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지난 5년 동안 틈나는대로 읽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일본 출신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작품입니다. 그는 이태리 로마에 살면서 지중해와 세계를 제패했던 로마의 역사를 재미있게 기록하였습니다. 그 서적들이 아주 방대합니다.
저는 그 책을 읽지만 현장감을 느끼기에는 부족하여 참 아쉬움을 느낍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이태리의 주요 도시를 방문하고, 그리고 십자군 전쟁 때에 이슬람군과 대항하면서 세웠던 성채를 방문해 보고 싶습니다. 그때의 현장 가운데서 그때의 사람으로 서서 그때의 느낌을 가져보고 싶었습니다.
오늘은 기독교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사도행전의 여러 사건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사건의 현장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바로 오순절의 성령강림의 현장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도하라고 당부했습니다(행1:4-5).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가지로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이때에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비가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의 아버지가 가장 좋은 것,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하고 두드리고 찾는 자에게, 사모하는 자에게 성령을 충만케 해주시는 것입니다.
성경 다른 곳에 보면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39) 죄를 회개하는 곳에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1907년 1907년 1월2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말씀 사경회가 열렸는데 1500명이 모였습니다. 이 말씀 사경회가 후일 한국교회의 대부흥이 일어나는 모닥불이 되었습니다.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 속에서 변변한 난방시설도 없이 여자들은 창밖에 멍석을 깔고 말씀에 귀를 기우렸습니다. 처음부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뭔가 어두움의 그림자가 평양 네거리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간구했으나 여전히 마음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이때였습니다. 장대현교회의 장로이자 전도사였던 길선주 씨가 단상에 서서 자기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평양 네거리에 영적 암흑을 몰고 온 장본인입니다. 저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서두를 꺼내면서 가슴 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은밀한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친구가 임종 시에 그를 불러놓고 가족을 돌봐 달라고 돈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그 돈의 일부를 숨겨두었던 죄를 고백하고, 그 돈을 내일 당장 갚겠다고 했습니다.
이날이 1월 8일로 추정되는데 이날의 죄의 고백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습니다. 1500여명의 교인들은 자기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각가지 은밀한 죄를 자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한 여인이 머리를 숙인 채 앞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회중은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우렸습니다.
“꼭 12년 전의 일입니다. 청일전쟁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 일본 군인이 나를 죽이려고 추적해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도저히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우선 나만이라도 살자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집 모퉁이를 지날 때 커다란 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에 아이의 머리를 부딪쳐 죽게 한 다음 아이를 숲 속에 던져버리고 도망을 쳤습니다. 그로부터 12년 세월이 지났습니다. 저는 가슴 한 구석에 숨겨 두었던 이 큰 죄를 하나님과 형제들 앞에서 고백하고, 깨끗한 양심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이 죄의 고백이 1907년 조국강산을 부흥의 물결로 파도 치게 했습니다. 영적 갱신과 위대한 부흥의 불길을 댕겼습니다.
한 여 교우가 가슴속의 장막을 제치고 숨겨두었던 죄를 고백했을 때, 회중의 마음을 열어 제치고 자기 죄를 자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간구했을 때, 부흥의 시작이었습니다.
“형제여 어찌할꼬”
성도들이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운동과 함께 성령의 강한 기름 부으심으로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 5:32)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 하나님이 강하게 임하십니다.
(행8:17)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
(행10:44)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 오시니 "
사도행전을 통해서 볼 때 성령님을 언제 받았느냐 하는 것은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다가, 어떤 이는 회개하다가 또 어떤 사람은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다가, 혹은 안수기도를 받다가, 혹은 말씀을 듣다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에게 한가지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성령님을 받으셨습니까?”
어떤 분은 확신에 찬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분은 머뭇거리며 부인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여러분의 대답과는 상관없이 이미 성령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임재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고전 12:3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靈)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主)시라 할 수 없느니라 "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자는 성령님이 이미 임했기에 그런 고백이 가능합니다. 2000년 전에 머나먼 이스라엘 땅에서 태어났다가 33년 만에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죽어버렸던 예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 믿는다는 것은 이미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내가 교회에 나와 앉아있다는 사실은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증거입니다.
내가 비록 성령의 임재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회개한 적이 없다고 해도, 성령 하나님은 나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임했습니다.
가령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는데 열심을 가진 흉측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다만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므로 성령님을 그에게 보내어 주셨고, 그에게 임하신 성령님의 도우심 속에서 그는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다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성령님을 받았습니까?”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습니까?”
여러분은 성령님을 받기 위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여러분에게 성령님을 이미 보내주신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성령을 받았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는 이미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를 받은 자는 성령충만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서로 사랑하는 청춘남녀가 연애하다가 결혼해서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아가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다. 이 과정에서 사랑하는 남녀는 부부로 살아가기 위해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것은 한번이면 족합니다.
결혼식을 했다고 늘 재미있고 행복한 생활이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식은 한 번 올리지만사랑은 매일 나누어야 합니다. 부부가 늘 함께 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무를 다함으로써 부부의 사랑이 지속됩니다.
이처럼 성령세례는 한 번이지만 성령충만은 우리 성도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의식하며 살 때에 성령충만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오순절 다락방의 현장으로 나아가보십시다. 120명의 성도가 말씀에 의지해서 기도할 때에 성령님이 강하게 임했습니다. 이때에 성령 하나님이 임하는 광경이 어떠했습니까?
(1) ‘바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2절에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바람 같은 소리와 함께 임했습니다. 성령이 바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마치 성령이 임하심이 바람이 불어오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는 말입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지나갈 때에 그 떨림으로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감각을 통하여 느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님도 보거나 만질 수 없지만 임할 때에 청각이나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바람은 힘을 동반합니다. 며칠 전에도 바람이 대단했습니다. 우리 집에도 정전이 되고 큰 나무가 둥지채 부러지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성령도 역시 힘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설교를 할 때 3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마른 뼈들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군대를 이루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겁 많던 주의 제자들이 성령이 임하자 죽음을 초월해서 복음을 전하고, 죽었던 자가 살아나고, 죄인이 탄식하는 기도를 하게 하는 힘이 나타났습니다.
(2) 성령이 임할 때에 불의 혀같이 갈라졌습니다.
이것은 성령이 임할 때에 시각적인 표현입니다. ‘불의 혀’라는 말은 불꽃을 말합니다. 성령이 마치 불꽃처럼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임했다는 말입니다.
불의 역할이란 태우고, 뜨겁게 하고, 체질을 바꾸어 놓습니다. 성령이 임한 다락방은 온통 뜨거운 불의 도가니와 같았습니다. 거기에 모인 120명의 제자들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출신 계층이 달랐지만 성령이 임할 때에 뜨거워지고 녹아져서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 증거로 바로 방언입니다.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오순절 날,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제자들은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습니다. 신앙적으로도 천차만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성령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기적입니다.
이것을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내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과 아주 연관이 있습니다. 나는 좀 부족하고 믿음이 약할지라도 내 주위에 뜨겁고 열렬한 신앙인과 헌신자들과 함께 있으면 그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격려와 사랑이 나에게도 함께 주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옛말에 애매한 사람과 함께 있다가 날벼락 맞는다고 했듯이 내 주변의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거입니다. 진실한 동료가 필요합니다. 뜨거운 신앙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이 일은 먼저 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소개하시기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14:16)
예수님께서 ‘보혜사“(保惠師)를 보내어 함께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보혜사는 바로 성령 하나님을 두고서 하는 말입니다.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로 표기하는데 그 뜻은 ‘위로자’,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하기를 ‘성령이 임하면’ 뭔가 뒤집어지는, 획기적이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가령, 신비로운 능력이 임해서 괴력의 소유자가 되거나, 손을 펴서 장풍을 일으키면 사람들이 벌러덩 넘어가는, 그런 마술적인 큰 힘이 생기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성령에 관해 말씀하시기를 주술적이거나 마술적인 힘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인격자로 소개합니다. 인격자가 아니고서 어떻게 위로 자, 돕는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인격자이신 성령 하나님을 만나려면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 인격자이신 성령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 그 분의 인격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럼 누가 성령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기도는 비록 서툴고 어눌하다 할지라도 성령 좇아 살면서 그의 인격이 변해 가고 있으면, 그 인격의 변화가 남을 위로하고 돕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성령 충만한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가리켜 다르게 표현했습니다.
(요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예수님은 성령 하나님을 ‘진리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세상의 영이 아니라 진리의 영입니다. 오직 진리로만 말씀하시고 진리를 통해서만 보이십니다. 진리 아닌 것과는 그 어떤 것도 함께 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깊이 사귀는 자는 진리 안에 거하는 자요, 그 삶을 통하여 진리를 드러내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성령 충만한 사람이겠습니까?
여러분이 비록 목이 쉬도록 기도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여러분의 삶 속에서 진리를 구현되어 간다면 바로 여러분은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님과 함께 하는 자에게는 성령님의 위로가 함께 하십니다.
(행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사람의 위로와 성령의 위로는 다릅니다. 사람의 위로는 ‘빈 말’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위로는 언제나 ‘채움’입니다.
사람은 해결할 능력이 없거나 혹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해결해 줄 마음이 없으면 빈말로 위로해 주게 됩니다. 사람의 위로는 말로써 끝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위로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성령님의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이기에 언제나 해결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큰 아픔과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것이 있습니다. 세상이 채워줄 수 없는 공허와 아픔이 있습니다.
보혜사, 위로자, 도움자 되시는 성령 하나님을 의식하십시오. 느끼십시오. 민감하게 반응하십시오.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터치하고 아름답게 건강하게 역동적인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