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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빌립보서 1:1)

작성자보리떡 5|작성시간19.02.09|조회수878 목록 댓글 0

"만일 미친 사람이 대로로 자동차를 몰고 간다면 나는 목사이기 때문에 그 차에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식이나 치러주고 그 가족들을 위로나 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는가?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달려가는 자동차에 뛰어올라 그 미친 사람으로부터 차의 핸들을 빼앗아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누구한 말인지 아십니까?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말입니다. 그는 독일의 히틀러 정권이 무너지기 직전 베르린에 있는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에서 게슈타포 장관의 직접명령으로 39세를 일기로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진 청년 신학자입니다. 그가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했다가 붙잡혀 감옥에 들어갔고, 그는 39세의 젊은 나이에 처형 당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감옥에서 보낸 편지를 모아서 낸 책이 아주 유명한 옥중서신입니다.

이런 옥중서신들이 세상에 많이 나왔습니다. 감옥생활 가운데서 듣고 깨달은 바들을 세세히 기록하여 보낸 편지가 나중에 [옥중서신]이라는 책으로 발간되어 나온 책들이 많습니다. 제가 접하고 읽은 것 가운데서 김대중 대통령, 문익환 목사, 신영복 교수 등이 있습니다. 또 옥중생활 가운데 교도소 뜰에서 접한 여러 가지 들풀을 그리고 기록해서 보낸 편지가 [야생초 편지]라고 해서 황대권씨는 옥중서신을 책으로 내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 가운데 옥중서신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생활 가운데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서신을 분류할 때에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옥중서신이라고 합니다. 옥중서신을 쉽게 기억하시고 싶습니까? 감옥에 갇히면 고생스러워서 애비고 골빈듭니다바로 그렇습니다. 애비고 골빈든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입니다.

이 옥중서신 가운데 하나인 빌립보서를 가지고 앞으로 설교를 하고자 합니다. 사도바울이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 죽을는지 모르는 위험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언제 사형언도를 받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감옥 밖에 있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유명한 성경 주석가인 윌리암 핸드릭슨은 빌립보서 연구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특징적인 유익이 3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참된 행복의 비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어떻게 하면 그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인지를, 셋째는 그 행복의 비밀을 배운 사람을 보여 준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참된 행복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이 행복을 누리는 사람에게 무엇이 있을까요? 바로 빌립보서에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에서 강조되고 자주 언급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기쁨]입니다. ‘기뻐하라’ ‘기뻐하리라라는 말이 9번이나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를 기쁨의 복음이라고 별명을 붙이기도 합니다. 내 속에 기쁨 없이,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서 행복이 있을까요?

사도바울은 그저 막연히 성도들에게기뻐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기뻐하니 너희도 기뻐하라고 아주 실제적으로 실감나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감옥 안에서 외롭고 우울하지만 너희는 기뻐하라거나 내가 너를 위해 고생하고 있으니 너는 좀 즐거워하라는 식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먼저 내가 기뻐한다고 하면서 너희도 기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2:17-18). 감옥 안에 갇힌 사람이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기뻐하라….. 그러니 얼마나 귀하고 얼마나 설득력 있으며 강하게 어필되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내가 믿음생활을 잘 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는가? 무엇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이기도 합니다. 내 신앙의 분량은 내가 주 안에서 얼마나 기뻐하느냐에 따라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기쁨을 누리고 있으면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이고, 반대로 아니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남보다 좋은 여건 속에 있어야 다른 사람에 전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전도를 안하고, 못하는 것입니다.

전도라는 것은 아무리 남보다 어렵게 살더라도, 몸이 약하더라도, 사업이 어려운 형편에 있더라도 항상 싱글벙글 웃으며 주변 사람들과 인사를 해 보십시오. 저절로 되는 것이 전도입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언제나 그렇게 싱글벙글 웃습니까?”라고 신기해 하고 궁금해 합니다. 그때에 , 좋은 일이 많아서 그렇습니다라고 말해 보십시오. 그러면 전도가 됩니다.

그런데 하고많은 날을 찡그리고 얼굴에 내천자()를 그리고 한숨을 푹푹 쉬면서 사람들을 만나서
예수 믿으라고 해보십시오. 그 사람이 말은 안해도 속으로 무엇이라고 할까요? “당신이나 잘 믿으시오라고 할 것입니다.

반면에 어려운 상황 속에 있으면서도 그 환경과 관계없이 역설적인 기쁨을 지니고 사는 사람,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누리며 사는 사람은 삶 자체가 전도가 됩니다. 이것이 참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스스로 기뻐하면서 감옥 밖의 사람들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 빌립보서의 주제입니다.

빌립보서라는 책의 제목입니다. 그 뜻은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라는 뜻입니다. 1절에 보면 빌립보에 사는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한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누군가 하면 빌립보에 사는 성도들입니다. 바로 빌립보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이 빌립보 교회는 어떤 교회이며, 사도 바울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사도행전 16장으로 넘어가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2차 선교여행을 계획하면서 그는 1차 선교여행 가운데 세워진 교회를 돌아보면서 성도들의 믿음을 단단하게 해야지 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주후 52년 경)에 바울이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한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 우리를 도우라”(16:9)고 하는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일을 계획할지라도 길을 인도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소아시아로 가려는 계획을 바꾸어 배를 타고 마게도냐로 가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첫 성 빌립보에 이르러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귀신 들려 점을 치는 여종을 온전하게 해주었습니다. 제 정신으로 돌아온 점치는 여종은 더 이상 점을 칠 수 없게 되자 여종의 주인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런 죄도 없는 바울을 붙잡아 관청으로 넘겼습니다. 여기서도 조사도 없이 때리고 감옥에 처넣어버렸습니다.

그때에 바울과 실라가 감옥 안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아이고 내 팔자야, 내가 무슨 꼴이고하면서 마게도냐로 오게 된 것을 원망하고 불평했습니까? 아닙니다. 매를 맞아 쑤시고 아픈 몸이었지만 그 마음 속에는 숨길 수 없는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감옥 안에서 기도하고 찬송을 했습니다.

왜 이런 희안한 일을 했겠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핍박하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벼락을 맞고 지옥에 던져져야 할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고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다니, 하늘 나라를 소유하고 가게 되었으니 …”하면서 감출 수 없는 구원의 기쁨이 쏟다 나왔던 것입니다.

그때에 바울과 실라가 감옥 안에서 기도하고 찬송할 때에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서 우리를 감옥 밖으로 나오게 해주시겠지 하면서 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바울과 실라에게는 매 맞고 감옥 안에 있지만 고난 그 자체가 영광이고 복된 것으로 여기고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찬양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옥문이 열리고, 옥을 지키던 간수가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감옥에서 기뻐하며 찬송을 부름으로 인해서 기적이 일어나고 회개 사건으로 말미암아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빌립보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기뻐하라고 할 때에 바울에게는 개인적인 체험적인 특별한 의미와 은혜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상황을 뛰어넘은 기쁨의 열매를 바울은 알았습니다.

이 기쁨은 돈을 많이 벌고, 사업이 잘되고, 계획한 일들이 술술 풀릴 때에 누리는 기쁨, 세상이 주는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누렸던 기쁨은 상황을 뛰어넘는 신령한 기쁨입니다. 영혼을 깨우고, 죄를 회개케 하고,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었습니다. 죄를 이기고, 의심을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죄악을 이기는 복음의 기쁨이었습니다. 이 기쁨으로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보내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기쁨의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기쁨의 복음을 빌립보 교회에 보내면서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는지를 보십시다. 1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예수님의 종이라고 설명합니다. 종은 헬라어 둘로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종이 아니라 팔고사고 하는 노예를 가리킵니다.

그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노예와 당나귀는 똑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당나귀는 말을 하지 못하고 노예는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이다이런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노예는 집에서 기르는 짐승쯤으로 취급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노예는 몸도 정신도 자기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주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주의 뜻대로 행해야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노예이라 부른 데에는 몇 가지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절대 소유라는 뜻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가진 소유의 모든 것이 누구 것입니까? 주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건강, 나의 생명도 주님의 것이요, 내가 지닌 재능도 다 주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고대에 노예가 자유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몸값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노예가 그런 돈이 없을 때에는 제 3자가 그 대가를 지불해 주어야 했습니다.

바울은 우리 성도가 성령을 모신 거룩한 성전이 된 것은 값으로 산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본질상 죄의 노예가 되어 죄악의 포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죄의 값으로 사망이기에 사망의 노예였습니다. 여기서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대신 제 삼자로 하여금 노예의 값을 지불하게 했습니다. 바로 그 삼자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의 노예, 사망의 노예였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므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 갚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죄로부터, 죽음으로부터 해방 받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알고 믿기 때문에 자신의 소속이 어디에 있는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 함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 절대 순종함을 뜻합니다.

노예에게는 오직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가 중요합니다. 주인의 생각이 곧 노예의 생각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느낌과 생각과 뜻대로 노예는 할 수 없습니다. 문자 그대로 절대 순종이 요구될 뿐입니다. 주인의 명령에 대하여 거절하거나 지연하거나 핑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스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순종했다고 칭찬받는 법도 없습니다. 순종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7:9)라고 ….. 노예에게는 칭찬이나 고맙다는 사례를 들을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수고했을 때에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그렇지 않았을 때에 섭섭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예수님의 노예가 가질 태도가 아닙니다.

셋째로,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말할 때에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이 종의 개념을 영광된 이름으로 이해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지자를 말할 때에 종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여호수아와 다윗을 말할 때에 하나님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귀하게 쓰임 받은 일꾼들을 표현할 때에 종이라 했으니 그 또한 감히 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게 생각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을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소개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주종의 관계를 정립했기에 함께 있는 동역자에게 대한 자세로 달랐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소개할 때에 어떻게 합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소개할 때에 자신과 나란히 소개합니다. 같은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합니다. 사실 디모데가 어떤 사람입니까? 디모데는 바울에게서 복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어린 사람입니다. 그리고 제자입니다. 그런 그를 믿음의 아들로 여겼습니다.

그런 그를 자신과 나란히, 동반자로, 동역자로 대우하고 소개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얼마든지 낮출 수 있습니다. 하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종된 자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로 세우는 자는 인간관계에서도 서로 존중하는 신뢰를 형성하고 사랑하는 관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두 개의 막대가 서로 겹쳐져 있습니다. 세로와 가로의 막대가 하나의 십자가가 됩니다.

세로의 막대, 하나님과의 주종관계, 상하관계입니다. 이것이 바로 설 때,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이 은혜와 정신을 가지고 가로(수평)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가 화평과 신뢰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연스럽게 기쁨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처한 상황 가운데서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무엇이 채워지고 주어지면 기뻐하시겠습니까?

주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기쁨의 근원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되십시오. 나는 그분의 소유요, 절대 복종이 요구됩니다. 이것이 최고의 영광이 됩니다. 그러면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 역설의 기쁨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으로 행복한 여러분과 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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