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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누가복음 13:22-30)

작성자보리떡 5|작성시간21.08.29|조회수363 목록 댓글 0

어제 저는 아프카니스탄에 대한 두 장의 사진을 인터넷 신문을 통해서 의미있게 보았습니다. 한 장은 미국의 어느 공항에 도착하여 부인인 듯한 젊은 여자와 어머니를 끌어안고 안도하는 젊은 남자의 사진입니다. 다른 한 장은 카불의 공항 인근에서 IS- K의 자살 테러로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울부짖는 중년의 부인과 두려움에 가득 찬 젊은 여인이 담긴 사진이었습니다.

이 두 사진에서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안도와 편안을 결정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카불의 공항 인근에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고, 살겠다고, 살아보겠다고 아우성치며 기다리지만 결정적인 것은 공항의 출입구를 통과하여 비행기를 타느냐 못타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그런 결정적인 것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행 가운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구원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이 질문을 한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평소에 구원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이기에 예수님께 질문했지 않겠습니까? 참 영적인 사람인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구원에 관심이 있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죽는다는 것 자체에만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지 자신에게 있어서 죽음의 문제나 죽음 이후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살려고 하는 사람이 많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끝이야, 우리가 어떻게 알아!라고 하면서 내세를 내색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가 하면 내세를 인정하는 사람마저도 현실 문제에 쫓기다 보면 세상의 출세와 향략에 젖어서 살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는 그런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농사를 짓었는데 소출이 많았습니다. 그것을 저장하기 위해서 창고를 지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말합니다. “내 영혼아 여러 물건을 쌓아놓았으니 편안히 쉬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시고자 했던 ‘어리석은 자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신이 가지고 누리고 있는 것으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쓰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 사람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욜로’(you only live once) 현재를 즐기자는 것입니다.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은 묻기를 “구원을 얻는 자는 적으니이까?”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구원은 오직 유대인에게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방인에게 구원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70억 인구에 유대인은 전인구의 0.3%이므로 2천만 정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7:6에보면

“너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민이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되었던 집에서 애굽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만을 자기 백성을 삼고 기뻐하셨습니까? 첫째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것을 지키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지만 구약성경에 보면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도 이삭과 이스마엘로 갈라집니다. 이삭의 후예는 구원을 받지만 이스마엘의 후예는 버림을 받습니다. 또 이삭과 리브가의 쌍둥이 아들이라도 야곱은 사랑을 받고 에서는 미움을 받습니다. 아무리 아브라함의 믿음이 좋았어도 에서같이 타락한 자손은 버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의 후손은 여러 가지 유리한 조건이 있지만 구원과 심판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범죄하는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18:20)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을 했던 사람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유대인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구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구원 얻을 사람이 적으니이까?”라고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주신 대답이 무엇입니까? 2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구원 얻는 문은 좁은 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7:13-14)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은 어떠한 문입니까?

 

1. 매우 좁고 하나 밖에 없는 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자는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7-9)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양은 성도를 말하고, 이 양들이 들어갈 수 있는 천국문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지형과 양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경상북도 크기만한 땅입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다양한 형태의 지리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갈릴리지역은 푸른초장으로 온갖 꽃들이 만발했는데, 남쪽 헤브론지역에는 사막지역으로 풀 한포기 제대로 나지 않았으며 가파른 산악지역이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양을 치는 목자는 아주 중요합니다.  목자가 목초지를 찾아서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로 옮겨 다닙니다. 밤이 되면 양들을 모아서 한곳에서 밤을 보내도록 합니다. 새벽이 되어 동이 떠오르면 목자는 양을 가두웠던 우리에 들어가서 양을 쓰다듬고 이름을 불러줍니다. 그리고는 양들을 다시 광야로 보내기 위해서 문을 한 마리 한 마리 통과하도록 합니다. 목자가 만든 문을 통과하지 않는 양은 목자의 양이 아닙니다. 목자의 인도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사도들은 모여든 군중들에게 설교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4:12).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입니다. 여기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로 가든 좌로 가든 서울에 가면 되지 않으냐는 식으로 모든 종교에는 구원이 있다고 포스트모던니즘은 말합니다. 절대적 진리와 절대적 구원을 반대합니다. 우리는 편협된다고 할지라도 여기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자가 없느니라”( 14:6).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좁은 문은 하나 밖에 없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좁은 문은 언젠가는 닫혀 지겠지만 아직은 열려 있는 문입니다.

 

25절에 “집주인이 일어난 문을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이 좁은 문이 열려 있지만 언젠가는 닫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닫혀지고 잠가지기 전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이 열려 있는 지금이 곧 회개의 때입니다. 지금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가서 주님을 영접하고 회개해야 할 때입니다.

아무리 주 앞에서 먹고 마시고, 주님의 이름으로 길거리에서 가르쳤어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10년 20년 평생을 교회에 다니고, 종교생활을 했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믿고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문이 닫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아무리 못나고, 죄가 많고, 손가락질당하고, 형편없는 자라도 상관없습니다. 지금 주님께로 나아갈 기회입니다. 지금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죄인임을 고백하십시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10:9)라고 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16:31)라고 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3. 그러기에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2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라고 했습니다. ‘힘쓰라’라는 동사는 헬라어에서 ‘고생하다’ ‘모든 노력을 다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에게도 할 일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애쓰고 힘써야 할 일 가운데 으뜸 되는 일, 최고의 일이 되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으뜸은 구원문제입니다.

 

지난 주간에 아프카니스탄 사람 391명이 한국으로 오는 군용기에 태워졌습니다. 그렇지만 1명은 서울에 오지를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어찌어찌 해서 공항에 들어와서 비행기를 탔지만 검색을 당하여 자격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구원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믿고서 예수 구원의 은혜를 누리기를 멀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뉴질랜드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곳마다 트레킹 코스가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트레킹 코스를 따라 걸으면서 새소리를 듣고, 길가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르는 꽃과 풀들을 대하면서 자연에 푹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기도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생각도 정리하는 아주 좋은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참 좋습니다.

 

그런데 요즘과 같은 시기에는 트렉 중간 중간에 진흙탕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트렉을 만나면 부르던 노래도, 깊은 생각도 멈추게 됩니다. 왜냐하면 진흙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집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진흙탕을 지나면서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와 이것이 인생이구나. 이게 신앙생활이구나’하는 생각이 문턱 일어났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더 기도하고, 더 깊이 생각을 해야 하는데 ... 왜 그렇게 하지 못했지? 진흙탕길에 몰입되어 있기 때문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진흙탕길에서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이것 벗어나는 것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진흙탕을 건너는데 있어서 아주 요긴하게 도움이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스틱 막대기입니다. 진흙탕 길을 피해 가면서 중심을 유지하며 건너가게 해 줍니다. 미끄럼을 방지해 줍니다. 아주 효과적으로 진흙탕을 통과하게 도와줍니다.

이처럼 내 인생의 여정에서 힘들고 어려운 진흙탕 길을 만날 때에 미끄러지고 넘어지거나 빠지지 않고 빠져나오게 하는 스틱이 무엇일까. 바로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말씀이요 기도입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수록 주님을 의지하고, 내 고통과 환란을 분산시켜서 발란스를 맞추어주는 것, 흙탕길의 스틱, 내 인생의 고난 가운데 은혜의 수단은 바로 하여금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좁은 문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우리의 책임이 아니겠습니까? 은혜의 자리에 나아 오기를 피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듣고 나누고 기도하는 자리, 성도의 교제자리를 사모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므로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냈습니다. 불뱀에 물린 자들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모세가 하나님께 백성을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처방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장대에다 구리뱀을 만들어 달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쳐다보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합니까? 하지를 않았습니다. 장대에 달린 구리뱀을 한 번 쳐다보기만 하면 살 텐데 사람들이 그러지를 않습니다. “그까짓 것, 쳐다본다고 나아!”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는 것이었습니다. 간단한 행동을 하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악한 인간의 마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구원 받을 사람이 왜 적겠습니까? 바로 인간의 악한 마음 때문이요, 교만 때문입니다.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되는데 믿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닫아 놓았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세상의 것을 더 신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문은 좁은 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맺겠습니다.

30절 말씀을 보십시오. “보라 나중 자로서 먼저 자도 있고 먼저 자로서 나중 자도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지금이 그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열린 문, 좁은 문에 들어갈 기회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길에 서 있습니까?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주예수님, 내마음을엽니다. 나는죄인입니다. 회개합니다. 지금이시간부터예수그리스도를나의하나님, 나의구주로영접합니다. 은혜받기를사모합니다. 주예수그리스도의이름으로기도합니다. 아멘”

 

찬송 /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483, 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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