었길래 이처럼 저 자신을 잔인하게 학대해야 합니까? 깨달은 사람이 와서 제게 "그건 끝내어야 할 꿈일 뿐이야" 라고 말하지만 그것 역시 그 자신이 꿈의 일부가 아닙니까? 덫에 걸려서 벗어날 길이 없다고 느낍니다. 선생님께서는 자신이 자유롭다고 하시는데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우십니까? 맹세코 제게 말로 하지 마시고 저를 깨우쳐 주십시오. 제가 꿈속에서 뒹굴고 있는 걸 보고 있는 건 선생님이시니 제가 깨어나도록 도와주십시오.

M: 내가 자유롭다고 하는 건 그냥 사실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선생은 지금 어른입니다. 선생은 옛날의 어렸던 선생으로부터 자유롭지요? 그처럼 난 표현된 모든 것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지금 선생이 듣고 보고 나에 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의 개념이나 지각의 대상이 아니에요.

문: 여전히 선생님은 육신을 지니고 있고 거기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M: 다시 선생은 선생의 관점이 유일한 바른 관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거듭해 말하지만 난 하나의 육신이 아니며 그랬던 적도 그럴 일도 없을 겁니다. 내겐 이것이 하나의 사실이에요. 나도 태어났다는 착각 속에서 산 시절이 있었지만, 나의 스승께서 생사는 모두 관념에 불과하며 출생은 "내가 육신을 지니고 있다" 는 생각이고 죽음은 내가 육신을 잃어버렸다." 라는 생각에 불과함을 보도록 해주었습니다. 이제 나는 내가 육신이 아님을 봅니다. 그리고 육신은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몸-마음이라는 것은 방과 같아서 거기 있긴 하지만 내가 그 속에 언제나 있을 필요는 없어요.

문: 하지만 육신이 있고 선생님은 그걸 돌보고 계십니다.

M: 육신을 만든 힘이 육신을 돌보는 것입니다.

문: 우리는 이 차원 저 차원을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M: 두 가지 차원을 고려해야 하는데. 하나는 사실에 관한 물질적 차원이고 또 하나는 관념들에 관한 정신적 차원입니다. 그러나 난 그 둘을 모두 넘어서 있어요. 선생의 사실이나 생각들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보는 것은 그 너머에 있는 것입니다. 나의 입장으로 건너와서 나와함께 보도록 하세요.

문: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 내가 육신이다.> 라고 믿는 한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돌봐주실 것이다." 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지 않을 겁니다. 그 분께서는 육신이 굶어서 병들어 죽도록 내버려두실 겁니다.

M: 단순한 몸에서 그밖에 무엇을 기대하겠어요? 왜 선생께서는 그 점에 대해 그렇게 신경을 쓰지요? 자신이 육신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그것이 파괴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적당한 훈련을 하면 상당히 수명을 연장할 수 있습니다만 그것이 과연 최상의 것일까요?

문: 오래 건강하게 사는 것이 낫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었을 때의 실수를 교정할 기회를 주고, 청년기의 좌절, 노년의 비참함이나 정신적 노쇠함을 피할 기회를 줍니다.

M: 어쨋거나 오래 살아봐요. 그런 선생은 주인이 아닙니다. 나고 죽는 날을 결정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아요. 선생의 언어는 모두 가정과 추측에 근거한 말입니다. 지금 선생은 자신이 알지 못하고 있는 일들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어요.

문: 그래서 제가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M: 선생은 아직 여기에 있질 않아요. 그러나 난 여기에 있어요. 들어와요! 그러나 선생은 들어오질 않아요. 오히려 내가 자기 식으로 살고 느끼고 자기 언어를 사용해 주길 바라고 있어요. 난 그렇게 할 수 없어요. 그건 선생에게도 도움이 안됩니다. 선생이 내게로 와야 합니다. 말은 마음의 일이며 마음은 초점을 흐리고 왜곡합니다. 그러므로 말을 넘어서 내 쪽으로 올 필요가 절대적으로 있어요.

문: 저를 건네어 주십시오.

M: 내가 그리하고 있는데 선생이 저항을 하고 있어요. 개념에 현실성을 부여하고 있는 겁니다. 개념이란 건 사실의 왜곡일 뿐입니다. 개념화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조용히 주의깊게 머무르세요. 이 일에 대해 진지해진다면 선생의 모든 일이 잘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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