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는 줄거리의 전개가 빠르고, 예측 불가능한 상황으로 호기심을 유발합니다. 난 데 없이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면 ‘야 저 사람은 어떤 역할로 나오는가’라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과연 이 드라마는 어떻게 끝날까’ 궁금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다가가면 더 빠른 이야기의 전개로 마지막에 의미있는 메시지를 던져주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는 가운데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마지막에이르면 당부하고 싶고 하고 싶은 말을 요점 정리해서 전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종말로 형제들아”로 시작합니다. 편지의 막바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3장1절에서 처럼 ‘종말로 형제들아’로 시작됩니다. ‘종말로’라는 말은 다른 번역본에서는 ‘끝으로’‘마지막으로’라는 말입니다. 3장1절에서는 편지의 절반 정도되는 시점이기에 ‘마지막으로’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앞에서 사도 바울이 설명하고 당부했던 말들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내가 요약해서 말하면’이라는 뜻이 더 강하다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이제 4장 8절에서 ‘종말로’라는 단어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거의 끝부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기에 ‘종말로’라는 말은 그야말로 종말을 말하고 있습니다. 진짜 편지의 끝 마무리에서 ‘끝으로’ ‘결론적으로’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를 거의 25분 내외로 합니다. 지금까지 수년 동안 저의 설교를 들은 분들은 ‘아, 김 목사는 설교를 어떻게 하시지’ 하면서 대충 압니다.
설교를 시작할 때에 예화를 하나 하면서 본문의 내용이 무엇이며, 오늘 설교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이끌어가려고 합니다. 본론에서는 본문을 가지고 해석하고 적용하면서, 오늘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찾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에서는 설교의 핵심을 한번 더 되새기면서 설교의 주제를 한 마디로 요약하여 집중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결론을 말할 때에 저는 주로 ‘말씀을 맺겠습니다’라든지,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이라고 청중을 주목하게 해서 설교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종말로 형제들아’라고 부르면서 ‘무엇에든지’를 무려 6번을 되풀이하면서 ‘어떻게 하라’라고 합니다. ‘무엇에든지’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호사’라고 하는데 ‘어떤 일을 만나든지, 어떤 일이 되어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라는 뜻입니다.
8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사도 바울은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성도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형제들아, 어떤 상황 속에 놓이든지 …..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처지에 들어 있든지 간에 ‘생각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동물과 사람의 다른 점이 열거한다면 무엇보다도 사람은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동물들도 보고 느끼고 냄새를 맡고 반응을 합니다. 독수리는 사람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넓게 봅니다. 개는 사람보다 훨씬 더 냄새를 잘 맡고 구별합니다. 닭이 모이를 보고 그것을 찍는 정확도는 사람이 따라갈 수 없습니다. 무슨 동물이든 사람보다 뛰어난 기능은 다 한가지씩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동물들이 사람에게 다스림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동물들은 생각이 없다고 합니다. 몸에 들어온 정보가 짧게 끊어져 있고 그것을 이어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능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생각이 없이 살면 동물보다 못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 하였습니다.
여러분, 자동차 운전을 하지 않습니까? 시동을 건 뒤에 기어를 전진 기어를 넣고 패달을 밟으면 차가 앞으로 가지만, 백기어를 넣고 패달을 밟으면 차가 뒤로 갑니다. 같은 자동차인데, 같은 패달인데, 기어를 어떻게 넣느냐에 따라서 차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전진기어를 넣어야 앞으로 차가 가고, 후진기어를 넣으면 차가 뒤로 갑니다. 똑같은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생각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과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왕하 5장 9-14절에 보면 나아만이 나옵니다. 그는 아람나라 군대 장관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누구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한 문둥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질병 문둥병을 고침 받고 싶어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가서 고쳐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처방은 자신이 생각과 맞지 않는다며 화를 내고 돌아섰습니다. 즉, 엘리사가 그의 종을 통해 병을 고치려거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한 말이 자기 생각과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람에는 요단강 보다 더 맑고 큰 강도 많은데, 저렇게 도랑 같은 작은 강이 무어라고 거기에 가서 일곱씩이나 씻어’라는 자기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냥 아람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러자 수행원들이 병을 고치려면 선지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간청하자 그때서야 자기가 국방장관이 아닌 문둥병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생각을 바꾸어 선지자의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때에 그의 살이 어린아이처럼 되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종말로 형제들아 이렇게 하라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7가지 좋은 것을 생각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1. 무엇에든지 참되며-참된 생각을 하라.
참되다는 것은 거짓되게 속이는 것이 없이 진실된 것을 말합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진실하므로 손해 보는 부분이 참 많습니다. 약간만 거짓되면 호박줄기에 열매가 줄줄이 달려오듯이 수확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지 말고 범사에 참되어라고 합니다.
흔히 거짓말을 해도 거짓말로 여기지 않는 3대 거짓말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처녀가 시집 안간다는 말, 둘째,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것, 셋째, 오인이 빨리 죽고 싶다는 말입니다. 이 역시 거짓말은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소위 ‘하얀 거짓말’은 해도 된다고 합니다. 가령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약을 먹이려고 할 때입니다. 약이 써서 아이들이 안 먹을 것 같으므로, ‘애야, 이 약은 쓰지 않고 달단다’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면 어린아이는 정말 단 것인 줄 알고 입을 딱 버립니다. 그러나 약이 목을 넘길 때에 보니 쓰거든요. 그래서 아이가 울고 불고, 엄마가 거짓말쟁이라고 하면 어머니는 ‘너 병 나아라고 할 수 없이 그렇게 했다’라고 변명을 합니다.
그렇지만 아이가 한번 두번은 속아 넘어가 주겠지만 그 휴유증은 남습니다. 어머니에게 대한 불신감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약을 줄 때마다 어머니를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거짓말이라도 유익한 것은 없습니다. 범사에 참되어야 합니다.
2. 무엇에든지 경건하며-경건한 생각을 하라.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신전의식,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세상의 시류에 떠밀려 사는 것이 아니라 고결하고 위엄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딤전4:8). 이것이 바로 경건이며 범사에 유익합니다. 신앙생활입니다.
이 경건함은 삶에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야고보서 1:27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서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했습니다.
주변의 약자에게 갑질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돌봄으로 경건이 나타납니다.
3. 무엇에든지 옳으며-옳은 생각을 하라.
무슨 일을 생각하고 행할 때에 ‘이것이 옳은가’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잣대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잣대, 흐름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옳아야 합니다(약1:12). 하나님으로부터 옳다 인정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옳아야 합니다.
요즘, 한국에서 ‘차별 금지법’ 제정을 하려고 합니다. 소수자의 권리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법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동성애와 동성결혼 등을 합리화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세상의 문화에 따라서 하나님의 법이 무시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가치관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4. 무엇에든지 정결하며-정결한 생각을 하라.
정결은 도덕적으로 깨끗함을 의미합니다. 성도가 세상의 빛된 삶, 소금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바른 삶이 필요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네가 잘 하세요’라는 소리를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5.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사랑할 만한 생각을 하라.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행하는 일들이 사랑 받을 만한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열정을 다해서 수고하고 땀을 흘리고, 정성을 다하고 있는데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문제이지 않습니까?
가령 내가 자식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자식으로부터 외면 당한다면 …. 내게 문제가 있는지 정검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피드백(feedback)이 필요합니다. 나만 죽도록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발상이 아니라 차원 높은 삶의 비결입니다. 서로 간에 감동이 있는 섬김과 사랑, 피드백이 있는 사랑, 가장 행복한 사람은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입니다. 사랑할 만한 것만 생각해야 합니다.
6.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칭찬할 만한 것을 생각하라.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내가 엄청 수고했는데, 다른 사람의 시선이 냉담하다든지, 원망들을 일을 했다면 문제이지 않습니까? 나의 삶에서 타인의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서 칭찬 받도록 하고 사람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하면 모든 사람도 칭찬하게 됩니다. 칭찬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 14:17-18)
7.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덕과 기림이 있는 생각하라.
덕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선행이나 봉사입니다. 기림은 도덕적으로 인정되어 칭찬 받는 것을 말합니다. 덕망 있는 사람, 인격이 훌륭한 사람은 덕 세우기를 먼저 생각합니다.
엡4:29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덕을 끼치는 사람은 어디 가나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습니다.
‘종말로 형제들아’라고 하면서 ‘무엇에든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에 같은 상황 속에 놓여 있어도 사람의 생각은 다 다릅니다.
이와 같이 7가지 좋은 것을 생각하고 행하는 사람이 되라고 바울은 권면합니다. 그러하면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9절에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9)라고 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축복을 받습니다.
사람은 다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사람에 따라서 그 생각이 다릅니다.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저수지를 보고 있지만 강태공은 물고기 낚을 생각을 합니다. 수영선수는 수영할 생각을 합니다. 보트 타기를 즐기는 사람은 보트 타면 좋은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농사를 짓는 농부는 저 물로 논에 물을 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꽃을 보면서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아, 참 꽃이 이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화초재배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은 '이 꽃의 원산지, 품종, 영양 상태, 재배 방법을 생각할 것입니다. 또 꽃꽂이 전문가는 '이 꽃은 어떻게 꽂았으면 아주 돋보이겠는데'하고 생각합니다. 꽃장사는 '이 꽃은 한 송이에 얼마에 구입했으니 얼마에 팔면 얼마의 이윤을 남길 수 있겠구나’를 생각할 것입니다. 자기가 속해 있는데 따라서 그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가나안 땅으로 보내졌던 12명의 정탐꾼들은 똑같은 것을 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열명은 부정적인 사람이었고,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현실뿐만이 아니라 현실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본 긍정의 사람이었습니다.(민13장) 하나님은 바로 이 긍정적인 두 사람 곧 여호수아와 갈렙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유지시켰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려고 하기에 생각이 달라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7가지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무엇에든지 참되고, 의롭고, 경건하고, 정결하고, 사랑 받을 만하고, 칭찬 받을 만하게, 그리고 무슨 덕이나 기림이 있든지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윤리입니다. 이 윤리는 단순한 도덕 윤리의 삶이 아니라 믿음의 결과입니다.
”바른 믿음은 바른 생각을 낳게 하고, 바른 생각은 바른 행동을 낳고, 바른 행동은 바른 삶을 낳고, 바른 삶은 운명을 가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어느 누구보다도 윤리와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이 윤리와 도덕은 바로 바른 믿음을 근거한 생각에서 시작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참되고, 올바르고, 경건하고, 정결하고, 사랑과 칭찬을 받을 만하여 덕과 기림이 되는 생각으로 행동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동행하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