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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태복음 27:38-44)

작성자보리떡|작성시간25.04.19|조회수40 목록 댓글 0

골고다 동산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곳에 세 개의 십자가 섰습니다. 세 개의 십자가 중에 가운데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목 박혀 달려 있었습니다.

모여든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가 머리를 흔들며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말했습니다.

성전을 헐고 3 만에 짓겠다는 자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신이나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너라.' (40)

가만히 들어보면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님을 불쌍히 여겨서 동정하는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듯이 예수님을 희롱하는, 조롱하는 말이었습니다.

“니가 말했지 않느냐?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메. 그러면 능력을 발휘해서 십자가의 못을 숭숭 빼고서 뛰어내려와 봐라. 무능한 자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고생하고 있느냐?

 

그 뿐만 아닙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함께 희롱합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42)

조롱하고 모욕하는 소리를 듯으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힌 육체적인 고통도 참지 못할 판국에 이들의 모욕은 비수로 가슴을 후비어 파는, 그리고 난도질하듯이 아팠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없습니까? 사람들의 비수 같은 말에 잠 못 이루고 며칠 밤낮을 괴로워했던 일이 있습니까? 그때에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면 마음에 몸에 병이 옵니다. 그리고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만일 견디다 못하여 그들의 말대로 권능을 행하셔서 십자가에서 내려왔다고 가장해 보십시다.

양손과 양발에 깊숙히 박힌 쇠못을 쑥쑥 뽑아서 내팽개쳐 버리고 십자가상에서 펄쩍 뛰어 내려오셨다고 해보십시오. 골고다 동산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눈이 휘둥그래져서 함성과 함께 예수님에게 몰려들 것입니다. 못 박힌 손발에 흐르던 핏방울은 순식간에 멈추어지고, 갑자기 상처 난 부분이 순식간에 아물러 지는 것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 저기 환성이 발해지고, 박수갈채가 터져 나올 것입니다. 이제까지 조롱하는 그들의 입술은 예수님을 향하여 찬탄하며 연호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예수 예수 메시야”

그럴 때에 모여든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죽음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사람들은 이제는 과감히 예수님 편에 서게 될 것입니다. 소문을 듣고 달려온 예수님의 제자들은 칼을 차고 예수님을 호위한다고 날뛸 것입니다.

모여든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과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이시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구원자로 믿을까요?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여든 사람들도 실제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42)

이러한 때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내려오셔서 이런 결과를 낼 수 있다면 절호의 기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기적을 목격하며 열광하던 군중들이 과연 예수님을 믿을까요?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감탄이 믿음으로 이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람들은 믿지 않으면서도 기이한 일이나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에 대해서 ‘와아’ 하면서 찬사를 보내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마음과 습성을 유리알처럼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께서 어찌 이것을 모르시겠습니까?

 

그러기에 예수님은 사람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그런 기사를 행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순전히 사람들을 놀라게 할 목적으로 하늘의 불을 쏟아 내리게 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아무런 필요도 없는데 순식간에 바다를 갈라지게 해서 청중들을 열광케 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일시에 천군천사를 나타내 보이시고 뇌성을 방불케 하는 하늘의 음성을 들려 사람들을 기절케 하신 있었던가요?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 가운데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으며 연명하다가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리고 부자도 죽었는데 지옥에 갔습니다.

지옥에서 부자가 눈을 들어보니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가 보입니다. 그는 지옥에서 너무나도 목이 말랐습니다. 그래서 간청했습니다.

 ‘나사로의 손가락에 물을 찍어 자신의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

 

그렇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나사로는 거기에 내려갈 수 없었습니다. 그 부자는 지옥의 고통스러움을 느끼면서 아직도 세상에 있는 형제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들도 자기처럼 호의호식하며 하나님도 모르고 살다가 죽으면 자신과 같은 처지가 될 것을 염려스러웠습니다.

지옥에 빠진 부자는 간청했습니다.

나사로를 다시 살려 세상에 가서 자기의 형제들에게 천국과 지옥을 알려서 지옥에 오지 않게 해달라

그때에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가는 기적이 있다고 할지라도 믿지 않을 것이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은 죽은 자가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믿지 못한다

신앙이란? 기적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우리의 마음 밭에 뿌려지고 성령 하나님이 역사할 때에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거쳐오는 가운데 들려오는 소문과 이야기를 통해서 상천하지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생명을 내어놓고 정탐꾼들을 숨겨주었습니다. 여리고성의 몰락 가운데 자기와 가족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제자들에게 감격하며 말했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이때 제자들은 속으로 어떤 마음을 품었습니까?

“야! 이제 드디어 우리 선생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려나 보다.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시면 나는 이스라엘의 장관 중에 자리쯤 차지하겠지”

마음이 부풀어 오르고 벅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들을 말했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삼일에 살아나리라 "( 20:18-19)

무슨 말입니까?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이유, 목적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죽으러 가신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뜻밖이 말, 기상천외한 말씀이십니다. 정권을 잡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죽으러 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현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기가 찰 노릇입니다. 정치적 메시야로 정권을 잡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죽으러’ 간다니 말이 됩니까?

당장 수제자 베드로의 반응을 보십시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16:22)

제자들로써 너무나 당연한 충언이지 않습니까? 어느 제자가 사랑하는 선생님이 죽으러 간다고 하는데 붙잡지 않을 제자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의 간청을 듣고서 말했습니다.

"사단아 !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16:23)

예수님은 책망하셨습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히지 못하도록 만류하고 훼방하는 것은 사단의 짓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강함과 힘쎔을 통한 감탄과 놀라움이 아니었습니다. 꺼질 듯이 약함을 통해서 스며들고 감동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 최근에 일어난 일부 목사들이 교인을 동원해서 세력화라는 형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어떠한 죽음입니까?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교세력에 의해 죽음으로 생각됩니다. 빌라도, 헤롯, 로마 군인 등이 정치세력이 야합에 의한 정치세력에 의한 정치적인 죽음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자신의 죽음을 두고서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6)고 하셨습니다. 억지로 죽음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원하신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0:18에서도 말합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이 말씀은 어쩔 수 없는 혹은 피치 못할 죽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45에

“인자의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집에는 암탉 한 마리가 어느 날 병아리 여덟 마리를 데리고 왔습니다. 어미 닭은 알을 품어 부화시켜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이 암탉은 자기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서 주변에 다른 닭이나 짐승이 접근하지 못하게 합니다. 온 신경을 자기 새끼들에게 있습니다. 모이를 주어도 자기가 먼저 먹지 않습니다. 새끼들이 안전하게 먹도록 합니다. 잘 때에도 자기 품에 여덟 마리를 다 품고 잡니다.

족제비와 같은 동물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자기 생명을 걸고 싸웁니다. 보호하다가 죽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이 어미 닭보다 더 큰 사랑으로, 그 깊이와 넓이를 측량할 수 없는 무한량의 사랑으로 우리를 그 품에 안으시고, 우리를 살리시려고 십자가 위에서 피를 쏟으시면서 죽으셨습니다. 나를 살리시려고, 이 벌레보다 못한 이 미물을 살리시려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53:5-6)

만약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참지 못하시고 십자가 형틀에서 내려오셨다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예수님이야 쓰리고 아픈 십자가를 벗어버렸으니 홀가분하고 자유스러우셨을 것입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스스로를 구원시켰다고, 십자가 위에서 기적이 나타났다고 칭찬을 받고 인기 독차지했을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야 정말 이스라엘의 왕이시다. 메시아다. 하나님의 아들 답다”

그러나 하나님은 슬퍼하셨을 것입니다. 아니 통탄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 성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으로 십자가에서 희생되므로 인간을 구속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경에 예언된 말씀대로 십자가 위에서 처절한 고통을 맛보셨습니다. 마지막 피한방울까지 다 쏟으시고, 정신이 혼미하여 지고, 심장이 더 이상 뛸 수 없어 마지막 숨을 내쉴 때까지 십자가 위에서 버티셨습니다. 기적을 행하여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행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축복받아 세계적인 부자가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세계적인 인물이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에게 있어서 성부 하나님을 가장 크게 기쁘시게 하는 것은 가장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려운 치욕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 위에 매달려서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부의 뜻이 너무나 힘든 길이기에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이 길밖에 없어서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의 유일한 뜻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에 그는 기꺼이 죽음을 받아드리고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라고 하면서 만족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기 위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9:23) "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고난주간에 십자가의 주님을 많이 생각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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