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나면 비참해 질 때가 참 많습니다. 저 사람은 어떻게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가지고 있을까 생각되면 위축되고 짜증이 일어납니다. 나는 왜 저 사람보다 ….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나 자신을 힘들게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풍부하게 소유하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는 풍요하게 존재하는 의미를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법정).
그러기 위해서는 바른 선택이 요구됩니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오늘 내가 무슨 일을 할 것인지부터 시작해서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선택의 연속 속에 있습니다. 이 선택에서 우리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비교하고 예상하면서 결정을 내립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선택이 바르도록 잘 비교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 속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두 인물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매우 귀한 향유를 부은 이름이 나오지 않는 여성과 그 행위에 대하여 분노하는 가룟유다입니다. 오늘 설교는 이 두 사람은 비교하고 분석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베다니라는 작은 촌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2마일 정도(3Km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마을에서 아주 유명한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바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이 있습니다. 바로 이 마을에 나사로와 그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가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에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이 마을에 가시었습니다. 이 마을에 사는 문둥병에 걸렸다가 나음을 입은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에 초대 받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 집에서 식사를 하시는데 한 여인이 와서는 아주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부었습니다.
요한복음 12:3에 의하면 그 향유는 “지극히 비싼 나드 한 근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드는 인도 지방에서 나오는 매우 희귀한 식물에서 축출한 매우 희구하면서 값비싼 향유였습니다. 그 가격이 얼마쯤 된다고 했습니까? 3백 데나리온이라고 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300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1년치의 연봉입니다.
뉴질랜드에서 노동자의 1년치 연봉이면 , 4월 1일자로 시간당 17.50불이면 하루 8시간 주 5일을 근무하는 노동자라면 연봉이 얼마나 될까요? 36400불입니다. 아주 괜찮은 완전 새로운 승용차 한 대 가격입니다.
1년치의 연봉에 해당되는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자, 가롯 유다가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이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도다”(8-9)라고 역정을 내었습니다. 가롯 유다는 여인의 행위를 허비요 낭비로 규정하고 분노했습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빠져나가서 대제사장과 흥정을 합니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면 얼마나 주겠소” 그리고는 은 30 개를 받았고,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앞에 두고 향유를 붓는 여인과 예수님을 팔아먹기로 한 가롯 유다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에 여인의 헌신과 유다의 배신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헌신과 배신, 헌신자와 배신자는 무엇이 다를까요?
1. 출발점 – 사랑
향유를 부은 여인이 누구인지 이름이 본문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바로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2:3). 마리아는 왜 값비싼 향유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께 부었을까요?
한 가정의 기둥인 오빠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살려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오빠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 놀라운 은혜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님을 집에 초청했습니다. 들려주시는 말씀이 너무나 은혜로와서 그 발 아래 앉아 말씀에 귀를 기울이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예수님은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다”라고 칭찬까지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하는 마음은 그녀를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4:18에 예수님은 마리아에 대하여 “저가 힘을 다하여 향유를 부었다”라고 하셨습니다. 300 데나리온입니다. 마리아의 형편으로는 거액이요, 재산 중의 재산이었습니다.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가 받은 바 은혜에 비하면 지극히 적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시편의 시인은 고백하기를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 116:12) 받은 바 은혜를 깨닫는 자는 감사하게 하고 헌신하는 자리로 나아오게 합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 십자가 은혜,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렸고, 피 흘리시고 죽어주신 구속의 은혜를 안다면 헌신의 자리로 나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가 141장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내 지은 죄 다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골로새서 3:15에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헌신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의 배신은 어디서부터 시작됩니까? 순간적인 오판이나 충동에 의해서 예수님을 넘겨주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를 평가하셨듯이 ‘도적’이었습니다(요 12:6). 유다는 돈을 사랑했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과 물질에 대한 탐욕을 극복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팔아먹는 배신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 옥합을 깨뜨릴 때에 그는 도둑의 심보를 가지고 도적질하면서도 무슨 선의의 천사인 것처럼 자신을 가장하고 말합니다. “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면 대단히 유익할 터인데 왜 그렇게 그대는 향유를 허비하는가?” 마리아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사실은 자신의 배를 채우며 도적질할 심보인데, 자신의 탐욕을 감추기 위해서 필요 없이 자기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였습니다. 자신을 정의의 천사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과시하려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 성도가 돈에 대하여 가져야 할 자세를 가르치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돈 자체를 악이라고 규정하지 않습니다. 돈이 중요하기 때문에 늘 경계하고 강조하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돈을 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을 섬기거나 사랑하면 돈이 살아있는 맘몬이 되어서 사람을 노예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딤전 6:10)고 했습니다.
가롯 유다를 보십시오. 예수님보다 돈을 사랑했기에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위선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비뚤어진 공격성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헌신과 배신은 다 사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300 데나리온(일년 연봉)를 쏟아 부었습니다. 아까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돈을 사랑했던 유다는 은 30냥(한달 봉급 분량)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며 이 땅을 살아가십니까? 사랑과 배신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
2. 헌신과 배신의 평가 – 장사를 준비하는 사람, 나지 않으면 더 좋았을 사람
이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어떠했습니까?
향유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에 대하여 유다가 허비와 낭비라고 하면서 화를 내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10)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 자신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로 행했던 일이었지만 예수님의 장사를 위한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시어 메시아의 사역을 성취하시려는 이 위대한 사역인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려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그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했기에 아까울 것이 없고 못 바칠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종종 받칠 것이 없다고 푸념을 터뜨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사실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와 같은 주님께 대한 깊은 사랑이 없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진정한 사랑과 헌신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11-12)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에 얼마나 큰 위안과 기쁨이 되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기쁘시게 할 일이 어떠한 것이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엡 5:10). 마리아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헌신자였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일을 준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어떠했습니까? 마지막 유월절 성만찬 때에, 그러니깐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저녁 식사 시간에 자신을 넘겨줄 가롯 유다를 두고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막 14:21)
차라리 나지 않으면 좋을 뻔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말입니까? 얼마나 실망스러운 말입니까? 예수님께 배신하므로 살면서 행한 모든 일이 무효화되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3. 역사적 평가 – 헌신과 배신의 마지막 열매
이제 끝으로 두 사람의 역사적 흔적, 삶의 열매를 말하고자 합니다. 마리아의 헌신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13)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때부터 지금까지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인의 헌신 이야기가 전파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복음 증거에 큰 도움을 주는 사역이 되었습니다. 오고 오는 세대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가롯 유다는 어떻습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마음의 가책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고, 그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오는 비참한 죽음을 기록되어 있습니다(행 1:6).끝끝내 주님께 나아가 회개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배신자의 최후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 우리는 헌신과 배신의 행보를 보였던 두 사람을 살펴보았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헌신자의 삶을 사는가 아니면 배신자의 삶을 사는가? 질문을 던져 보십시다.
1962년도 영국 텔레비전에 [유다의 얼굴]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습니다. 이 드라마는 한 영화 제작사가 영화 속에 누가 가룟 유다의 역할을 맡을 것인지, 모델을 찾아 다니는 것이 드라마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결국 마지막까지 유다 역할의 모델을 찾지 못합니다. 그 얼굴을 찾지는 못하지만 이 드라마의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 주인공이 청중들을 갑자기 쳐다보면서 “당신이 그 유다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유다가 될 수 있다”
이 드라마의 핵심 메시지였습니다. 누구라도 유다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누구라도 마리아와 같은 헌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기억하고 내 삶의 자리에서 감사하는 자가 되면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배신자도 될 수 있고, 헌신자도 될 수 있습니다. 어느 편에 설 것입니까? 그것은 오늘 나의 선택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