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먼 제자에서 십자가의 제자로
막 8: 1-3
마가복음 8장은 예수님은 사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통해 자신의 긍휼과 풍성한 공급하심을 나타내시지만,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표적을 요구하며 믿지 않는다. 또한 제자들조차 떡 문제를 걱정하며 예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영적 둔함을 보인다.
이 장의 중심은 예수님의 정체성이 점차 드러나는 데 있다. 벳새다 맹인의 치유는 제자들의 불완전한 영적 시야를 상징하며, 이어지는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신앙고백은 마가복음의 중요한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 자신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예고하시며, 제자들이 생각한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구원자이심을 가르치신다.
[1-3]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3]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단순히 배고픈 사람들에게 떡을 주신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깊은 긍휼과 선한 목자 되심을 보여 주는 중요한 말씀이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며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스플랑크니조마이)는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 창자가 뒤틀릴 정도로 깊이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는 사랑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긍휼은 인간의 고통을 멀리서 바라보는 감정이 아니라, 그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특별히 예수님은 무리가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 먼저 그들의 필요를 발견하셨다. 사흘 동안 말씀을 듣느라 먹을 것이 떨어진 그들의 형편을 아셨고, 그냥 돌려보내면 길에서 기진할 것을 염려하셨다.이는 참된 신앙이 단지 종교적 열심이나 영적인 관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실제 삶과 필요를 함께 돌보는 것임을 가르쳐 준다. 또한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군중 전체가 아니라 각 사람의 수고와 형편을 기억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 장면은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이스라엘을 먹이신 하나님과 에스겔 34장에서 약속하신 선한 목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예수님은 굶주린 양을 먹이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결국 이 기적의 중심은 떡이 아니라 예수님의 긍휼이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필요를 아시며 영혼과 삶을 함께 돌보시는 선한 목자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부족함보다 변함없는 주님의 긍휼과 돌보심을 신뢰해야 한다.
[4-9]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5]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6]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더라 [7]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시니 [8]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9]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일곱 광주리"의 핵심은 숫자의 숨은 암호가 아니라 예수님의 풍성한 공급을 보여주는 실제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몇 광주리를 거두었느냐?"고 물으시며 숫자 자체의 상징보다, "그 많은 은혜를 경험하고도 왜 아직 믿지 못하느냐?"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초점은 "일곱이라는 숫자"보다 "일곱 광주리가 남을 만큼 풍성하게 공급하신 예수님" 에 있습니다.
사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통해 예수님의 풍성한 은혜와 공급하심을 보여준다.
제자들은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라고 말한다. 이미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했음에도 다시 현실의 부족함만 바라본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도 문제 앞에서 쉽게 염려하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라고 물으신다. 주님은 없는 것을 보지 않으시고, 우리가 가진 것을 사용하기 원하신다. 비록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몇 마리뿐이었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손에 들려질 때 놀라운 기적의 시작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주시자 사천 명이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도 일곱 광주리나 거두었다. 이는 주님의 공급이 부족하지 않고 완전하며 풍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준다. 우리는 현실의 부족함을 보지만, 주님은 "네게 무엇이 있느냐"라고 물으신다. 중요한 것은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것이 누구의 손에 맡겨져 있는가이다.
우리의 작은 시간과 재능, 물질과 믿음도 주님의 손에 올려드릴 때 많은 사람을 살리는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다. 광야에서도 떡을 준비하시는 주님을 신뢰할 때 우리는 참된 만족과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주님의 손에 맡겨진 작은 것이 가장 큰 기적의 시작이다.
[10-13]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12]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3]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예수님께서 사천 명을 먹이시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 후 달마누다에 이르시자, 달마누다는 갈릴리 호수 서쪽의 작은 마을로 추정되며, 영적으로는 많은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보여주는 장소이다. 바리새인들이 찾아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진리를 찾는 데 있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고 비난할 명분을 찾고 있었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이미 수많은 표적을 보았다. 병든 자가 치유되고, 귀신이 쫓겨나며, 오병이어와 사천 명 급식의 기적까지 목격했다. 그럼에도 또 다른 표적을 요구한 것은 표적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오병이어/ → 유대 지역/* 사천 명 급식/→ 이방 지역, 으로 구분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모습을 보시고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셨다. 이는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눈앞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도 끝내 믿지 못하는 완악한 마음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신앙 생활하면서 여전히 옛날 습관과 행동으로 교회안에 머무는 우리의 모습이다.
믿음은 더 많은 증거를 통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마음을 여는 데서 시작된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기적을 보아도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하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작은 은혜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불신앙과 완악한 마음으로 요구하는 증거 요청에는 응답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을 증명하시는 분이 아니다.
결국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오르신다. 이는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에게서 물러나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질문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끊임없이 새로운 증거와 기적만을 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께서는 이미 충분한 증거를 주셨다. 가장 큰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더 많은 표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말씀과 은혜를 붙드는 데 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는 표적을 원하는가, 아니면 나를 믿는가?"
참된 믿음은 눈에 보이는 증거가 아니라, 이미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는 데서 시작된다.
[14-21]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15]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20]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21]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이 본문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여전히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배 안에는 떡이 한 개밖에 없었다. 제자들은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때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신다.
>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여기서 "누룩"은 빵을 부풀게 하는 작은 효모를 의미하지만, 성경에서는 종종 사람의 마음과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사상과 영적 태도를 상징한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외식과 불신앙이다. 그들은 수많은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전통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헤롯의 누룩은 세속적 욕망과 자기중심적 권력 의식을 상징한다. 헤롯은 진리를 알면서도 자신의 자리와 체면 때문에 순종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영적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또 다시 떡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영적인 교훈으로 듣지 못하고 물질적인 문제로만 이해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신다.
>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둔하다"는 말은 마음이 굳어져 영적 분별력을 잃은 상태를 의미한다.
제자들의 문제는 떡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믿음이 부족한 것이 문제였다.
사실 그들은 이미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았다. 다섯 개의 떡으로 오천 명을 먹이셨고, 열두 바구니가 남았다.
또 일곱 개의 떡으로 사천 명을 먹이셨고, 일곱 광주리가 남았다.
그런데도 지금 배 안에 떡 한 개밖에 없다고 걱정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물으신다.>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주님의 책망은 떡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도 기억하지 못하는 믿음 때문이다.
우리도 종종 제자들과 같다. 어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했지만, 오늘 새로운 문제가 생기면 다시 두려워한다. 어제는 응답받았지만, 오늘은 또 염려한다. 그래서 믿음은 단순히 기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이 가장 원하신 것은 떡의 공급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공급하시는 분을 믿으라는 것이다. 제자들은 떡을 보았지만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 남은 바구니 수는 기억했지만, 그 기적을 행하신 분의 능력은 잊고 있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은 말씀하신다."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증거가 아니라, 이미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는 믿음이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불신앙이고,/ 헤롯의 누룩은 세상에 대한 집착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사람은 환경보다 주님을 바라본다.
배 안에 떡이 한 개뿐이어도 예수님이 함께 계시면 충분하다.
문제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문제 가운데 누가 함께 계시는가가 중요하다.
참된 믿음은 부족함을 보면서도 주님의 풍성하심을 신뢰하는 것이다.
[22-26]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벳새다 맹인 치유 사건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 가운데 매우 특별한 장면이다. 예수님은 다른 많은 기적처럼 단번에 고치지 않으시고, 두 번에 걸쳐 안수하심으로 맹인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신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한 사람을 향한 주님의 세밀하고 인격적인 돌보심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
예수님은 맹인을 만나시자 곧바로 기적을 행하지 않으시고 그의 손을 붙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다. 이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연약한 한 영혼을 향한 주님의 따뜻한 배려를 보여 준다.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에게 예수님의 손길은 가장 안전한 인도하심이었을 것이다. 주님은 병만 고치시는 분이 아니라 상처 입은 사람의 삶과 마음까지 돌보시는 분이시다.
첫 번째 안수 후 맹인은 사람들이 보이지만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그는 전혀 보지 못하던 상태에서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아직 완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다시 안수하셨고, 마침내 그는 모든 것을 밝고 선명하게 보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때로는 단번에 역사하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과정을 통해 사람을 회복시키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 속 아브라함과 요셉, 다윗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오랜 기다림과 연단의 시간을 지나야 했다. 하나님은 결과만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우리의 믿음과 인격을 빚어 가신다. 벳새다 맹인의 치유 역시 순간적인 기적보다 점진적인 회복의 은혜를 보여 준다.
또한 이 사건은 마가복음의 흐름 속에서 제자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많은 기적을 보았지만 아직 주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가는 이 사건을 통해 영적인 깨달음도 점차 깊어질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듯하다.
결국 이 본문이 주는 가장 큰 위로는 주님께서 한 번 만지시고 끝내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믿음과 삶이 아직 불완전할지라도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 벳새다 맹인을 끝까지 붙드시고 완전한 회복으로 이끄셨던 것처럼, 오늘도 우리를 인내로 인도하시며 점점 더 하나님을 선명하게 알아가도록 은혜를 베푸신다. 우리의 회복이 더디게 보일지라도 주님의 손길은 결코 멈추지 않으며, 마침내 온전한 회복의 자리까지 우리를 이끌어 가실 것이다.
[27-30]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침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마가복음 전체의 중심이자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지만, 이제 제자들에게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신다. 그것은 바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이 주어진 곳은 빌립보 가이사랴였다. 그곳은 로마 황제의 권세와 각종 우상 숭배가 가득한 도시로, 사람들이 세상의 힘과 영광을 의지하던 장소였다.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백을 요구하신다. 이는 단순히 예수님에 대한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참된 주인이 누구인지를 묻는 영적인 질문이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혹은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생각한다고 대답한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존경하고 특별한 분으로 인정했지만, 그분의 참된 정체성까지는 알지 못했다. 예수님의 능력은 보았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온전히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묻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질문이다. 세상이 예수님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님을 누구로 믿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신앙은 다른 사람의 고백으로 대신할 수 없으며, 결국 주님 앞에 선 한 사람의 믿음의 결단이다.
그때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한다. 이는 예수님이 단순한 선생이나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요 메시아이심을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이었다.
비록 베드로가 훗날 십자가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예수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을 고백하였다. 하나님은 완전한 이해보다 진실한 믿음을 기뻐하신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신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참된 신앙은 이 질문에 대한 올바른 고백에서 시작된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요 삶의 주인으로 믿고 따를 때 우리는 세상의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참된 제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결국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며, 믿음의 완성은 날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하며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데 있다.
[31-38]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예수님의 정체성과 제자도의 본질을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말씀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지만, 아직 십자가를 지시는 그리스도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사실 이것은 베드로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성도가 쉽게 빠질 수 있는 신앙의 모습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지만, 고난과 희생, 순종이 따르는 주님의 길은 부담스러워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메시아를 믿는 것과 메시아를 따르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임을 가르치신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순한 책망이 아니라 제자의 위치를 회복시키려는 말씀으로 볼 수 있다. "내 뒤로"라는 표현은 제자가 서야 할 자리, 곧 스승의 뒤를 따르는 자리로 돌아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예수님 앞에 서서 주님의 길을 바꾸려 했지만, 제자는 주님의 길을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다. 신앙의 성숙은 하나님께 내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나 자신을 맞추어 가는 데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는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과 순종의 자리를 의미한다. 십자가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인내해야 할 가정이 십자가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끝까지 감당해야 할 사명과 섬김이 십자가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 자체가 아니라 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믿음이다. 예수님은 먼저 십자가를 지셨고, 제자들은 그 뒤를 따라 걷는다.
또한 본문은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와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준다. 세상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을 성공이라 말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 참된 생명이라고 말씀하신다. 잃는 것 같지만 얻는 길이 있고, 죽는 것 같지만 사는 길이 있으며, 낮아지는 것 같지만 높아지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역설이며 복음의 능력이다. 35절에서 예수님은 역설적인 진리를 말씀하신다.
>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세상은 자신을 위해 살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내려놓을 때 참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신다.
36절과 37절은 인생의 가치에 대한 질문이다.
>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세상의 성공과 명예와 재물이 아무리 많아도 영혼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이다. 영혼의 가치는 온 세상보다 크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조롱과 핍박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평가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충성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신다.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을 아는 것과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십자가의 길은 쉽지 않지만, 그 길 끝에는 부활의 영광과 참된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길을 선택하며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