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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원태 시인의 시

작성자미소|작성시간13.10.12|조회수614 목록 댓글 0

엄원태 시인

 

1955년 대구 출생. 1990년 「문학과 사회」로 등단.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시집 : 『침엽수림에서『소읍에 대한 보고『물방울 무덤』『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 (2013년. 창비)』

김달진문학상. 대구시협상등을 수상

 

 

 

타나 호수

 

엄원태

 

 

  이제 너는 타나 호수로 돌아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타나 호수, 내 침침한 흉강 한쪽에 넘칠 듯 펼쳐져 있다. 거기에 이르려면 슬픔이 꾸역꾸역 치미는 횡경막을 건너야 한다. 고통의 임계 지점, 수평선 넘어가면 젖가슴처럼 봉긋한 두개의 섬에 봉쇄수도원이 있다. 우리는 오래전 거기서 죽었다. 파피루스 배 탕크와는 한때 내 몸이었다. 언젠가 다시 그곳에 가리라. 그때면 너는 물론 거기 없을 테지만, 한 무리 팰리컨들이 너를 대신해서 오천년쯤 날 기다려 주리라. 그때, 내 입에선 문득 악숨 말로 된 노래가 흘러나올 것이다.

 

 

일주(日柱)

 

  1

겨울 저수지에 오전 내내 빛기둥이 선다.

명지바람 부는 날이면 수면 위에 은하수가 뜬다.

 

저 물별들은 쇠오리들의 무덤이다.

창공의 별들보다는 덧없을 테지만,

십억년 동안 생멸을 거듭해온

물의 영혼이다.

 

  2

창문 깊숙히 햇살 비껴들어, 병상 발치까지 환하다. 내 몸에, 빛기둥이 섰다. 몸에선, 기껏 살비듬 같은 먼지들이 떠다닌다. 때로 그것들도 먼 별들처럼, 반짝인다.

 

  수행승들은 스스로 토굴에 들어 용맹정진했다지만, 내 몸뚱이가 영락없이 토굴이다. 장좌불와(長坐不臥) 대신 장와불립(長臥不立)이다. 한 오백년쯤 지난 후, 뜻밖의 어느 도굴꾼에 의해 관 속까지 비껴드는 한 줄기 햇살처럼, 한 소식처럼, 내 몸에도 빛기둥이 섰다. 늦은 오후, 겨울 햇살 덕분이다.

 

 

극지에서

 

 

     1

  온난화로 조차지(祖借地)처럼 변해버린 허드슨 베이, 겨울 한 철 제외하면 더이상 북극곰의 제국이 아니다. 안 그래도 북극곰은 고독한 짐승, 너무 외로워서, 고독의 총량이 무려 구백 킬로그램에 달한다. 그래서 화이트아웃과 물범의 잠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극지의 봄은 따뜻해서 겨울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오로지 제 몸에 저장된 고독을 태우면서 버텨야 한다. 가을이 끝날 무렵이면 북극곰의 고독은 기껏 삼백 킬로그램 정도로 비쩍 말라붙는다. 북극토끼나 사할린뇌조는 그동안 세번 몸을 바꿔야 한다.

 

 

     2

  얼룩물범도 외롭기는  마찬가지다. 너무 외롭고 심심해서, 물범은 애써 잡은 먹이 목도리팽귄을 갖고 논다. 상처 입은 먹잇감을 수면에 가면히 뜨워놓고 무슨 공처럼 입으로 툭툭 치며 논다. 그 방심의 순간, 팽귄은 죽을힘을 다해 육지로 도망친다. 하지만 이미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 붉은 피로 가슴이 물든다. 도적갈매기들이 이를 놓치지 않는다. 물범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더 많이 먹으려면 외롭더라도 물속 깊이 숨어서 먹어야 한는 거다.

    

내 외로움은 덩치가 북극곰만하다.

무려 구백구십 킬로그램에 이른다.

 

하지만 내겐 갖고 놀 목도리팽귄이 없다.

 

 

마음을 얻는다는 것

 

 

십년을 넘은 공부 끝에야

암컷의 마음을 얻어 교미할 수 있는 새가 있다

 

코스타리카의 긴꼬리매너킨은 탱고 스텝의 달인들

그들의 일생은 가무(歌舞)에 바쳐진 셈

수년 매너킨은 생후 오년째부터 스스로 연마하여 몸을 만들고

육년째도 연전히 독학으로 노래와 춤 연습에 전념하다가

칠년째, 마침내 갈고 닦은 노래로 스승의 마음을 얻어

문화생 생활을 시작한다면 그건 대체로 운이 좋은 편,

이렇게 해서 사부를 모시고 또다시 십년 공부

 

드디어 새침한 암컷 앞에 서면

사부가 먼저 절로 예를 갖추고

듀엣 노래와 솔로 나비춤으로 몸을 달군다

결정적 순간이 오면 등넘기 탱고가 시작되는데,

등넘기춤은 여늬 탱고처럼 절묘한 타이밍과 박자가 생명이다

 

암컷이 필생의 수십분짜리 이인조 춤 공연에 매혹되면

사부는 마침내 암컷의 마음을 얻게 되고,

제자는 비로소 조용히 물러나 독립하여

자신의 제자를 구하러 정처 없이 십년 공부 스승의 길을 떠난다

 

마음 얻기란 그런 것

적어도 십년 공부는 기본이다

 

 

9월

 

치르르르르르르르르, 자전거 체인 소리에

비켜서며 돌아보니, 없다!

 

풀숲 여치 울음은, 꼭 뒤통수에 바짝 달라붙는다

 

돌아서고 나서야 듣는다

 

 

 

강 건너는 누떼처럼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 사랑이여.

 

그것을 마라 강 악어처럼 예감한다

 

지축 울리는 누떼의 발소리처럼

멀리서 아득하게 올 것이다, 너는.

 

한바탕 피비린내가 강물에 퍼져가겠지

밀리고 밀려서, 밀려드는 발길들

아주 가끔은, 그 발길에 밟혀 죽는 악어도 있다지만

주검을 딛고, 죽음을 건너는 무수한 발굽들 있다

 

어쩔 수 없이,

네가 나를 건너가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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