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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두산

작성자최수용(뉴욕)|작성시간15.07.26|조회수492 목록 댓글 0
 

퇴근후 판매처 순례

김준경 사원은 입사 뒤 얼마 안돼 박두병 사장의 눈에 띄 게 된다. 동양맥 주에 입 사,1 년 반 동안 무역 업 무를 담당한 김 사원 은 기획실로 자리를 옮기고 3년째 되던 해에 사장 ’비서로 기용된다. 이 때부터 탄탄한 그의 인생항해가 시작된다. “촌티가 물씬 풍기는 사람이 사장 비서가 되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우스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사장 비서실에서 1 년이 지나자 그에게 미국 지사 발령이 났다. 때는 1968년이었다. 동양맥주는 1966년부터 생산부문에만 적용하던 해외 연수 방침을 개선해 관리부문에까지 확대 적용했다. 1년에서 2 년의 단기 연수를 시행해 8명이 해외 연수를 마쳤다.

“공채 4기인 그는 3기 선배보다 먼저 미국에 가는 행운 을 얻게 되었습니다.” 동양맥주는 젊은 사원들에게 꿈에도 그리는 미국 일본 독 일 등지에 보내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상경계 출신 사원은 미국과 일본의 지사로 보내 경 영 안목을 높이 며 경영훈련을 쌓도록 하고 이공계는 독일로 보내 양조학 학위를 취득하도록 유도했다. 이 무렵 독일에서 양조기술 박사가 돼 금의환향한_인물로 는 백화양조의 조사흥 사장,두산종합기술원 백운화 부원 장,종합기술원 명남진 전무 등 3명 이 있다.

이보다 한발 앞서 독일에서 공부한 한국 양조학 박사 1 호인 선우 일(鮮干 溫) 박사가 동양맥주 초대 공장장으로 근 무했다. ‘옹박사’란 별명을 가진 선우박사는 한국인의 입맛 에 딱 맞는 맥주맛을 개발하기 위해 몰두했다. 그는 연구가 곧 동양맥주를 살리는 첩경이라고 생각한 불굴의 집념을 가 진 과학자였다. 젊은 김사원의 눈에는 선우박사의 연구생활이 아름답게 비쳐졌다.

“공장에 갈 때마다 연구실 아니면 현장에서 공장 근로자 들과 함께 일하고 있는 선우박사를 보는 것은 하나의 즐거 움일 정도였습니다.” 패기에 찬 김준경 사원은 미국에서 경험한 일화가 있다. “미국 사람은 나의 직업을 물을 때 으레 교수,의사, 그렇지 않으면 태권도 사범 중 어느 것일 거라는 투였습니다. 내 가 비즈니스맨으로서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하면 의 아한 태도를 보이기 일쑤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을 아는 사 람은 6 • 25 전쟁이 난지 20여년의 세 월이 흘렀건만 미개한 나라로 취급했습니다.” 미국인들 가운데는 그에게 모욕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인에게도 고유문자가 있는지 등을 물어올 때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까지 했다. 5천년 단일민족의 역사를 가지고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라는 ‘우리 말과 글’ 을 가진 후예의 가슴에서는 뜨거운 피가 솟구쳐 올랐다.

미국지사에서 2년 동안의 외국생활을 마치고 돌아온지 이틀만에 동양맥주의 영업을 담당하는 판매 조사과장 발령 을 받았다. 1970년 9월 판매조사과에 배치된 김준경 과장 은 희사 퇴근시간에 집으로 곧장 간 적 이 없다. 주요 판매처 를 한바퀴 돌며 상황을 점검했다. 술매상이 한창 오를 시간 인 야간에 순찰을 돌며 외상값이 터무니없이 많은 거래처의 동태를 살폈다. 그래서 김과장을 예고 없이 만나려면 OB의 시음장으로 가면 반드시 볼 수 있었다.

수금상 이상기류가 떠있는 대리점은 밤마다 술집을 순례 하는 김과장의 안테나에 에누리 없이 붙잡혔다. 김과장은 성실히 열심히 장사하는 대리점에게는 회사 차원에서 지원 을 강구해 끝까지 회생시키는 작업을 펼쳤지만 술을 판 대 금으로 딴청을 부리는 업소는 과감히 정리했다.

김 과장은 공동판매를 담당한 회사가 해체된 1973년 12월 에 판매부가 영업부로 개칭되면서 조직이 확대 개편될 때 대구 출장소 소장직 발령을 받았다. 부산에만 있던 출장소<!--[endif]--> 를 서울 대구 대전 광주에도 개설하고 서울과 부산에는 직 매 장을 두었다.동양맥주는 조직을 재편성하면서 경쟁사인 조선맥주에 뒤졌던 지방에서의 판매활동을 만회하고자 영업 사원을 대 폭 보강하면서 영업본부 조직을 축소하고 지방조직을 확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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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단명 영업부장

 

동양맥주 서울 영업소장을 거쳐 본사 영업부장에 오른지 4개월만에 상무가 된 김 부장은 최단명 영업부장이다.

 

 

 

 

 

“사장님,외람된 말씀일는지 몰라도 저는 모가지 달아날 일을 저지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회의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이 숙연했다. 느닷없이 발표된 박사장의 한마디에 김부장의 머리는*순식간에 헝클어졌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박사장은 빙 그레 웃으며 당황한 김 부장을 바라보았다. “영업부장 자리가 모가지란 말일세 . 알아 듣겠는가.” 그는 동양맥 주 최 단명 영 업 부장 기 록을 남기 고 한국 오크 (현 두산전자) 상무이사로 전격 기용되어 주위에서는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다. 1977년 3월이었다. 이보다 한달전 77년 2월 한국 오크 주주총히에서 한국 오크에 대한 경영진단 결과를 바탕으로 근본적인 개선책이 논의되었다. 진지한 토론 끝에 한국 오크를 동양맥주가 한 국 실정에 맞는 경영을 이룬다면 혹자 전환이 가능하다는데 의견이 일치했다. 따라서 한국 오크의 경영권을 동양맥주가 맡기로 했다.

동양맥주측은 40%를 출자한 한국 오크사가 4년 동안 내내 적자 운영을 해 온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양 맥주 경영진은 결단을 내렸다. 동양맥주 기획실은 은밀히 한국 오크사의 적자 경영의 원인을 집중적으로 내사했던 것 이다.한국 오크는 1974년 2월 18일 최초 납입 자본금 1억2천 283만원으로 설립 등기를 마치고 국내 최초로 동박 적층판 전문 생산업체로 출발한 회사이다. 동박 적층판이란 절연 물질 위에 금속박을 입힌 뒤 인쇄 기술을 이용해 필요한 회 로를 인쇄하고 이외의 부분을 부식시킴으로써 전자 부품을 상호 연결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 동박 적층판은 전자공업 의 필수 소재로서 전자공업과 그 발전의 맥을 같이 해 왔다.

김준경 상무는 부임하여 부사장 월리엄 레터로부터 경영 권을 인수받는 작업에 들어갔다. 5개월에 걸친 경영권 인수 가 끝난 77년 6월부터 한국 오크는 실질적인 한국인 경영 체제로 이양되었다. “한국 오크는 자기 자본은 한푼도 안 남긴 빈털터리가 되 어 있을 뿐아니라 오히려 채무를 지고 있었습니다. 기술을 비롯해 모든 경영을 새롭게 하기로 각오하고 정상화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동양맥주에서 관리직과 생산직 사원 8명을 받아 인원 보 강과 업무 체계를 확립했다. 76년까지 매년 1 억원 이상의 적자를 낸 회사가 경영 체 제가 바뀐 첫 해에 혹자로 돌아섰다. 77년의 혹자는 7백만 원이었다. 비록 얼마 안되는 돈이지만 김상무가 살던 아파 트 22평 값과 맞먹는 액 수였다. “직원들을 일본 거래처에 보내 눈 도둑질로 기술을 배워 오도록 했습니다. 직원들은 일본 회사를 방문할 때 보아 둔 설계도를 밤새 기억을 되살려 그려 왔습니다.”

그리고 보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관리가 가능하도록 했 다. 김상무는 우선적으로 작업자들에게 원가 의식을 갖도록 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그는 작업자들과 잦은 대화를 하여 일체감을 조성하며 원가절감에 대한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 했다. 김상무가 작업 현장을 순시하다가 발견한 일화는 그 당시 모든 사원에게 원가절감의 중요성을 알려준 하나 의 본보기가 되었다.

수지 혼합장에서 생긴 일이었다. 한 사원이 드럼통에 담 긴 수지를 탱크에 퍼올리고 있었다. 수지를 퍼낼 때 사용하 는 기구는 철 파이프였기 때문에 그 구조상 드럼통에서 수 지를 완전히 퍼낼 수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쳐 이미 비워져 옆에 놓여 있던 드럼통을 거꾸로 세워 놓게 하였다. 드럼통 벽면과 밑바닥에 묻어 있던 수지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말 끔히 홀러 나왔다. 이 뒤로는 모든 사원이 수지를 일단 퍼낸 다음 드럼통을 장시 간 거꾸로 세 워 한방울의 수지도 낭비 하지 않고 사용하게 되었다. <!--[endif]--> 

“1978년에는 반별 포상제도를 실시하여 원가절감을 가속 화했습니다. 생산직의 2부 교대 근무를 이용하여 각 반별 월 불량률이 일정수준 이하일 때에 해당 반원 전체를 포상 하는 이 제도는 사원들의 경쟁심을 유발시켜 불량률을 줄이 는 데 목적을 둔 것으로 불량률 감소라는 직접적인 효과도 컸지만 간접적인 효과가 더욱 컸습니다. 불량률을 낮추기 위해서는 반원 전체의 단합된 힘이 필요했습니다.” 결국 직 원들의 단합도 부수적 인 효과로서 자연히 이루어졌다.

78년 초,껍데기만 인수받았던 한국 오크는 국내 전자공 업이 고도 성장을 이룩하면서 전반적으로 수요가 급증하자 늘어나는 수요에 대비 하기 위 해 증설을 했다.김 상무는 구미공장 가동이 시 작된 79 년 12 월 15 일, 한국 오크사 전무로 숭진했다. 그러나 한국 오크는 구미공장의 제품이 줄하되면서 세계 경제를 강타한 제 2차 유류파동으로 전자공업 계의 침체현상 과 일본 업체들의 덤핑 공세로 부진을 겪으면서 경영 위기 에 빠졌다.

“1980년 국내 동박 적층판 업계가 극심한 판매 부진을 겪으면서 경영 위기에 봉착하게 되자 국가 차원에서의 조치 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정부는 동박 적층판 업체,조립업체, 가공 업체간의 관련자 회의를 8월 29일부터 두차례에 걸쳐 개최하고 각계의 의견을 수렴했습니다.” 이를 토대로 정부는 1980년 11 월 25일 단계적인 수입 제 한 조치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수입 추천기관인 한 국 전자공업진흥회가 같은 해 12월 26일 수입 추천 요령을 공고하여 보호 조치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한국 오크는 “바람직한 기업문화란 한마디로 한 기업의 구성원들이 강한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의식이 물질 적으로 구체화돼 나타날 때 가름할 수 있는 총체적 표현으로서 이때 비로소 그 기업은 ‘강한 기업문화’를 가질 수 있습니다.” <!--[endif]--> 

1981 년 1월 6일 공장 가동을 재 개 하고 조속한 시 일 내 에 국제 경쟁력을 구축하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여 나가기 시작 했다. 모든 조립업체로부터 승인을 받고 내부적인 품질 개 선 활동을 통하여 점 차 생 산과 판매 에서 안정을 찾아갔다. 1983년 미국과 서구 지역의 경기가 회복되자 전자공업의 급격한 성장 추세에 따라 동박 적층판의 수요도 급증했다. 정부의 전자공업 육성 정책에 크게 힘입은 한국 오크는 국 내 동박 적층판 업계를 대표하는 업체로서 외국의 유수한 업체와 당당히 겨룰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다.

1986년 1월 4일 한국 오크는 두산전자주식회사로 상호 변경 등기를 마치고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 두산전자는 문자 그대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구 축하게 된 것이다  두산전자에서 대형 사건이 발생했다. 그 건은 김사장 의 가슴에 못을 박는 아픔이 었다 “일본 출장 중인데 두산전자 페놀 유출사건이 터졌다는 급보를 받았습니다. 미처 일을 다 끝내기도 전에 허겁지겁 서울로 뛰 어 들어왔습니 다. 김포공항에 도착하기도 전에 비 행기 속에서 받아본 국내 신문마다 대문짝만하게 두산 전 자 페놀 유출사건’ 기사가 새까맣게 실려 있었습니다.

 

 

 

 

 

사건을 그리면서 그의 입가에서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이윽고 순식간에 그의 두 눈에서 눈물방울이 주루룩 홀러

 

 

 

내렸다. 김사장의 가슴 속에 묻힌 아물지 않은 상처가 다시 아파왔던 것이다. 나는 적자에 허덕이던 두산전자의

 

 

 

 

전신인 한국 오크사 를 재건한 당사자로서 세계적인 기업체로 성장한 두산전자 의 공장 구조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 습니다. 두산전 공장 설비는 페놀을 일부러 쏟을 수 없게 된 시설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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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특히 언론에 보도된 내 용대로 사람들이 믿고 있다는 것이 그를 슬프게 한다고 했 다. 김사장이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마자 옷을 갈아 입기 위 해 집에 들렀을 때 가족들의 얼굴빛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 었다. 당시 이화여대 3학년인 큰딸의 질문은 그를 더욱 가 슴아프게 했다.

“아빠,여 태까지 그런 회 사를 다니셨어요.” “왜 그러니.” “신문마다 두산전자가 고의로 오염물질을 유출했다는데 요.”

 

“두산전자는 절대로 그런 회사가 아니란다.” “그러면 왜 신문 방송 등에 그렇게 나왔나요.” 아버지와 딸은 한참 동안 실랑이를 했다. 딸은 언론에 발 표된 내용만을 믿으려 할 뿐 애써 사실을 말하려는 아버지 의 뜻이 가슴에 와 닿지 를 않는 듯했다. 김사장은 흐느껴 울고 있는 딸의 등 뒤에 힘없는 목소리 로 말했다. “두산전자는 절대로 그런 회사가 아니란다.” 아무도 없는 광야에 홀로 선 채 허공에 마구 쏟아 붓고 있는 외 침 같았다. 만신창이가 된 두산전자만큼 그의 가슴은 상처 투성이였 다. 세상 사람들은 오발탄에 맞아 쓰러진 사람의 억울함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김사장을 잘 아는 친구들마저 두산전자의 무죄를 인정하지 않고 어쩌다 운이 나빠 걸린 것이라고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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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 건설회사의 인수

 

 

정도(正道)를 중시하며 매사를 순리적으로 처리하는 김사 장은 몸에 벤 현장주의 경영인이라고 직원들은 평가한다. 그는 한번 약속하면 끝까지 행동으로 옮기는 ‘신보스형’ 경 영인으로 아랫사람들의 인기가 높다.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진솔한 언어로 다가서는 김 사장을 나타내 보이는 일화가 많다. 1986년 11 월 15일의 일이다. 노조가 없는 한국 오크사에 7년동안 몸담았던 김사장은 덕수건설종합개발(현 두산개 발) 대표이사 사장이 되었다. 아마 두산건설(주) 전무를 맡 은 것이 계기가 된 듯싶다.

먼저 덕수종합개발을 두산그룹이 인수한 배경을 알아보자. 덕수종합개발주식회사는 1970년대 중반까지 ‘별표 전축’ 과 ‘아리랑 TV’로 명성을 쌓은 천일사의 창업주 정봉운 씨 가 1978년 6월 1일 부직포 제조업체인 한국위재공업주식 회사를 인수함으로써 설립되었다. 정봉운 씨는 한국위재공 업의 인수와 동시에 상호를 덕수개발주식회사로 바꾸고 전 자제품 종합전시장 설치 운영,판매 업,상가점포 및 사무소 임대업으로 사업을 변경해 부동산 임대사업에 참여하게 되 었다.덕수종합개발은 1979년 1월 서울시 교육위원회와의 계 약에 따라 을지로 6가에 위치한 덕수상업고등학교의 건물과 부지를 인수하고 사세확장을 위해 자본금을 9억원으로 증자함과 동시 에 주택 건설업과 주차장 사업을 확장했다.

1982년에는 국민소득 증대에 따라 새롭게 부상하는 스포 츠레저 산업에 진출했다. 그 일은 1981 년 12월에 자금부족 으로 중단된 마산 돌섬 유원지 개발사업을 삼성개발주식회 사로부터 인수하면서 비 롯되 었 다. 1982 년 5 월 3일 국내 최 초의 해상 유원지를 개장하고 돌섬에 마산사업소를 설치하 여 유원지를 운영 관리하였다. 800명 이 한꺼번에 수영을 즐 길 수 있는 해수 풀장과 서독 일본 등지에서 수입한 오랑우 탄 등을 포함한 520여마리의 동물을 갖춘 해상동물원 등이 설치돼 있었다. 3천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해상종합유원지 이다.

건설공사,스포츠 레저 사업 그리고 부동산 임대업 등을 통해 급속히 성장해 온 덕수종합개발은 1985년을 전후해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타 격은 중동 경기의 퇴조와 국내 건설 경기의 침체였다. 해외 로 진출한 건설업체들이 국내 시장으로 몰림 에 따라 덕수종 합개발은 국내 공사의 수주 확보에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채산성 없는 공사를 무리하게 수주하였 다.

1986년에는 누적된 부채가 모두 1 천 130억원으로 늘어났 다. 은행빚을 얻어 은행 이자를 갚는 악순환이 거듭되는 지 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해 8 월 주거래 은행인 제 일은 행은 채권확보와 종업원 및 중소 하도급 업체의 연쇄 도산 등을 방지 하기 위 해 은행 관리 에 착수하는 한편 두산그룹 계 열사인 동산토건(주)(현 두산건설)에 회사의 경영을 위탁했다.

 

“부실한 덕수개발 노조는 두산그룹이 인수하자 하늘 높 은 줄 모르고 요구사항을 늘어 놓았습니다. 노조는 회사

 

 

 

 

사간의 갈등이 노골화돼 회사 경영이 악화되 기 일보 직전 노조간부들과 담판을 내야 했다. 장소는 마산 돌섬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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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대형사건이라도 터질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습니다.”이러한 일촉즉발의 분위기 속에

서 김사장과 노조간부들 이 탄 배가 돝섬으로 기수를 돌렸다.

 

돌섬에 도착하자 마자 노조 간부들은 김사장만 홀로 남겨 두고 다시 마산 선착장 으로 떠나가버렸다. 즉 협상의 뜻이 없다는 표현이었다. 그 들은 단 한척의 배도 남겨두지 않고 떠났다. 돌섬에는 김사 장과 몇명의 사무직원이 전부였다. 꼼짝없이 갇힌 신세가 되었다.<!--[endif]--> 

노조원들과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어보겠다는 일념으로 뛰어든 돌섬의 돌개바람은 포악스러 웠다. 돌섬 유원지 관리 소장이 괴로운 표정으로 앉아 있기만 하는 김사장에게 말을 걸었다. “사장님,마산 매립현장에 동산토건 배가 한척 있는데 그 배라도 띄울까요?” 동산토건은 김사장이 덕수개발종합으로 오기 전 재임했 던 회 사이 다. 그러나 그의 대 답은 단호했다. “내가 왜 남의 회사 배를 탄단 말이오.”

관리소장은 더 이상 말도 못 붙이고 옆으로 비켜섰다. 김 사장은 홀로 사무실에 앉아 이 생 각 저 생 각을 떠올렸다. 여 러가지 상념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돌섬 유원지를 바 라볼 때는 중고교 시절 수영선수 생활을 하던 자신의 모습 이 그려졌다. 1 천 500m코스를 완주하기 위해 물속에서 갈 증이 일면 수영장 물까지 들이마신 그 시절을 회상하였다. 그러면서 혼자 회심의 미소를 짓기도 했다. 이 때다. 몇 척의 배가 희미한 안개 너머로 모습을 드러 내기 시작했다. 마산 선착장에서 기다리 다 지 친 노조원들이 회사 배를 타고 들어오고 있었다. 노조원을 실은 배는 전투 에 출전하기 위해 떠나는 군함처럼 보였다. 노조원들의 이 마에는 여전히 빨간 띠가 둘러쳐져 있었다.

노조 간부들이 김사장에게 다가왔다. 김사장은 반가운 내 심을 저며 놓고 말문을 열었다.

“이마의 빨간 띠나 풀고 이야기합시다. 그래 나를 여기에 얼마나 가둬 둘 생각이었소.” “사장님이 말을 들어 줄 때까지 농성을 할 생각이었습니다.“우리 서로 감정을 터 놓고 말해봅시다. 노조가 요구한 보너스 협상부터 의논합시다. 적자투성이 회사를 인수하자 마자 갑자기 的0%의 보너스를 내라는 것은 너무 무리가 심하지 않소. 그러면 나도.이 회사 인수하는 것을 포기하겠 소.”

김사장이 단호한 결심을 나타내자 협상 테이블은 조용했 다.

“미안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계약하지 않으면 협상할 수 없습니다.”

김사장은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한 치도 물러설 수 없 다는 자세를 보였다. 협상장은 순식간에 웅성거리기 시작했 다. 웅성거림도 일순간이고 노조원들이 조건을 수락했다.

노조와 협상이 끝나자 긴박한 돌섬의 순간들이 백사장의 흰 파도처럼 밀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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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개라는 별명이 좋아

 

 

 

그 뒤 두산유리(주) 사장을 거쳐 두산그룹의 모기업체인 두산상사(주)의 경영을 맡고 있는 김사장은 인간적인 체취 가 물씬 풍기는 ‘두산의 신사’이다. 업계에서는 김사장을 두 고 묵묵히 업무를 완수하는 ‘소리없는 승부사’라고 평한다. 만나는 사람의 가슴에 신뢰 감을 남겨 주는 그는 정통 두산맨 으로서 자타가 공인하는 순리주의 자이 다.

이러한 이면에는 그의 청소년 시절의 이력서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김사장은 서울사대 부중 고교 시절 싸움질 잘 하는 ‘문제학생’이었다고 스스럼 없이 소개한다.

“나는 중 고교 때 전국에서 1 등을 한 수영선수라는 것 이 외에는 내세울만한 것이 없습니다. 남녀공학인 중 고교 시 절의 친구들 가운데는 ‘어깨’가 많았습니다.” ‘어깨’가 드센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한 그의 학교 성 적 은 반석 차가 70 명 중 25 등 안팎이었다. 고2 때이다. 그는 반친구와 싸워 큰 상처를 입혔다. 이를 안 담임 선생님이 그의 학부모를 호출했다. 학교 수업을 끝 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은 천근 만근 무거웠다.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집에 도착할 때는 저녁 해의 꼬리 가 서 쪽 하늘의 보자기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 였다. 자신의 방으로 쓴살같이 들어간 김준경은 은행에서 퇴근 하고 들어오신 아버지의 인기척 소리에 깜짝 놀랐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밥상을 물리 고 난 뒤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고 말했다.

“아버지,학교에 한번 가보셔야 되겠어요.”

“준경이 잘못한 일이 있는가 보구나.”

그는 뒤통수를 긁적 거 렸다.

“실은 뛰어 놀다가 반친구와 싸웠어요.”

아버지가 학교에■ 오신다는 시간은 마침 체육시간이었다. 당번을 대신 하면서 교무실로 들어가시는 아버지를 발견했 다. 아버지는 교무실에서 한참만에야 나오셨다. 아버지의 뒷모습은 그렇게 우울해 보일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선생 님에게 수업 태도는 물론 학업성적까지 모두 알아보고 난 뒤 자식을 걱정하며 걷고 있었다.김준경은 이러한 아버지의 심사를 헤아리며 다짐했다. “열심히 공부해 부모님에게 효도해야지.”그러나 그의 학교 성적은 수영연습을 해야만 하는 여름방 학 이전까지는 부동의 위치를 고수했다. 고3 김준경은 밤을 새우며 공부했다.

드디어 대학 입 학원서 시즌이 다가왔다. 학교에서는 매 일 지원학교별 사정회가 열렸다. 김준경은 8월말까지 한번도 400점대를 기록하지 못했다. 그러나 9월부터 400점대를 넘 어섰다. 밤늦게 책상 앞에 앉아 지원할 대학을 고민하고 있 었다.“광주 학생의거 때 연루돼 고교(현 경기고)를 중퇴한 아 버지의 은행 월급으로 많은 식솔을 거느린 가정형편이 저의 마음 한구석에 불만이 되었던가 봅니다. 상대를 나와 사장 이 되면 그런 심사를 보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서을대 상 대를 지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사정회에 참석한 교사들은 중•고 때 성적이 뛰어나지 않 은 보통 수준의 김준경 이 서울대 상대를 지 원하겠다는 것이 무모하게 여겨졌다. 3학년 2학기의 반짝한 성적으로는 믿 을 수 없다는 이야기까지 덧붙였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교 감선생님이 일어섰다.

“김준경이의 학교 성적은 전체적으로 낮은 편입니다. 그 러나 성적이 중간석차에서 꾸준히 상향조정된 사실에 주목 해 봅시다. 이는 준경이가 내재된 실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성적이 향상된 기간은 준경이가 수영연습이 끝나는 시점입니다.”

교감 선생님은 더 설명했다. “얼마전 학교를 돌다 우연히 발견한 일인데 준경이가 방 과 후 매 일 남아 친구와 청소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만 큼 성실한 학생입니다.”

사정 회에 참석한 눈들이 김준경 학생에게 모아졌다• 김준경은 사정회에서 서울대 상대로 결정된 시간부터 거 의 밤을 새우며 공부했다. 서울사대 부고 수영선수가 서울 대 상대에 합격한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주위 친구들 가운데는 사무착오로 서울대 상대에 들어 간 것이라고 농담을 하는 애들도 있었습니다.”

김준경이 서울대 상과대 원서를 쓸 수 있는 기회를 마련 해 준 친구는 전종국 군이다. 홀어머니 슬하에서 공부한 우 등생 전군이 특차전형을 실시한 고려대 상대의 우수 장학생 으로 진학하는 바람에 무리 없이 서울 상대 원서를 따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준경은 서울대 상대에 들어가서도 기록을 경신했다. 그 당시도 운동이라면 꼴찌를 맡아 놓다시피 한 서울대 수영선 수로 전국체전 등에 출전해 우승기를 가져왔다. 그 덕분에 대학 4년 동안 체육 점수는 모두 A였다.

그의 학창시절 별명은 물개,깜둥이였다. 또한 대학 친구 들과 술내기 오락을 할 때 판돈을 어김 없이 챙기는 것을 보고 회계사 또는 변호사라고도 놀려댔다. 맥주의 호프 냄새가 짙게 밴 김준경 사장의 인터뷰를 마 치고 돌아오는 길i에 인간적인,너무나 인간적인 김준경 사 장에게 축복을 벌었다. 그는 요즘 집에서 가까운 영화교회 에 나가 감사 찬송을 부를 때는 감사의 뜨거운 눈물을 삼킨 다. 주말마다 나가던 골프장도 평화와 안식을 말하는 십자 가상의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마다한다. 그는 일요일에도 바쁘다. 영화교회에서 성가대장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대 기업 사장과 성가대장…….주변에서 그를 인간적인 체취가 물씬 풍기는 ‘두산 신사’ 로 표현하는 이유를 알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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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으로 쌓은 마케팅 실무 이론가

한국컴퓨터주식회사 이 동 수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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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객과의 끊임없는 대화

 

경영 인의 경 영활동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의 하나가 마 케팅 분야이다. 그 중요성은 경영인 스스로 인식하는 것보 다 훨씬 더 크다. 이를테면 유능한 경영인이 되는 조건 중 의 하나가 마케팅 능력의 보유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 부사장은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의 대부분을 국내 마케 팅 분야에서 일해 왔을 뿐 아니라 그 분야에 연구도 많이 한 마케팅 전문가이다."경영이란 고객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고객을 위하고 고객이 원하는 기업이라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고 객의 마음 속에 우리의 사랑이 전해질 때 고객도 우리를 좋 아하게 될 것입니다."

이 부사장의 경영철학은 다분히 고객 지향적이다. 아마 그것은 그가 마케팅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해 왔기 때문에 자연히 형성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말은 대단히 설득력 이 있었으며 능변이었다. 고객과의 끊임 없는 대화 때문이 아닐는지. 이 부사장이 오늘날 전문 경영인으로 입신하기지의 경력 자체가 하나의 마케팅 활동의 압축구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국마케팅클럽의 회원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그 동안 수집 한 수많은 마케 팅 사례를 갖고 있으며, 바 쁜 틈을 내서 한국생산성본부의 마케팅관리사 과정 초빙강 사로 출강해서 후진들에게 마케팅의 이론과 실천 사례들을 가르치고 있다.  

"요즈음의 마케팅은 너무 기교에 의존하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다시 원점에서 원칙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마케터(Marketer)는 소비자의 진정한 욕구를 면밀 히 파악해서 그것을 제품으로 구상화하고,그 실체와 이미 지를 소비자에게 호소함으로써 소비자의 사랑을 받도록 노 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 부사장은 이렇듯 원칙적인 마케팅을 강조한다. 제품에 대한 아이디어는 연구실에서 나오기 보다는 소비자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마케 팅 부서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이 또한 그의 주장이 다. 이 부사장이 70년대 초 해태제과에서 과자판매 부장으로 일할 때 광고 CM 송과 관련된 재미 있는 사례가 많다. 맛동산 먹고/맛있는 파티의 맛동산 과자를 비롯해서알알이 알알알사탕의 알사탕과 아카시아껍 등의 신제 품들이 거의 동시에 개발 출시됐고,홈런을 쳐서 소비자들 의 인기를 독차지한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땅콩과 고소한 맛을 좋아한다는 점 에 착안 하여땅콩으로 버무린 튀김과자!’ 맛동산이 개발되었고,우 리가 어렸을 때 먹고 맛이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는 눈깔 사 탕一달지 않고,알이 크며,깨물면 으지직 잘 부서지는一의 아이디어로 알사탕이 개발되었다. 하도 제품들이 잘 팔려서 이 제품의 원료인 땅콩이 품귀가 되어 가격이 2~3배로 뛰 었다. 대부분 과자의 제품수명 이 1 년 이내인데 반해 이 제 품들은 20년 이상 장수하여 지금도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 고 있다.

한창 재미 있게 과자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던 어느 날 음료사업부에서 일하라는 회사의 발령을 받았다. 당시 해태 제과는 음료시장으로의 진출을 위하여 음료사업부를 신설 했는데 신사업 초창기이고 롯데칠성, 코카콜라 등 막강한 경쟁사들과 시장에서 싸워야 하기 때문에 형편이 대단히 좋 지 않았다."마케팅 분야에서 근30년간 일해 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음료사업부 근무 시절이고 또 가장 보람 있었던 때도 그때입니다. 어려웠던 음료사업부의 마케팅 기반을 구축하 여 판매증대에 성공한 것이 보람이지만 너무나 고달프고 힘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득하지만 음료 마케팅이 성공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함께 땀홀려 일한 동료들 덕분 입니다."라고 이 부사장은 그 시절을 회상한다.

"막강한 경쟁사인,코카콜라, 롯데칠성과의 싸움에서 생 존하려면 무언가 다른 전략을 수립 할 필요가 있다고 생 각했 습니다. 제품 차별화를 위해 천연과즙 음료인 오렌지 주스 와 희석과즙 음료인 써니텐을 주력 제품으로 삼았습니다. 왜냐하면 경쟁사 제품들이 사이다나 인공향을 첨가한 음료 이기 때문이지요. 소비자들도 소득의 증대와 함께 천연과즙 음료를 원하기 시작하던 때 였습니 다. 효율적 인 자동차 루트 세일 조직을 구축하고 타사들이 갖고 있지 않는 방문판매 조직 도 만들었 습니 다. 공격 적 인 광고와 감미 로운 CM 을 통 해 소비자들에게 천연과즙 음료 씬키스트 오렌지주스와 써 니텐의 이미지를 심어갔습니다."

해태 써니텐의 CM송은 김도향 씨에게 의뢰해서 만들었 다. ‘사과 하나 그대로 써니텐/귤 하나 그대로 써니텐/ 마셔 봐요 써니텐 정말 좋아요/해태 써니텐, 아주 감미롭고 소비 자에게 잘 기억되고 잘불려지는 CM송이었다. 그런데 이 CM 송 가사가 문제가 되었다. 식품관계를 담당하는 정부 부서에서 CM 송을 듣고써니텐에 사과나 귤이 정말 한 개 가 들어가 있느냐며 확인해 왔다. 사실 그때는 공정거래법 이 시행되기 전이어서 사전에 시험을 해보고 CM송 가사를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관계기관의 요청이니 할 수 없 이 과수원에서 원료용으로 수매한 귤과 사과를 들고 가서 시험에 응했다. 다행히 귤, 사과 한 개분의 과즙량이 써니텐 에 함유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어 무사했으나소비자가 원료 용이 아닌 시중 판매용 사과나 귤 한 개가 들어 있는 것으 로 오인할 수 있으니 CM 송 가사를 바꾸라고 권고를 받았 다. 그래서사과 하나 그대로사과 맛이 그대로로 바뀌었다.

당시에 구축했던 방문판매 조직 방판용 제품인 훼밀리주 스는 아직도 활발하게 판매되고 있으며 소비자의 사랑을 계 속 받고 있다.톱 메이커에서 메이커의 입장으로만 마케팅을 하던 이부 장에게 반대 입장에 서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해 태와 미원이 합작해서 만든 유통회사인코스코(지금 이름은 해태유통)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해태유통에서의 1년은 해태제과의 5년과 같은 귀중한 체험을 그에게 주었다. 경영 에서 소비자가 갖는 위치를 재확인 한 시기였으며,메이커 의 오만한 자세에서 행해 왔던 과거의 마케팅 활동을 반성 하고 소비자와 유통업자의 위치에서 마케팅을 다시 볼 수 있게 한 시기였다. 제품을 판매하기 위하여 방문하는 각 메 이커들의 수많은 판매사원들을 관찰하면서 세일즈맨의 속 성을 파악하고 그들의 훈련방법을 터득하고 확인할 수 ;었 다.

 

1979년 가을,해태유통 이동수 상무는 진로의 영업본부 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상무가 진로에서 펼친 위스키 마 케팅은 하나의 드라마와 같다.오랫동안 소주시장을 지배해 온 진로는 소주진로의 상 품력과 주류의 독특한 유통경로 때문에 고압적이고 오만한 마케팅을 하고 있었으며, 판매원들은 판매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배급을 하는 형편으로 취약점이 많았다. 이때 정종 메 이커인 백화가베리나인이라는 국산 위스키를 처음 개발 출시하였고 진로도 이에 뒤질세라길벗-로얄이라는 위스 키를 개발하여 시장에서 백화의베리나인과 부딪쳤다. 그 러나 그 결과는 진로의 참패로 나타났다.

"1 차 위스키 전쟁에서 진로가 백화에 진 원인은 아주 간 단합니다. 백화는 한국 소비자들의 입에 맞는 위스키 베리 나인을 만들었고, 진로는 영국 소비자들 입에 맞는 위스키 길벗-로얄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음주 문화는 양 적으로 마시는 문화입니다. 칵테일 해서 조금씩 음미해가며 마시는 서양의 음주 방식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목에 넘어 갈 때 부드러워야 합니다. 백화는 이점을 간파해서 처음부 터 부드러운 맛의 위스키를 만들었고 진로는 그렇지 못했습 니다. 그뿐 아니라 병 모양도 베리나인은 손에 잡기 쉽고 표 면이 넓어 상표가 멀리서도 잘 보이는데 로얄은 병 모양이 둥글어 한 손에 잡기 어렵고 상표가 베리나인보다 어둡고 좁아 업소에서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리점망도 백화는 위스키가 가장 많이 팔리는 살롱, 나이트클럽,요정 등 업소 에 강력히 침투할 수 있는 사람들을 다수 포섭 하여 구성한 데 반하여 진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진로의 마케팅 부서에서는 이러한 시장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고,기존 제품으로는 위스키 시 장에서의 열세를 만회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소비자들의 욕구를 정 확히 파악하고 그것에 근거한 마케팅 전략을 다시 수립할 필요가 있었다.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의 임종원 교수팀의 지 도와 협조로 정밀한 시장조사가 실시되었고, 진로 위스키의마케팅 상의 문제와 전략방향이 설정되었다. 소비자의 입맛 맞는 신제품을 시장에 내서 전세를 역전하자는 것이 주 된 전략이었다. 마침 그때 국세청에서도 신규격의 특급 위 스키 제조를 위스키 3사인 진로, 백화, OB에 지시한 사건 이 발생했다. 우리나라의 모든 주류는 주세법의 규제를 받 도록 되어 있는데 국세청은 주세법에 의거,주류의 제품,가 격,유통경로,판매촉진 등 모든 분야에 강력한 행정력을 행 사할 수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행사된 것이다. 이동수 상무가 이 호기를 놓칠 리가 없었다. 소비자의 입 맛에 맞는 가장 부드러운 위스키,한국인이 좋아하는 10각 형의 각병,부르기 쉽고 기억에 남는 좋은 이미지의 브랜드 네임, 이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 VIP라는 진로 특급 위스키 였다. 또한 대리점망을 재편하여 강화했고 지원체계를 마련 했으며 VIP를 연상하는 판촉물들도 제작되었다. 진로의 VIP,오비씨그램의패스포트,백화의베 리나인 골드 킹이 맞붙은 위스키 제2차 전쟁에서 업계의 선두를 달리던 백화가 참패를 했고 결과적으로 백화는 두산그룹에 매각되 어 주인이 바뀌어지는 사태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는 진로에서 고객 서비스 시스템을 만들었다. 당시 위 스키 3사는 막대한 광고비를 TV 광고에 투입했다. 그러나 위스키 소비자들의 귀가시간이 늦기 때문에 인기 프로그램 에 맞추어 TV 광고를 해도 실소비자들이 광고를 볼 수 있 는가가 문제였다. TV 광고의 효율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었 다. TV 광고비의 일부를 전용하여 실소비자에게 서비스함 으로써 그들을 진로 민모의 고객으로 만들자는 것이 고객 서비스 시스템의 기본 취지였다. 고급업소에서 위스키를 마실 수 있는 고객들은 자연히 소수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에서도 특별히 선별된 위스키 Heavy UserOpinion Leader 가 차곡차곡 카드화되어 쌓여져갔다. 그들 을 일일이 방문하여 VIP를 설명하고 좋은 업소를 추천하고 건강음주에 관한 지식,매력 있는 판촉물을 기증하는 등 정 성 어린 방문과 서비스가 계속되었다. 고객의 생 일, 그 부 인- 생일,결혼 기념일 등에는 카드가 보내졌고 승진,경조 사 때에는 그에 따른 의전이 행해졌다. 이렇게 해서 고객과 진로 VIP 사이가 훈훈해졌고 고객의 VIP 지명도가 높아지 기 시작했다. 고객 서비스와 관련된 에피소드도 많다. 고객 의 부인 생 일, 결혼 기념 일에 축하 카드를 보냈는데 고객인 남편이 부인 생일,결혼 기념 일을 잊어버려 부부싸움이 벌 어진 사례가 그것이다. 부인 말씀이 "얼마나 술집에 자주 다녔으면 술 회사에서 이런 카드까지 보내왔겠느냐"고 바 가지를 긁어 버 렸단다.

 

진로에 입사할 당시 이동수 상무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도림장로교회의 집사였다. 예수를 믿는 교회 집사가 술 파 는 직업에 종사한다고 생각하니 몹시 고민되고 망설여지게 되었다. 그는 며칠간 생각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사람들이 술 마시는 3단계가 있다. 술을 마셔 즐거움을 느끼는 단계 가 있는데 이 단계에서는 술이 사회에 공헌을 한다. 다음은 술이 술을 마시는 단계 , 술이 사람을 마시는 단계 등으로 술이 사회에 해악을 주는 단계가 있다. 이상무는 첫번째 단계 에서만 술을 팔아 사회에 즐거움을 선사하고 건전한 음주문 화를 구현하는 데 노력 하겠다고 스스로 약속하고 출발했다.

그래서 그가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일 중에는칵테일 음 주운동가정에서 가족,친지, 친구들과 어울려 즐겁게 음 주하기 운동등이 있다. 칵테일 소개 책자를 발간 보급하고 회사에 칵테 일 교육 전담부서를 만들어 기업체,여성단체, 사회단체 등을 순회하며 칵테일 교육과 건전한 음주방법을 교육하고,싼 가격으로 칵테일 파티를 주선하는 일 등을 했 다. 한 회사나 개인의 힘으로 사회적 음주 관행을 개선하려 한다는 것이 무모한 일이었는지 진로나 이 전무(1979 년 전 무로 승진)의 노력이 결실을 맺지는 못한 것 같았다. 5년여 의 주류 마케팅에 종사하느라고 심신이 피곤해진 이동수 전 무는 진로의 계열회사였던 화장품 회사인 쥬리아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주류와 화장품은 소비재라는 점에서는 같으나 다른 면이 너무도 많다. 우선 주류의 소비자가 대부분 성년 남성인데 반하여 화장품의 소비자는 여성이 대부분이다. 제품의 라이 프 사이클이 길고 제품의 수가 비교적 적은 주류에 비해 화 장품은 제품의 수가 대단히 많고 제품 수명도 짧다. 유통경 로도 화장품은 당시에는 방문판매 위주였으나 주류의 경우 는 대리점과 슈퍼마켓 등에서의 판매가 주종을 웠다.이 전무가 해태제과 음료사업부에서 방문판매 조직을 구 축하고 육성했던 것이 쥬리 아에 와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방문판매를 운용하고 있는 화장품 회사에서의 교육은 특별 한 의미를 갖는다. 방판을 위해 정기적으로 미용지도사원, 판매사원을 모집하고 교육시켜야 하며 계절별로 그들을 재 교육하고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교육해야 하기 때문이다.또 제품 종류가 워낙 많고 제품 수명이 짧아 유행과 첨단 피十과학 이론에 맞게 제품을 정기적으로,그리고 수시로 개발하여야 했다. 더구나 매출채권이 워낙 많아서 대리점, 방판사원별로 매출은 줄이지 않으면서 매출채권을 줄이는 어려운 작업을 해야만 했다이 모든 일이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없으나 이동수 전무에 게는 쥬리아에서의 마케팅이 진로 때보다 더 적성에 맞고 즐거웠던 것 같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피부와 화장품의 관계에 대해 공부하고,요원들을 교육시키고,제 품을 개발하고,대리점을 육성하고, 매출채권을 회수하는 등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부임 첫 해 승용차 운 행거리가 7.8만km였습니다. 그러나 일하는 것이 즐거웠습 니다."우리나라의 생활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소비자들은 더 개 성화되고 방문판매원을 통해 화장품을 구매하던 관습이 여 러 회사의 제품을 비교하여 직 접 구매하는 방향으로 변화하 게 되었다. 이 전무는 이러한 조짐을 일찍 감지하고 과감하 게 특약 도매점 판매를 늘려 화장품업계에서의 시장 점거율을 높여갔다.

비타민 C가 피부를 검게 하는 멜라닌 색소의 형성을 억 제하거나 형성된 멜라닌 색소를 환원한다는 실험 결과에 의 거, 여성의 소망인 얼굴을 희게 하는 화장품을 개발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비타민 C가 상온에서는 불안정해서 원 료로 사용하기가 곤란한 것이 난점이었다. 일본 모 기업에 서 비타민 C의 안정성 문제를 해결한 비타민 c 유도체 아 스코르빈산 인산 에스테르 마그네슘염을 개발했다는 정보 가 입수되었다. 지체없이 기술자를 일본에 파견, 이 원료를 도입해서 개발 출시한 제품이 본격적인 미백 화장품르미 에르였다. 경쟁사보다 시장 진입이 3~4개월 앞섰고 소비 자의 사랑을 받아 많은 판매실적을 올렸다.1988년 말 이동수 전무는 우연히 신문에서 친구 홍국태사장의 기사를 보게 된다. 컴퓨터 회사를 창업하여 크게 성 장시킨 능력 있는 기업가가 소설가로 변신하여 장편소설을 출판하였으며 문학에 전념하기 위하여 기업경영에서 손을 땐다는 기사였다. 하도 의외의 소식이라 흥국태 사장에게 문안 전화를 했고 기사 내용에 관해 물어보니 사실이라고 했다. 그 후에 홍사장이 쓴 장편소설피와불이 집으로 우 송되어 와서 읽어보았다. 이북에서 간첩으로 넘어온 그의 친척에 관한 이야기인데 소재가 아주 특이하고 내용이 진지 하여 재미있었다. 그런데 그 며칠 후 홍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좀 만나자는 얘기였다. 흥사장은 여의도 그의 사무실 에서 이전무에게 한국컴퓨터에 와서 일해주기를 열정적으 로 요청했다. 홍사장의 얘기는 대단히 설득력이 있었고 한 국컴퓨터가 매력 있게 다가왔다. 그러나 이 전무로서는 쥬 리아가 적성에 맞는 회사였고 컴퓨터 분야에 전혀 문외한이

전직한다는 것이 쥬리아에게는 미안한 일이었고 본인에 게는 고민이었다. 이 런 과정 을 거쳐 1989 년 2월 이동수 전무는 한국컴 퓨터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긴다."과자 회사에서 술 회사로,또 화장품 회사로 옮길 때는 전혀 문제가 없이 쉽게 적응하고 마케팅을 리드할 수 있었 습니다. 그것은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를 상대로 한 소비재 마케팅이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컴퓨터 회사는 다릅니다. 제품들이 매우 기술 지향적이 고 판매방식도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과거보다 더 많은 공부와 노력이 요구되었습니 다."그러나 이 부사장은 끊임없는 연구와 성실한 노력으로 이 들 어려움을 하나씩 하나씩 극복한다. 소비재 마케팅이건 하이테크 제품의 마케팅이건 고객에게 제품과 회사의 이미 지,자기의 인격을 함께 판다고 하는 점에선 같다. 회사 내 부에선 강력한 팀워크를 만들어 실력을 쌓고 고객으로부터 는 신뢰성을 얻는 데 전력을 다해갔다. 회사의 실적은 매년 견실하게 성장했고 증시에서 한국컴퓨터의 주식은 항상 고 가로 거래되었다."한국컴퓨터는 다른 회사와 달리 순수한 국내 자본으로 설립된 공개회사입니다. 많은 제품들을 국산화해서 외산을 사용할 때보다 현저히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함으로써 고객 들과 국가경 제에 이 바지 하여 왔습니 다."이 회사의 주요 시장인 금융기관의 주변기기에 관해 살펴 보자. 옛날 외국기업이 지점관리 컴퓨터터미널, 키보드통장프린터 MSRW 등 주변기 기 한 세 트를 1 천 500 만원 이 상으로 판매했던 것을 한국컴퓨터가 완전히 국산화해서 500만원대로 판매하고 있다."우리 한국컴퓨터주식회사는 컴퓨터의 모든 분야에서 앞 서 가려고만 하지 않습니다. 특정한 분야에 집중 투자해서 회사를 전문화해 나가고 있습니다."실제로 한국컴퓨터는 금융분야 전산화에 상당한 노하우 를 축적해 놓았고 그 결과로 전국 은행에 3만여대의 금융단 말기를 공급하여 업계 시장점거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EDI(Electronic Data Interchange, 전자문서교환) 분야에도 일찍부터 눈을 떠 한국 최초로 무역자동화 사업 체 인 한국무 역 정보통신 (KT-NET)에 EDI 시스템을 SI(System Intergra- tor, 시스템 통합자)로 공급하였다. 우리 나라에 EDI에 의 한 무역자동화가 이루어짐으로써 시간인력 비용이 현저 히 절감되고 효율이 엄청나게 향상되는서류 없는 무역시 대가 조만간 도래될 것이다. VAN 사업 또한 이 회사가 역 점을 두고 추진하는 신규사업이다. 서울, 경기 지역 지하철 이나,편의점 또는 교통의 요지에 한국컴퓨터의 현금자동지 급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네트’(HAN NET)라고 명명 된 이것들은 현금이 별안간 필요하게 된 서민들에게 언제 어디서나 신용카드로 간편하게 현금을 인출해 쓰게 하는 VAN사업이다 이 회사의 또 하나의 강점은 세계적으로 가장 앞서가고 있는 미국 TANDEM사의 NON STOP COMPUTER 를 비 롯해서 MOTOROLA, OLIVETTI, NSC, ACI 등 세계적으 로 유명한 컴퓨터와 통신관련 회사들의 하드웨어와 소프트 웨어들을 취급한다는 것이다. 또 이들 제품 중의 일부는 국 산화되어 그들의 기술이 한국 실정에 맞게 개선되어 우리 것이 되었다는 점이다. TANDEM 컴퓨터는 부품 일부가 고장나도 정지없이 계 속 운용되는 세계 최초의 무정지형 컴퓨터로서,24시간 서 비스가 제공되 어 야 하는 업 무에 탁월한 능력 을 발휘 하고 있 다. 한국에서도 금융결제관리원, 신용카드 회사들, 증권 회 사들에 공급되어 그 진가를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다-

1974년 4월에 홍국태(현 한국문학사 주간) 씨에 의해 창업되어 금년에 20주년을 맞은 한국컴퓨터는 종업원 여 명,자본금 154억,연간 매출 800억원의 중견기업으로 성장 했고 컴퓨터업계를 선도하는 하이테크 기업으로 확고한 위 치를 구축하고 있다. 이제 2(W0년대를 눈앞에 두고 흥승채 회장 이하 전 임직원이 다시 도약하기 위한 착실한 준비를 하고 있늑 중이다.

미래 컴퓨터산업의 전망 "컴퓨터는 기술의 발전 속도가 아주 빠릅니다. PC 를 한 번 보십시오. XT—-AT—386 —486—펜티엄칩에 의한 PC 로 정말 눈이 돌아갈 정도로 빨리 발전하고 있습니다. 따라 서 기술이 적시에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는 기업은 컴퓨터 산업계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반도체 와 메모리가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의 컴퓨터 산업의 발전 수준은 아주 미미한 단계에 머 물고 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PCCPU 칩이나 운 용 s/w(o/s) 등 원자재의 일부를 수입해서 생산하긴 해도 PC는 세계적인 수준에 거의 올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 다음 단계부터는 단계가 올라갈수록 수준이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일부만 국산화하거나 외국에서 주 요 부품을 들여와 조립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한국의 첨단 산업은 발전의 소지가 많은 분야입니다. 많은 회사에서 자 체 기술이나 독자적인 노하우를 개발하지 않고 외국기술을 도입하거나 적당히 베끼고 있는데 이렇게 해서는 장기적으로 발전하지 못합니다. 외국기술을 도입해도 그것을 우리 것으로 소화하고 그것을 기초로 본래 것보다 더 향상된 기 술을 만들어내 야 합니 다.""다행히 정부 주도로 국산 컴퓨터 TOLERANTTI- COM 이 개발되어 시 판되고 있습니다. 아직 부족한 것이 많 지만 시일을 두고 보완한다면 중형 이상 규모의 컴퓨터 시 장에서도 국산 컴퓨터의 모습을 더 많이 볼 수 있게 될 것 입니다."이 부사장은 한국의 컴퓨터 산업에 많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한국 사람들이 근면하고 명석한 두뇌를 갖고 있기 때문에 업계 모두가 성실하고 창의적인 자세로 도전한다면 어느 수준까지는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음악에 심취했던 대^^시절

이 부사장은 학교 공부 외에 음악활동을 많이 했다. 서울 상대에 합창단이 있었고 음악을 좋아하는 학생들이 많아 매 년 정기 연주회를 갖기도 했다. 그래서 서울 상대를 서울 음 대 종암동 분교로 부르는 짓궂은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합 창지 휘 를 맡았던 박응서 현 삼성 석 유화학 사장의 노래는 프 로를 능가했다. 그리고 반주는 미국에 이민 가 있는 김길성 (김달성 교수의 동생)이 맡아 했다. 이 부사장은 정용익(한 일은행 부장), 호민선(재미 공인회계사), 이광언(재미 사업) 들과 함께 중창단을 구성하여 연주회 때마다 노래를 했다.연주회는 서울 음대 리사이틀 홀(동대문운동장 앞쪽)에서열렸는데 한번은 배꼽을 잡고 웃을 일이 벌어졌다. 연주 순 서에 피아노 트리오가 있었다. 바이올린에 송인구(부스타 보일러 부사장),첼로에 이용구(한비산업 사장), 피아노에 김길성 등 3명이 모차르트의 군대행진곡을 연주했는데 청 중석에서 학생들이 연주에 맞추어 발을 굴렀다. 연주하던 송인구 군이 일어나 보면대를 발로 걷어차며 "음악도 들을 줄 두르는 이 무식한 상대 놈들 앞에서 연주할 수 없어"하 고 ᅪ활」値홱�. 이때 덩치가 큰 이용구 군이 첼로 연주를 중 지하며 한마디 거들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고.

군대를 학보병으로 갔다온 친구들이 복학 후 모여 경제학 을 연구하는 모임인 MACRO(매크로)’를 만들어 이승윤 교 수(당시 서울 상대에서 경제발전론을 가르쳤다. 현 국회의 원)를 모시고 연구와 토론에 열을 올리곤 했다. 그때의 우정 이 지금까지 계속되어 정기적으로 만나 우의를 다지고 옛날 에 즐거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 있다. MACRO 의 멤버들은 이승윤 교수 외 이필곤(중앙일보 사 장),장배식(배성무역 사장), 노창송(대창상사 사장),채오병 (제일모직 대표이사),전상희(선경정보시스템 사장), 이상언 (선경 아주본부장), 김광수(영풍기계 사장),김영만(선경 아 메 리카 사장),이동수 등이 다.선생님을 사랑한 국민학생이 부사장은 평범한 가정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이연광학(주)의 직원으로 근무했으며 집안은 넉 넉 하지 는 않았으나 평 화로운 가정 이 었다. 그 당시 6 25 전쟁과 휴전이 이어져 서울시내로 들어가지를 못하고 영등포 에 살면서 영등포국민학교를 졸업했다. 경기중학교에 들어 갈 정도로 성적이 뛰어났고 노래를 썩 잘 불렀다고 한다.

국민학교 1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인 김영숙 선생님을 무 척 좋아했다. 여자 선생님의 모든 것이 아름답고 좋았다. 국 민학교 2학년이 될 무렵 김영숙 선생님은 같은 학교 교사인 김광원 선생님에게 시집을 갔다. 그래도 시집 간 여선생님 은 그의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몇 십 년 후 도림교회 2대 목사였던 그녀의 아버지 김영환 목사님의 영결식장에 서 김선생님을 다시 뵈었다. 그녀는 너무 늙어 보였다."선생님, 저를 기억하십니까.?""선생님을 무척 좋아했던 이동수입니다. 선생님은 국민학 교 1 학년 때 저희 담임선생님이셨습니다."선생님은 초췌한 모습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옆에는 선생 님의 부군도 자리하고 있었다. 상가였지만 잠시 옛일을 회 상하며 모두들 웃고 말았다.산으로 들로 신나게 뛰어 다니던 국민학교 친구로는 연세 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인술을 펼치다가 캐나다로 이민 간 김철기 박사, 강직한 교육자 전도웅 유도대 교수, 선교의 사 명을 받고 소련 선교사로 떠나 현지에서 목회하고 있는 유 의경 목사가 잊혀지지 않는 친구들이다.신앙과 함께 하는 생활,노래하는 생활교회를 떠나서는 이 부사장을 생각할 수 없다. 이 부사장 의 가정은 어머니,두 아들,그리고 부부 모두 수십년간 도 림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이 부사장 댁의 가훈 역시 기독교 적이다. ‘감사하는 생활’ ‘사랑하는 생활’ ‘일하는 생활이 그것 이 다. 그의 집은 항상 음악과 노래 가 그치 지 않는다. 음 악대학에 가려고 했을 정도로 성악에 소질이 있는 그와 부 인은 두 아들과 함께 솔리스트로, 성가대원으로,주일학교 교사로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 그의 두 어머니 ᅳ畸�는 친어 머니와 장모님을 결혼 이후 20여년간 모시고 함께 살고 있 다 一는 모두 교회 권사이며 가정과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 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그는 한국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이웃 사랑에 인색한 것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 한국 기독교인이 천주교인까지 합쳐서 1천만 명에 이르는데,한 국 사회가 이렇게 부패하고 어려운 것은 일차적으로 기독교 인들의 책임이 크다고 강조한다. 교회생활 뿐 아니라 사회 생활에서도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 이다.이 부사장은 통상 회사에 일찍 출근하는 편이다. 회사에 도착하면 우리 회사가 사회에 기여하며 소비자에게 사랑을 받는 회사가 되게 해달라고,저에게 경영의 지혜를 달라고, 회 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 광 돌리 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그는 한국컴퓨터주식회사의 부사장이자 교회 장로이다. 그리고 아들이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해 서울대 경제학과 부자 동창이 된 행 운아이다.

 

 

 

 

 

 

 

 

 

 

 

 

 

 

 

 

 

 

 

 

 

 

 

 

 

 

 

 

 

 

 

 

 

 

 

 

 

 

 

 

 

 

 

 

 

 

 

 

 

 

 

 

 

 

 

 

 

 

 

 

 

 

 

 

 

 

 

 

 

 

 

 

 

 

 

 

 

 

 

 

 

 

 

 

 

 

 

 

 

 

 

 

 

 

 

 

 

 

 

 

 

 

 

 

 

 

 

 

 

 

 

 

 

 

 

 

 

 

 

 

 

 

 

 

 

 

 

 

 

 

 

 

 

 

 

 

 

 

 

 

 

 

 

 

 

 

 

 

 

 

 

 

 

 

 

 

 

 

 

 

 

 

 

 

 

 

 

 

 

 

 

 

 

 

 

 

 

 

 

 

 

 

 

 

 

 

 

 

 

 

 

 

 

 

 

 

 

 

 

 

 

 

 

 

 

 

 

 

 

 

 

 

 

 

 

 

 

 

 

 

 

 

 

 

 

 

 

 

 

 

 

 

 

 

 

 

 

 

 

 

 

 

 

 

 

 

 

 

 

 

 

 

 

 

 

 

 

 

 

 

 

 

 

 

 

 

 

 

 

 

 

 

 

 

 

 

 

 

 

 

 

 

 

 

 

 

 

 

 

 

 

 

 

 

 

 

 

 

 

 

 

 

 

 

 

 

 

 

 

 

 

 

 

 

 

 

 

 

 

 

 

 

 

 

"어서 오십시오. 먼길을 수고가 많으셨 습니까

."그는 이웃과도 같은 매우 친숙한 얼굴로 방문객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이보다 앞서 검정색 코트 정장을 한 단정한 아가씨는 우리가 탑승한 자동차 문을 열며 상큼한 미소로 인사를 했다. 그리고 필자가 금보개발주식회 사 옆마당에 자 동차를 주차시키고 있는 동안 그는 본관 옆으로 난 현관문 앞에서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 대번에김정현 = 친절이란 등식을 통감할 수 있었다.그는 현관 바로 옆에 있는 사무실 한 쪽에 마련된 소박한 사장실로 우리 일행을 인도했다. 5평 남짓한 사장실에는 손 님 접대용 의자와 책꽂이가 있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는 얼 마전 작고한 도예가 해강과 포즈를 잡은 그의 사진이 진열돼 있었다. 이것이 한국 골프업계의 신화를 창조한 김정현 금보개발 주식회사 사장의 첫만남을 소개한 짧은 문장이다. 그는 난 생 처음 인터뷰를 한다는 사실을 먼저 알려주었다. 그러나 어느 전문경영인보다 자신의 삶의 과정을 쉽고 특징적으로 잘 설명해 주었다.그가 몸담고 있는 금보개발(주)은 골프업계 진출을 희망 한 지 거의 10여년만에 골프장 건설 허가를 받아내는데 성 공했다. 그리고 3년 동안의 건설기간을 거쳐 지난 92년 1 월1 일 문을 연 지 만 15개월 되었다.남부컨트리클럽은 하우스 건물이 마치 동화 속의 궁전같 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둥근 아치형으로 된 계단과 천장 등 이 그러했다. 필자는 사장실에서 커피 향이 짙은 한잔의 차를 마시고 둥근 아치형 계단을 올라 다이아몬드 륨으로 안내되었다. 3 월 초 화요일 아침 10시 나뭇가지에서는 아직 물흐름 소리 가 들리지 않았다.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는 남부컨트리클 럼의 전경은 복잡한 서울 시내의 생각일랑은 아예 저편 나 락으로 떨쳐냈다. 서울 강남구 세곡동 사거리에서 자동차로 불과 30여분도 달리지 않았건만 이 곳의 초봄은 캐디들의' 가날픈 이야기 소리에서 묻어 나왔다. 그녀들의 수줍은 이 야기 소리는 적막한 산속의 교향악이 었다. 평화스런 공기가 수십만 평 대지 위에 잔잔히 물결치고 있었다.남부컨트리클럽은 갓 출발한 신흥 명문 골프업체로서 여 러가지 신화들을 창조해내 이 업계에서는 모범으로 손꼽히 고 있다. 김사장이 일궈낸 신화들이다. "현재 한국의 여건으로는 골프가 대중화 될 수 없는 운동 입니다. 골프가 대중화 되기 위해선 퍼블릭 골프장을 건설 운영하고자 하는 욕구가 일 수 있도록 토지의 저렴한 공급 과 세제 등에 관한 정책이 획기적으로 마련되지 않는 한 골 프의 대중화는 요원한 문제입니다. 골프란 어떤 운동보다도 매너와 에티켓을 중요시하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먼저 개장 과 함께 회원들의 에티켓을 살리기 위해 넥타이를 착용하지 않은 잠바차림의 복장, 운동화 착용,진바지 착용 등을 가급 적 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약은 FAX 로만 받는 것을 원칙으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약 질서가 무너진 것은 근거가 전혀 남지 않는 전화예약제도 때문이었습니다. 전화예약은 많은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철 저히 FAX 예약제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킹은 2주 전으로 규정해 골프 질서를 바로 잡는데 최선의 노력을 경 주하고 있습니다." 그는 골프장이 겨우 60여개에 이르는 한국의 실정을 안 타까워했다. 이웃 일본의 경우만 해도 2천 100군데에 가깝 고 미국은 2만이 넘는다고 설명했다. 김사장은 매 일 현관에 나와 남부컨트리클럽을 찾는 회원 들을 직접 맞이하며 현장에서 최고의 경영기법을 최단 시간 에 학습하는 공부하는 전문경 영인이다. "골프장 개장한 날부터 하는 일인데요." 겸연쩍어 하며 말했다. 그는 플레이어들을 마중하며 몸소 경험한 경영철학 으로 골프장을 운영하겠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출발했다. 김 사장은 현재 한국의 여러가지 여건으로 보아 골프장 운 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털어 놓았다. 그리고 획기적인 정부의 의지가 없는 한 골프의 대중화는 요원한 문제 라고 잘라 말했다.그 이유는 우선 비싼 땅값이다. 그리고 건설비가 엄청나 하나의 골프장 건설에 투자된 비용이 3백억 내지 7백억원 에 이른다. 또 장애요소는 이 뿐만이 아니다. 고가의 재산세 와 특별소비세 부담 등이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한국 은 아직 골프 후진국을 면치 못하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처 럼 자율성이 전혀 인정되지 않는 것도 분제점이다. 한살박이 신흥 남부컨트리클럽이 이러한 열악한 조건에 서 창조한 신화는 골프업계에 유명하다. 남부컨트리클럽은 회원이 아닌 사람에게는 어떤 경우라도 예약이 금지된다. 거의 절대적이다. 6공시절 실제 있었던 이야기다. 높은 직책에 있는 비회원 이 예약 신청을 했다가 거절된 일이 있었다. 이 때 거물을 설득하는 작업에 김사장이 직접 나섰다. 그는 높은 사람의 사무실에까지 찾아가 차근차숀 설득을 해나갔다. 조그마한 체구에 다부진 외모를 가진 그는 설득의 명수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교통지 옥입 니 다." "그건 사실이지요." "모두들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자동차를 가져 오지 않기 를 바라고 있지요. 그러나 우선 나부터 실천한다면 교통질 서는 곧 바로 잡혀질 것입니다." "맞는 말이지요."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날으는 총알처럼 말을 꺼냈다. "비회원인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골프장을 이용하려는 것도 그와 비슷한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골프장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역할과 같은 일입니다. 꼭 골프를 쳐야 할 경우 언제든지 연락을 주십시오.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김사장의 설득법은 화약고가 있는 적진 속에 뛰어 들어 진화작업을 펴는 식으로 펼쳐진다. 그는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골프산업의 사장다운 뛰어난 처세술로 위기를 넘 겼다. 권력의 마술봉을 피하는데도 항상 최전선에 나섰다. 물거품이 된 자존심친절함과 신중함이 적당히 배합된 김사장은 중학 시절까지 맡아 놓은 모범반장이었다. 고교 때도 매우 깔끔한 엘리트였다. 모범생 김정현이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한 것은 경남고-졸 업반이 되었을 때이다. 처음으로 방황을 했다. 집안에서는 의대를 지원하길 바라는 눈치이고 본인은 법대에 진학하고 싶었다. 두 갈래 길에서 고민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가 어 린 시절에 법대를 지망한 이유는 억울한 사람들의 편이 되 어 마음의 병을 고치는데 힘이 돼주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황도 걷히게 되었다. 입시 한달 전 발표 된 서울대 입시요강은 김정현의 미래를 결정짓다시피 했다. 입 시 요강에 지 난해 까지 만 해 도 제 2 외 국어 또는 사회 과목 중 한 과목을 선택하던 것이 제2외국어로 통일되어 버렸 다. 사회과목은 경남고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리 만큼 잘 하던 학과목이었다. 그의 꿈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김정현은 허겁지겁 독일어 대신에 물리를 선택할 수 있는 상과대를 지원했다. 물리는 한달 정도 어물쩡거려도 합격점수는 따낼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큰 오산이었다. 첫번 째 도전에서 김정현은 낙방의 쓴 잔을 마셔야 했다당연한 일이었다. 할 수 없이 김정현은 난생 처음 재수생의 길을 걸어가야 했다. 재수의 길은 험난했다. 재수를 하면서 도 내면에 파고드는 자존심 때문에 갈팡질팡했다. ‘법대냐, 상대냐로 단판을 내려야 했다. 오기가 싹렀다."서울대 상대가 원데 감히 김정현을 거부한단 말인가. 내 기필코 정복하고 말리라." 그는 잃어버린 자존심 회복운동을 펴기 위해 서울대 상대 에 재도전했다. 이렇게 해서 경남고 동기들보다 1년 늦게 들어간 서울대 상대는 그에게 큰 매력을 주지 못했다. 김정 현이 두번씩이나 도전해 정복한 서울대 상대는 아카데미와 는 다소 먼 거리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정돈되지도 않았다. 그 당시 서울대 상대생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파보다는 노는 학생들이 많았다. 인생을 논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 이 아니라 취하기 위해 음주를 즐기는 경향이 있었다. 전쟁 의 폐허가 몰고온 허무주의가 아직도 팽배한 시대의 초상이 었다. 서울대 상대 4년 세월은 무계획적으로 궤도를 이탈한 기 차마냥 구겨져 버렸다. 올곧게 뻗고 싶었던 자존심 회복은 말뿐이었다. "자존심 도전 자체가 내 인생을 복잡하게 만들 뿐아니라 실패로 바꿔 놓고 말았습니다." 그는 큰 포부와 자존심이 가져다 준 피곤함에 이미 지쳐있었다. 무기력한 나날들을 보내는 가운데 어느덧 4년이 홀 러 ROTC 1 기생으로 군에 입대했다. 그가 군복무를 마친 것은 65년이었다. 군부의 등장으로 한국 전체가 몸살을 앓 고 있던 시절이다.점쟁이의 궤변김사장은 한때 점 보기를 좋아했다. 별난 취미를 가진 야 심 큰 청년이었다. 28세 때의 일이다. 하루는 김사장이 고 등학교 친구들과 어울려 점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젊었을 때 그는 호기심이 많았다. 특히 미래에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 될 것 인가가 궁금했다. 점 볼 차례가 돌아왔다."당신은 뚜렷하게 봐줄 것도 말 것도 없는데 뭣하러 여기 왔는기요. 크게 출세할 것 같지도 않고 재벌이 될 것도 아니 고,한세 상 평 탄하게 살다가는 가겠구만." 점쟁이의 무책임한 말 한마디는 푸른 꿈으로 가득차 터지 기 직전에 있는 김정현의 머리 속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점 쟁이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은근히 화가 치밀기도 하고 기분은 좋지 않지만 점쟁이의 뒷말이 신통했다. "이 머스마 별 것도 아닌 것이 자가용 타고 다니 네. 자기 것은 아니지만 팔자 하나 좋네." 시간이 흐르자 뒤 죽박죽이 된 김정현의 머리 속은 차츰 정리되어졌다. 사람의 운명은 그릇과 같은 것이다. 운명은 주어졌다고 여기자. 큰 그릇,작은 그릇, 그렇다고 그릇을 바꿀 수는 없 는 일이다. 얼마 만큼 노력해 어떻게 그릇을 채우느냐에 따라서 행복은 결정된다. 이제부터 난 내 그릇을 채워 야지 .’ 자신도 모르게 체념하고 있었다. 점쟁이의 판단이 옳을지 도 모른다고 믿었다. 거부반응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러 고 있던 차에 지금은 도시계획에 밀려 도로가 된 내자호텔 을 지나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고향 선배인 김욱과 마주쳤 다. 김욱은 당시역도연합회회 장직을 맡고 있었으며 사주 팔자 풀이의 대가로 명성을 날릴 때이다. 김정현은 다시 한 번 김욱에게 관상을 보아달라고 부탁했다. 김욱은 그에게 역 철학을 들려 주었다. "역이란 학문적으로 경험에 의한 통계라네. 사람들의 얼 굴만큼 마음의 모양도 모두 다르지. 어떻게 살아 가는 것이 더 좋을까를 알려주는 카운슬러 일 따름이야. 그리고 인생의 용기를 불어 넣어 주는 역술가가 좋은 카운슬러라네. 미래 의 모양은 자네에게 달려 있다네." 한마디로 통쾌했다. 그 이후 김정현이 점쟁이를 찾는 버 릇은 없어졌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에서 출발, 불교와 천주 교 등을 섭렵하며 인생의 시작과 끝의 신비를 체험하고 싶 었다. 지금은 무종교주의자가 된 그는 가끔 집 근처에 있는 봉은사 경내를 아내와 함께 산책하는 정도이다. 용꼬리보다 닭벼슬 김정현은 직장생활 초기부터 서울대 상대 55회동기들과 는 판이한 길에서 시작했다. 65년 육군 장교로 제대한 뒤 취직할만한 곳을 찾고 있었다. 때는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막 펴려고 활기를 띠기 시작할 즈음이다. 마땅한 곳을 고르 지 못한 그는 삼성물산 천우사 등이 만든 스웨터수출조합 사무국에서 잠깐 일을 했다. 스웨터수출조합은 직원이 3〜 명 뿐이었다. 위치는 당시 명동 건설증권 빌딩에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에서 그는 8개월 가량 근무했다. 수출조합에 근무하다가 삼성물산으로 옮길 예정 이었는데 삼성이 내건 조건이 탐탁치 않아 마땅한 직장을 고르고 있 었다. 그의 자존심은 사회 초년병으로 출발할 때도 여전했 다. 회사가 그를 모셔가야만 한다고 배짱을 부리고 있었다. 삼성 대우 등에서 제의가 있었지만 그의 배짱에 맞지 않았 다. 이러한 때 부산의 대 일섬유실업(주)에서 제안이 왔다. 조건은 서울사무소 소장 자리 였다. 그는 용꼬리보다 닭벼슬 이 좋았다. 속내의 담요 양말 등을 생산하는 대일섬유의 서 울사무소 소장이 된 그는 또래의 대 학 동창들보다 월급이 3 내지 4배는 많았다. 자동차도 한대 나왔다. 김소장의 하루 일과는 주한 미군 구매처(KPA)가 월남 파 월장병들에게 보낼 군수품을 사들일 때 군납업무를 성사시 키는 일이었다. 한국군의 군수품 대금은 미군예산에서 지급 돼 미군이 최종 결정을 내렸다. 경쟁회사가 많아 눈치 빠르 게 행동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영어 실력은 형편없이 짧았 다. 유창하게 미군을 설득시킨다는 것은 꿈에 가까웠다. 30 대 초반의 일이었다. 입찰 때마다 경쟁사의 담당자보다 나 이가 훨씬 어린 김소장의 엣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서툰 영 어솜씨지만 성실하게 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역력했다.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부족한 점들이 그의 장기가 되었 다. 문법에도 맞지 않는 영어로 대충 말하는 그에게 미수품 조달 담당자는 호감을 보였다. 입 찰 때마다 유리했다. 젊은 김소장의 표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동정심을 불러 일 으켰다. 더불어 진솔함도 확연히 심어주었다. 김소장은 대일섬유에서. 승승장구 승진해 얼마 안돼 상무 가 되었다.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는 김상무의 운명 에 변환 기류가 발진했다. 인생의 진로를 변경해야 하는 기로에 섰 다. 김상무는 세진레이온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이 때 마침 가족은 서울에 있고 혼자 부산에 남아 두집 살림을 하 던 때이다. 벅찬감이 없지 않았다.김상무는 과감히 세진레이온의 영업담당 이사로 인생의 항로를 바꿨다. 세진레이온은 현 민속촌의 오너인 정영삼회 장이 운영 하고 있던 때 이 다. 그가 세진레 이온에 들어 간지 1년만인 1976년 말 다시 회사가 이원천 씨에게 넘어가는 전환기를 맞이했다. 세진레이온은 회사명 을 원진레이온으로 바꿨다. 이에 앞서 정회장은1976년 초 세진레이온을 양도 하기 전에 민속촌을 인수했던 것이다. 그가 다시 정영삼 회 장의 브레인으로 영입된 것은 원진레이온 근무 1 년만에 이 뤄 졌다. 민속촌 경영시절 77년 용인 민속촌 상무가 된 그는 섬유를 취급한 전문경 영인에서 관광산업의 종사자로 크게 변신했다. 전문경영인 에게는 전공이란 없다. 그는 우선 민속 상식에 대하여 전혀 문외한인지라 자신을 위한 공부부터 시작했다. 전통을 새로 익혀야 했고 적자에 허덕이던 경영을 책임져야 했다. 민속촌은 68년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시작하면 서 없애버린 초가집의 전통을 그대로 담아 관광자원화하자 는 취지에서 발족되었다. 민속촌은 한국의 전통문화와 고유한 전래의 풍속을 배울 수 있는 전통 학습장이요 박물관이다. 그리고 외국인까지도 우리 겨레의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생활 풍속의 옛 모 습과 멋을 느낄 수 있는 전시장이다. 30만평의 대지 위에 모두 고유의 전통 건축양식으로 꾸민 250여채의 집들이 모 여 있다. 또 각 지방의 가옥구조를 살필 수 있는 민속촌은 옛날의 한 고을을 그대로 재현시켜 놓았다. 이곳에는 옛 조 상들의 슬기와 솜씨를 엿볼 수 있는 민속공예품과 각종 가 구들이 전시돼 있어 우리 조상들의 손길을 살펴볼 수 있다. 지난 시대와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이다. 민가 대가 농가 관가 서원 등이 있는 민속촌은 관광담당 부서 인 교통부가 관광 차원에서 민영으로 설립토록 한 관광 지이다. 민속촌은 부실경영으로 부도를 내고 말았다. 정영 삼 회 장이 이를 인수했다. 부실회사의 전문경영인이 된 그는 고민이 많았다. 78년 이다. 이러던 차에 박대통령이 행차했다. 박대통령이 다녀 간 뒤 불호령이 떨어졌다. 외국 관광객들에게 보여주는 관 광자원이 쓰러져가는 오막살이가 대부분이고 문짝은 다 떨 어져 나가 엉망인 것을 책망했다. 당장 고치라고 지시했다. 외국인에게 내보여도 부끄럽지 않게 반듯하게 개조하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민속학자들은 그렇게 될 경우 허례허 식 에 가까운 허 상만 보여줄 뿐이 라고 적극 반대했다. 민속촌의 전면 개조 작업은 78년부터 3년 동안 진행되었 다. 새집이 되다시피 뜯어 고쳤다. 오두막집은 사라지고 반 듯한 촌락이 대신 자리 잡았다. PATA 총회(태평양지 역 관광업자총회)와 IPU(국제의원연맹) 등이 열릴 때는 1만 여명의 외국인에게 선을 보이기도 했다. 그 기간동안 김전 무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집 개조를 끝낸 김전무는 83년 만년적자에 허덕이던 민 속촌의 경영개선책을 서둘렀다. 영업과 시설관리부문을 분 리해 운영하는 경영기법을 적용했다. 모든 영업은 새로 설 립한 동주산업주식회사가 맡았다. 그리고 민속촌의 시설관리는 조원관광이 담당했다. 민속촌이 분리 운영되던 때 그는 동주산업 사장으로 취 임 했다. 김사장은 사장 취임과 동시에 민속촌 경영 합리화 차 원에서 임대를 해준 기념품 및 음식물 등을 판매하는 가게 를 정리했다. 업자들의 반발도 심했다. 그러나 민속촌의 문 화재를 보호해 야 한다는 신념 아래 불도저식으로 몰아 붙였 다.분리경영 2년만에 민속촌은 혹자로 돌아섰다. 85년에 이 뤄진 일이다. 그의 가슴 속에서는 국내 하나 뿐인 민속촌을 자리잡게 만든 공로를 자축했다.몸으로 실천하는 서비스 정신서울대 상대 출신으로서 서비스산업에 종사하는 전문경 영인은 혼치 않다. 그는 드문 분야의 전문경영인이다. 단 한 번도 지난일을 후회한 적이 없다. 골프장의 사장이 된 것도 만족한다. 그래서 단시간 내에 남부컨트리클럽을 신흥 명문 으로 만들어냈다. 그에게 사업은 자존심의 투쟁장이다. 중 고교 시절 공부할 때처럼 말이다. 그는 권위주의를 멸시한다. 현장을 뛰면서 터득한 경영 수업에 최고의 점수를 준다. 공장경 영자는 최고의 기술자가 되어야 하며 서비스업 종사자는 최고의 서비스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경영철학이다. 즉 톱이 되려면 그 분야의 대가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이다. 김사장은 회사 근무시간의 반 이상을 현장 근무로 할애한다. 몸소 실천하는 사장이 다. 그는 로비에 나가 무언으로 서비스산업의 종사자가 갖 춰야 할 기본 매너 개혁을 부르짖는다. 말로 하는 교육은 효 과가 적기 때문이다. 직원들의 철저한 교육을 중요하게 여 기는 그는 전화를 걸 때도 비서를 시키는 법이 없다.그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 다. 그러나 스스로의 점수를 406 점 이상 주지 않으며 지금도 낙제생이라고 자칭하는 그는 비틈이 없다. 그의 경영철학은 업체에 따라 변신했다. 서비스산업체에 근무할 때는 서비스맨의 경영철학을 몸에 익히도록 노력했 다. ‘최선을 다 할 것’ ‘모든 것에 감사하라’, 이는 서비스업 체 종사자 모두에게 적용되는 기업 윤리이다.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고객에게 감사하고 건강한 신체를 가져 일 할 수 있는 자신에 기 뻐 하라는 것이 다. 서비스업체의 최고 경영인이 된 그의 신입사원 면접 스타 일은 독특하다. 그는 두가지 질문을 하고 한가지 당부를 하 는 식으로 면접을 끝낸다. ‘무엇을 하고 싶으냐’ ‘어느 정도 근무할 수 있느냐가 질문의 요지 이다. 그리고 마지막약속 을 지키겠는가로 마감짓는다. 그리고 가장 솔직한 사람을 고른다. 능력보다 신의가 우선이다. 제 모습 대로 살자김사장은 회사의 발전을 주도한 주요 핵심 인물이다. 경 수투자금융,서 울수력 발전주식 회 사, 간척 사업 등에 도 수완 을 발휘해 성공으로 이끈 주역이다. 1 백만여평에 이른 불모 의 땅에 생기를 불어넣은 강화도 간척사업은 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그는 강화도 간척사업 때4~5 년 동안 손수 농사를 짓기도 했다. 물을 대어 바닷물에 침수 된 땅의 염분을 희석시키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으로 개 선하는데 앞장 섰다. 국토의 활용면적을 증대시킨 자랑스런 기업가이다. 그는 기업을 경영할 때 가능한 한 돈을 쓰지 않는다. 능 력으로 일해야지 돈으로 능력을 메우는 무능한 경영인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다. 철저한 전문경영인 정신으로 일관해 온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산업분야의 초일류급 프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프로가 되려면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렇게 할 때 반드시 대가는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남부컨트리클럽 초창기부터 산파역할을 맡았던 그는 프 로 골프장 사장이 되기 위해 골프장 수업을 받으러 외국의 유명 골프장을 직접 답사했다. 그리고 민속촌을 맡을 당시 는 해외 관광단지를 두루 시찰하며 경영 실무를 쌓았다. 우 리 것을 잘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의 방식을 이해하는 것 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가정에서도 그러한 철학을 고수한다. 김사장과 백민 경 여사(50) 사이에는 한성(25 외대 영어과 졸업 대유증권 근무), 한석(22 연대 경영학과 재학중), 한준(21 경희대 정외과 재학중) 등 아들만 셋이다. 그는 늘 아들들에게 친구 를 많이 사귀라고 권유한다. 결혼은 이대 출신의 백여사를 선배 소개로 만나 교제 3개월만에 약혼식을 올릴 정도로 속 성으로 진행했다. 일본인들이 도망가다가붙잡혀 중국인들이 휘두른 총부리 앞에서 아우성치는 소리는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여기 저 기서 왜놈들을 수색해서 총살하는 광경을 보았다. 그의 가 족들도 저녁에는 호롱불을 끄고 숨을 죽이며 보내야 했다. 어차피 하얼빈도 한국사람에게는 이국이었기 때문에 왜놈 으로 오인 받거나 밉보였다가는 뼈도 추스릴 수 없었기 때 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일본인으로 오해받아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기도 했다. 1945년 9월 초 괴나리 봇짐을 등에 진 그의 가족들은 만 주에서 신의주로 우선 와야 했다. 기차를 탔다. 신의주에서 다시 남쪽으로 이동하기 위해 전가족이 기찻길 옆 철로변에 서 쭈그리고 앉아 노숙을 하기도 했다. 하늘도 무심 하게 밤 새도록 비를 뿌렸다. 식수가 없어 밥을 지을 수도 없었다. 전 가족이 허기진 배를 움켜 쥐고 모두 굶어야 했다. 이튿날 기차는 대만원이었다. 찻간을 채우고도 남은 인파는 짐짝처 럼 기차 지붕 위에 거의 매달렸다. 어린 소년 김정현은 이북의 해방 당시의 분위기를 환히 볼 수 있었다. 이북에는 치안대가 조직돼 빨간색 완장을 차 고 죽창을 들고 활보하며 일본사람들을 잡아들이는 광경을 지켜볼 수 있었다. 공포의 도가니였다. 머리가 짧은 사람은 무조건 찔러 죽였다. 평양역에는 일본 군수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설탕 명태 등이 철로변에 즐비했다. 개성에서 서울까지는 달구지를 타고 귀향했다. 그의 가족의 귀향 행 로는 만주에서 서울까지 20 일 동안 이어졌다. 서울의 분위기는 이북과는 너무나 판이했다. 이북이 공포 의 분위기라면 서울은 평온했다. 서울에 돌아온 그의 가족 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국교 5학년 때 또 한 차례의 난리를 겪어야 했다. 6 25가 일어나 동족상잔의 비극을 맛보아야 했다. 그의 가 족 중에 군인이 있어 고향인 진주로 피신했다. 피난 간 것이 난리를 마중한 꼴이 돼 혼쭐이 났다. 진주폭격으로 죽을 고 비를 하루에도 수도 없이 넘겨야 했다. 총알파편이 그의 바 로 옆에 떨어지기도 했다. 그의 가족들은 견디다 못해 어머 니의 고향인 사천으로 옮겼다. "4 • 19 때 경무대로 진출한 일이 있었습니다. 5 16 때는 4 19 당시 조선호텔 건너편에 있던 방첩부대로부터의 발 포 사건에 대한 목격자 참고인으로 중앙정보부에 가서 진술 하는 등 현대사의 전개과정을 어떤 형태로든 체험한 것입니 다." 6 3사태 때도 역사의 현장에 서 있었다. 그는 한국 현 대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상록수의 주인공을 꾼꾼 청년 김정현은 아들만 둘인 집안의 장남이다. 부유하진 않았지 만 대한통운 지점장을 지낸 아버지 덕분에 중류 정도의 생 활이었다. 경남중 고교 시절에는 교복을 항상 깨끗이 입고 다니는 샌님파였다. 그가 가장 마음 놓고 놀아 본 것은 고등 학교 때이다. 아버지가 대구 지점장으로 발령 받으신 덕에 혼자 하숙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그의 성 적은 항상 상위 그룹을 유지 했다. 그는 어릴 때 매우 욕심이 많았다. 부산 남일국교 때부터 시험지 이름 옆에필승이란 단어를 새겨 넣곤했다. 부적처 럼 말이다. 그는 남에게 지는 것을 못견딘다. 항상 1 등을 해 야 한다는 욕심을 가졌다. 그러나 1 등을 해본 적은 그리 많 지 않다. 실패할 때마다 가슴은 아팠다. ‘필승부적은 고등 학교 때 중단되었다. 순전히 타의에 의해서였다. 담임선생 님이 금지령을 내렸다. 이는 남에게 뒤떨어지면 스스로 질 책하느라 밤잠을 설친 김정현에게는 고통이었다. 그가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한 표창장이 있다. 적십자 총 재에게서 받은 표창장이다. 그는 청소년 적십자 회원이 된 것이 자랑스러웠다. 봉사정신을 강조한 청소년 적십자 활동 은 그의 젊은 시절 많은 감동을 주었다. 지금도 그의 가슴 속에는 그 시절 만난대한적십자사 청소년(JRC)부장 이 범 석 씨가 기억되고 있다. 이범석 씨는 그가 접한 인물 가운데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다. 아웅산 사태 때 비운을 맞은 그가 몹시 그리울 때가 있다. 각 도 대표들이 서울에 올라와 수련 회를 가질 때너희들은 사회에 나가거든 어려운 일을 내 일같이 생각하라는 그의 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 를 실천하려고 항상 노력 한다. 한편 고교 때는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을 꿈꾸기도 했다. 농촌 계몽활동에 나가 의욕적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 는 양산과 창원 지역의 단골 농활대원으로서 주로 야학지도 를 했다. 어떻게 하면 뒤떨어진 농촌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 를 고민하며 젊은 나날의 일부분을 바쳤다. 농활대원 출신 김정현에게는 재미 있는 에피소드도 많다. 야학을 지도한 학생들이 대학재학 시절 서울에까지 일부러  올라와 야학을 계속해달라고 생떼에 가까운 부탁을 할 때는 난처하기보다 짙은 흙내음을 맛볼 수 있었다. 시골 학생들 은 농사 지은 쌀 채소 놓을 손에 손에 들고 그의 하숙집을 찾아왔다.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이 내려갈 때까지 숙식을 제공할 정도로 인정 많은 대학생이었 다.

 

인간을 위한 공간창조의 기수 벽산건설주식회사 정 종 득 부사장 은행원 출신 건설회사 대표 3월의 꽃샘추위가 아직 고개를 숙이지 않던 여의도의 아 침 공기는 매서운 기운이 녹록치 않았다. 필자가 벽산건설 이 자리 잡고 있는 정우빌딩 4층 사장실에 들어 섰을 때 아 직 이른 시간이었다. 정부사장은 무언가 서류를 챙기고 나 서 우리를 그의 사무실로 안내했다. 부리부리한 눈매가 건 설회 사의 보스라는 인상을 주었다. 얼어 붙었던 국내경기가 움트고 있던 바로 그때 정부사장 의 93년 건설경기 전망은 상당히 밝았다. "건설경기는 공공 분야의 경우 하반기에 활성화가 되고,민간부문은 연말쯤으 로 예상하고 있습니 다." "건설은 조선업과 자동차공업과 비슷합니다. 건설업 이 서 비스업이라 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수많은 자재나 부품 을 어셈블리한 것입니다. 건설업을 진정시키면 건설업만 진정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여타 제조업이 6개월 정도 뒤따 라 침체국면에 들어 갑니 다." 그는 특유의 건설경기와 제조업과의 경기연계론을 폈다. 그러면서 건설업 역시 제조업의 제품과 같이 고객지향적이 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택의 품질은 고객 위주로 해서 향상시켜야 합니다." 주택사업이 고객 취향 중심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기 업의 사회적 이미지,고객에 대한 이미지 개선이 없이는 기 업이 존립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건설업도 94년부터 개방 된다. 개방을 앞두고 경영혁신을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신 도시 몇군데서 일부 건설업체의 아파트 부실공사가 발생했 는데 이 점에 대해서 건설업계 내부의 반성이 있어야 하고 이미 일부에서 반성 이 일고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 건설회사 중 재개발 사업에 관한 한 벽산이 선 두이다. 벽산은 재개발 사업 전체 시장의 15%를 차지한다. 이 정도의 시장점유율이라면 종합건설업계가 1천500개가 넘는 상황에서 엄청난 것이다. 서울시내 부산 대구 등 변두 리 불량주택을 개량해 아파트단지를 구성하고 있다. 원래 정부 재정자금이 충분하면 정부돈으로 서민주택을 개량해 야 하는데 벽산건설이 이주비를 주고 불량주택 재개발사업 을 추진한다고 들려 주었다. "주택개량사업에는 노하우가 상당히 필요합니다. 재개발 지에서 주민을 내보내는데 몇년이 걸립니다. 주민을 철수시 키는 과정에서 마찰이 없어야 하고 건축 인허가도 까다롭습 니다. 특히 재개발인 경우 더 심합니다." 또 조그마한 집들이 대부분이어서 아파트 몇평을 분할하느냐 등 까다로운 문제가 산적해 있다고 밝혔다. 재개발사 업을 착수할 때는 땅의 감정부터 시작한다. 갑이 가진 땅값, 을이 가진 땅값 집 값 등을 모두 따져 야 한다. 재개발이 예상 된 변두리에 몰려 있는 세 입자에게는 임대아파트를 분양하 는 일 등이 쉽지 않다. 벽산건설은 수년동안 쌓은 분야의 노하우가 많이 축적 됐다고 자랑했다. 벽산그룹은 환경 에너지사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환경사 업에서는 쓰레기 소각로 제작을 시도하고 있다. 벽산은 도 시 쓰레기 소각로 건설에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일본은 도 시의 쓰레기 90%를 소각한다. 산업 쓰레기를 기계로 압축 해 먼저 독성을 없애고,이 폐기물을 건축자재를 만드는 원 료로 사용한다. 여기에 세라믹을 섞어 벽돌을 만들거나 도 로 포장용 자갈을 만들기도 한다. 더 이상 쓸 것이 없을 때 는 고체상태로 땅속에 묻는다. 벽산은 이와 같은 산업폐기 물을 가공 처 리하는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벽산은 에너지사업에도 관심이 많다. 벽산에는 열병합발 전소를 전문으로 하는 에너지사업 전담사업부가 있다. 대규 모 주택단지에 열병합발전소를 세워 난방용 열생산도 하고 부수적으로 전기도 생산하고 있다. 이 때 나온 전기는 한전 에 판매하고 있다. "건설업계에서 업종 다변화가 4,5년 전부터 일어나고 있 습니다. 건설업의 업종 다변화는 초창기에는 콘도 호텔 위 락단지 등 레저업에 진출하거나 건자재를 직접 생산하는 일 등에 참여 하는 것 으로 이 뤄 졌습니 다." 다변화는 수직적 사업 다변화와 수평적 사업 다변화로 나 눌 수 있는데 부동산 개발회사,리스업 등이 다변화의 전자에 속한다. 환경과 에너지,수질 정수관계,오배수 처리장 등이 후자에 해당한다. 다른 회사가 후자쪽에 관심을 안 쏟 을 때 벽산은 맨 먼저 이들 분야에 뛰 어 들었다는 것이다.목포에서 출발한 인생역정 정부사장은 서울경제신문 박병윤 주필과 중고교 동기이 자 서울 상대에도 함께 나란히 합격한 대학동기 이다. 이 때 목포고 출신이 상대에 2명,법대에 2명,공대에 4명을 비롯 해 사대 문리대 등 모두 15명이 서울대에 합격했다."서울이 라곤 처음 와본 시골 촌놈이 간신히 물어 물어 흥 롱에 있는 상과대를 찾아 입학시험을치렀습니다. 입학시험 장에서 시 골학생 인 저는 솔직 히 기 가 죽었습니 다•"당시 서울 상대에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용산고 등의 출 신들은 20~30명씩 합격하고,경남고 경북고 부산고 출신 들도 많이 합격했다. 호남쪽에서는 광주의 일고,광주고,목 포고, 전북의 전주고,이리의 남성고, 군산고 등의 출신을 모두 합쳐봐야 20명도 안된 숫자였다. 그 당시 애로점은 1학년 때 하숙을 구하는 일이었다. 이 상하게 고향을 물어보아전라도라고 말하면 하숙을 안시 켜 주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래서 애를 먹었다는 것이다서울 상대생인 정군은 한번의 낭만도 없이 공부벌레처럼 공 부만 했다.3학년 1학기를 마치고 1년 6개월 단기병제도인 학보병 으로 군대에 지원했다. 그는 군대에 근무할 때 연탄을 갈고,분뇨 푸는 일을 일 삼았다. 낮에는 산에서 나무를 하는 등 매일 막노동꾼보다 험하게 일했다. 하루는 산에 가서 그의 손등을 살펴보았다. 손등이 나무껍질인지 사람의 손등인지 구분이 안되었다. 그 처럼 힘든 군대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3학년 2학기에 복학 했다."복학후 학교 도서관, 자유열람실의 방을 차지하려고 야 단을 떨었던 기억이 새삼 그리워 집니다." 당시는 선배 한사람이 졸업 해 나가면 예 약했다가 방을 차 지했다. 복학후 못했던 공부를 실컷 했다. 그 해 11 월에 공 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했다. 어느덧 졸업때가 다가왔다. 그 당시 취직할 만한 직장이 거의 없었다. 개인 기업체는 천우 사 삼호물산이 고작이고 삼성물산도 이름이 나기 전이다. 국영기업은 한전 대한중석 석탄공사 은행 정도였다. 금융기 관에 취직하는 것은 대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당시 은행 가운데 한국은행과 산업은행은 인기가 대단했다.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산업은행이 마음에 들었다. 산은은 대기업에 산업금융지원을 해주고 있어 회계학을 전공한 사 람들을 많이 필요로 했다. 그가 입행할 때인 65년도에는 20 명 을 뽑았다. 화려한 은행생활 산업은행에 들어가 기업분석부에 소속되었다. 기업의 재무상태 등 기업을 진단하는 부서에서 6, 7년 근무했다. 그 뒤 외자금융부로 옮겨 외자도입 업무를 맡았다. 우리 기업 들이 외국에서 차관을 들여오는 것이 큰 화제거리가 되던 때이다. 대.한항공 점보 여객기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던 시절이다. 지금은 점보 여객기가 많지만 그 당시 5천만 달 러의 점보 여객기라면 눈이 휘둥그래졌다. 정종득 행원에게 미국 은행 연수를 갈 기회가 주어졌다. 기간은 6개월이었다. 미국 워싱턴주에 있는 시 애틀로 꿈에도 그리던 해외 연수 를 떠났다. 연수내용은 미국 은행에 가서 근무하며 미국의 실상을 보고 오는 일이었다. 그는 은행의 각 파트별로 돌며 미국의 은행업무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공부했다. 그 때 느 낀 점 이 많았다. 첫째는 우리나라에 비해 여성들의 은행활동 영역이 높은 것이었다. 그 때 미국은행에는 여성 부장들이 많았다. 어떤 부서는 부장이 여성이고 그 아래 대리와 과장이 남성이었 다. 미국은행의 성별은 여성 반,남성 반이었다. 여성들이 금융업에서 맹 활약을 했다.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여자 행원은 있었으나 여자 간부는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다. 여자는 결혼만 하면 그만둬야 했던 것이 우리나라 실정이었던 때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은행은 정부통제나 지시를 많이 받았는데 미국은 행에는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미국은 은행 경영이 자율화 돼 있었다. 미국사람들이 일하는 것을 보고 놀라웠다. 시간관념 이 정 확할 뿐 아니라 근무 강도도 높았다. 우리나라 은행원들은 적 당히 일하는 습관이 있었다. 귀국해서 산업은행 업무부에 배치받았다. 업무부는 현재 의 자금부 심사부 종합기획부를 합쳐 놓은 주요 부서였다. 요즘도 핵심부서의 부서장을 역임해야 그 은행의 중역이 될 수 있듯이 업무부는 산업은행 내에서 핵심부서였다. 거기서 4년 근무했다. 때 직책은 대리였다. 75~76년에는 금융기관의 경우 메리트가 없어졌다. 급여 가 다른 직장보다 높았다가 줄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많은 은행원이 사기 업으로 전직 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은행 이직사태는 승진이 늦은 데도 원인이 있었다. 20년 ~30 년이 지 나야 과장 차장이 었다. 그리 고 은행 업 무가 천편 일률적이어서 창의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운 점도 이직을 부 추기었다.탈은행의 물결과 함께 정대리도 은행 이직의 계획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정부가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따라서 기업은 사람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서울상대 동기로서 산업은행에 함께 입행한 13명의 동기 가운데 11 명이 사표를 쓰고 나왔 다. 산업은행에는 2명만 남게 되었다. 이시조 산업은행 종 합기획부 부장과 홍정웅 외국지점장이 은행을 사수한 2인 조이다."제가 대리로 있는데 이필곤 씨(삼성물산 부회장을 역임 하다 최근 중앙일보 사장이 됨)는 삼성의 차장직에 있을 정도로 사기업체의 승진이 빨랐습니다. 이필곤동문을 만나고 나서 은행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정대리는 쌍용의 기획실 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당 시 쌍용 부회장 이주범씨가 담당상무였다. 이상무는 입사 3 개월쯤 지난 어느날 정차장을 불렀다. 대번에 호통을 쳤다. "우리 부친도 은행에 계셔 잘 봐주려고 했는데 이게 뭐 야. 이 따위로 일해선 안돼. 개인회사는 자기 책임하에 판단 해서 일하고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고 하는 것인데 3개 월을 두고 봐도 은행원 티를 못벗고 이러고 있어." 심한 꾸지람을 들은 정차장은 은행 스타일과 기업체 스타 일이 다르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그는 그분의 마움을 평생 잊지 못하고 있다. 그는 사기업체 간부직원으 로서 어떤 정신을 가져 야 하는지 따끔하게 한마디로 가르쳐 주었다. 그는 이상무 밑에서 부장 등의 간부직을 거쳤다. 한국 외교가 중립국 수교를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의 일 이다. 가봉 봉고 대통령이 한국에 왔다. 한국측에서 가봉에 백화점을 지어주기로 합의했다. 쌍용이 이 일을 맡게 됐는 데 정차장이 가봉 백화점 건설 팀장이 되었다. 쌍용이 가봉 에 차관을 제공해 백화점을 짓기로 한 것이다. 그는 합작투자 계 약서 를 만들어 계 약을 한달내 끝내고 오 기로 하고 프랑스 대학 출신 통역자와 직원을 데리고 가봉 으로 떠 났다. 그 때만 해도 중서부 아프리카에 가 본 한국인이 단 한명 도 없었다. 한국에서라면 한달 안에 끝날 일이 1 년이 걸려 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가봉에 간다고 가봉의 상공부장관 앞으로 텔렉스를 보냈는데 한달이 되었는데도 상공부장관에게 보낸 텔렉스는 도착되지 않았을 정도였다. 한달이면 끝날 줄 알았던 일이 1 년이 걸렸다. 가봉에서 백화점을 짓고 돌아와 기획실장으로 승진됐다. 그 때 수출이 잘안되었다. 정부는 수출실적을 2% 이상 못 올리면 종합상사 자격을 박탈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당시 수출 실적을 통관기준으로 계상했다. 정부가 D/A 판 매를 허용하자 이를 변칙시킨 D/A조건의 수출이 성행했다. D/A 판매란 외국에 외상으로 물건을 파는 것을 말한다. 그 런데 우리 기업들은 외국에 물건을 판 것으로 하고는 사실 은 물건을 싣고 나가 현지에서 판매하는 경우가 많았다. 엄 밀한 의미에선 D/A판매가 아니었다. 한국의 창고에 있는 상품을 외국으로 옮긴 것에 불과했다. 물건이 안팔려 외국의 창고에 쌓아 두고 있어도 6개월 뒤에는 은행에 돈을 갚아야 했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상품을 싣고 나올 때 은행에서 네고해 돈을 미리 받았기 때문에 외국에서 팔린 돈으로 은행 빚을 갚아야 하는데 돈 이 안나와 문제가 많았다. 정실장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 기 위해 중동본부장으로 나가게 되었다. 카이로지점, 사우 디 제다지점,담만지점,암만지점, 이란의 테헤란지점 등을 모두 커버해야 했다. 현지에서 물건을 팔고 수줄을 독려하 는 일을 2년 동안 했다. 중동본부장으로 가서 일하다 보니 예상한 것 만큼 잘되지 를 않았다. 별로 좋은 실적을 못올렸다. 그래서 제대로 처분 안된 창고물건들을 헐값으로 매출해야 했다. 장기간 쌓아놓 다 보니 아무리 헐값이라도 살 사람이 별로 없었다. 주로 건 축자재 가 많았다. 외 상으로 팔았다가 돈을 못받기 도 했다. 벽산과의 만남 중동에서 한국건업(벽산건설의 전신)의 김희근 사장과 그 의 형인 동양물산 김희용(계열사인 동양물산 사장)을 만난 것은 정본부장 일생에 변화를 주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 다. 벽산으로 와서 함께 일하자는 권유를 받았다그는 82년 4월 마침내 벽산으로 옮겼다. 벽산에 와보니 중역이 38명 이나 되었다. 중역 이 많은 이유는 70년대말과 80년대초 중동건설 붐이 한창일 때 이사는 상무를 줘야 중 동에 나가고,상무는 전무를 주어야 중동 근무를 하는 등 임 원의 임용을 남발했기 때문이었다. 82년부터 85년4년 동안은 건설회사 최고의 불황기 였다. 직장을 그만 둔 사람과 남아 있는 사람간에 여러가지 마찰 도 있었다. 그는 이런 와중을 겪으며 6개 월 정도 있다가 자 금담당 상무로 숭진했다- 87 년관리 담당 상무로서 총무 경 리 회 계 자금담당을 맡 고 있을 때이다. 벽산이 정우개발 공사 때 공사보증한 사실 이 있었다. 상업은행 지점장 자살사건으로 그만둔 김주기 행 장이 상무시 절 정 상무를 만나자고 했다. "한국건업이 정우개발에 대해서 공사보증을 섰는데 책임 져 야 합니다"고 말을 꺼낸 뒤 벽산건설에서 정우 인수를 검 토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회사로 돌아와 본격 검토에 들어 갔다. 그 당시 쌍용과 포철도 검토중이었다. 정우개발 정우석탄 화학(포철의 부산물 화학처리) 정우엔지니어링 정우정보산 업 동부해 양도시가스산업 등 5개 회 사가 있었다. 벽 산은 87 년 4월 정우에 대한 인수 가계약을 맺고 위탁관리에 들어갔 다. 왜냐 하면 1 개월 동안 검토해서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 기 때문이었다. 정전무(그후 전무로 승진)는 1 년 가까이 인수팀장으로 일 하며 수많은 고생을 했다. 인수 작업 이 이루어지고 있는 도 중에 정권이 전두환 대통령에서 노태우 대통령으로 바뀌자 정우 직원들이 벽산의 인수를 반대하는 데모를 했다. 말썽 도 많았지만 88년말 정식으로 인수를 했다. 그 와중을 겪으 면서 정상무의 체중은 5 kg 이나 줄었다. 그때부터 혈압이 높아져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잊을 수 없는 친구 정부사장은 목포에서 중앙국교 목포중 목포고를 나왔다. 국민학교 졸업식장에서 어린 그는 씁쓸한 맛을 보아야 했 다. 항상 1 등을 놓치 지 않았는데 엉 뚱한 아이 가 졸업식장에 서 1 등상을 받았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데 그 학생의 부모와 담임 선생님 이 가까워 그렇게 됐다는 소문이 있었지요." 정부사장의 부친은 목포에서 소규모 가내공업을 운영했 다. 부친은 공원 15명을 거느리고. 난로 등 여러가지 생활용 품을 만드는 수공업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부친이 사업 에 실패하기 전인 고교 2학년 때까지는 법대를 지망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자빨리 대학을 졸 업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상과대 지망으로 바꿨 다. 그는 서울 상대에서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사우디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불귀의 객이 되고만 권 원기 박사를 잊을 수 없습니다." 정부사장은 사우디 주재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던 중 리야 드공항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진 권박사와 같은 비행기 를 탈 뻔 했다. 정부사장은 담만공항에서 사고 비행기를 놓 치는 바람에 사고를 면했던 것이다. 권박사는 사우디정부와 회의를 위해 갔다가 돌아오던 중이었다. 정부사장은 그 다음 비행기 편으로 사무실에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자 직원이 권박사의 사망 소 식을 알려주었다. 중앙경제신문 논설위원을 지낸 김영곤 동 문은 도서관 자유열람실에서 꿇어 엎드려 공부해야 했던 인 고의 시절에 만났던 친구이다. 학교 앞에서 방 하나 얻어 놓 고 같이 세 끼 매식하며 1 년 6개월간 공부했다. 안재원 동일 방직 전무도 잊을 수 없는 친구이다. 그리고 대학동창으로 가깝게 지낸 친구로는 같이 산업은 행에 근무했던 국민경제연구원 원장인 서상록 박사,경기고 출신의 수재이며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길수하,대우 자동차판매(주) 최정호 사장,대우자동차공업(주) 김태구 사 장, 쌍용양회(주) 우덕창 사장,대유증권 배창모 사장,새한 렌탈 이재원 사장 등은 모두 산업은행 출신 대학동기로서 지금도 두터운 우정을 나누고 있다. 특히 서상록 박사,길수 하 사장,최정호 사장 3명과는 60년대 후반 산업은행 근무 시절 주당 4인방으로 월급날에는 외상값을 못갚아 쩔쩔멜 정도로 당시 명동 주점가를 휩쓸고 다녔고,헤아릴 수 없는 많은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는 친구들이다. 동일방직 안재원 전무는 2학년 때 종암동 같은 방에서 하숙했으며,하숙집 딸을 놓고 경쟁을 벌였던 추억과 낭만 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광주고 출신의 수재인 러시아경제 공사로 있는 이상태도 잊지 못할 친구이다. 알칸-닛케이 김 형수 사장은 1 년 6개월의 학보병 근무시절 같은 중대에서 생 사고락을 같이 나누었던 친구로 지금도 자주 술자리를 같 이 하고 있다. 박청부 가스공사 사장,장기신용은행 박창수 감사,최청 림 조선일보 편집국장,차윤소 조흥은행 부장도 현재까지 우정을 나누고 있는 대학동창들이다. 심재선 태산상호신용금고 사장, 배정운 (주)성진실업 사 장,이태형 수자원공사 감사도 자주 소줏잔을 나누고 있는 동창들이 다. 목포고등학교,목포중학의 동창들로는 전윤철 공정거래 위원회 상임위원,김민웅 국세청 과장,김승우 부장판사,김 홍천 한일은행 지점장,한화갑 국회의원(민주당) 등은 모두 서울대 동문으로 지금도 1 주일이 멀다 하고 자주 모이는 고 향 친구들이다. 정부사장과 1,2년 차이로 서울법대에 입학 한 전윤철,김민웅,김승우,김홍천 군들과 종로바닥이 좁다 하고 대폿집에 자주 몰려 다녔고 용돈이 떨어지면 전당포 신세도 같이 졌던 고향의 벗들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송기종 군은 서울법대에 다니면서도 고 시 공부하는 학생들을 비웃으며 이태백이 같은 호연지기를 보였으나 술 때문에 건강을 이기지 못하여 먼저 세상을 떠났다. 스포츠 조선 이용호 부국장은 외국어대 출신으로 와 신상담 끝에 늦게 조선일보에 입사하였는데,대학시절에는 항상 이용호 군의 서대문 누님집이 정부사장 일당들의 집합 장소로 고인이 되신 이군 누님집의 쌀가마 축을 많이 냈다. 목포중을 나오고 중앙고등학교를 졸업, 연세대를 나온 민병 초 전국회의원(현재 해남에서 정미소 운영),무역 오퍼상을 하고 있는 서한길 사장,하나로건축설계의 대표로 있는 서 천식,삼부화학의 이한길 사장,금성건축 대표 강응권,미원 그룹 사장으로 있다가 최근에 개인 연구소를 차린 이태욱 등은 재경 목포중(10회),목포고(8회) 동창회장을 역임한 친구들로 정부사장과 함께 목포중고 동창을 빛내는 사람들 이다. 특히 한화갑 의원은 서울 문리대 정외과 출신으로 대학 졸업후 국회의원이 될 때까지 옥살이를 세번이나 한 민주운 동의 투사로서 자타가 공인하는 DJ선생의 측근이다. 사회생활에서 잊혀지지 않는 기억 정부사장은 산업은행 근무 때 청와대에서 실시한 부실기 업 정리에 1 년 동안 파견나간 바 있다. 회사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67년의 일이다. 그 회사의 부실 경영 상태를 조사하기 위해 재무부 상공부 산업은행으로 구성된 청와대 조사팀을 만들었다. 한 기업이 차관을 들여와 공장을 건설 하는 과정 에서 문제 가 있다는 정 보를 받고 조사하기 시 작했 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문제를 발견했다. "외부압력도 많았고,그도 안되니까 금전 유혹까지 펼쳤 습니다. 때로는 생명을 위협하는 공갈 협박까지 받으며 철 저히 원리원칙대로 조사를 끝냈습니다. 그런데 이 기업의 부정사건이 정치적으로 해결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경험 했습니다." 정행원으로서는 재무부 장관 표창장 하나 받고 입을 다물 어야 했다. 매우 언짢은 일이었다. 정의감을 가지고 조사를 한 것은 젊은이로서 올바른 일을 한 것이라고 그는 회고했 다. 그 다음은 정우개발 인수과정에서 1년 6개월 동안 고생 한것이다.' "그당시 채권자들에게 멱살도 잡히고 뺨도 맞는 등 갖은 수모를 다 겪었습니다. 돈을 안주면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사람도 있었지요." 정우개발 5개사 인수과정에서 겪은 경험은 고통도 많았 지만 보람도 많았다. 그룹 내에서도 반대가 많았다. 그룹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냐며 반대하는 사람도 있 었지만 지내 놓고 보니 기업의 변신과 성장에 많은 도움이 되었고 그 당시 판단이 옳았다는데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바르게,다르게,다같이정부사장은 그의 경영철학을 묻자바르게,다르게,다같 이라고 말했다. "혹자는 기업이란 이윤추구가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 나 수단 방법을 안가리고 돈버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경영 인은 정도를 걸어야 합니다. 성장속도가 느리고 화려하지 못할지라도 길이 승리의 길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정권이 득세할 때 어떤 기업이 득이 될지 모르지만 정권이 바뀌면 오히려 손해를 본다면서 원칙대로 꾸준히 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말로 혁신을 주장하고 있는데 조그만 일부터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작은 일이 차곡 차곡 쌓이면 혁신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거 창한 구호를 좋아하지 않는다. "미국 이나 일본 기업들이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는 거창한 구호를 내건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하고 정부사장은 반문했다. "인사원칙은 우리나라가 유교 문화권이기 때문에 연공서 열을 무시 할 수는 없습니 다. 50 %능력 , 50%의 연공이 우리나라 실정에 맞습니다." 연공서열만 주장하다 보면 조직이 너무 침체된다는 게 그 의 지론이다. 반반의 비율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좋다는 것 이다. 그가 직원들을 평가할 때 중시하는 것은 첫째 창외력, 둘째 업무추진력 또는 도전성,세번째 의사결정력과 판단력 이다. 신입사원 면접 때는 "심성을 본다"했다. 10여년을 면하는데 참여하다 보니까 심성을 어느 정도 볼 줄 안다며 그는 웃는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을지라도 밝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두운 사람이 있는데 후자는 선발하지 않는다 고 일러 주었다. 그는 긍정적인 사람을 좋아한다고 강조했 다. "신입사원 교육 때 항상 긍정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해 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신입사원이 오래된 사원과 똑같이 틀에 박혀선 안됩니다. 신입사원은 발상이 신선해야 합니 다." 마쓰시타 전기 회사가 일류 제품의 목표를 따라 잡고 나니 까 직원들에게 목표가 없어지면서 회사가 어려웠다는 일화 를 들려 주었다. 방황하던 마쓰시타 전기는 20대 후반과 30 대 젊은 사원 500명을 모아 21세기 인간형을 연구하는 팀 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업도 인간을 연구하는 데서 나옵니다. 엉뚱한 발상을 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상품이나 사업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 습니다." 과감한 발상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 라고 역설했다. 한두번 실패해도3, 4번째 성공하면 회사에 도움이 된다는 철학을 정부사장은 갖고 있다. 정부사장은 최근에는인간다운 경영을 강조한다. "기업이 국가와 사회 에 기여하는 것이 최종 목표라면 기업을 구성하고 이끌어 가는 경영자와 종업원이 인간다운 직업관,경영관, 가치관 을 가져야만 최종 목표의 달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훌륭 한 품성과 가치관을 갖춘 종업원이 많은 기업은 사회로부터 신뢰를 받고 존경을 받아 결국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 이다. 경영자의 올바르고 건전한 경 영관은 종업원들에게 모 범이 되며, 일상적인 기업활동에서 고객과 접촉하는 직원들 의 사고방식,행동스타일,직업의식, 가치관은 그대로 그 기 업의 이미지와 평판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제는 제품과 서비스 등 경제적 품질보다는 기업의 경영이념과 종업원의 정성과 혼이 담긴 풍질 좋은 상품이 더욱 중요시 되는 사회 라는 것이인간다운 경영의 포인트임을 정부사장은 힘주 어 말했다. 종래에는 도덕적 기준을 떠나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써서 라도 기업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직원을 유능하다고 평 가했으나 이제는 그런 식의 경영관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 다. 올바른 방법이 아닌, 그러나 빠른 길로 목표를 달성 하는 것은 단기적 인 승부에서는 이 길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실 패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고 건전한 가치관에 어긋나지 않는 기준에서 기업경영의 목표와 전략,행동양식이 정해져야 한 다. 그러기 위해서 기업은 종업원의 품성과 철학이 인간다 운 기준에서 출발해야 하며,인간성을 존중하는 종업원을 양성 하는 것을 교육훈련의 제 일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인간성이 풍부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 이 아닙니다. 신입사원 선발에서부터 교육훈련계획,중간관 리자들의 OJT 교육,임원들의 부하관리 업무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그런 기본철학이 반영되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중 요한 것은 최고경영자의 확고한 경영이념과 경영철학입니 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기업인의 사회적 긍지를 항상 최고의 경영가치관으로 생각하고 기업의 최고경영자가 된 것을 명예로 생각하는 사회적 인식이 중요하다고 정부사장 은 믿는다. "인간으로서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것이 세가지 있습니 다. 특히 남자의 경우 명예,돈, 권력입니다. 이 세가지를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다 가지려고 해도 신이 용서하지 않습 니다. 기업의 경영자는 명예를 먹고 살아야 합니다. 수백명 수천명을 거느린 기업의 장으로서 그 기업이 발전하여 사회 에 기여하는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 입니까. 본인도 그렇게 느껴야 하고 사회 전체가 그런 경영 자를 존중해주는 풍토가 되어야 합니다."  보수와 혁신의 조화,벽산그룹 벽산그룹은 현대 삼성과 같이 대규모의 그룹이 아닌 중규 모의 그룹이다. 벽산그룹은 외부에 PR하는 것에 대해 그렇게 적극적이지도 못하다. 조용히 묵묵하게 기업활동에 전념 하는 것이 주된 흐름이다. 80년대에 다른 기업에서는 정부 와의 좋은 역학관계에서 기업을 확장해 왔지만 벽산은 그저 분수에 맞게 이끌어 왔다. 그러다 보니 주위에서 보수적인 그룹으로 본다. 그러나 화려하지 않지만 착실하게 성장해 온 그룹이다. 경영인맥의 구성을 보면 창업 이후 비교적 20~30년 근무해온 임원들이 반이고,정부사장과 같이 80 년대초 이후 참여한 임원들이 반 정도이다. 80년대 후반부 터는 정부사장을 중심으로한 경영인들이 그룹 확장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보수와 혁신이 조화되어 90년대 이후에 는 보다 활발한 벽산그룹의 성장이 기대된다. 김희철 회장을 중심으로 2세대 경영이 우리 기업계의 세 대교체와 함께 벽산그룹의 21세기 경영에 변화와 성장을 예상케하며, 정부사장을 비롯한 5~6명의 전문경영인들이 벽산의 발전을 이끌어 가는데 대한 업계의 기대가 크다. 벽산그룹의 창업자인 김 인득 회장은 기독교 승동교회(인 사동에 있음) 장로이다. 승동교회는 우리나라에서 역사가 오래된 교회이다. 그는 기독교 실업인회 회장직과 총신대 재단이사장, 기독교신문사 사장 등을 맡고 있다. 최태섭 씨 와 같이 한국기독교 실업인 원로로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벽산그룹은 창업자의 기독교 정신을 본받기 위해 매주 토 요일 직 장예 배를 본다. 그것은 다른 그룹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특성이다. 또한 소비재를 생산하지 않고 제조업 중심의 생산재를 중점적으 로 생산하는 그룹이라는 점이 벽산의 또 다른 특징이며 자 랑이 다. 건설업의 목적이 인간을 위한, 인간의 편리한 공간을 창 조하는 것입니다." 정부사장은 건설업의 장래를 밝게 전망했다. 그러면서 모 든 기업이 기술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 다. 최고 경 영자도 기술자 출신이 많이 배출돼 야 한다는 것, 동시에 국내보다 해외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 이 그의 지론이다. 우리나라는 국토 면적이 좁고 자원이 없 어 해외시장을 많이 파고 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른바 한국기 업 의 국제 화를 촉구하는 주장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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