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차 속에서 나는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형광등 불빛을 받아 초점이 흐려진 내 모습이 차창 밖 어둠에 비쳐졌다. 거기에는 중년의 사내가 넥타이를 맨 채 맥없이 서 있었다. 혁대 바깥으로 삐죽이 나온 흰 와이셔츠와 작은 듯한 양복 차림이 후줄근한 그림으로 차창에 걸려 있었다. 안경 낀 얼굴은 무표정했고 어깨는 처졌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스스로에게 타인(他人)이었다. 머리 속의 나는 이십 대에 머물러 있었지만 거울을 통해 바라본 나는 두 턱이 지고 뱃살이 비어져 나온 중년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에게 이십 대의 나란 너무도 부당하고 부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마흔이 넘은 나이가 낯설었다. 양복 밖으로도 쉽게 드러나는 망가진 체형 역시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 동안 무엇을 하고 살았던 것일까.
스스로의 외모에 고개를 돌리고 싶어졌을 때 전동차는 다음 역에 정차하였고 바깥의 불빛을 받아 차창에서 나는 잠시 사라졌다.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들이 떠들며 들어왔다. 그들 중 하나는 긴 머리에 무스라도 발랐는지 연신 머리를 만지며 쌍소리를 담아 이야기하다 내 몸에 부딪혀 왔다. 그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더니
"죄송합니다."
하고 머리를 꾸벅 숙여 사과를 하고는 학생들을 몰아 다음 칸으로 가 버렸다.
불량해 보이는 학생들 눈에도 나는 역시 영락없는 아저씨였다.
언제 나는 이렇게 나이 들어 버린 것일까. 여전히 나는 어린 시절의 한 때를 보낸 그곳을 찾아 이렇게 전철을 타고 있건만 지난날이란 흘러 버린 시간만큼이나 아득한 것이었다.
목적지까지는 아직 몇 정거장이 남았는지 몰랐다. 아마 서너 정거장이 남았으리라. 이번에는 여학생 몇몇이 올라탔다. 그 중 둘은 춘추복을 몸에 꼭 조여 입었다. 한 학생은 머리에 나비 장식 핀을 꽂고 머리카락 한 쪽 끝을 가늘게 갈색으로 물들였다. 에취오티와 지오디 이야기로 그들은 시끄러웠다. 장식 핀을 꽂은 학생이 손잡이를 잡은 채 내 옆에 서서 말했다.
"토니가 일본에서 왔다며......? 근데 개들은 왜 해체한다는 거야?"
목소리가 약간 쉰 듯했다. 일렬로 손잡이를 잡고 서서 서로를 보며 떠들던 그들 중 하나가 저쯤에서 말했다.
"에취오티 말하는 거지? 뭐, 돈 때문이겠지, 다른 이유가 있겠어?"
산동네의 철거민 촌에서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멀었다. 버스 종점까지 거의 삼십 분을 걸어야 했고 거기에서 버스를 타야 했다. 오히려 뒷산을 넘어 걸어 다니는 편이 나았다. 학교와 집을 오가는 동안 자주 학교를 빠지게 되었다. 버스 요금이 오 원이던 당시에 왕복 차비로 십 원을 받으면 그것으로 만화 가게에 앉아 있곤 하였다. 만화 가게 주인아저씨가
"얘, 너 학교 안 가니?"
하고 물을 때가 있었다.
그러면 가방을 등에 맨 채 산에 올라가 혼자 놀았다. 나뭇가지를 주워 칼싸움도 하고 두 살 위이던 누나의 교과서를 읽거나 집에서 가져온 동화책을 보았다. 그것도 싫증이 나면 잡목이 울창한 수풀 속에서 수북이 쌓인 낙엽을 덥고 누웠다. 나뭇가지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바람을 타고 나뭇잎이 파도 소리로 흔들리면 하늘은 곧 어지러워졌고 마른 잎과 함께 솔방울이 떨어졌다. 흔들리는 솔가지에서 송충이가 목덜미로 떨어지면 나는 놀라 고쳐 앉았다. 그리고 한참이나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멀리 산 아래에는 낮은 지붕의 집들이 개천을 따라 닥지닥지 붙어 있었고 건너 편 비포장 길에는 가끔 택시 한 두 대가 머리에 뿔테를 이고 털털거리며 지났다. 그렇게 산에서 한 나절을 보내다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리고 걸핏하면 싸웠다. 산동네 아이들에게 주먹 다툼은 특별한 행사가 아니고 부정기적으로 치루는 서열 정리의 일상사였다. 나는 싸움꾼이 되어 갔다.
학교에 가지 않고 산에서 혼자 놀던 생활은 초등학교 3 학년 때 마감되었다. 어머니가 알게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흐느꼈다. 그늘 진 얼굴로
"얘, 네가 어쩜 이럴 수가 있니? 이럴 수가……."
하고 하염없이 울었다.
멀쩡한 집마저 날린 아버지는 교원 복직(復職)을 위해 지방에 있었다. 어머니는 베갯잇 등속을 떼어다가 시장 바닥에 좌판을 벌여 놓고 팔았다. 나는 노을이 내려앉는 먼 산을 바라보며 언제나 어머니를 기다렸다. 산 너머로 해가 떨어져 그림자가 길게 늘어질 때쯤이면 버스 종점까지 삼십 분 가량이나 걸어 어머니를 마중 나갔다. 종점에는 흰 갓을 쓴 외등이 허름한 건물 외벽 위에 매달려 있었다. 원추형으로 외롭게 빛나던 불빛 주변에 날벌레들이 까만 점으로 날아들었다. 불빛 옆으로는 여러 대의 버스가 서 있었다. 버스 사이로 유니폼 상의의 불룩한 주머니를 찰랑거리며 바삐 뛰어다니는 안내양과 허리를 두드리며 기지개를 켜는 기사들이 보였다. 나는 후미진 벽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언제까지나 어머니를 기다렸다. 대개의 기다림은 지루했고 어머니는 쉽게 오지 않았다. 몇 번이고 일어나 저린 다리를 주무르기도 하고 벽을 향해 작은 돌을 골라 발로 차기도 하였다. 무료한 동작이 몇 차례 반복되고 버스에서 내리는 승객의 수가 점점 줄어들어 시각이 열 한 시가 넘어가면 어머니는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나타났다. 그러면 나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어두운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러나 그런 기다림과 만남도 어머니가 서울에서 물건을 내다 팔 때에만 허용되는 일이었다. 어머니가 물건을 가지고 지방으로 내려가면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먹먹한 마음으로 어머니를 기다려야 했다.
그리움이란 예고 없이 아무 때이고 찾아온다. 아침에 세수를 하다가도, 또는 수저로 밥을 뜨다가도, 잠자리에 이불을 덥고 누웠을 때에도 목이 메여 왔다. 산골짜기로 흘러드는 아침 안개를 바라보다가도 문득 혼자 울 때도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창경원으로 나들이 갔던 일도 생각났다.
봄날 정오 무렵 공작이 꼬리를 펼치고 있다. 원숭이는 아이들이 던져 준 비스킷이며 앙코빵 따위를 날렵하게 받아먹고. 우리 가족은 나무 그늘이 내린 풀밭에서 찬합에 싸온 김밥을 먹는다. 어머니는 체한다고 물통 뚜껑에 물을 따라 내게 먹여 주셨지. 참기름을 발라 반짝이던 김밥에는 고실 거리는 밥과 고기 다진 것, 시금치며 얇게 썬 계란 부침, 단무지 따위가 박혀 있었고. 적당한 두께로 썬 그것을 먹다가 기억 속에서도 목이 메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머니 얼굴이 뭉클하며 떠올랐다.
산동네에서 싸움을 하다가도 상대 어머니가 나타나 나를 야단치면 나는 신발을 신은 채 그 집 안방까지 쫓아가 상대 아이를 패 버렸다. 그리움은 그렇게 나를 못 말리는 아이로 만들기도 했던 것이다.
그 어머니가 나 때문에 흐느껴 울었다.
우리 집에 닥친 재앙에 대해서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시장의 노점 보따리로 맞섰던 어머니가 학교를 가지 않는 어린 아들 때문에 흐느낌으로 가슴을 뜯고 있었다.
나는 울먹이며 어머니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엄마!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엄마, 울지 마. 잘못했어."
그리고 이후 나는 약속을 지켰다.
한 달 보름여를 결석하고 다시 돌아간 초등학교의 3학년 담임은 며칠 후 나를 불러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놀랍다는 듯이 말하였다.
"어머! 너는 두 달 가까이나 학교를 빠지고서도 어쩜 이렇게 성적이 좋니?"
여선생은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 나는 정말 공부를 잘하여 칭찬받는 줄 알았었다. 그러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어머니는 담임선생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아이가 엇나가고 있는 것 같아 고통스럽고 선생님께는 정말 죄송하다고…….
담임선생은 한 번도 학교를 찾은 일 없는 어머니의 편지 한 통만으로 나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이후 나는 책만 읽는 공부 잘 하는 모범생이 되었다. 초등학교 6 학년 성적표는 전 과목 수(秀)였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