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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다윗 공동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사무엘상 22:20–23)

작성자보리떡|작성시간26.06.20|조회수44 목록 댓글 0

 

Elie Wiesel은 유대인 작가이자 Holocaust 생존자로, 인간의 고통과 신앙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진 인물입니다.

그는 Auschwitz concentration camp 등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경험을 바탕으로 『Night』을 집필했으며, 기억과 책임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후 인권운동가로 활동하며 1986년 Nobel Peace Prize을 수상했습니다.

엘리 위셀은 전통적인 유대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수용소에서 경험한 사건으로 인해 깊은 신앙적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왜 의인이 고통받는가?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살아남았는지 평생 질문하며 살았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서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사울 왕에 의해서 놉 제사장 85명이 죽습니다.

놉 땅의 많은 사람들과 짐승들도 몰살당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가 해체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아비아달, 한 사람은 살아 남습니다.

그리고 다윗 공동체로 숨어 들어갔습니다.

다윗은 아비아달을 받아드립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 속에 살아남아 다윗 공동체로 숨어 들어가 생명을 이어가게 했을까요?

그래서 오늘 말씀을 근거해서 다윗 공동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라는 제목으로 세 가지에 살펴보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1. 하나님 나라는 남은 자들을 통해 이어갑니다. 우연은 없다.

 

본문 20절을 보겠습니다.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의 아들 하나가 피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아비아달이라 그가 도망하여 다윗에게로 가서

한 사람, 아비아달이 살아남았습니다.

아비아달 (אֶבְיָתָר)의 뜻은 “하나님은 풍성하시다”입니다.

주 안에서 죽는 것도 복 중의 복이지만 아비아달은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아비아달의 이름의 뜻대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입니다.

살아있음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저는 가끔씩 타카니니 요양원에 심방을 갑니다.

거기에는 우리 교회에 나오셨던 왕 병은 할머니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1932년생으로 알고 있습니다. 95세입니다.

치매로 모든 기억을 잃으셨습니다.

침대에 하루 종일 누워서 간병인이 떠먹여주는 죽을 먹으며 연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심방을 가면 답답합니다.

저렇게 살아야 하는지,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할머니의 생명을 거두어 가주십시오.’

저는 이 기도를 오래 동안 했습니다.

하나님은 제 기도를 그대로 응답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저렇게라도 할머니는 살아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살려 두신다고 믿습니다.

 

치매로 모든 기억을 상실하신 할머니는 정말 총명하신 여장부였습니다.

남편 이철수 할아버지가 젊을 때에 바람을 피우고 마음 고생을 많이 시켰습니다.

그래도 할머니는 땅을 사서 집을 지어 파는 일을 했습니다.

많은 인부를 거느리며 건축업을 해서 3남1녀를 대학 공부를 시키고, 유학을 보내고, 결혼해서 집을 장만까지 다 해주었습니다.

그런 할머니가 치매로 저렇게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저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는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계속 붙드시고 보존하십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현장 가운데서 살아남은 것은 운이 좋아 살아남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존의 섭리 가운데 있었습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중국의 교회는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십자가는 철거되고, 예배당은 창고로 바뀌었으며, 목회자들은 감옥이나 노동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성경을 소지하는 것조차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교회는 끝장 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은 밤마다 이불을 덮고 가족과 함께 작은 목소리로 시편을 암송했고, 또 다른 성도는 농촌의 헛간에서 몰래 성경 한 장을 돌려 읽었습니다.

누군가는 체포될 위험을 알면서도 “예수는 주님”이라는 고백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교회가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 남겨 두신 것입니다.

 

이후 문화혁명의 소용돌이가 멈추자, 숨겨져 있던 믿음의 공동체가 수천만 명의 성도로 드러났습니다. 교회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뿌리로 살아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은 놀라와하며 증거했습니다.

“교회가 사라진 알았는데, 커져 있었다”

 

성도 여러분,

교회가 이러다가 끝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교회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교회가 사라져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결코 하나님의 교회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내 인생이 이러다가 파산 나는 것이 아닌가? 내일이 어찌될지 모르겠다고 불확실성의 비관에 빠져들 때가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역사와 생명의 주관자요 보호자요 심판자이심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여기에 내가 있음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보이지 않을 뿐, 하나님의 손길은 멈추지 않습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책임을 지는 신앙의 사람에 의해 세워집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

 

아비아달이 죽음을 피해 다윗에게 갔습니다.

놉 땅에 일어난 일을 다윗에게 알려줍니다.

그때에 다윗이 무엇이라 했습니까? 22절입니다.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말할 내가 알았노라 아버지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탓이로다”(22)

다윗이 무엇이라 말하고 있습니까?

" 아버지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탓이로다"

이 엄청난 이에 대해, 다윗은 발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원인이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칼날을 피해 놉땅의 아비멜렉에게 숨어들어갔을 때에 거기서 사울 왕의 앞잡이, 칼날이 되어 제사장 85인을 죽인 도엑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도엑을 보았을 때 위험을 감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안전만을 생각하며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에 대한 자신의 실수를 뼈저리게 인정합니다.

다윗은 놉땅에 일어난 사건 - 불행하고 큼직한 살해 사건을 회피하고 숨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과 도엑의 잔인함을 탓하며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원인이 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책임을 떠안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울 왕을 보십시오. 대조적입니다.

길갈에서 사무엘 제사장을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제사를 드리는 사건에 대해 책망을 받게 되자 무엇이라 변명했습니까?

“백성이 나를 떠나고, 사무엘도 오지 않았고, 블레셋이 몰려오니 내가 어쩔 없이 번제를 드렸습니다.

세 가지 책임 전가를 하고 있습니다.

·         첫째, 백성 탓입니다.

·         둘째, 상황 탓입니다.

·         셋째, 사무엘의 지연 탓입니다.

 

아말렉 전쟁 이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사울은 백성의 눈치를 보며 전리품 중 좋은 것들을 남겼습니다.

지적을 당하자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왕으로서의 체면과 이익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울은 탓이요’ ‘내가 원인입니다라고 하지 않고 변명하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시켰습니다.

 

그렇지만 다윗 공동체를 이끄는 다윗은 놉땅에서 일어난 비극에서 조차도 말했습니다.

"내 탓이다"

“내가 원인이 되었다”

 

독일 나치 시대에 대부분의 독일교회가 나치 정권에 아부하고 침묵했습니다. 이때에 몇몇교회는 고백교회를 형성하고 나치 정권을 비판했습니다. 거기에 앞장 선 사람이 디트리히 본회퍼입니다.

나치 정권에 대해 침묵하는 교회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교회가 침묵할 , 그것은 죄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는 서슬 퍼런 시절에 자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저항했습니다.

정신 이상자가 많은 사람이 타고가는 버스를 운전하지 못하게 끌어내려야 해야 하듯이 미친 히틀러가 나라를 이끌게 해서는 안된다

히틀러를 끄집어 내고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다가 붙잡혀서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는 나라가 세계가 전쟁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하여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을 소유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다윗은 변명하지 않습니다.

·         “사울 때문입니다” 라고 하지 않습니다.

·         도엑 때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말합니다:

 “내 탓입니다”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는 아무 죄도 없는 거룩하고 순전하신 분이셨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내 탓이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세상의 어머니들이 자식들에게 찬사를 받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연약하지만 자식과 가정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을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어머니, 교회의 직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 여러분,

자기를 돌아보며 ‘내탓이요’  회개하는 자책이 아닙니다. 자존감이 없는 자의 언행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가난하고 온유하며 애통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하늘의 은혜를 누리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자기 고백입니다.

이들에 의해 하나님 나라는 견고하게 세워져 갑니다.

 

3. 하나님의 나라는 참된 피난처가 되어 갑니다. 다윗 공동체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디윗은 살기 위해 도망해 온 아비아달을 맞이하면서 말했습니다. 23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생명을 찾는 자가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 하니라”(23)

다윗은 두려움에 떠는 아비아달에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생명을 찾는 자가 생명도 찾는 자니"

이 말은 무슨 선포입니까?

"너의 적이 나의 적이다"

다윗은 아비아달을 짐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공감과 연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거리에 어떤 사람이 외로이 비를 맞으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를 잘 알고 있는 친구가 우산을 쓰고 가다가 다아가서 우산을 받쳐 함께 동행해 주었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산을 들고 있는 친구가 외로이 혼자 비를 맞으며 걷고 있는 것을 보면서 조용히 쓰고 있던 우산을 접고 비를 맞고 걸어가는 친구에게 다가가서 함께 비를 맞으며 동행해 주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공감과 연대를 생각해 때에 어느 것이 진심입니까?

우산을 함께 나누어 쓰고 우중을 걷는 것은 좋은 연대입니다.

우산을 접고 함께 비를 맞으며 걷는 것은 아름다운 공감입니다.

 

아굴람의 다윗 공동체에 아비아달은 생명보존을 위해 왔습니다.

아굴람 다윗 공동체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의 피난처였습니다.

억울한 사람들이 도망해 왔습니다.

상처 입은 자, 버림받은 자들이 숨어들었습니다.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상한 자

다윗은 이런 자들을 다 품었습니다.

그리고 아비아달도 품었습니다.

 

다윗은 말했습니다.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다”

“안전하다”

 לְמִשְׁמֶרֶת (레미쉬메렛)

 군사적 표현으로 “완전히 보호받는 상태”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기에,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공동체이기에 그렇게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아둘람의 다윗 공동체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초청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 11:28)

예수님의 그늘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의 통치가 있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1950년 한국전쟁 직후, 충청도 한 시골 마을에서는 교회당이 불타고 남은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성도들은 불탄 예배당에서 모일 수 없어서 이장 집 마당과 헛간에 모였습니다.

한 집사님은 매주 새벽이면 가장 먼저 헛간에 와서 불을 피우고 바닥을 쓸었습니다.

그 집은 가난해서 쌀이 늘 부족했지만, 그 집사님은 밥 한그릇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유를 물으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누가 오든지 하나님 앞에 와서 굶지 않게 하려고요.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은 많이 가지고,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서로를 돌아보는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젊은 성도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집사님, 이렇게 힘든 데도 기쁘셔요?

 

그는 웃으면서 짧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신데, 뭐가 필요해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좋아서 기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심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특별한 사람들의 무대가 아니라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평범한 일상의 자리에서 이미 시작된 현실입니다.

 

호레이쇼 스패퍼드는 시카고의 변호사이자 성공한 사업가였습니다.

하지만, 1871년 시카고 대화제로 모든 재산을 잃습니다.

가족이 유럽으로 다시 돌아가 살기를 작정하고 먼저 아내와 네 명의 딸을 보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와 네 딸은 먼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가던 중, 여객선 사고로 바다에 빠져 모두 목숨을 잃고 맙니다.

아내는 겨우 살아남아 남편에게 전보 한 장을 보냅니다.

“Saved alone. (나만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즉시 배를 타고 그 바다를 건너갑니다.

배는 바로 그 사고 해역을 지날 때 속도를 늦추었습니다.

그때 스패퍼드는 창가에 서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슬픔 속에서 바다를 바라봅니다. 바로 그 바다 아래에 네 딸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마음에서 나온 것은 절망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찬송시를 씁니다.

 

“내 평생에 가는 순탄하여

잔잔한 같든지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편하다”

 

사람의 논리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고백입니다.

그는 자기 연민과 자책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보다 더 깊은 곳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하나님은 잃지 않았습니다.

 바다는 딸들을 삼켰지만, 하나님의 손은 그의 영혼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현실을 부정하는 망상가가 아니라, 현실보다 더 큰 하나님을 붙든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마무리해 보십시다.

놉땅은 무너졌습니다

사람은 죽었습니다

세상은 끝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작이었습니다.

한 사람을 남기셨고

억울한 사람들을 모으셨고

책임감을 가진 사람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공동체를 세워가게 했습니다.

 

오늘, 우리를 험악한 세상에서 오늘도 살아 있게 하심은 무엇입니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있어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머무는,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편안과 생명을 흘러 내보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

 

찬송 / 내 영혼이 그윽히 깊은 데서 412 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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