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머서교회 | 안해용 목사
‘차별을 넘어서 차이를 인정하는 교회’로 평신도들과 함께, 소통과 관계 안에서 공동체를 세워가기 위해 애쓰는 너머서 교회 안해용 목사와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여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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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먼저 너머서교회가 시작된 이야기를 해주시겠습니까?
저희들은 2007년 12월 7일부터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부목사로 섬기던 일산에 있는 어떤 교회가 목회자와의 갈등 때문에 교인들이 150명 정도 나와 있었습니다. 그 중에 많은 교인들이 다른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면서 고민하고 있을 때, 저도 교회를 사임하고 나와 있었고, 그런 과정에서 개척이란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저의 아내와 개척 안하는 조건으로 결혼했는데, 아내의 입에서 맨날 다른 사람 비판하지 말고 당신이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개척을 막상 하게 될 과정에 있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두렵더라고요. 그러는 과정에 제가 꿈을 하나 꾸었는데 아직도 그 꿈이 제 마음에 남아 있어요. 시골에 가면 논과 논 사이에 웅덩이가 있어요. 어느 날 거기에 앉아있는데, 흙탕물이 가득 고여 있는 거예요. 보면 너무 안타까워서 그 흙탕물을 계속 퍼냈어요. 그러면 깨끗해질 줄 알고요. 아무리 퍼내도 흙탕물이 깨끗해지지 않는 거예요. ‘왜 이렇게 안 깨끗해지지?’ 하면서 포기하고 앉아 있는데 저 구석에 조그만 샘물이 퐁퐁 솟아나고 있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꿈속에서 생각하기를, ‘참 한심하다. 저 조그만 샘물이 언제 큰 웅덩이를 깨끗하게 해? 참 한심하게 솟아나네.’ 그러고 있는 사이에 어느 순간 조그만 샘물이 흙탕물을 정화해가서 거의 삼분의 이 이상을 깨끗하게 하는 걸 보면서 꿈을 깼던 기억이 나요. 그러면서 마치 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처럼, ‘네가 꿈꾸는 교회가 작은 샘물이 되면 어떻겠냐?’ 해서 기도하면서 우리 교인들과 이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이름을 지을까 공개모집을 했습니다. 첫째 조건은 많은 교회 중에 한 교회가 아니라 우리만의 색깔이 있는 교회면 좋겠는데 이름도 다른 교회가 쓰지 않는 이름이면 좋겠다 했죠. 그러는 가운데서 저희에게 ‘너머서’라는 이름을 주었어요. 차별을 넘어서 차이를 인정하는 교회. 좀 넘어 설 것들이 있지 않을까? 우리 안에서, 교회의 벽도 넘어서고요. 차별을 좀 넘어서기 위해서 ‘너머서’라는 이름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교인들과 함께 모여서 그 때부터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19살 때부터 목회를 했으니까 20년 이상을 목회생활 했는데, 본 것이라고는 기존교회스타일이 다잖아요. 부목사 10년 하면서 늘 마음속에서 ‘이건 아닌데’ 싶었고, 그러면 그 다음은 ‘어떻게’인데, 그에 대한 답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면서 답을 찾다가 ‘평신도신학’이라는 책을 읽게되었습니다. 로버트 뱅크스와 하워드 스나이더, 송인기 목사님의 책들을 죽 보면서 답을 찾아냈습니다. 평신도신학을 기초로 한 교회였으면 좋겠다 해서 저희 교회가 어떤 교회로 가야 할까라는 방향을 잡기 위해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홍성사에서 펴낸 평신도신학 1, 2권을 13주 주제별로 나누어서 설교도 하고 성경공부 교제도 만들고 책도 읽게 해서 13주 공부를 멤버십과정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의 방향성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좀 체계적이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언덕, 예인, 디딤돌교회들을 찾아가보았습니다. 보니까 정관을 가지고 있어서 교회개혁실천연대에서 펴낸 모범정관을 보면서 이 철학을 정관화했고, 목회자 청빙도 하자고 했고, 목회자 3년 임기제로 하고 그것을 다 담아서 정관 만들고, 그 다음 주에는 목회자 청빙절차로 공청회를 시작했습니다. 일대다수라 살살 할 줄 알았는데 아주 세게, 심각하게 질문도 하시면서 저 자신도 돌아보면서 목회자 청빙 절차 밟고 투표해서 3분의 2로 통과되고 그 다음 주에 창립했습니다. 그 때가 2008년 3월 30일인데 약 4개월의 준비과정을 통해서 교회가 갖고 있는 철학, 교회가 가야 하는 방향들을 정관으로 녹여내고 목회자 청빙 절차를 밟고 해서 저희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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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차별을 넘어서 차이를 인정하는 교회를 지향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 중에서 넘어서야 하는 차별로 어떤 것을 염두에 두었습니까?
모든 차별이긴 한데, 그 중에 저희 교회가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나이의 차별, 성인과 어린 아이의 차별을 넘어서자 해서 온가족예배를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필요에 의해서보다는 철학에 의해서였죠. 아이들이 교회 안에서 차별받는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어른들 중심의 교회이면서 미래세대를 준비하는 교회라고 말은 그렇게 하죠. 실제로는 아이들을 인정하지 않는 거죠. 그렇다면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예배드리자, 그리고 함께 예배드린다고 해서 차별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차별받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아이들을 주체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자. 그래서 그 아이들에게 주체적 역할로서 초등학교 4학년 이상이면 어린이 집사로 임명하는데, 제자훈련을 마치면 어린이 집사로 임명하고 사역을 시킵니다. 성인들과 똑같이요. 주일 낮 예배에 대표기도, 성경봉독과 봉헌순서를 맡기고, 봉헌위원은 걸어 다닐 수 있는 아이들, 최소한 세 살 이상이 되면 봉헌 담당을 시킵니다. 주체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 아이들이 충분하게 교회의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게 하는 것이기에 교인총회에 아이들도 참석시킵니다. 교인총회에서 발의를 할 수 있지만 의결권을 주지는 않습니다. 책임질 수 있을 때 투표할 수 있죠. 그것은 성인이 되었을 때, 19세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소통하고, 또 하나는 어른들과 아이들의 관계에서 멘토링을 합니다. 아이 하나당 어른 가정을 멘토와 멘티로 연결해서 아이들과 함께 고민하고, 이런 나이의 차별을 넘어서려고 합니다.
두 번째는 남성과 여성의 차별을 넘자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운영을 운영위원들이 합니다. 목회와 운영이 분리되어있고 저도 운영위원회에서 빠져나왔습니다. 평신도 중심으로 하니까요. 의무사항은 6명이 운영위원이면 최소한 2명 이상은 여성이 맡게 되어 있습니다. 여성할당제죠. 이렇게 해서 남성과 여성의 차별을 넘어서 가자. 그리고 교회의 차별도 좀 넘어서자. 너무 교회중심적인 의식을 넘어서자. 저희 교회는 주일 점심값을 모으는데, 모아서 ‘좋은벗’을 지원합니다. ‘좋은벗’은 정토회의 법륜스님이 하시는 단체인데 종교의 벽을 좀 넘어서서, 정말 뜻이 있게 잘 하는 기관이라면 우리 종교 단체가 아니더라도 그 분들을 지원할 수 있는 그런 차별도 넘어서 가자는 거죠. 교회중심적 차별에서 넘어서서 사회지향적인, 세상과 소통하는, 그래서 공간도 세상 속에 있는 공간으로 가서 예배하자. 그래서 저희들은 학교 공간을 빌려서 예배드립니다. 지금까지 학교 공간을 빌려서 현장 속으로 들어가고, 학교 현장 속에서 문제들을 고민하고 그 곳에서 예배드릴 수 있는 그런 의미로 너머서의 개념들이 담겨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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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목회와 운영이 분리되어 있다고 하셨는데, ‘목회’와 ‘운영’ 간의 선을 그어 주신다면요? 목사님들에 따라서는 목회도 잘해야 하지만 운영도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목회와 운영을 교회 안에서 완전히 분리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다 섞여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리하려고 하는 것은, 목회적 입장에서 운영까지 하다 보면 목사의 전횡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저희들 입장에서 운영 부분은 재정이나 교회 행사인데 이는 평신도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분들의 책임이고, 목회자는 목양적 입장, 즉 교인들을 보살피는 것, 말씀 사역, 가르치는 사역에 집중하자고 했고 지금 4년 되었는데 이게 분리가 잘 안되었습니다. 교인들이 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목사가 뒤치다꺼리를 다 해야 합니다. 구조적으로 잘 안 되는 겁니다. 초창기에는 제가 운영위원회에 들어갔는데, 다들 말을 해놓고 마지막에 ‘목사님 생각은 어떠세요?’ 라고 묻습니다. 그게 한계입니다. 사실은, 안 해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날 많은 경우, 목회자들의 전횡이 이루어지는 것은 목회자들이 그만큼 애정을 갖고 하다보니까 교인들보다 더 많이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교인들보다 더 많이 알고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마치 소비자 사회 속의 그리스도인들처럼 쇼핑 온 성도처럼 대접받는 구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론적으로 악순환의 구조입니다. 교인들이 주체가 되어서 운영을 하고 뭔가를 꾸려나가다 보면, 교회의 모든 문제에서 굉장히 주체적인 결정을 하고 주체적으로 생각을 바꾸어나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목회와 운영을 분리한다고 시작을 했는데 처음엔 참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목회자가 해야 할 것은 교인들이 자라게 하는 것이고, 자라게 한다는 것은 처음에는 주체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자라서 주체적으로 자기들이 운영을 해가고, 자기들이 만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입니다. 목회자가 운영을 돕는 의미에서, 재정은 제가 전혀 관계하지 않고 교인들이 주최하고 행사도 교인들이 주최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들도 각자의 영역에서 운영하는 부분도 함께 합니다.
결국에는 이것이 분리라기보다는 보완적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도 늘 목회의 영역과 운영의 영역이 서로 분리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서로 보완이라고 말씀합니다. 목회자들은 목회의 영역을 하지만 결국에는 소그룹의 리더들이나 교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보완입니다. 또 행정적 부분에서도, 전임사역자니까 당연히 보완해드려야죠. 교인들이 일상생활하는데 다 할 수 없습니다. 그 부분에서 제가 보완하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교인들이 주체적으로 운영해가는 것인데 한 3년 해보니까 지금은 좀 됩니다. 운영위원장이 연간계획표, 재정 수치 비교분석해서 예산 짜고 저와 함께 의논하고, 교회의 각 부서별로 계획 짜고 저도 좀 돕고, 이제 조금 됩니다. 예배부 부장님은 예배 전체의 순서를 짤 때 저랑 같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논문 가지고 예배학 공부 다 했고, 이제는 예배 순서도 그들이 좀 바꾸고 찬양도 바꾸고요. 올해는 목표가 그 분들이 예배 인도까지 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라감이죠. 저희 교회도 일반교회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전혀 준비되지 않은 분들이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점점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주체적으로 움직이고, 저희도 예배 장소 정할 때도 그 분들이 결정해서 좀 움직여 가고요. 그래서 저희들의 목표는 목사 50, 교인들이 50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까지는 목사 90, 교인 10 했다면 조금 낮추어서 한 해 정도는 80대 20, 그 다음에는 70대 30, 그 다음에는 60대 40 정도 가야 서로 간에 주체적이 될 수 있지요.
또 견제도 필요하고요. 목사 하는 부분에 견제도 하고 그래서 1년에 한 번씩 평가도 하고요. 이런 것들이 같이 맞물려가는 서로 보완적 구조에서 목회와 운영이라는 개념들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지요. 쉽게 말하면 오늘날 장로교회도 목회와 운영의 분리예요. 당회의 기능이 있잖아요. 장로들이 늘 감시 기능을 하고요. 목사들은 늘 긴장하는 CEO 역할을 한다고요. 그런 의미로 목회와 운영을 분리한다는 개념이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정말 교회공동체는 보완적 개념으로 함께 한다면 굉장히 의미 있는 시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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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탐방한 교회 중에 어떤 교회는 세대통합예배를 지향하고 그것을 위해서 300명이 넘으면 교회본질을 지키기 힘들다는 말씀을 하는데, 너머서 교회가 공유하는 사이즈에 대한 생각이 있으신지요?
교인들이 분리하기 싫어해서 정관에 넣어놓았습니다. 150명입니다. 어떤 권사님은 149명까지 받고 149명 이상 될 때는 교회 입구에 서서 돌려보내라고 하시는데, 150명이 되면 분리해야 하니까요.(웃음) 분립개척을 해서 더 이상 커지는 것을 방지하자는 거죠. 150명이라고 했는데, 150명도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100명으로 줄이자는 쪽에 있습니다. 어쨌든 숫자가 많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100명은 아이들을 포함한 숫자인데, 100명이 넘으면 목양적인 면에서 케어적인 기능이 약화될 것 같습니다. 또 하나 가장 큰 위험은, 교인들 간에 서로의 상호작용이 불가능합니다. 또 하나 현실적인 문제로, 주일공간을 빌려서 예배하기 때문에 100명이 넘으면 그런 공간을 빌리기가 마땅치 않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 정관에는 150명인데 좀 낮추자, 분립개척위원회를 좀 만들어서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심도 있게 고민하자고 작년부터 이야기를 했습니다.
또한 목회를 하다 보니까 목사 한 사람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100명 이상은 주일예배에 눈으로 만나고 가슴으로 느끼는데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주중 사역도 주중에 케어할 수 있는 범위도 100명 넘어가면 쉽지 않고요. 어떤 분들이 300명이라고 할 때, 교회 사역 쪽에서 외부 사역도 좀 하려고 하니까 300명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저희는 좀 반대입니다. 너무 사역중심의 교회로 간다면 결국에는 큰 교회가 사역을 더 잘 한다, 만 명 모이는 교회가 돈 더 많이 내고 더 잘 하는데, 그럼 그 교회 가지 왜? 저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보완할 수 있는 것이 교회 연합인데 연합으로 하면 됩니다. 좀 다른 관점을 가져야 하는데, 사역중심이 아니라 교회 안의 공동체, 특히 목회적 영역도 있지만 교인 서로 간에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려면 100명이 넘어가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교회가 지금 아이들까지 다 포함하면 70명 되는데, 어른들이 아이들 이름을 모른다고 합니다. 헷갈린다는 것입니다. 쟤가 걔 같고, 벌써 이름을 모를 정도 된다면 위험한 것이지 않습니까? 이름도 모르는데 무슨 교인입니까? 이름도 모르는데,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 사람의 삶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사실 100명도 많습니다. 어느 순간 한국교회 성도들은 겉으로 교제하지, 내밀한 교제를 스스로 불편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큰 교회에 갑니다. 그런 부분에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한다는 것은 결국 교인들 간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최소한 알아야 합니다. 뭘 하고, 어떤 고민을 하는지, 서로의 고민을 알려고 하고 그렇게 다가갈 수 있는 공동체가 진짜 성서적인 의미의 공동체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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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게 바람직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장년, 아이 포함해서 70명 정도가 된다고 하면 풀타임 사역자가 있을 경우 헌금이 사역자의 사례 쪽으로 몰릴 수밖에 없고, 적어도 목회자의 최저생계비는 나와야 하는데, 그런 부분에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주일 예배당 건물을 안가지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운영비가 줄어듭니다. 학교 공간을 쓰는데, 한 주에 6만원, 한 달에 24만원이면 주일에 공간을 다 사용합니다. 냉난방 포함해서요. 그렇게 하니까 비용이 확 줄어듭니다. 그리고 주중 모임 때문에 사무실 공간이 필요한데, 같이 연대해서 쓰면 확 줍니다. 저희 교회는 힘들지만, 사례비가 적지 않습니다. 최저생계비를 넘어섭니다. 세금도 내고 다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1년 전체 예산의 50%가 목회자 생활비인데 이것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웬만한 사역은 충분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저는 건물을 갖지 않고 사무실 공간은 공유합니다. 공간적 비용을 최소화하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런 부분은 결코 불가능한 구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공간을 갖기 때문에 투여되는 비용이 너무 많아서 결국 목회자와 건물에 다 들어가고 나머지 사역을 전혀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70명인데도 자립이 되고 있고 일도 충분히 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시작부터 자립했습니다. 건물이 없으니까 저희 집에서 시작했고, 학교 공간 빌려서 예배드렸고, 사무실은 2년 뒤에 돈 모아서 마련했고요. 돈 한 푼도 없이 개척했습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이, 교인 열 가정이 십일조를 정확하게 하면 목회자들은 그들의 10분의 일 평균 수준만큼 생활하는 것이지 않나요? 이것이 히브리의 랍비 정신이지 않습니까? 회당에서 다 그렇게 합니다. 그런 구조를 만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저희는 감사하게도 열 세 가정으로 시작했으니까 자립이 됐고, 그렇게 풍족하게 받진 않았지만 시작부터 잘 됐고, 시작하면서부터 선교했습니다. 올해는 예산이 좀 줄어서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7천만 원 정도는 나오니까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또한 저희 교회가 3년이 지났을 때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너머서교회 하면 떠오르는 것이 뭐냐?’ 옛날 교회 같으면, 교회하면 건물이 떠오른다, 놀았던 공간이 떠오른다 일 텐데 아이들도 그렇고 어른들도 그렇고 ‘사람’이 떠오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교회라는 것을 아무리 설명해도 건물이 있는 한 안 와 닿는데 건물에 대한 집착에서 놓여나니깐 사람들이 본질로 갑니다. 사람이 교회고, 우리가 교회고, 우리가 머무르는 곳이 교회다. 저는 어떤 값어치보다 가장 값진 값어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더 큰 본질이 어디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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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럼 불편해하지는 않나요? 그래서 더 편하게 안정된 공간에서 예배드리고 싶다, 우리 건물이 있으면 교회도 더 잘 될 것 같다고 생각 하는 분은 없나요?
그래서 대놓고 이야기합니다. ‘저희 교회는 불편한 교회다. 편하게 예배드리고 싶으면 다른 교회로 가라.’ 왜냐하면 교회가 모든 것을 다 충족시켜 줄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소비자 지상주의에 물든 기독교, ‘하나님을 팝니다’라는 책에서 나왔듯이 결국에는 교회가 성도들의 편의를 도와주면서 그 편의를 조장하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초대교회가 어디 그렇게 했습니까? 그렇게 했으면 초대교회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잖습니까? 그런 입장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저희 교회는 불편하다, 아주 불편하다. 왜냐? 일찍 와야 되고, 한 시간 전에 와서 청소해야 하고, 학교 강당을 예배 모양으로 세팅해야 하고, 끝나고 나면 다 청소해야 합니다. 청소를 조금만 잘 못하면 학교에서 왜 이렇게 지저분하게 썼냐고 전화 옵니다. 그걸 다 감내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결국에 저는 본질지향적인 교회로 갈 것이냐, 아니면 소비자지향적인 교회로 갈 것이냐의 두 가지 갈림길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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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건물이 있다고 해서 다 소비자지향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텐데요?
건물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소비자지향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럴 여지는 있다고 봅니다. 편안하니까요. 저도 상가교회에 있어보니까 건물 갖고 싶더라고요, 불편하니까요. 임대료 올려달라고 하고요.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많은 한국교회들이 왜 건축에 저렇게 올인 하느냐 하면 편한 교회를 지향하기 때문 아닙니까? 교육관도 짓고 싶고, 교육관 짓고 나면, 수련회도 갈 수 있는 수양관도 짓고 싶고. 더 편한 것을 지향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희들은 좀 역으로 가자는 거죠. 이런 부분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건물이 있는 교회가 다 편한 것을 지향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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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목사 임기가 3년인데요, 한 번 투표를 했는데 100%가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목사님이 3분의 2의 찬성을 받지 못하여 그만 둬야 한다면 교회는 어떻게 될까요?
그것도 교회, 공동체의 몫입니다. 저는 공동체가 그 정도를 수용하고 그것을 볼 수 있으면 건강한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는 목회자에게 기본적으로 점수를 더 줍니다. 저희 교회는 50대가 많아서 굉장히 우호적입니다. 제발 저를 좀 잘 평가해주었으면 좋겠는데, 굉장히 감성적으로 평가합니다. 반대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그건 정말 대단한 용기입니다. 처음에는 반대표가 유일하게 한 표 나왔습니다. 저의 아내가 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교인들이 아직도 목회자들에게 점수를 후하게 준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요. 저는 그런 의미에서, 바꿀 수 있다면 우리 교인들에게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자른다면 우리 교회는 성공한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3년마다 평가받는다는 것은 목회자들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장로도 임기는 3년입니다. 재신임을 묻고 계속 연임할 수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서리집사가 없고 다 안수집사입니다. 권사님도 있고요. 일명 항존직만 있는데, 서리집사라는 말 자체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집사면 집사지 무슨 서리냐,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 집사로 바꾸었고, 저희들은 호칭제로 가는 느낌이 있는데, 50세가 넘어가면 무조건 권사 임직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주고, 가부를 묻고 교육받고 임직합니다. 안수집사도 똑같이 세례교인 3년 이상이 되면 자격을 주고 가부 묻고 교육받고 다 안수를 줍니다. 장로님은 지금 현재는 좀 다른데, 이것도 바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직분에 의해서라기보다 운영위원회가 교회 운영을 맡고 있기 때문에 그 분들을 1년마다 선출하고 2년 임기제로 해서 반반 나누어서 선출합니다.
운영위원회는 6명이고 1년차가 반이 바뀝니다. 그러면 새로 반이 들어오고 반반씩 바뀝니다. 3명씩 로테이션 하고 연임은 없습니다. 무조건 바뀌어야 합니다. 일단은 자원제인데 자원을 잘 하지 않습니다. 고생스러우니까요. 뒤치다꺼리는 다 해야 하니까요. 연임은 안 되지만, 1년 쉬면 다시 반복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교인 수가 적어서 연임해왔는데 대신 운영위원장은 2년 이상 못하게 했습니다. 너무 한 사람에만 집중하니까요. 이제는 자리를 잡고 또 새로운 사람이 좀 왔으니까 기존 멤버들이 바뀌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교인들과 합의해서, 한꺼번에 다 바꾸면 너무 연속성에 문제가 있으니까 반 바꾸고 반 바꾸어서 그렇게 2년 임기제로 올해는 시스템화하려고 합니다. 누가 운영위원을 맡든지 교회 운영을 할 수 있도록, 그래서 시스템화하고 모든 것을 다 세칙화해서, 운영위원장은 이런 일 하고 예배부장은 이런 일 하고 선교부장은 이런 일 한다고 다 만들어서 그 틀 안에서 만들어가도록, 그 안에서 바꾸어갈 수 있게 지금 준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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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만장일치제와 관련하여,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의 의견이 일치할 때까지 기다리면 정말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을 텐데 그럴 때는 어떻게 하십니까?
왜 중요한지 끝까지 설득하고 그 사람이 받아들일 때까지 노력하는 과정 중에 그 구성원이 관심 받고 존중받는다는 의식이 생겨납니다. 그 과정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매우 목표 지향적이고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까, 그 사람을 위해서 목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목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 한다면 100% 하려는 목표를 줄이고 30, 40%만 하고 그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어야 합니다. 올해도 계획 세울 때, 운영위원들과 뜨겁게, 정말 우리가 할 수 있느냐, 우리가 해야 하느냐 등에 대하여 논의하는데, 이런 과정이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성숙도를 어떻게 끌어올리느냐를 위해 무던히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그렇게 살려고 해야 합니다. 설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그렇게 사는가? 내가 그렇게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가? 이런 것들이 보일 때 신뢰가 가고 그들에게 감동이 가는 것 같습니다. 초창기에는 지적인 부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논리적으로 그들을 끌어오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 개혁적인 교회의 색깔에 맞지 않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어느 순간 제가 그 분들에게 왜 저랑 2년, 3년 넘게 함께 오셨냐고 물었더니, ‘그냥 목사님이 좋아서요. 목사님이 좋으니까 목사님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와보니까 좋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사람의 마음은 이성과 합리로 움직이는 부분도 있지만 다는 아닌 것 같다. 신뢰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온 몸으로, 관계로.’ 지금도 정말 유치한 이야기를 가지고 2, 3시간 하고 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안아줍니다. 그러면서 제가 이야기하면, 그분들도 제 이야기를 듣습니다. 저도 사실 ‘나를 따르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온 몸으로요. 그 방법이 다른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목양적 부분에서 어떻게 접근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수준이 안 되는 이 교인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눈높이로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육신이구요. 늘 자기 수준에 머물러있는 목회자들이 그 사람의 깊이 있는 마음을 알아주는 거죠. 저희들은 일 년에 자체 예배 없이 두 번 흩어지는 예배를 드리는데, 너무 싫어합니다. 우리 교인들은 아직 이해를 못합니다. ‘왜 우리 교회에는 예배가 없냐? 딴 것은 다 마음에 드는데, 이것은 싫다.’ 그런데도 이야기하다보면 철학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계인 거죠. 그 사람의 아픔을 알아주고 만져주고, 교인들을 연결하여 주어 교인들 서로 간에 관심 갖고 연결해가는 것,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기존교회에서 오래 신앙생활하다가 오신 50대 분들은 기존 교회의 마인드에 많이 젖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처음 오시는 젊은 분들은 대개 우리 교회의 철학을 보고 오는데, 그들은 너무 감동합니다. 목회자에 대한 자세에서 오늘날 너무 높이는 것은 문제지만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 서로 상호적인 자세에서는 예의가 상당히 필요합니다. 저희 교회는 참 고맙게도 참 따뜻합니다. 최근에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젊은 부부들이 주일예배 끝나고 성경공부 과정을 5주를 해야 했는데 아이들이 있으니까, 아이들을 데리고 성경공부를 하면 정신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교인 두 가정이 그 아이들을 맡겠다고 나섰습니다. 주일 오후에 3시간씩 맡아서 아이들을 돌봐준 것입니다. 이 젊은 부부들이 너무 감동해서 그 이야기를 하고, 그 부부들이 공부 끝나고 나서 새로운 분들이 성경공부 해야 할 때 자기들이 아이를 맡아주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교회공동체라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치와 이념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방향이 분명하다면 속도는 더딜지라도 함께 갈 수 있는 것, 교회가 섹트화되는 것은 위험하죠.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하게 묶여서 함께 가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 아닐까요.
저는 어떤 면에서 찾아가는 목회를 합니다. 저희들의 공간은 뚜렷하지 않으니까 직장에 찾아 가서 직접 만나서 밥도 먹고 직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고민 들어주고요. 저도 초창기에는 교인들과 수다모임 잘 못했습니다. 만나서 밥 먹고 하는 이야기가 연예인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온갖 잡다한 이야기를 하는데 미치겠더라고요. 너무 시간 낭비하는 것 같았는데, 최근에는 그런 시간을 즐깁니다. 같이 이야기하면서 결국 그 속에 뭘 말하고자 하는지 마음을 읽어주는 것입니다. ‘아, 저 마음이구나!’ 수다모임도 좀 자주 하고, 먹는 것 즐기고, 가서 잘 먹어주고요. 또 가장 관심을 두는 부분은 경조인데 저는 그거 굉장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어떤 분이 병원에 입원하면 거의 매일 가고, 장례가 있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다 맡아서 올인 합니다. 장례식 때는 전교인이 옵니다. 작년에 장례가 발생했을 때 어린아이까지 장례식에 다 참석시킵니다. 돌아가신 분에게 편지 쓰게 해서 관에 넣어주고, 돌아가시고 나면 계속해서 돌봐주고요. 그럴 때 그 사람들의 마음에 녹아들고 그 다음부터 들려오는 이야기가 그것이 바람직한 거구나, 그것이 올바르구나 하는 거죠. 저희들은 이 고양, 파주 이 지역 안에서 교인들이 오면 지역 안에서 자주 찾아가고, 가게하시는 분들은 순회하면서 장사 잘되는지 물어주고 가서 차 한 잔 마시고, 그런 것들을 하는 것이 그들을 변화시키는 키워드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정관 세우고 그런 것 별로 의미 없는 것 같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변화가 우리 교회의 변화입니다. 정관 하나 잘 세웠다고, 재정 하나 깨끗하게 썼다고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요. 그런 것은 우리 교회보다 더 잘 하는 교회는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