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록에게서 신선한 감각에 대한 기대가 많이 무색해져 버렸음에도 그가 기교를 모르는 시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기교를 잘 알기에 가장 정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지 않고 감동적인 내용을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집을 읽다보면 이렇게까지 말한 것과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게 언어유희를 즐겨 상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그 이유를 생각해 보다가 '불경스럽게도' 시인이 그다지 재능이 없는 시인이 아닌가 하는 점을 생각하게 됐다. 첫 번째 시집의 해설은 그의 '부지런함'을 이야기한다. 한마디로 노력파 시인이라는 것이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생각이 진부한 바른 사나이를 연상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생활의 감동을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궁리를 열심히 해서 기지를 발휘하려고 하는 시가 이정록의 시인 것 같다.
이상섭의 '문학비평용어 사전'을 보면 기지는 재빠른 두뇌작용, 식별력, 언어표현능력으로 18세기까지 영국비평사에서 문단의 본질적인 요소로 보았지만, 낭만주의 시대에 상상력과 대치되는 이성과 판단력의 기능이라며, 산문적이라는 혹평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나는 이정록이 상상력의 결핍을 기지로 메우려고 하고 있지 않나 생각을 해본다. 그의 시의 상당부분은 너무나 딱딱 맞아 떨어지는 시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석쇠'의 "그것도 석쇠라고~그뭄달이 네가 있는 쪽으로 몸지지는 밤이야'라든가, '저돌적인 사랑'의 겨우 양수기 호스의 끝이, 쇳덩어리-돼지 머리를 가지고 상상력을 이어 나가 저돌적인 사랑으로 연결한 것을 보고 비유들이 너무나 비 시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기지를 동원한 비유들이 아닐까 한다. 물론 모든 좋은 시에는 기지가 담겨 있을 것이다. 보통 사람이 보지 못한 면을 발견하고 시로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지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기지는 시인의 폭넓은 상상력 안에서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거이 대개의 좋은 시의 특징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정록의 경우는 부족한 상상력을 기지로 메꾸고 있는 듯하다. 대표적인 경우가 '앗' 이지만, '피서', '숨쉬는 집','산','눈','단골' 등의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해 볼 여지도 있을 것 같다. 시인이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반영해서 시의 기법을 계발할 수도 있지만, 그가 무엇을 쓰고 싶으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기와 지붕위 오동나무'의 "국자처럼 하늘의 귀가 파인다". '새 발자국을 따라서'의 "반대편으로 화살표~과거쪽으로 화살을 쏘며",'기러기떼'의 "활시위처럼 몸당겨, 작살같은 대오로",'개집'의"늙어, 발보다 손으로 움직거릴 때면 개집을 닮아가는 등허리" 등의 시들을 보면 시인이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는 표현들을 쓰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시인의 구체적인 생생한 표현을 위한 노력이 먼 지평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를 바라는 독자의 바람과 좀 어긋날 수도 있었던 게 아닌 가 한다. 여하간 '개미'.'장평이발소','들밥','노래의 끝','토순' 등 언어유희가 드러나는 많은 시들에 대해서 좀더 생각해 볼 것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가장 납득 안 되는 시를 하나 꼽아보자면 '배꼽'인 것 같다. "웨딩드레스처럼, 흰 페인트칠 된~삼각표지판이 얼음처럼 차갑네.", "웅덩이로 요약된 그녀의 배꼽" 운운하는 데서 나는 비유들이 대입방정식 같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시인이 즐겨 사용하는 단어로 "햇살을 쟁이는""단물 쟁여놨구나""독을 쟁인다""그 소리를 숨차게 쟁이며"라는 쟁이다라는 표현이 있다. 숨어 있는 사물들의 잔잔한 생명력을 발견해내는 시인의 눈에 생명들은 무언가 소중한 것들을 쟁여놓은 것으로 보이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