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거 45주기를 맞아 스코필드 박사님을 추모하면서
김수영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는 영국의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로 대동강을 통해 한국에 들여오려다 배 위에서 순교를 당했다. 대원군의 쇄국정치로 천주교를 탄압하던 시기였다. 그 후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가 들어와 배재학당을 세웠고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가 연희전문학교를 세워 기독교 교육을 시작했다. 이 세분 선교사의 복음전파로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외국 선교사님들 가운데 내가 직접 만나뵙고 지대한 영향을 받은 분은 윌리엄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님이다. 서울대학교가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기 전 문리과 대학 건너편에 의과대학이 있었고 의과대학 구내에 외국인 교수회관이 있었다. 스코필드 박사님이 이곳에서 기거하시면서 수의과대학 교수로 세균학과 병리학을 가르치고 계셨다. 영국에서 오신 영문학 전공 교환교수님을 찾아뵈러 갔다가 그곳에서 우연히 스코필드 박사님을 만나뵙고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하셔서 지팡이를 짚고 다니셨다.
도움이 필요하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자주 찾아뵙고 영어성경공부와 보육원에서 통역으로, 세계 각국에 장학금 모금편지 쓰는 일 등등… 도와 드리면서 나에겐 Gwen이란 영어 이름, 동생 김영교 시인에게는 Dora란 영어 이름을 지어 주셨다. 사랑의 인연으로 삼촌이 되어 주시겠다고 하셔서 늘 ‘Uncle Frank’라고 불렀다.
고려대학교 석좌교수로 계시는 오라버니가 1960년도 미국 유학의 장도에 오르기 위해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였다. 스코필드 박사님은 지팡이를 짚고 비행장까지 나오셔서 배웅해 주셨다. 그때 함께 기념으로 찍은 빛바랜 사진을 반세기가 넘도록 간직하고 있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를 비롯한 사회 많은 저명인사가 스코필드 박사님께 장학금을 받아 공부하였고 그 후 기독교인들이 되었다.
1919년 삼일독립운동 때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위하여 삼일운동에 민족대표 34인으로 참여, 일인주간의 영어신문에 익명으로 일본정책을 비난하는 글 기고, 제암리 사건 현장 답사 후 기록, 삼일 운동 시 일본의 비인도적 만행 중지를 호소, 일본 동경 극동지구선교사 전체회의에서 삼일운동을 알림, 유관순 열사 등 삼일 운동 관련형 복무자 방문 및 격려 등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우리의 위대한 애국자이시다.
대한민국을 그토록 사랑한 그는 고향인 캐나다 보다 한국에서 묻히기 소원, 1970년 4월 12일 한국에서 영면 하셨다. 우리나라 독립을 도운 유일한 외국선교사로 국립현충원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다른 선교사님들은 모두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박사께 대한민국 문화훈장(1960)과 건국훈장 독립장(1968)을 추서하였다.
스코필드 박사님이 나에게 보내온 많은 친필 편지를 정운찬 전 총리께 드렸다. 친필 편지를 다 잃어버리고 한장도 없다 하시면서 귀한 자료니 모두 달라고 하셔서 잘 보관하고 계신다. 언젠가 스코필드 박사 추모기념관이 세워지면 그곳에 진열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는 예수님을 닮아 비둘기처럼 온순한 성격이었는데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느라,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느라 비둘기 깃털은 다 빠지고 호랑이로 변했다며 웃으시곤 했다. 호랑이 삼촌, 스코필드 박사님! 나의 영적인 멘토가 되어주신 당신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