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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주 한시감상

88.送人【송인】-임을 보내며-鄭知常【정지상】

작성자열정99(이광우)|작성시간19.07.09|조회수917 목록 댓글 0


送人송인-임을 보내며-鄭知常정지상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비 갠 긴 강둑에 풀빛 짙어지고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남포로 임을 보내니 슬픈 노래 이는구나.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대동강 물은 그 어느 때도 마르지 않으리.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이별의l 눈물이 해마다 대동강 푸른 물에 보태지리니

 

작자 鄭知常은 고려 仁宗때의 인물로 당대에 金富軾과 시명을 겨루었다. 그러나 그는 깁부식과는 대조적인 생애를 살았다.

 

김부식은 관리가 되어 현실 정치에 참여하여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정지상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불우한 삶을 살았다.

 

사상적으로도 김부식이 유교적이고 근엄하고 전아한 시풍인데 비해, 정지상은 노장의 사상과 불교적 경향을 지닌 낭만적 시풍이었다.

 

徐居正은 정지상의 시가 晩唐을 깊이 體得했다고 평하고 있다.

 

이시는 鄭知常의 대표작이며, 이별시의 절창으로 수많은 사람에 의하여 평가되고 애송되었다

 

1구를 보자.

雨歇長堤草色多비 갠 긴 강둑에 풀빛 짙어지고

 

이 구절은 단문이다.

의미를 나누어보면 비 갠 긴 둑雨歇長堤에 풀색草色이 짙다

즉 장소보충어雨歇長堤+주어草色】】+술어의 구조이다

 

우리는 누구나 알고 있다. 항상 물기가 있는 강둑에는 풀이 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강둑에는 풀이 푸르다>고 산문적으로 말하면 아무런 관심을 끌지 못하는 표현이 된다.

시인은 여기서 <단순한 강둑>이 아니라 <비 갠 강둑>이라고 <비 갠>이라는 말로 수식함으로써 단순한 산문적 표현에서 생생한 시적 표현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봄비를 맞음으로써 봄날의 초목은 움을 트고, 성장할 뿐 아니라 생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생명의 봄비인 것이다.

이로서 이시의 무대는 만물이 소생하는 화창한 봄날의 강변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곳에서는 젊은 남녀가 사랑을 속삭이거나, 가족의 봄나들이, 나물 캐는 아가씨들의 행열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공간이고 시간인 것이다.

 

2구를 보자

送君南浦動悲歌남포로 임을 보내니 슬픈 노래 이는구나

 

그러나 뜻밖에도

이러한 장소와 이러한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이별의 장면이 연출되는 것이다. 즉 하나의 반전이 나타난다

 

남포로 임을 보내送君南浦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봄날은 임과 같이 햇볕이 화사한 강둑을 거니는 것이다. 때로는 강둑의 푸른 풀을 보면서 풀이 자라나듯 자신들의 사랑이 자라기를 다짐하는 날인 것이다. 또 비가 내려 산뜻해진 날씨에 풀싹이 파릇파릇해진 강둑은 그러한 장소로 적합한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생각할 때, 정든 임을 떠나보내는 이의 가슴에는, 도저히 보낼 수 없는 서러움이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한 번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심정을 작가는

슬픈 노래가 움직인다動悲歌고 표현하였다.

그냥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피가 움직이는 것이다. 감정의 폭풍이 몰아치는 것이다.

그 슬픈 노래悲歌의 형태는 어떠했을까 . 먼저 생각되기는 아마 노랫말도 없었을 것이다.

 

가사가 있는 노래였다면, 아마 자신의 심정을 대변하는 자신이 알고 있는 곡조의 노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은 지금 겪고 있는 이 이별로 인하여, 자신의 현재 심정에서 나오는 작곡되지 않는 노래, 곧 단순한 <몸의 떨림>이었으리라.

작곡의 능력만 있었다면 곡이 되었을 것이고,

작사의 능력이 있다면 시가 되었을 것이며,

노래를 부르는 능력이 있다면 노래로 불리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당사자로서는 어느 것도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만 울먹였는지 모른다. 그냥 눈물만 흘렸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면 그저 <가지 말아요>를 반복했는지도 모른다.

 

그 또는 그녀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이별을 하면서, 아니 상대방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당하는 이별을 하면서 말이다

 

여기서 감상자는 남포南浦를 임이 향해 떠나는 장소로 보았다. 왜냐하면 대동 강변에서 남포南浦는 실재하는 지명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별에는 떠나는 사람의 목적지가 있어야 더 구체성을 가질 것이다. 따라서 <남포로>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임과 이별하는 장소로 보고 이 시를 감상하는 분들도 있다. 이럴 경우 남포는 <남쪽포구>라는 의미로 보이고 해석은 <남포에서>로 되어야할 것이다.

 

3 구를 보자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 물은 그 어느 때도 마르지 않으리

 

그러면서 갑자기 이렇게 단언한다. <대동강물이 어찌 다 마를 수 있겠느냐고, 아니 결코 마를 수 없다>고 말이다.

이는 결국 이별을 기정사실화하는 발언이다. 이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서 또 새로운 반전이 일어나는 것이다.

즉 대동강의 나루터는 이별의 장소라고 말이다. 예부터 나루터는 사람들에게 이별과 만남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이별과 만남의 장소>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는 것會者定離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은 이별을 경험하는 것이 그 숙명이라고 말이다. 사실 우리는 인간의 이별이 시간의 문제이지 이별 그 자체를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마지막의 죽음에 의한 영원한 이별까지도 말이다.

 

그 사이에 우리는 여러 가지 이별이 있을 것이다. 사랑하면서도 생이별을 해야 하는 인간의 제도와 문화에 의한 이별, 상대의 욕심에 의한 강요당하는 일방적인 이별 등 한 없는 부당한 이별에 상처받고 고통 받는 이별이 많은 것이다. 이러한 이별로 인하여 수많은 시가 지어지고 노래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대동강은 이러한 인간의 숙명적인 수많은 이별이 이루어지는 일상적 장소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도 내일도 또 내일도 나와 같은 이별이 이루어지는 장소인 것이다. 그래서 대동 강물은 마르지 않는다는 인식이다. 따라서 시적 자아가 당하는 이별도 체념되고 긍정되는 이별이다.

 

4 구절을 보자

別淚年年添綠波이별 눈물 연년이 보태지리니” .

 

그러나 그 체념은 <결코 잊지 못하는 이별>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또 다른 새로운 반전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별의 눈물別淚<해마다年年> 대동 강물에 보태진다添綠波는 것에서 우리는 이를 이해하고 설명하고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왜 해마다 눈물이 보태지는 가. 그리고 <누구의 눈물>이란 말인가

물론 시적 자아의 눈물이다.

 

내가 임과 이별하는 것은 인간의 숙명으로서 받아들여 지금 보내드리지만, 나는 이 이별 후에도 임을 결코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떠난 임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를 차지하고서 항상 나와 대화 하면서 나와 같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 얼굴 그 모습, 그 목소리 그 웃음으로 그는 항상 나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항상 나와 현실에서도 같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와 처음 만난 장소도 현실에 그대로 있고, 그가 내게 사랑을 고백한 장소도 그대로 있고 그와 정다웠던 모든 것을 기억하며 그와 함께 했던 모든 것을 재생산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살다가 혹시 임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면, 임을 떠올릴 수 있는 마지막 장소, 가장 슬퍼서 자기에게 가장 깊이 각인된 장소인 대동강 부둣가로 달려와서 이별한 그 날을 떠올리며 그리움의 눈물을 흘리겠다는 것이다. 언제고 몇 번이고 와서 떠난 그를 추억하겠다는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따라서 시적 자아는 임을 보냈지만 결코 보내지 않았다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서는 결국 우리 시의 전통인 <애이부절哀而不絶>과 닿아있다.

 

그리고 그 이별은 시적 자아와 그와 공감하는 많은 이 시를 감상한 사람들에 의하여 아직도 계속되는 이별인 것이다.

 

결국 이 시는 대동 강변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이별을 보고, 그 이별의 차원을 높인 것이다. 이 시는 인간에 있어서 이별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시다. 정지상의 시 <送人>은 우리 민족의 수준 높은 순수한 이별 정서를 대표적으로 표현한 <우리 민족의 영원한 이별가>인 것이다. 가히 <이별시의 백미>인 것이다.

 

<참고>

2구의 해석을

남포로 임을 보낸다는 해석과 남포에서 님을 보낸다2가지 해석이 있다.

 

먼저, “남포로 임을 보낸다는 해석은 보내는 이가 떠나는 이의 목적지를 분명히 기억하고 의식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별은 아쉽고, 보내는 이는 떠난 사람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남포에서 님을 보낸다는 해석은 많은 한시에서 남포가 이별이 이루어지는 상징적 장소를 나타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당히 타당성 있는 이해이기도 하지만 시적 분위기로 볼 때, 떠나는 사람의 가는 곳을 기억하려는 보내는 이의 마음이 더 강하다고 보면, “남포로 임을 보낸다는 해석이 더 타당할 수도 있다.

 

 

이 문제는 작가만이 정확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해석되던 간절한 이별의 심정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는 어느 쪽의 해석도 문제가 될 수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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