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원재훈 자료실

미켈란젤로 “나에게 붓이 아닌 끌을 다오” 外|FINE·ART

작성자원 재훈(뉴저지)|작성시간19.11.11|조회수876 목록 댓글 0

미켈란젤로 “나에게 붓이 아닌 끌을 다오” 外|FINE·ART

관리자 | 조회 35 |추천 0 |2014.10.16. 10:17 http://cafe.daum.net/alumni-boseong51/5LHB/25  //

function pollSubmit() { if (!checkData()) { alert(‎"보기를 선택하세요"); return; } document.bbsForm.action = "/_c21_/article_poll_vote"; document.bbsForm.grpid.value = "1TnS3"; document.bbsForm.mgrpid.value = ""; document.bbsForm.fldid.value = "5LHB"; document.bbsForm.dataid.value = "25"; document.bbsForm.pollseq.value = ""; document.bbsForm.return_url.value = "/_c21_/bbs_read?grpid=1TnS3&mgrpid=&fldid=5LHB&page=2&prev_page=3&firstbbsdepth=0000Lzzzzzzzzzzzzzzzzzzzzzzzzz&lastbbsdepth=00002zzzzzzzzzzzzzzzzzzzzzzzzz&contentval=0000Pzzzzzzzzzzzzzzzzzzzzzzzzz&datanum=25&listnum=20"; document.bbsForm.submit(); } function checkData() { var choice = document.bbsForm.article_poll_fldpoll_egseq; if(choice.length > 0) { for(i = 0; i < choice.length; i++) if (choice[i].checked) return true; } else { return choice.checked; } } function popup(szURL, szName, iWidth, iHeight) { window.open(szURL, szName, 'width=' + iWidth + ',height=' + iHeight + ',resizable=no,scrollbars=no'); }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vs 다빈치 vs 라파엘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Buonarroti) · “나에게 붓이 아닌 끌을 다오”
ⓒ박상철
  EBS 세계의 눈 · 바티칸의 보물들 · 1 - 2
vod_high.gif 1 르네상스 회화와 고대 문명의 유산 · 2014/08/09
vod_high.gif 2 두 거장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 2014/08/16
▲ Michelangelo(1475-1564) - David, detail of the copy outside the Palazzo Vecchio in Florence.
honybee.gif    미켈란젤로, “나에게 붓이 아닌 끌을”

라이벌 미켈란젤로 와 다빈치 (Leonardo da Vinci)

서양 미술의 역사 속에 명멸해 간 무수한 작가들 중에 가장 위대했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꼽아보라면 누구를 떠올리게 될까? 개인적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두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이 두 사람이 그린 회화 작품 <모나리자>와 <시스티나 천장화>가 또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들이 아닐까 싶다. 유명세로는 <모나리자>가, 스케일에서는
<시스티나 천장화>가 앞서겠는데 두 작품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다만 재미있는 사실은 이 두 최고의 작가들이 동시대 사람이라는 것이다.
동시대인일 뿐만 아니라 서로 라이벌 의식이 지나쳐 마주치기만 하면 으르렁댔다.
다빈치가 1452년생이고 미켈란젤로가 1475년에 태어났으니 스물 하고도 세 살 차이.
한 세대가 차이 날 정도로 다빈치가 연상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같은
15~16세기에 르네상스의 최고 중흥기를 함께 이끈 천재요, 거장이었다.
그리고 예술가들의 경쟁에 세대차 같은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는 자신의 재능에 대한 확신이 컸던 만큼이나
일찌감치 인정을 받은 다빈치의 천재성을 질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최대 걸작으로 꼽을 만한 작품은 조각의 <다비드>와 그림에선
<시스티나 천장화>이다. 미켈란젤로가 거인이라 불린 <다비드>를 만들어 전 피렌체
시민들의 찬탄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지만 그 보수는 금화 400 플로린에 불과했는데 반해
비슷한 시기의 레오나르도는 시청 회의실에 그릴 프레스코화의 대가로 금화 1만 플로린을
받기로 결정되었다. 무려 25배! 은근히 자신이 피렌체의 최고 예술가라 자부했던
미켈란젤로가 어떤 심정이었을까? 다빈치가 항상 주장하던 대로 조각은 회화의 발꿈치
에도 미치지 못하는, 한갓 기예일 뿐이라 여겨지게 하는 작품료의 차이가 아닌가.

그러나 그때 당시 의뢰되었던 다빈치의 벽화 <앙기아리 전투>는 완성되지 못했던 반면에
미켈란젤로의 거인 <다비드>는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되었다. 저 유명한 모나리자
조차 끝내 완성다운 완성을 보지 못하고 갖고 다닌 다빈치였지만 미켈란젤로는
수십 명의 화가가 덤벼도 힘들었을 성당 천장화를 특유의 집념으로 완성해낸다.

미켈란젤로, <다비드> ⓒ박상철

신장 155cm의 거인

이렇듯 미켈란젤로의 위대함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상승하는 힘을 보여주었지만
다빈치는 예술에만 신경 쓰기에는 너무도 재주가 많은 천재여서 남긴 작품이
아쉬울 정도로 적다. 만일 다빈치가 그의 재능을 온전하게 그림에 쏟았다면
상황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 어떤 엄청난 작품이 탄생했을지 상상만 해도 명치가 짜릿해 질 일이지만
다빈치의 성격상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같은 대작은 절대 사양했을 것이다.
밀라노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 식당 벽의 <최후의 만찬>이 다빈치가
그린 유일한 대작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시스티나 천장화>와는 규모가 다르다.
크기도 크기려니와 미켈란젤로처럼 천장 아래의 작업대에 위태롭게 누워서 뚝뚝
떨어지는 물감을 얼굴에 묻혀가며 작업을 해야 한다면 아무리 교황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레오나르도는 백리 천리 밖으로 달아나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그 거대한 ‘천장화’를 혼자서, 4년 6개월 만에 완성시켜 버린다.
미켈란젤로가 원했던 일도 아니었다.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억지로 시킨 일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어서 조각 일로 돌아가고 싶어서 천장화를 예정보다 일찌감치 완성시켜
버렸다나? 참으로 인간 능력의 한계를 넘어선 거인 같은 면모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정작 이 거인의 키는 155cm 였다.

그토록 작은 키에다, 스스로 생각해도 납작해 보이는 못생긴 얼굴인데 기를란다요
공방의 수습 시절에 동료 토리자노와 다툼 끝에 주먹으로 얻어맞은 코가 주저앉아 버렸다.
거기다가 그는 조각가로서 만이 자신을 드높일 기회라 생각하고 일찌감치 몸단장 따위는
포기해버려 항상 추레한 작업복 차림에 잘 씻지도 않았으니 전형적인 지저분한 예술가
타입이라 해야겠다. 생김새에 관한 한 콤플렉스 덩어리였던 미켈란젤로는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얼굴과 몸을 지닌 남자를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반면에 레오나르도는 어떠했던가.
미켈란젤로의 제자이자 <르네상스 예술가 평전>이란 책을 펴낸 바사리는 그 책에서
레오나르도의 생김새와 몸매는 아름답기 그지없고 행동은 우아하고 깊이가 있으며
성품 또한 너그러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옷차림도 항상 깔끔하게 신경 써서 세련되고
고상한 기품을 보여주었고 사교적인 성격까지 더하니 추종자들이 무리를 이루어 따라
다녔다. 다만 변덕스럽고 끈기가 없었으며 너무나 다양한 방면에 관심과 능력이 넘쳐
한 두 분야의 대가로 만족할 수가 없었던 것이 흠이라면 흠이랄까? 그런 레오나르도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졌으니 미켈란젤로가 질투심에 불타지 않을 도리가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두 천재는 서로에게 질투심 섞인 경외심을 품고 있었고
아름다움과 예술을 추구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았다. 그들 둘 다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지냈으며 동성애적 성향이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다빈치의 그림을 틈나는데로 모사했고
다빈치도 미켈란젤로의 거대한 조각상 <다비드>에 감탄해 옮겨 그린 그림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박상철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박상철

너무도 인간적인 천재

그런데 그토록 대단한 거인이자 천재인 미켈란젤로는 실제로는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 이었다. 그는 평생 돈과 가족 때문에 골치를 썩이고 다빈치를 비롯한 경쟁자들과 다투고 교황과
고위 성직자들을 미워한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미켈란젤로는 어떤 사람이었던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렸고 피에타와 다비드를 조각한 르네상스 3대 거장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정도이려나. 그렇다. 그 정도가 일반 상식이나 퀴즈 프로그램에 나오는 수준이겠다. 그 정도 상식을 벗어나 좀 더 알아보기에는 시간과 성의가 꽤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세상에 알아두어야 할 위인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도 정말 조금만 더 시간과 성의를 들이면 재미있는 사실을 많이 알 수 있다.
미켈란젤로는 작고 못생긴 자신의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었고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며
화가가 아니라 조각가로 지낼 수 있기를 갈망했다. 르네상스의 다른 두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라파엘로 산치오 보다 오래 살았고 작품도 많이 남겼다.
다빈치와 라파엘로가 후원자와 세인들의 인정을 받고 명예를 뽐내며 추종자들을 거느릴 때
미켈란젤로는 오로지 작품에만 매달려 미친 듯이 일했다. 다빈치는 조각 따위는 단순히 기술에 불과할 뿐 고상한 회화 예술과는 격이 떨어진다며 미켈란젤로의 속을 박박 긁었고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에 경도되어 모방한 주제에 교황의 사랑을 업고 미켈란젤로를 조롱했다.

교황들! 평생 미켈란젤로를 괴롭혔던 교황들.
자신들의 명예와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미켈란젤로를 턱 끝으로 부렸던 교황청의 인간들은
조각을 하라고 청해 놓고서도 무얼 조각할 것인지 결정해 주지 않고 몇 년을 허송세월 하게
만든다. 물론 그동안 보수도 없다. 엄청난 조각을 의뢰했다가 취소하기도 손바닥 뒤집듯
하고 수십 년이 걸려야 완성이 가능한 작업을 수년 내에 끝내라고 독촉하기도 예사였다.
몇 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불세출의 예술가를 괴롭힌 교황들 중 지금껏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있을까?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대표적인 예인데 갑옷을 입고 다닌 이 전투적인 교황과 미켈란젤로는 불과 불이 맞붙어 싸우는 듯 했다. 돈을 제대로 주지도 않고 접견도
허락하지 않은 교황에게 열 받아서 고향인 피렌체로 달아난 미켈란젤로를 달래다 못해 시장인 소데리니에게 협박까지 해서 다시 데려왔다니 전투 교황 보다 예술가의 고집이 한 수 위였나
보다. 그런데 그런 막무가내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억지로 시켜 떠맡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가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으로 완성되었으니 단순한 악연 이상의 엄청난 아이러니다.

가족은 또 어떠했던가. 미켈란젤로의 아버지 로도비코는 얼마 되지도 않는 물려받은 재산으로 근근이 살았었는데 미켈란젤로가 돈을 벌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죽을 때까지 굶주린 진드기처럼 돈을 뜯어내며 살았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형제들도 마찬가지로 미켈란젤로가 유명해지면서 큰 보수를 받는 것을 보고 난 후로 전혀 일할 생각을 하지 않았고 당연히 미켈란젤로가
전 가족을 부양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미켈란젤로는 끝없이 금화를 퍼낼 수 있는 황금 우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미켈란젤로 자신도 가족을 절대 잊지 않았다.
식구란 그런 것이다.

천재 미켈란젤로를 괴롭힌 사람은 아주 많았다. 교황과 가족 이외에 조각을 조롱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랬고 그의 그림을 훔쳐간 라파엘로가 그랬고 사사건건 미켈란젤로의 설계와 조각을 적대시 했던 건축가 브라만테가 그랬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괴롭혔다는 것은 그들이 미켈란젤로를 질투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미켈란젤로가
워낙 격정적인 사람이었던 탓도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미켈란젤로는 자기를 비판하거나 적대하는 자들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시비 걸고, 싸우고, 신경질을 부리고, 상처받거나 절망하고,
무섭게 화를 내기도 했다. 불과 같이 격정적인 사람이었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사람이 미켈란젤로였다. 또한 그러한 다혈질이 그가 창조한 거대하고
아름다운 작품들을 완성해 낼 수 있었던 힘의 바탕 아니었을까? 반면에 레오나르도는 그토록
우월하다고 주장했던 회화의 작은 작품들조차도 제대로 완성해 낼 열정과 끈기가 부족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 <새벽> ⓒ박상철

화가가 아닌 조각가이길 원한 사람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남자 누드상은 어떤 걸까나?
바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다. 받침을 제외한 상의 높이만 410cm 이다.
그리고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조각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유명세로야 밀로의 비너스도 있고 사모트라케의 니케, 로도스 섬의 라오콘 군상 등
더 오래전부터 인구에 회자된 조각들과 바로크 시대 >베르니니, 근대의 로댕과
현대에 들어와 데미안 허스트의 상어 박제도 있지만 거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나체상 이라는 찬사는 오로지 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에게만 해당될 뿐이다.

미켈란젤로는 조각가 이길 원했던 사람이었으나 그의 재능은 조각에만 있지 않았다.
먼저 얘기 했듯 억지로 떠맡은 프레스코화 <시스티나 천장화>가 인류의 최고 문화유산
중 하나가 될 정도이니 그의 천재성은 가히 무시무시한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조각가에게 맡긴 천장화. 미켈란젤로는 그것을 그리는 동안 먼저 계획했던 조각들,
교황의 무덤을 장식할 조각들을 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려 하지 않았다.
이미 교황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화가 라파엘로가 있지 않은가. 실제로 미켈란젤로는
재수 없이 여기던 라파엘로를 추천하기 까지 했다. 그러나 교황은 단호히 미켈란젤로를
지명했는데 그 뒤에서 교황을 조종한 것은 건축가 브라만테였다는 음모설이 있다.
브라만테는 자신의 건축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던 미켈란젤로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조각만을 원하는 미켈란젤로의 심중을 알고서 천장화를 맡도록 교황을 부추겼다.
만일 미켈란젤로가 천장화 일을 끝내 거절한다면 교황과의 관계는 끝장이 날 것이고
일을 맡는다 해도 당시 전성기 실력을 자랑하던 라파엘로의 그림보다 못할 것이 뻔하니
미켈란젤로의 명성은 땅에 떨어지리라 계산했다는 소리다.

하지만 결과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엄청난 오산으로 판명되고 말았다.
바로 그 오산과 교황의 무모한 명령 덕분에 성당의 천장화는 완성될 수 있었으니
음모자 브라만테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다. 나는 어떤 조각가든지 제대로 된 작가라면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천장화처럼 500㎡가
넘는 면적에 300명 이상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그림은 완전히 얘기가 다르다.
조수의 실력을 믿지 못하여 홀로 작업한 미켈란젤로의 4년6개월에 걸친 고통은
생각만 해도 처절하기 그지없다. 그 장대한 그림이 완성된 지 4개월도 채 되기 전에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세상을 떴고 또 그 다음 해에 브라만테도 사망한다.
우연이겠지만 교황과 브라만테는 <시스티나 천장화>를 탄생시키려 죽음이 미루어
진 것만 같은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미켈란젤로 또한 이런 무지막지한 권력의
명령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그 큰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그는 그림 보다 조각을 좋아했다.
그는 자신을 항상 조각가라 불렀고 조각 중에서도 대리석 조각만을 원했던 조각가였다.
끌과 망치로 대리석 덩어리 안에 내재해 있는 형상을 해방시킨다. 그러니까
그에게 조각은 단순히 돌을 깎아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대리석 안에 완성되어 있는 형태 바깥의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시키는 일이었다.

미켈란젤로, <다비드> ⓒ박상철

가장 완벽한 다비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유명한 <다비드>는 원래 산에서 캐낸 대리석 원석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조각가들이 형상을 찾아내지 못해 손을 대다 말고 25년 동안 방치한
어정쩡한 상태의 대리석 이었다. 조각용 대리석 중 최대 크기라 할 5m의 흰 대리석은
중간 부분이 아주 얇은 기둥모양 이었다. 도나텔로의 제자 두초가 깎다 말아서 ‘두초의 기둥’
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미지의 형상을 품은 대리석에 미켈란젤로는 열정적으로 빠졌고
자신만이 다비드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시장과 양모조합을 설득했다. 돌의 주인인
양모조합이 ‘두초의 기둥’을 작품으로 만들어 줄 조각가를 공개 모집했던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친구 안드레아 산소비노도 후보가 되었지만 다빈치는
조각 따위 하지 않겠다고 거절했고 산소비노는 대리석이 추가로 더 필요하다고 요구하는
바람에 경합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소데리니 시장의 지원을 받은 미켈란젤로가 선택되었는데 그가 ‘두초의 기둥’을 요리할 적임자로 뽑힌 것은 로마에서 <피에타>를 만든 후 큰 명성을
얻은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 돌과 그 돌로써 창조해 낼 조각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모습엔 전통적으로 다비드 상에 표현되던 골리앗의 머리도 없고
크고 역동적인 동세도 없다. 가늘고 홀쭉한 기둥 모습의 대리석으로는 불가능 했던 것이다.
그런 재료상의 제약도 제약이었지만 미켈란젤로가 원했던 다비드는 전혀 새로운
모습의 다비드였다. 도나텔로와 베로키오의 청동 다비드를 포함한 이전의 다비드상은
거의 골리앗의 잘라낸 머리를 밟고 서있었고 뭐든 걸치고 있었으며 여성적인 모습에
크기도 등신대 이상으로 크게 만들어 지지도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성경의 이야기에
나타난 대로 거인 골리앗을 돌팔매로 때려죽인 다비드가 상대적으로 작았다는 효과를
노린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이상과 기준은 동시대 조각들의 모습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있었다. < 아폴론 벨베데레>와 같은 미묘한 콘트라포스트
와 조용한 위엄이 그의 다비드 상에 부여할 이상적인 모습이었고 위대한 심플함만이
피렌체의 상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또 이전의 다비드처럼 여성적이거나
소년의 모습이 아닌 건장한 체격의 청년 모습의 다비드를 원했다.
그래서 청년 <다비드>는 그 거대한 크기 때문에 ‘일 기간테’ 즉 ‘거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원래의 거인은 다비드에게 맞아 죽은 골리앗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성서에도 없는 완전한 나체의 모습!
확실히 미켈란젤로는 여성보다 남성의 나체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의 스케치나 조각, 시스티나 성당화 에서도 항상 성인 남성의 잘 발달된 근육과 나체가
빠지지 않고 나타나는데 그 때문에 숱한 오해와 구설수에 오르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당시 예술가의 절반 이상이 동성애를 경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대상은 거의
근육 같은 건 발달되기 전의 미소년이었으니 청년의 누드가 동성애적 성향의 대상
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아마도 미학적인 견지에서 미켈란젤로는 여성보다 남성의
모습이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심지어 <시스티나 천장화>에 등장하는
많은 여자들도 우락부락한 남자의 근육과 골격을 지닌 모습이 대부분 이다. 다만
크기가 좀 작고 유방이 추가된 정도랄까. 그 그림에 나타난 남자와 여자들은
미켈란젤로의 해부학에 대한 지식의 표현이자 조각적인 3차원 모습의 추구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조각적인 그림이라 할 수 있겠다.

다시 <다비드> 이야기로 돌아가 그 공개적인 나체를 생각해 보면
미켈란젤로의 청년상은 세상 어디에 내다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신의 창조물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게 그의 믿음이었다. 다만 그 조각상을 쳐다보는 뭇 인간들이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부끄러워하듯 얼굴을 붉혔는데 아직껏 성기 모습을 감출
나뭇잎을 따로 제작해 둘 정도이니 500년 세월이 지났어도 인간은 여전히 자신이
부끄러운 원죄 의식은 여전한 모양이다.

어쨌든 2년 만에 완성된 이 <다비드>는 온 피렌체인의 사랑을 듬뿍 받게 되었는데
이 조각상을 어디에 둘 것인지에 대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산드로 보티첼리 등
피렌체 주요 인사들 30인이 모여 의논에 들어갔고 결국 미켈란젤로의 바람대로 베키오궁 앞
시뇨리아 광장에 놓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애당초 이 조각 일을 거절했던 레오나르도의
불편한 심중이 표출되어 별로 잘 보이지 않는 장소에 <다비드>를 설치할 것을 주장한 바 있어 <다비드>의 성공에 대한 질투심을 내비치기도 했다. 현재 원본 <다비드>는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시뇨리아 광장에는 복제품이 대신 설치되어 있다.

다른 모든 경쟁자와 대가들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미켈란젤로는 80대의 나이로
경이적인 체력과 열정을 가지고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조각하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설계하였다. 그가 마침내 90세의 나이에 로마에서 생을 접은 후 생전의 유언대로
피렌체의 산타크로체로 이장하여 사랑했던 고향 토스카나의 영원한 안식처에 모셔졌다.

- 출처 : 박상철 Insight Entertainment
top.gif

미켈란젤로, <모세> ⓒ박상철
미켈란젤로, <모세> ⓒ박상철
미켈란젤로, <Vatican Pieta> ⓒ박상철
미켈란젤로, 다비드
미켈란젤로, <Vatican Pieta> ⓒ박상철
미켈란젤로, <Dying Slave>, 1513-16 Marble
  ·  시스틴 천정화 · The Ceiling of the Sistine Chapel
미켈란젤로, <The Creation of Adam> The Ceiling of the Sistine Chapel
미켈란젤로, <The Temptation of Adam and Eve, Fresco> The Ceiling of the Sistine Chapel
  ·  최후의 심판 · Last Judgement

예술적 측면에서 본 바티칸은 거대한 미술관이다.
르네상스에서 바로크에 이르기까지 역대 교황들이 경쟁적으로
거대한 건축물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바티칸의 발상지인
성 베드로 성당은 미켈란젤로의 걸작으로 도배가 된 거대한 작품이다.

6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성당은 1506년에 재건된 것이며,
'피에타' 조각은 미켈란젤로 24세 때의 작품이다. 그러나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를 빼놓고 바티칸을, 또 미켈란젤로를 말할 수 없다.

미켈란젤로를 경쟁자로 생각한 건축가 브라만테는
벽화를 그려본 경험이 없는 그를 흠집내기 위한 음모의 하나로 천장 벽화를
그리도록 공작했던 것.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이 음모를 실력으로 극복,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그후 21년 뒤 다시 반강제적으로 맡아 완성한 것이
'최후의 심판'이다.

그러나 1564년 공의회는 전부 나체인 이 그림이 외설적이라고 해서 팬티를
입히기로 결정했다. 이때는 미켈란젤로가 죽기 한달 전의 일. 이미 기력이 쇠한
미켈란젤로에게 다시 부탁할수는 없던 공의회는 다른 화가들을 불러 팬티를 입히게된다.
그 이후 벽화의 인물들에게 옷을 입히기 위해 동원된 화가는 '팬티 화가'라는 별칭만
남아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최후의 심판' 은 이렇게 '도덕적으로 보강' 된
미켈란젤로와 '팬티화가' 의 합작품이다...
 
  • 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의 심판

  • 휘장 걷어내자 ''이단 (異端) 이다'' 경악

    1541년 만성절. 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의 심판>이 공개되었다.
    교황과 성직자들이 경사스런 행사에 맞추어 시스티나 예배소로 모여들었다.
    베드로 대성당 공사가 수십 년 째 완공이 지체되는 바람에 줄곧 여기서
    의식을 치러왔으니 새삼스런 걸음은 아니었다.

    1512년 이곳의 천장 프레스코를 완성하고 서른 해 남짓.
    예순 여섯의 늙은 예술가에게도 감회가 밀려왔다. 이윽고 창문을 가렸던 휘장을
    걷어내자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올려보는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최후의 심판 날, 뭇 영혼들의 찬양과 울부짖음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재림 예수가 하늘 복판에 앉았다. 천사와 악마, 꽃다운 생명을 던져서 신앙의
    사표가 되었던 순교자와 열두 제자들, 그리고 400명이 넘는 성자와 성녀들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퍼렇게 빛나는 하늘은 어떤 심판의 칼날보다 무섭고 전율스러웠다.
    그런데 그림을 뜯어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한순간 일그러지더니 술렁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쥐어짜는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단(異端)이다!”

    미켈란젤로는 이날 이후 숨을 거둘 때까지 <최후의 심판>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성직자와 교황청 관료들, 예술가와 인문학자들이 모두 한편이 되어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를 두둔하다가 `이처럼 저질스럽고 음란한
    장소에서 어떻게 기도와 찬양이 나오느냐''고 막말을 듣기도 했다. 뒤이어 성좌에 오른
    네 명의 교황들은 제단 프레스코에 대해서 전혀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전면 철거냐, 부분 개작이냐를 두고 안팎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성자, 성녀 알몸으로 그려

    그림 한 점을 두고 이단(異端)의 의혹을 천 가지 이상 꼽아대는 사람도 있었다.
    성자들 뒤통수에 후광이 없고 천사가 날개를 달지 않은 것도 시빗거리였다.
    예수 얼굴을 수염 없는 애송이로 그려놓았으니 교회의 권위를 어디서 찾느냐는
    볼멘 소리도 나왔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자와 성녀들을 실낱 하나 걸치지 않은
    빨간 알몸으로 벗겨놓은 게 탈이었다. 의전관 체세나는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음탕한
    그림을 교황 예배소에 버젓이 그려두었으니 자칫 목욕탕이나 술집에 온 줄 착각하겠다고
    비아냥대기까지 했다. 심지어 십자가를 모신 제단 바로 위에 악마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걸 보고 이건 예배소에 모인 사람들더러 곧장 지옥불로 직행하라는 이야기라고 수군댔다.
    더군다나 명부의 뱃사공 카론이 베드로의 고깃배에 타고 노를 휘두르는 판이니
    첫 교황 베드로가 일군 천오백 년 역사의 가톨릭 교회가 그림 속 푸른 바다에서 뱃멀미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24년 시비끝 수정결정

    압력을 견디다 못한 바오로 4세는 `그림을 바로 잡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시종장의 전언에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쏘아붙였다.
    “교황 성하께 먼저 세상을 바로 잡으시라고 전하게. 그러면 그까짓 그림 따위야
    저절로 바로 잡힐 테니.” 그러나 뒤를 이은 피우스 4세에게는 그런 발뺌이 통하지 않았다.
    교회의 권위는 그림 수정을 결의한다. 1564년 1월 21일 트렌티노 공의회의 결정은
    미켈란젤로가 여든 아홉 나이로 숨을 거두기 한 달 전에 내려졌다.

    수정 작업을 그의 제자 볼테라가 맡은 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스승의 뜻을 크게 다치지 않고 최소한의 가리개만 씌우는 정도에서 일을 마무리했다.
    다만 엉덩이를 흔들어댄다고 비난을 모았던 성녀 카테리나는 본격적으로 손보았다.
    성자들의 부끄러운 곳을 덮는 가리개는 회벽을 파내고 젖은 석회를 새로 바른 뒤에
    물감을 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볼테라는 이후 `브라게토니''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가리개 귀신''이란 뜻이다. - 미술사가 노성두

    살가죽에 미켈란젤로 자화상

    성 바르톨로메오는 산 채로 살가죽을 벗겨 죽이는 순교를 당했다.
    십자가에 매달거나, 돌로 쳐죽이거나, 자루에 넣고 바다에 빠뜨려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16세기 이탈리아 화가들은 극적 효과를 노리고 가장 참혹한 순교방식을 선호했다.
    잔혹 주제가 판치던 17세기에는 심지어 성자를 십자가에 매단 상태에서 인피를 벗겨
    내기도 했다. 미켈란젤로는 단검으로 발라낸 성자의 껍질에다 자신의 자화상을 새겼다.
    이로써 육신의 희미한 그림자 속에 예술의 고귀한 유령이 깃들게 되었다.

    최후의 심판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미켈란젤로는 제 얼굴을 그리면서 두 눈을 후벼팠다.
    실명의 달콤한 유혹이 그의 붓을 이끌었다. 또 그의 표정은 젖은 걸레처럼 일그러졌다.
    무슨 심사였을까? 성 바르톨로메오 말고도 살껍질을 벗겨서 죽은 인물이 또 있었다.
    마르시아스. 반인반수의 괴물이었으나 아폴론의 키타라를 능가하는 피리 솜씨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르네상스 이후 예술의 순교자로 추앙 받았던 신화 속의 존재다.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도 예술의 순교를 꿈꾸었을까?

    ''목욕탕에 어울리겠습니다''

    시인 아레티노는 탁월한 미술 비평가로 이름을 날렸다.
    베네치아 화가 티치아노에게는 간지러운 아부를 서슴지 않았으나
    그와 적대관계에 있던 미켈란젤로에게는 주특기인 독설을 쏟아냈다.
    <최후의 심판>을 보고 나서 1545년 일흔 먹은 미켈란젤로에게 쓴 편지다.

    “천사와 성인들은 지극히 고귀한 소재입니다. 그런데
    당신 그림을 보면 지상의 진지함이나 천상의 엄숙함을 눈곱만치도 찾을 수 없군요.
    알만한 예술가라면 디아나에게 옷을 챙겨주는 거야 말할 것도 없고 베누스도 손으로
    가릴 곳을 가리게 하지 않나요? 그런데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그대가 예술을 구실 삼아
    신앙을 깔보는군요. 순교자와 성스런 처녀들이 창피한 줄 모르고 넋빠진 자세로 저마다
    성기를 드러내고 있으니, 설령 유곽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쳐도 도저히 눈뜨고 못 볼
    희한한 볼거리가 되겠군요. 이 그림은 교황의 성스러운 예배소보다 고급 목욕탕에
    갖다두면 어울리겠습니다.”

    한겨레/문화생활/노성두의 '고전미술현장'
    top.gif

    The Last Judgment
    Fresco Cappella Sistina, Vatican by MICHELANGELO, 1537-41
      ·  아테네 학당 · The School of Athens
    라파엘로, <The School of Athens> 1510-11
    라파엘로, <The School of Athens> Plato and Aristotle
    The School of Athens, 1510-11 / Plato and Aristotle
    라파엘로, <The School of Athens> left side
    라파엘로, <The School of Athens> right side
    라파엘로, <The School of Athens>Zoroaster, Ptolemy, Raphael and Perugino
    The School of Athens, 1510-11 / Zoroaster, Ptolemy, Raphael and Perugino
    라파엘로, <Portrait of a Nude Woman (the 'Fornarina')> 1518
    Portrait of a Nude Woman (the 'Fornarina') 1518
    라파엘로, <The Burning of the Borgo> 1514
    The Burning of the Borgo, 1514

      ·  모나리자 (Mona Lisa) · 최후의 만찬
    Leonardo da Vinci, <The Last Supper>, 1498 after cleaning
    Leonardo da Vinci, <Mona Lisa>, 1503-06
    (Upper) The Last Supper, 1498 / (Lower) Mona Lisa, 1503-06

    다빈치가 19세기 살았다면,  모나리자 (Mona Lisa) 미소는 선명했다
    Leonardo da Vinci, <Mona Lisa>
    Mona Lisa, 1503-06










    “미술은 하나의 언어(word)다.”
    저명 미술사가인 호스트 월드마 잰슨과 앤소니 잰슨 부자는
    『서양미술사』에서 미술을 이렇게 규정했다.
    한국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언어인 수학으로 서양미술사를 해석한 독특한 연구결과를 내놨다.

    KAIST 물리학과의 정하웅 교수, 한양대 응용물리학과 손승우 교수는
    11세기 중반부터 19세기까지 서양화 8798점의 색상 · 명암 등을 복잡계 이론으로 분석했다.
    두 학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명암대비가 뚜렷해지고 다양한 색상이 사용된 것을 확인했다” 고 15일 밝혔다. 또 “이런 변화는 스푸마토(Sfumato, 물체의 윤곽선을 번지듯 그리는 명암법)
    ·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점진적으로 변해가는 명암법) 등
    미술 기법의 발전사와 일치했다” 고 덧붙였다.
    이번 연구 결과는 과학저널인 ‘사이언티픽 리포트(Scientific Reports)’에 소개됐다.

    연구팀은 헝가리 ‘물리학 컴퓨터 네트워킹 연구센터’가 운영하는 온라인 갤러리의
    빅데이터 이미지를 분석했다. 분석대상의 94%가 700×700 픽셀(화소) 이상이었고
    가장 큰 이미지는 1350×1533 픽셀이었다. 연구팀은 이 이미지들을 하나하나의
    점(픽셀)으로 쪼갠 뒤 물리학에서 사용하는 함수를 이용해 상관관계를 따졌다.
    가령 디지털 이미지에서 색은 R(적색) · G(녹색) · B(청색) 코드의 조합으로 표현된다.
    이 세 코드를 X · Y · Z축으로 바꾸면 3차원 공간에 점의 위치를 표시할 수 있다.
    그림의 색이 다양하면 이런 점들이 넓은 영역에 촘촘하게 배치 된다.
    명암 대비는 그림을 옆으로 눕혀 각 점의 밝기를 3차원 막대기둥으로 표시해 분석했다.
    명암 대비가 강하면 막대의 높낮이 차이가 커져 3차원 그림의 표면이 울퉁불퉁해진다.

    연구팀은 이런 값을 비교해 ‘암흑시대’로 불리는 중세가 지난 뒤부터 서양화에 사용된 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명암대비는 후기로 갈수록 강해졌다.
    연구팀은 이 같은 결과를 바탕으로 르네상스·바로크·로코코 등 각 미술사조(思潮)별
    특징을 정리했다. 이런 특징을 르네상스 시대 걸작인 ‘모나리자’에 적용해
    색과 명암이 어떻게 달라지는 지를 비교하기도 했다. 과학적 연구결과를 활용해
    바로크판 ‘모나리자’, 로코코판 ‘모나리자’의 상상도를 그려본 셈이다.
    정하웅 교수는 “서양화가 변화해온 트렌드를 정량화·객관화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고 말했다.

    미술계는 이에 대해 “원화가 아니라 디지털화된 ‘그림자’를 분석했다는 한계는 있지만
    흥미로운 시도” 라는 반응을 보였다. 선승혜 서울시립미술관 학예부장은
    “색보다는 선이 주가 되는 한국화, 동양미술을 분석했다면 더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을 것” 이라며 “이런 분야에도 과학적 분석이 가능한 빅데이터 자료가 구축되면 좋겠다” 고
    말했다.

    - 중앙일보 김한별 · 권근영 기자 2014-12-16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