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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이 불꽃 같고(요한계시록 2:18-29)

작성자보리떡 5|작성시간20.10.24|조회수645 목록 댓글 0

우리 부모님은 아이를 낳게 되면 그 이름을 짓기 위해 심혈을 기우립니다. 자녀에 대한 기대, 예쁜 이름, 의미 등등을 생각합니다.

 

이런 이름은 어떻습니까? 귀한 아들과 딸이라서 귀남, 귀녀, 성이 방씨가 되면 방귀남, 방귀녀가 됩니다. 아들과 딸이 사랑스럽고 예뻐서 자랑이나 애미로 지으면 어떻습니까? 성이 지씨인 경우에는 좀 이상합니다. 지자랑, 지애미가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이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 이름을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부모님들이 작명소에 가서 이렇게 지어야 오래 살고 성공한다는 감언이설에 이렇게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뉴질랜드에 와서 영어 이름을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앤드류로 지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여자 교우들은 예쁘지만 사용 안했으면 하는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이세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아디라 교회에 나오는 한 여자입니다. 이세벨, 이름이 참 예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어 이름으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성경에는 유명한 두 명의 이세벨이 나오는데 한결 같이 나쁜 여자들입니다.

구약에는 나오는 이세벨은 북 이스라엘의 아합왕의 아내입니다. 그녀는 원래 시돈왕의 딸입니다.이스라엘로 시집온 것입니다. 그녀는 이스라엘로 올 때에 자신들의 신과 여신을 가지고 왔습니다. 바알과 아스다롯과 온갖 우상들을 가지고 들어와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숭배에 빠지게 했습니다.

 

두아디라교회의 이세벨은 교회의 성도들을 유혹해서 타락시킨 여자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잘못되게 하였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교회 안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소아시아 7교회 중에서 보십시오. 에베소교회는 니골라당의 행위가 있었습니다. 버가모교회에는 발람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두아디라교회에는 이세벨의 유혹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이단적인 존재들은 여러 가지 이름과 형태로 나타나지만 본질적인 것은 같습니다. 교회로 하여금 음란하게 하고 우상숭배에 빠지게 했던 것입니다. 이런 거짓된 가르침은 어느 시대나 어느 곳에서나 언제나 호시탐탐 유혹해 왔습니다.

 

두아디아교회에서 이세벨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20절에 보면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이세벨이 누구입니까? 자칭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백성들을 가르치는 사역을 했던 직분입니다.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을 우리는 압니다. 이사야 호세아 엘리야 엘리사 등등, 백성들이 하나님만을 신앙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들이 이 사역을 할 때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부르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엘리사 엘리야 시대에 보면 선지학교가 있어서 거기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훈련을 받았던 기록도 있습니다. 이 선지자 직분은 한시적으로 초대교회에 남아 있었습니다. 안디옥교회에 보면 그 교회에는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직분은 초대교회 이후에는 없어졌습니다.

 

두아디라교회의 이세벨은 자칭 선지자입니다. ‘자칭’이란 스스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그렇게 부르고 그렇게 부름 받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직분은 자칭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공식적인 교회의 부름이 있어야 합니다. 자칭은 없습니다. 교회의 질서를 허무는 것입니다.

한때에 미국에 있는 목사 가운데는 자기 스스로 비행기 안에서 머리에 손을 얻고 안수하므로 목사가 되었다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너무나 쉽게 목사가 되는 시대에 있습니다. 통신으로 6개월만 신학교에 등록하면 안수를 받을 수 있다는 곳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에는 너무 쉽게 집사가 됩니다. 교회 나온 지 1년도 안되는데, 자기들끼리 집사님 집사님 합니다. 자칭 타칭으로 집사요 권사라는 타이틀을 흘리고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 직분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공신력 있는 임명과 세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세벨은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의 대분분의 문제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사단은 이 문제를 교묘하게 성도들로 하여금 빠져들게 했습니다.

 

버가모교회는 세상 권세를 통해서 무시무시한 핍박으로 음란과 우상숭배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두아디라교회는 가공할만한 핍박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단은 교회 안에 자칭 선지자를 일으켜서 사단의 거짓 것을 하나님의 계시 인양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사단은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상황에 따라서 다른 전법을 활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자들인 것입니다. 각 교회의 상황에 따라서 더 효율적인 방법을 구사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단은 두아디라의 지역적인 특성을 잘 활용하였습니다. 에베소나 버가모 같은 정치적인 지역은 아니지만 경제적인 활성화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양모산업과 염색 산업으로 유명했습니다.

 

여러분은 두아디라 출신의 또 다른 한 여성을 알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자주 장사 루디아의 고향이 바로 두아디라입니다. 루디아는 그곳의 특산물이자 당대의 고가품인 염료를 취급하는 무역업자였습니다. 그녀는 바울을 만나 복음을 맞고 개심하여 빌립보교회의 설립멤버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두아디라는 상업적인 활성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여러 가지 직종에 따라 그 직종의 조합(우리말로 하면 협동조합)에 소속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조합의 수호신을 믿어야 했습니다.

 

가령 구두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구두 만드는 가바치 그룹에 소속되어야 하고, 가바치 그룹의 수호신인 황소신을 수호신으로 믿어야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 신을 섬기는 축제 때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가바치는 가바치 축제에 참석해서 우상숭배 제물을 먹어야 했으며 음란 행위에 동참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결국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는 행위였습니다.

이런 사회경제적인 상황 속에 있는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들이 신앙의 갈등 때문에 조합에서 탈퇴하면 살아갈 길이 막막합니다. 그러자니 가입해야 하고, 가입해서 조합원으로서 남아 있자니 우상제물을 먹고 마지막에는 음행을 저지르는 섹스 파티에까지 참여해야 된다는 것이 그들의 고민이었습니다.

 

이 난감한 상황에서 그럴듯한 대답을 제시한 여자가 바로 이세벨 - 자칭 선지자였습니다. 성도들이 고민하고 있는 현실문제에 대하여 교묘하게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그들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듯이 유혹해 왔습니다. 어떤 식으로 했을까요?

 

“우리는 세상 속에 살고 있기에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는 세상을 경험하고 알아야 한다. 죄악의 삶을 경험해 보기 전에는 죄를 극복할 수 없다. 사단의 은밀한 것을 배워서 알아야 사단을 이길 수 있다. 우상숭배의 현장에 가보고, 경험해보고, 그래야 사탄의 교묘한 작전을 파악할 수 있다. 죄악의 깊이를 알아야 그만큼 구원의 감격도 더 크게 누릴 수 있다. 그러니 여러분이 속해 있는 조합에 소속해서 서서히 변화시키도록 하라”

 

무슨 말입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 죄를 짓고 양심의 가책을 가진 성도들에게 그럴듯한 말로써 양심을 마비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상황을 이해해주는 휴머니즘 같고, 배려 같지만 사실은 사단의 교묘한 교란 작전인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교인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부드럽고 살가운 인간적인 배려와 위로와 같은 이세벨의 가르침이 더 호소력있게 다가왔습니다. 결국은 두아디라교회가 어떻게 합니까?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은 두아디라 성도들만에게만 직면한 문제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양심을 속일 수밖에 없다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정직하게 사업하면 쪽박을 찰 수밖에 없다고 항변합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교부 터툴리안을 찾아온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신상을 만들고 거기에 도금하고 도료를 칠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교부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말고는 먹고 살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터툴리안은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왜 여러분들은 꼭 살아야만 합니까? 먹고 사는 것은 모든 죄가 다 용서될 수 있는 면죄부가 아닙니다.”

두아디라 성도들에게는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조합원이 되기를 거부함으로 사업을 포기하고 물질적인 손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것은 자살 행위와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가난해져야 했습니다. 파산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얼마나 현실적인 문제입니까? 정말 절실한 결단이 요구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어느 교회에 아주 믿음이 좋다고 소문난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혼할 적령기가 되어 주변에서 중매를 했습니다. 한 사람은 너무나 신실하고 믿음이 좋은 청년이었지만 학력이나 직장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또 소개받은 한 사람은 큰 부자 집 아들로 너무 잘 생긴 미남이고, 학력과 직장도 좋았습니다. 그리고 벌써 목 좋은 아파트까지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만 아내가 될 사람의 신앙은 자유이기 때문에 제한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매는 누구와 결혼을 할까 고민을 하다가 조건이 좋은 남자와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결혼하고 나서 예수님을 믿도록 전도하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신혼 초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신랑도 교회에 몇 번 신부를 따라 교회를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회사에서 주일날에 등산을 하는데, 남편이 아내에게 부부동반을 해야 한다며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아내는 신앙은 자유며 존중한다고 하였으니 같이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부부싸움을 했습니다.

그 후로부터 남편은 아내가 교회에 나가지 못하게 하다가 나중에는 무섭게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이혼을 해야만 했습니다. 처음부터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참으로 애석합니다.

주님께서는 이세벨의 유혹을 용납하는 두아디라교회를 책망하셨습니다. 교회 안에 많은 사람들이이세벨을 따라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우상숭배와 음란을 합리화시키며 허용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그렇다고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19절에 보면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도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두아디라교회를 칭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의 사업을 알고 있다. 너의 사랑과 믿음도 알고 있다. 너의 섬김과 인내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너의 행위를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어떻게 살았고,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분이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다 알고 있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사업을 하고 직장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다 아신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감정으로 사람을 대하고, 섬기고 있는지를 다 알고 계신다고 하십니다.

 

그 주님께서는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을 두고서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는 낫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쉽게 들을 수 있는 칭찬이 아닙니다. 참으로 대단한 칭찬입니다. 너의 나중이 처음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욥기식으로 말하자면 ‘과거에는 미약했으나 지금은 창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처음에는 잘 하다가 중간에 흐지부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잘 하는 것 같으나 지속하지 못하면 결과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칭찬을 받을 수 없습니다. 끝까지 충성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잔치집에 초대받아 갔습니다. 이때에 그의 어머니와 제자들도 함께 초대받아 갔습니다. 그런데 잔칫집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잔칫집에 반드시 있어야 할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물로서 포도주를 만드시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 결과, 이러한 과정을 모르고 있던 연회장이 주인에게 말하기를 말하기를 ‘어떻게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느냐?’고 칭찬을 했습니다. 어떻게 더 좋은 포도주를 계속 공급할 수 있었습니까? (1) 예수 그리스도를 문제의 잔칫집에 손님이 아니라 주관자로 모셨기 때문입니다. (2) 문제를 예수님께 아뢰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두아디라교회의 성도 가운데는 이세벨의 유혹에 빠지는 사람이 있기도 했지만 시종일관 주님을 신뢰하며 따르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처음보다 나중이 더 낫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에 칭찬과 아울러 책망을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두아디라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시는 주님을 두고서 무엇이라 설명합니까? 18절에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불꽃 같은 눈을 가지신 예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습니까? 우리의 흔들리는 세상의 유혹 가운데 있습니까? 주님은 불꽃 같은 눈으로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워서 손을 내밀면 우리의 손을 팽개치지 않고 잡아주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고 칭찬해 주실 주님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세벨의 유혹에 넘어가 산다면 책망을 면할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불꽃 같은 주님의 눈에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십니다. 우리의 심정을 꽤뚫어 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오로지 주님을 따라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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