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편지를 언제 써보셨습니까?
한국과 뉴질랜드의 편지쓰기에서 차이점이 있습니다. 한국 식은 맨 먼저 ‘누구누구에게’이며 그 다음에 인사말을 쓰고, 맨 나중에 편지 쓰는 사람의 이름과 날짜를 적습니다.
뉴질랜드는 어떻습니까? 편지지의 좌측 상단에 보내는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오른쪽 상단에 보내는 날짜를 썹니다. 그리고는 그 아래에 편지를 받는 ‘누구에게’ 라고 하면서 인사를 씁니다.
신약성경의 서신서는 한국식과 뉴질랜드식 가운데 어느 쪽에 가깝습니까? 예, 뉴질랜드식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가 누구에게 누가 보낸 것인가를 1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1)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바울과 디모데가 편지를 보냅니다. 누구에게요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에게요.
그 다음에 오늘 우리가 말씀을 나누려고 하는 2절에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면 바로 문안 인사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
우리가 편지를 쓸 때를 기억하면 됩니다. 우리는 주로 “누구 누구에게”라고 쓰고는 인사말을 하지 않습니까? 가령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시절에 그 동안 편안하셨는지요?’ 이렇게 편지를 보내지 않습니까? 바로 여기에 해당됩니다.
문안인사의 요지는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은혜와 평강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은혜가 있습니까? 평강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은혜와 평강을 누리고 있습니까?
1. 은혜를 누리자
이기영 집사님의 딸 이름이 하은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지요. 임승만 집사님의 장녀 이름이 가은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우리 집 딸 이름이 주은이입니다. ‘주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조건을 요구하지 않고 값없이 베풀어진 호의입니다.
로마서 4:4에 “일 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긴다”라고 했습니다. 일하는 사람이 하루 종일 일을 했습니다. 그 대가로 품삯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일을 시킨 고용주 입장에서는 의무요 빚입니다. 일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받아야 할 대가입니다. 그러니 일을 하고 품삯을 받는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은혜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마음 좋은 주인 밑에서 살면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일하는 일꾼이 주인집의 아주 값진 물건을 가지고 도망을 쳤습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주인과 도적질한 일꾼이 우연하게 어떤 장소에서 딱 만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인이 도적질한 사람의 멱살을 잡고서 경찰서로 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인은 도적질한 사람에게 배상청구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궁핍한 처지에 놓인 것을 알고는 불쌍히 여겨 자립할 수 있도록 밑천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주인은 도적질한 일꾼에게 책임을 묻지도 않고 호의를 베푼 것입니다. 도적질한 사람 입장에서는 주인으로부터 대가 없이 호의를 입었습니다. 이것을 두고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하나님 앞에서 누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만드신 후에 자기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만물을 소유하고 다스리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버리고 마귀의 꾐에 빠져서 죄를 짓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의심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죄를 먹고 마시는 자리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나니 … 저희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가득하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롬 3:10)
그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에 따라 진노의 날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앞에 서게 될 죄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누가 하나님 앞에 서서 나는 떳떳하겠다고 자부하며 설 수 있겠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앞에서 살아남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심판장 되시는 하나님께서 죄된 인간에게 호의를 베푸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지옥 심판에서 면하게 하실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긍휼하심(헤쎄드)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호의,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헤세드(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카드를 사용하셨습니다. 그 카드가 무엇이냐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어 우리의 죄값을 대신 감당케 하시므로 우리의 지옥행을 면하게 해주셨습니다. 예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를 천국 백성 되게 해주셨습니다. 천국의 영광을 누리게 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서 왕노릇하게 해주셨습니다. 함께 보좌에 앉게 해주셨습니다. 영원한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해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믿는 자녀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에베소서 1:3에서 말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3-7)
그렇습니다. “거저 주시는 바 그 은혜의 영광”이 바로 은혜입니다.
성도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아 그의 자녀가 된 것은 다른 사람보다 착하기 때문에 선택함을 받았습니까? 다른 사람보다 특출한 뭔가가 있어서 그렇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믿고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됩니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풍성에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목사인 챨스 웨슬러는 찬송했습니다.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 내 은혜로신 하나님 날 도와주시고 그 크신 영광 널리 펴 다 알게 하소서”
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누리는 자는 어떤 찬송이 흘러나오겠습니까?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송가 438장(통 495장).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자는 고백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 여러분에게 은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2. 평강을 누리자.
이 은혜를 누리는 자에게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평강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편지를 보낼 때마다 평강이라는 말을 단독적으로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은혜와 평강을 나란히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에 편지를 쓸 때의 하나의 관습이기도 하겠지만 바울이 은혜와 평강을 나란히 사용할 때에는 그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은혜가 우리 신앙의 원동력이요 밭이라고 한다면 평강은 은혜라는 밭에서 은혜를 영양분으로 하여 자라난 믿음의 열매요 결실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깐 은혜가 원천이라면 평강은 그 은혜라는 원천에서 자라난 나무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평강이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의 인사가 무엇입니까? “샬롬”입니다. 바로 평강의 히브리어가 샬롬입니다. 우리 말로 평화, 화평, 평강, 편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사할 때에 ‘안녕하십니까’라고 할 때 바로 그 안녕이 샬롬입니다.
평강을 좀 쉽게 풀어서 생각해 보십시다. 소극적으로 평강이란
(1) ‘전쟁이나 갈등이 없는 상태’입니다. 갈등이나 전쟁이 있는 곳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2) 부족함이 없는 상태입니다. 여행을 갔는데 내 지갑에 돈이 부족하면 조바심이 일어납니다. 마음의 편안이 없습니다.
(3) 내가 바른 길을 가지 못할 때 평강이 없습니다. 불안 그 자체입니다.
(4) 확신이 없을 때에는 마음이 흔들리고, 요동칩니다. 그러면 평안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평강이라는 말을 종합해 보십시다. 평강이란 올바른 관계 속에서, 갈등이 없고, 부족함이 없고, 바른 길을 가고 있으며,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에 마음의 편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편안을 잘 대변해 주는 시편이 있습니다. 바로 시편 23편입니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6)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7)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 뿌듯한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3. 은혜와 평강의 근원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는 은혜와 평강이 어디로부터 오는가를 보십시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입니다. 어디로부터 옵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교리를 알게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나란히 은혜와 평강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보다 열등하거나 제2차적인 신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되심을 이 짧은 인사 속에서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디에서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까? 세상의 재물에서 옵니까? 높은 학벌이나 명예에서 누립니까? 아닙니다. 은혜와 평강의 원천은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 제자들이 두려움과 공포 속에 꽁꽁 숨어 있었습니다. 이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인사가 무엇입니까?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면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였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살 찢고 피 쏟으시므로 우리 죄를 대속해 주신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샬롬,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은혜가 없다면 평강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라”(히 4:16)
슈바이처 박사는 나이가 채 30세도 되지 않아서 모교의 신학부장이 되었습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의 기쁨에 잠겨 있던 그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침의 밝은 햇살에 눈을 떴다. 내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 나는 결코 이것을 그냥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그것은 죄악이다.” 감사하고, 역사 앞에서 은혜 받은 자로서의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갈급한 마음으로 은혜의 보좌로나아갑시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 가운데 평화를 누리며 그 은혜와 평강을 흘러 보내는 삶이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