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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 시인의 시

작성자미소|작성시간15.07.08|조회수617 목록 댓글 0

 

 

1965년 8월 3일 (만 49세)인천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 인하대학교 대학원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2010 제10회 미당문학상 . 김수영 문학상. 현대문학상

2003 한양여자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시집 : 『별의 감옥』. 『젖은 눈』.『새떼들에게로 망명』.『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외

 

 

배를 밀며

 

 

배를 민다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

희번덕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넣고는

온 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

잠시 머물다 가라앉고

 

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

아무 소리 없이 밀려들어오는 배여

 

 

 

배를 매며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저 새로 난 꽃과 잎들 사이
그것들과 나 사이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무슨 길을 걸어서
새파란
새파란
새파란 미소는,
어디만큼 가시려는가
나는 따라갈 수 없는가
새벽 다섯 시의 감포 바다
열 시의 등꽃 그늘
정오의 우물
두세 시의 소나기
미소는,
무덤가도 지나서 저
화엄사 저녁 종 지나
미소는,
저토록 새파란 수레 위를 앉아서

나와 그녀 사이 또는
나와 나 사이
미소는,
돌을 만나면 돌에 스며서
과꽃을 만나면 과꽃의 일과로
계절을 만나면 계절을 쪼개서
어디로 가시려는가
미소는,

 

 

목돈 

 

 

책을 내기로 하고 300만 원을 받았다.
살찐 마누라 몰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어머니의 임대 아파트 보증금으로 넣어 월세를 줄여드릴 것인가
그렇게 할것인가
이 목돈을 깨서 애인과 거나히 술을 우선 먹을 것인가
잠자리를 가질 것인가
돈은 주머니 속에서 바싹바싹 말라간다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가고 돈봉투 끝이너덜 거리고
호기롭게 취한 날도 집으로 돌아오며 뒷주머니의 단추를 확인하고
다음날 아침에도 잘 있나, 그럴성싶지 않은 성기처럼 더듬어 만져보고
잊어버릴까 어디 책갈피 같은 데에 넣어두지도 않고,
대통령 경선이며 씨가 말라가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텔레비젼 화면으로
바라보면서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꼭 쥐고 있는
내 정신의 어여쁜 빤쓰같은 이 300만 원을,


나의 좁은 문장으로는 근사히 비유하기도 힘든
이 목돈을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평소의 내 경제관으론 목돈이라면 당연히 땅에 투기해야 하지만
거기엔 턱도 없는일,허물어 술을 먹기에도 이미 혈기가 모자라
황홀히 황홀히 그저 방황하는,
주머니 속에서,가슴 속에서
방문객 앞에 엉겹결에 말아쥔 애인의 빤쓰같은
이 목돈은 날마다 땀에 절어간다

 

 

초저녁 ‘밥별’이라는 별

 

 

저녁때 밥을 먹습니다

저녁때 된장에 마른 멸치를 찍어 먹습니다

자꾸 목이 막혀 찬물도 몇 모금씩 마십니다

좀 더 어둡자 남쪽하늘에 별이 떴습니다

그 별 오랫동안 쳐다보며 씹는 저녁밥

속으로 나는 그 별을 ‘밥별’이라 이름 붙입니다

어느 틈엔가 그 별이 무척 신 얼굴로 진저리치며 빛납니다

눈에 어려 떨어질 듯

어느덧 그 별 내 들숨을 타고 들어와

마음에 떴습니다

누군가가 떠서 초저녁 저무는 마음을 내려다봅니다

삶은 드렁칡, 삶은 드렁칡, 마음 엉키고

눈에 드렁칡처럼 얽히는 별의 빛이여

 

 

분꽃이 피었다

 


분꽃이 피었다
내가 이세상을
사랑한 바 없이
사랑을 받듯
전혀 심은 바 없는데 분꽃은 뜰에 나와서
저녁을 밝히고
나에게 저녁을 이해 시키고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의 이 세상을
보여주는 건지,
이 세상에 올 때부터 가지고 왔다고 생각되는
그 비애悲哀보다도 화사히
분꽃은 피어서 꽃 속을 걸어 나오는 이 있다
저물면서 오는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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