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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만화계 거성 친구와 좋앗던 시절.

작성자신브라운|작성시간09.11.27|조회수187 목록 댓글 2
악돌이 추억들 :  결혼할 때 함지고 간 일, 장인장모에 그냥 건네 주었음. 바보들.
                       물마시기 시합에서 진일, 그는 8 바가지를 마시고 나는 7바가지 반을 마시고 나 다 토함.
                       최선웅 선배의 건빵 안주가 유죄.
                       박영래와 최선웅 선배의 인왕산 꼭대기 집에서 묶던 날들.  광교에서 누상동까지 걸어 다녔음.
                       둘이 산엘 가는데 그가 부추겨 나는 설탕푸대자루를 뚫어 아이스바일을 꽂고 다녔다.
                       그의 장인이 구파발 신발공장에서 두터운 비브람을 마추어 준 일.
                       설악산장  김종철씨가 저녁산날 무지게 마시고  둘이 합승, 담뱃불을 소파에 던져 택시 불나고
                       나도 멱살 잡히고, 그의 장모님에 체면 구기고.
                       그의 처남 대봉이 잘 있는지. 각씨 복점에 정말 미인이고. 주위에서 그녈 도둑질했다 했다.
                       동대 오영복,이형삼,이순용,최선웅 선배 겨울산행, 백운암,인수산장 거쳐  소주충음. 인사불성.
                       오후세시반 하산출발. 오영복의 우모복에 박기자를 싸 질질 끌.  우이산장 도착시간 밤 9시반. 기록적인 하산시간.
                       단청스님과 대낮부터 선일집 나의 원고료 다털어 마시고, 2차로 그의 외상차례. 
                       나 대학원 다닐 때 배고프고 술고플 때 조선일보 들리면 조퇴, 선일집 행. 다들 줄이어 모였고.
                       그는 평생 후배,친구,선배들에게 인상찌뿌리는 일이 없었다.
                       그의 명언,  담배는 피워서 지구에서 없애고 술은 마셔서 없애야 한다. 
                               안주남아 한병 더 시키고 술남아 안주 한 사라(일본말임) 더 시키고. 
                       참으로 보고 싶은 친구로다,  
 
우연히 보게된 친구 산악인, 만화가 박영래 기자에 관한 글로 필독강추입니다..  

[창간특집] <월간 山> 40년 기자 박영래 탐구

“술이 여기 있으니 술을 마신다”
‘악돌이’의 창조자이자 산악계의 마당발

“나는 원효나 사명대사의 마음을 이해한다”
학벌 지상주의와 끼리끼리 편 가르는 세속의 불합리함, 지나친 물욕에 대해 그는 열변을 토하며 분개했다. 이 꼴 저 꼴 보고 싶지 않아 헬멧을 눌러썼지만 실상은 변화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만화 캐릭터 악돌이는 박학다식한 암빙벽·산행 정보를 전했으며 동시에 산악계의 잘못된 행태와 허세·권위의식을 해학적으로 비판하며 날카롭게 깔아뭉갰다. 실상 허허실실해 보이는 그의 말투와 만화 속에는 상대방의 폐부를 긋는 날선 면도날과 자기 과시욕을 버리고 스스로 바닥까지 몸을 낮추는 내공이 담겨 있다. 최근의 악돌이를 보라. 스스로를 ‘개(犬)’라고 일컫는 경지에 이르지 아니하였던가.


“난 고등학교만 나왔어. 돈이 없어서 대학 못 간 게 아니라 더 배울 필요를 못 느꼈어. 고등학교 때부터 만화 그린 고료가 쌀 몇 가마니였거든. 평생 만화를 그리고 싶었어. 원래 꿈도 만화가였고.”


조선일보 창사 이래 고교 출신으로 기자가 된 사례는 단 두 번. 전쟁 때 종군기자 한 명과 박영래 기자다. 그는 1980년 산악문화사에서 조선일보로 <월간山>이 넘어갈 때도 살아남았으며 IMF 감원 열풍이 불어 명문대 출신들의 자리가 없어져도 살아남았다.


독자들의 악돌이에 대한 성원, 산에 대한 열정이 40년 등산기자 생활의 원동력이었다. 2004년 퇴직했지만 그의 책상은 여전히 산지 사무실에 남아 있다. 객원기자로 여전히 부록지도 코스 가이드와 악돌이 코너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매달 5~6일은 취재 산행을 간다. 거리로는 50~60km이다. 그것을 기사화하고 등산 지도를 만든다. 그렇게 40년을 이어왔다. 그의 취재 산행 원칙은 정확한 정보, 안전한 코스, 새로운 등산로를 전달하는 것이다.


5월 13일 밤 10시가 넘은 시간. 땀내가 밴 파란 등산복을 입은 이가 사무실에 들어섰다. 영동 천태산 취재 산행 후 막 서울에 올라온 박영래 선배였다. 그리곤 펜으로 빽빽하게 기록한 지도를 꺼내 옮겨 쓰는 작업에 돌입했다.


“선배님, 산행 어떠셨습니까?”하고 묻자 “천태산이 영동에서 올라오는 길은 소개가 됐지만 서쪽 금산에서 올라오는 길은 한 번도 소개된 적이 없어. 또 북동쪽 계곡에서 올라오는 길도 이렇게 좋은데 한 번도 소개된 적이 없단 말야. 우린 이런 거 다 확인해서 독자들에게 소개해줘야 해. 우리가 한 발 더 뛰어야 독자들이 행복한 거야.”


키 높은 풀숲을 헤쳤는지 그에게선 풀 냄새와 땀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는 지치지도 않는지 곧바로 등산 지도 작업에 몰입했다. 산 앞에서는 결코 양보가 없는 그에게는 지금도 ‘대충’이나 ‘매너리즘’ 같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 온천 산행 취재로 이 땅의 온천은 다 가봤지만 실상 탕 속에 들어가 본 적은 거의 없다. 그럴 시간에 주변 산에 오르고 동네 노인들 만나 산의 내력이나 지명, 온천 약효가 어떤지 하는 것들을 조사하고 민박은 어디서 하는지 등등을 취재해도 시간이 모자랐기에 일정을 빡빡하게 채우고 올라올 때에야 온천을 못했구나 하고 무릎을 친단다.


“한 번은 어느 온천에 갔는데 주인이 특실을 내주더라고. 근데 저녁이 되자 기똥차게 예쁜 아가씨가 한복을 입고 들어오는 거야. 사장님이 같이 자라고 했대. 그래서 몇 만 원 쥐어주면서 돌려보내고 사장한테는 아침에 잤다고 얘기하라 그랬지.”


취재는 떳떳해야 한다는 게 그의 도덕적인 원칙이다. 그래서인지 지난 40년간 수많은 산악인을 만났지만 촌지를 받았다거나 해서 추문이 돈 적이 한 번도 없다. 


“돈 많이 벌어 부자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 부동산 투기해서 부자 된 친구들 지금은 다 죽었어. 투기하느라 골머리 썩고 방석집 가서 술 먹으니 일찍 죽지. 나야 공기 좋은 산에서 먹으니 살아남았지. 아파트 몇 채 있다고 하면 내가 그러지. 나는 더 부자다. 텐트 1인용, 2인용, 3인용, 5인용 다 있다고. 나한테는 산이 종교야.”


산꾼은 술꾼이라 했던가. 그의 취중 기행은 산악계에서도 유명하다. 지금은 산행할 때 술을 안 마시지만 10년 전만 해도 배낭에 항상 소주 페트를 꽂고 다녔다.


“나는 술사랑 덕분에 원효나 사명대사 이런 분을 이해해. 쉽게 말해 열반을 이해하는 거야. 나는 그런 경험 많이 했어. 내 딸내미 비나 여섯 살 때 애들 데리고 도봉산에 갔어. 한국등산학교 수료식 있는 날이니 술 먹으러 간 거지. 나 혼자 가면 술 마시러 간다고 마누라가 뭐라 하니까 딸 데리고 갔지. 오후 다섯 시부터 산 입구에서 줄창 마셨지. 지나는 산꾼들은 다 붙잡고 한 잔씩 돌렸으니 꽤 마셨어. 그래 새벽 한 시쯤 집에 와서 배낭 내려놓고 등산화 끈을 푸는데 장모가 ‘박 서방, 애가 안 보여’하는 거라. 얼마나 기분 좋게 술을 먹었는지 술잔 돌렸던 산꾼들 말은 다 기억나는데, 딸 데리고 도봉산에 갔다는 기억은 그냥 없을 ‘무(無)’가 되더라고.”


결국 야간 산행하는 학국산악회원들이 소나무숲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찾아 데려다 주었고, 다음날 월요일부터 “박영래가 술 마시고 취해서 딸 버렸다더라”하고 소문이 퍼져 산 선배들에게서 엄청 욕을 얻어먹었다고 한다.


▲ 40년 경력의 베테랑 기자와 그에게 “핏덩이”라 불리는 막내 기자가 한자리에 섰다. 두 사람의 어색한 미소가 은근히 잘 어울린다.

소주 100잔에 받은 결혼 승낙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고 하잖아. 내가 그걸 체험했어요. 이번에는 포천 광덕산에 아들 자일이를 데리고 술 마시러 갔는데 버스 출발하기 전에 애한테 배낭 보라고 하고 얼른 내려가 순두부에 소주 한 병 털어 넣고 와서는 똑같이 생긴 버스를 탔어. 근데 그 버스가 아냐. 벌써 출발한 거지. 순간 의정부 시내가 다 노랗게 변하더라고. 왜냐. 직전에 도봉산에서 딸 잃어버린 사건 때문에 마누라한테 호되게 당했거든. 결국 택시 타고 쫓아가서 버스 잡았지.”


그렇다고 술 때문에 곤혹스런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주 100잔을 마시고 장인으로부터 인정받아 소문난 미녀였던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구파발에 등산화 공장이 있었는데 거기 사장님 딸이 예쁘다고 소문이 자자했어. 딸을 노리는 산꾼들이 많았지. 그 양반이 술 백 잔 마시면 딸을 준다고 해서 친구들이 가서 도전했는데 다 실패했어. 그래서 공짜로 술 먹을 기회가 생겼다고 가서 100잔 먹었지. 덤으로 좀 더 먹고. 사실 며칠 전부터 고기 먹고 몸을 좀 만들었지.”


그렇다고 그가 알코올 중독자처럼 그냥 술만 먹는 것은 아니다. 술자리는 취재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한 그만의 비법이었다. 술자리에서 그는 허허실실한 듯하면서도 유머와 재치가 있는 말솜씨로 분위기를 띄웠고 내로라하는 산악인들 모두가 술안주감이었다.


한편으로 이토록 그가 술을 좋아하는 것은 워낙 사람을 좋아하고 정이 많아서이기도 하다. 마당발인 그는 산악계의 크고 작은 애경사를 모두 챙기고 독자나 산꾼들의 술자리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특히 2004년 퇴임하고 나서는 더 바빠져, 그와 술자리를 갖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아는 전국의 산꾼들과 잔을 부딪치고 있다. 그러나 예순을 넘어서며 과거에 비해 술이 많이 줄었다. 하지만 건강을 위해 술을 끊을 생각은 없다.
“술, 담배 끊는다고 행복해지는 건 아냐. 전쟁터에서 술, 담배 안 한다고 총알이 피해가나? 그거나 마찬가지인 거지. 인생에서 불행이란 그런 거야.” 


토왕폭 초등자 박영배, 월간 <사람과 산> 사장 홍석하, 한국산악회 부회장 정우섭, 중앙고 OB 신승모, 동국대 OB 오영복, 안나푸르나 한국 초등자 유동옥씨 등이 그의 절친한 산친구이자, 술친구 들이다.


요즘의 등산객들은 잘 모르지만 ‘악돌이 박영래’는 우리나라 등산 조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가이드 산행 기사의 대가로서 40년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산을 소개한 일이 그렇다. 시중에 개인의 이름을 내건 무수히 많은 등산 가이드 책자와 인터넷 사이트가 있지만 그 중에 몇 퍼센트나 되는 필자가 자신이 발로 간 곳만을 지도에 표기했을까. <월간山>의 취재로 생긴 등산로를 뺀다 하더라도 상당수는 <월간山> 기사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서산대사의 선시(禪詩) ‘눈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는 /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말라 / 오늘 내가 지나간 발자국은 / 마침내 후인들의 길잡이가 될 것이니’를 두 발과 글로 실천한 이가 악돌이 박영래다.


“사실 40년 근무한 거 부끄럽게 생각해. 사람이 얼마나 할 게 없으면 한군데서 40년을 있었겠어. 40년 기자, 그거 결코 좋게 볼 필요없어. 나 같은 사람 뭐가 있다고 망신스럽게 기사를 써. 나중에 기사 다 써도 절대 미리 보여줄 생각 마.” 


그러나 이제는 안다. 그가 환갑이 넘어서도 여지껏 <월간山>에 머무는 것은 돈 때문도, 술 때문도 아닌 산꾼들 사이에서 머물고 싶은 순수한 욕망 때문임을.


그는 현대의 강호 속에서 취권을 구사한다. 산악계의 병폐는 공격하고 사람에게는 따뜻한 악돌이표 취권을 구사한다. 박영래 선배에게 경의를 표한다. 


 / 글 신준범 기자·사진 이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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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홍 종만 | 작성시간 09.11.28 즐겁던 지난날들을 떠올리며 자알 읽었네. 좋은글 올려서 다시한번 감사하네.
  • 작성자山巨志(강재병) | 작성시간 09.12.06 어제 영래형님과 통화를 했는데 형님한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전하랍니다.~ 요즘 년말이라서 한국에 산악회가 너무 많다보니 날마다 축제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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