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詩 감상실

최승호

작성자초록잎새|작성시간04.07.28|조회수667 목록 댓글 0
 



가건물 속의 희멀건 희망                   최승호


가건물 속의 희멀건 희망


나이 들수록 누추해지는 가건물인 몸 안에, 꾸물대며 죽어 가는 희망이 산다.

실망과 피로의 납덩이들이 쌓이는 날, 몸 구석에 꼬부라져 잠자던 희망, 불멸이라는 말에 번쩍 고개를 쳐들었었지만 이제는 자신이 허물어질 가건물의 일부이며, 흩어질 조각더미임을 긍정한, 희망이 산다, 살아간다.

마치 옛집으로 가던 노파가 목구멍에서 끄집어내 황토 길바닥에 팽개치던 회충처럼, 꾸물거리며 죽어 가는, 희멀건 희망이.


灼晩 ? 미래사, 1991






공장지대                                  최승호


공장지대


무뇌아를 낳고 보니 산모는

몸 안에 공장지대가 들어선 느낌이다.

젖을 짜면 흘러 내리는 허연 폐수와

아이 배꼽에 매달린 비닐끈들.

저 굴뚝들과 나는 간통한 게 분명해!

자궁 속에 고무인형 키워온 듯

무뇌아를 낳고 산모는

머릿속에 뇌가 있는지 의심스러워

정수리 털들을 하루종일 뽑아댄다.


灼晩 ? 미래사, 1991






공터                                      최승호


공터


아마 무너뜨릴 수 없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빈 듯하면서도 공터는

늘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다

공터에 자는 바람, 붐비는 바람,

때때로 바람은

솜털에 싸인 풀씨들을 던져

공터에 꽃을 피운다

그들의 늙고 시듦에

공터는 말이 없다

있는 흙을 베풀어 주고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볼 뿐.

밝은 날

공터를 지나가는 도마뱀

스쳐 가는 새가 발자국을 남긴다 해도

그렇게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늘의 빗방울에 자리를 바꾸는 모래들,

공터는 흔적을 지우고 있다

아마 흔적을 남기지 않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灼晩 ? 미래사, 1991






그늘                                      최승호


그늘&


모두들 그를 바보 영감이라 불렀다.

모두들 옳다.

그는 바보였고 집도 가족도 없었다.

어쩌다 교회당 옆 작은 목장에

일거리를 얻어

그는 날마다 건초더미를 날랐고

우물에 눈을 져다 붓던 치성인(痴聖人)처럼

마냥 즐겁게 소의 똥 오줌을 퍼냈다.


이제 그는 누워 있다, 거적을 덮고

교회당 그늘 건초더미 위에 나흘째,

바람이 반백의 더부룩한 머리를 쓸어 주고

진눈깨비가 삐져 나온 발등을 덮어준다.

성가대가 찬송가를 부를 때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연보주머니가 돌아다닐 때

사랑을 배우며

신자들이 고개 숙여 기도를 할 때에도

그는 누워 있다,

거적송장이 되어

동굴 안에 죽은 예수처럼

나흘째

부활(復活)하지도 않으면서.


灼晩 ? 미래사, 1991






그로테스크한 죽음 앞에서                  최승호


그로테스크한 죽음 앞에서


어느 날 갑자기 비마(悲魔)가 찾아 들어도

북어(北魚)는 슬프지 않아

한쪽 눈에서만 가짜 눈물이 흐른다

진흙 위에 꼬리 끄는 예술이

꼬리의 흔적이 길면 얼마나 길까

어느 날 하나씩 내게서 멀어져 가고

모두에게서 내가 멀어져 가

죽음의 문턱을 넘는 날

죽음의 문턱에 덧니라도 걸어 놓고

북어(北魚)는 짖어야 하리라 밤의 아가리로 끌려 들어가면서

누구에게 짖어야 하나

아마 자궁을 향해 짖을 말이 있을 것이다

누구나 다 욥은 아니지만

하늘을 향해 토할 말이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비마(悲魔)가 찾아 들어

울대를 꼬챙이로 찔러도

눈을 까뒤집어도 늙은 북어(北魚)는 슬프지 않아

가짜 눈물이 뾰족한 덧니 적시네


灼晩 ? 미래사, 1991






꽁한 인간 혹은 변기의 생                  최승호


꽁한 인간 혹은 변기의 생


나에게서 인간이란 이름이

떨어져나간 지 이미 오래

이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흩어지면 여럿이고

뭉쳐져 있어 하나인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왜 날 이렇게 만들어놨어

난 널 해(害)치지 않았는데

왜 날 이렇게 똥덩이같이

만들어놨어, 그리고도 넌 모자라

자꾸 내 몸을 휘젓고 있지

조금씩 떠밀려 가는 이 느낌

이제 나는 하찮고 더럽다

흩어지는 내 조각들 보면서

끈적하게 붙어 있으려 해도

이렇게 강제로 떠밀려 가는

변기(便器)의 생(生), 이제 나는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니다


灼晩 ? 미래사, 1991






나는 숨을 쉰다                            최승호


나는 숨을 쉰다


신기해라 나는 멎지도 않고 숨을 쉰다

내가 곤히 잠잘 때에도

배를 들썩이며

숨은, 쉬지 않고 숨을 쉰다

숨구멍이 많은 잎사귀들과 늙은 지구 덩어리와

움직이는 은하수의 모든 별들과 함께


숨은, 쉬지 않고 숨을 쉰다 대낮이면

황소와 태양과

날아 오르는 날개들과 물방울과 장수하늘소와 함께

뭉게구름과 낮달과 함께

나는 숨을 쉰다 인간의 숨소리가

작아지는 날들 속에

자라나는 쇠의 소리

관청의 스피커 소리가 점점 커지는 날들 속에


답답해라 나는 숨을 쉰다

튼튼한 기관지도 없다 폐활량도 크지 않고

가슴을 열어

갈아끼울 싱싱한 허파도 없다


산소를 실컷 마시지 못해

허공에서 입이 커다랗게 벌어지는 물고기처럼

징역에 지친 늙은 죄수처럼

때때로 헐떡이고

연거푸 음침한 기침을 하면서

숨은, 쉬지 않고 숨을 쉰다


그리고 움직이는 은하수의 모든 별들과 함께

죽어서도 나는 숨 쉴 것이다


灼晩 ? 미래사, 1991






나비떼                                    최승호


나비떼


번데기 한 마리가 변신 중에 변시체가 되면

번데기 세 마리가 변신 중에 변시체가 되고

번데기 한 가마니가 변신 중에 변시체가 되는

이러한 법칙을 사람들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우화(羽化)의 길 위에서 통째로 삶아져

나체로, 침묵으로, 움츠린 몸뚱이로

항거하는 번데기 통조림 속의 나비떼, 나비떼!


灼晩 ? 미래사, 1991






대설주의보                                최승호


대설주의보(大雪注意報)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어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灼晩 ? 미래사, 1991






돌들의 서랍                               최승호


돌들의 서랍


한밤중 창문을 누군가가 거칠게 두드리고 있었다

열었다

사람이 아니었다 비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창문을 닫으면 다시금 누군가

거칠고 다급하게 창문을 두드렸다

멀고 어둠 깊은 데까지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보였다 한 무리의 털벌레들이

캄캄하고 질척한 어둠 저쪽에서

거멓게 꿈틀거리며 오고 있었다


불행이 우리를 서로

가깝게 했나보다

바위굴 속의 가재들과

돌들의 서랍 속 정신병자와

내가 울증의 시대에 서로

가까워지나보다


이렇게 멀쩡한 나

나를 전기 쇼크로 치료하는

내 담당 의사는 형사라고

두려움에 떠는 얼굴이 있다

갈수록 딱딱해지는 공기 속에서

나는 한 마리 북어(北魚)로 변신한다고

신음하는 화신망상(化身妄想)의 얼굴이 있다


밤마다 창 밖에 범눈의 밤이 파도친다

꿈이 꿈길을 가는 것이

표적들이 창을 향해 나아가는 것과 다름없다

내 안에서 거대한 북어(北魚)들이 울부짖는다

북어(北魚)들이 창을 향해 나아간다

표적들이 창을 향해 나아간다 피를 흘리며

표적들은 창을 향해 나아간다

이렇게 쓴다 밤이다


나는 아직 미치지 않았다

창 밖에서 노려보는 키 큰 털벌레들은

해가 뜨면 또다시 빛 푸른 나무들로 변할 것이다


灼晩 ? 미래사, 1991






두번째 자루                               최승호


두번째 자루


이쪽을 누르시는군요 저쪽이 튀어나옵니다 보세요 이 길고 물렁물렁한 자루는 건드릴수록 보아구렁이처럼 꿈틀댑니다 제발 가만히 좀 내버려두세요 계속 그렇게 뭉개고 찌르며 들쑤시면 이 자루는 울부짖으며 일어나 당신 몸을 휘감고 삼켜 버려요


灼晩 ? 미래사, 1991






때밀이수건                                최승호


때밀이수건


  □  1


살이 얼마나 질긴지

때밀이수건에 먼저 구멍이 났다.

무명(無明)은 또 얼마나 질긴지

돌비누 같은 경(經)으로 문질러도

무명(無明)에 거품 일지 않는다.

주일(主日)이면

꿍쳐둔 속옷 같은 죄들을 안고

멋진 옷차림으로 간편한 세탁기 같은 교회에

속죄하러 몰려가는 양(羊)들.

세탁비를 받으라, 성직자여

때 밀어 달라고 밀려드는 게으른 양(羊)떼에게

말하라, 너희 때를 이젠 너희가 씻고

속옷도 좀 손수 빨아 버릇하라고.

제 몸 씻을 새 없는 성자(聖者)들이 불쌍하다.

그들의 때 묻은 성의(聖衣)를 누가 빠는지.


  □  2


죽음이 우리들 때를 밀러 온다.

발 빠지는 진흙수렁 늪에서

해 저무는 줄 모르고 진탕 놀다 온 탕아를

씻어주는 밤의 어머니,

죽음이 눈썹 없이, 아무 말 없이

우리들 알몸을 기다리신다.

때 한 점 없을 때까지

몸이 뭉그러져도 말끔하게 때를

문지르고 또 문지르는 죽음,

죽음은 때를 미워해

청정한 중의 해골도 씻고 또 씻고

샅샅이 씻어 몸을 깨끗이 없애버린다.

그렇다면 죽음의 눈엔 온몸이 다 때란 말인가?


灼晩 ? 미래사, 1991






렌트카의 길                               최승호


렌트카의 길


원한 일도 없는데

온갖 물질들로 나를 만드시고

내게 붙여 놓은 번호

나 6969

나는 붕붕거리며 나아간다

누가 이 몸뚱이를 모는지 모르지만

아슬아슬 죽음을 비켜가는 길로

바퀴의 길로 나는 질주한다

길들은 나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기억상실의 헝클어진 길들은

개들이 오줌으로 점 찍은 전봇대들은

다리 입구의 울부짖는 돌사자들과

주유소의 긴 고무호스는

나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아슬아슬한 길 위에서의

신경질적인 경적,

1초를 빗나간 죽음과

1인치 곁을 쌩쌩 스쳐가는 죽음들

누가 나를 몰고 가는지 모르지만

(그 분은 얼굴이 없으시고)

소음의 길에 소음을 덧보태며

나는 중고차가 되어간다

폐차장

그 부식해가는 고철더미 위에

어느날 나 6969도 뜯겨지고

또 무슨 일이 있나, 내가 없는데

쇠찌꺼기로 무수한 잔해인 내가 널려 있는데

재생의 붉은 쇳물 뜨거운

윤회의 공장에서

새 옷 입힌 고철들이 설레면서

렌트카의 길을 가겠다고 붕붕거리네


灼晩 ? 미래사, 1991






마을                                      최승호


마을&


나비처럼 소풍 가고 싶다

나비처럼 소풍 가고 싶다

그렇게 시를 쓰는 아이와 펑화로운 사람은 소풍을 가고

큰 공을 굴리는 운동회날

코방아를 찧고 다시 뛰어 가는 아이에게

펑화로운 사람을 박수갈채를 보낼 것이다


산사태는 왜 한밤중에

골짜기 집들을 뭉개 버리는가

곰은 왜 마을을 습격하고

산불은 왜 마을 가까운 산들까지 번져 오는가

한밤중에 횃불을 드는 마을의 소리

한밤중에 웅성거리는 마을의 소리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마을에서

온몸에 가시바늘을 키운다

평화로운 사람은 문을 걸고

잠 속에서도 곰에게 쫓길 것이다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집에서

돌담을 높이 쌓는다

평화로운 사람은 한숨을 쉬고

문풍지 우는 긴 겨울밤엔 장자(莊子)를 읽으리라


灼晩 ? 미래사, 1991






몸                                        최승호



끙끙 앓는 하나님

누구보다도 당신이 불쌍합니다

우리가 암덩어리가 아니어야

당신 몸이 거뜬할 텐데


피둥피둥 회충떼처럼 불어나며

이리저리 힘차게 회오리치는

온몸이 혓바닥뿐인 벌건 욕망들


灼晩 ? 미래사, 1991






무인칭 대 무인칭                          최승호


무인칭 대 무인칭


무덤 속의 무인칭들은 갈수록 썩으면서

끙끙거리기는 하지만

밖으로 기어나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누가 나갔다가 `아 난 풀려났어, 혼 나갈 뻔했지'

그리곤 무덤으로 들어온다

울타리들이 무덤을 삥 둘러싸고 행진하고 있다

울타리 너머에 또 울타리들이 넓게도 행진하고 있고

울타리 너머 울타리, 그 너머 울타리들이 씩씩하게 행진하고 있다

발효하는 시체의 냄새, 아내는 설거지통 속의 그릇들을 씻고 있고

남편은 이리 뒤적 저리 뒤적 신문을 방바닥에 펼쳐 놓고

숨은그림찾기를 하고 있다. 국어책을 큰 목소리로 읽는

아들의 발성연습, 딸애의 가계부 정리, 산수를 잘 해야지,

텔레비에선 뉴스 시간에 복권당첨 번호를 보도한다.

발효하는 시체의 냄새 속에 이렇게

모범 가정이 무덤 속에 여러 개의 관처럼 많을 줄이야.


灼晩 ? 미래사, 1991






무인칭의 죽음                             최승호


무인칭의 죽음


뒷간에서 애를 낳고

애가 울자 애가 무서워서

얼른 얼굴을 손으로 덮어 죽인 미혼모가

고발하고 손가락질하는 동네사람들 곁을 떠나

이제는 큰 망치 든

안짱다리 늙은 판사 앞으로 가고 있다


그 죽은 핏덩어리를

뭐라고 불러야 서기(書記)가 받아 쓰겠는지

나오자마자 몸 나온 줄 모르고 죽었으니

생일(生日)이 바로 기일(忌日)이다

변기통에 붉은

울음뿐인 생애,

혹 살았더라면 큰 도적이나 대시인이 되었을지

그 누구도 점칠 수 없는


그러나 치욕적인 시(詩) 한 편 안 쓰고 깨끗이 갔다

세발자전거 한 번 못 타고

피라미 한 마리 안 죽이고 갔다.

단 석 줄의 묘비명으로 그 핏덩어리를 기념하자


거기에서 떨어져

변기통에 울다가

거기에 잠들었다.


灼晩 ? 미래사, 1991






물 위에 물 아래                           최승호


물 위에 물 아래


관광객들이 잔잔한 호수를 건너갈 때


수부(水夫)는 시체를 건지려

호수 밑 바닥으로 내려가

호수 밑 바닥에 소리없이 점점 불어나는

배때기가 뚱뚱해진 쓰레기들의 엄청난 무덤을,

버려진 태아와 애벌레와

더러는 고양이도 개도 반죽된

개흙투성이 흙탕물 속에

신발짝, 깨진 플라스틱통, 비닐조각 따위를 먹고 배때기가

뚱뚱해진 쓰레기들의 엄청난 무덤을,

갈수록 시체처럼 몸집이 불어나는 무덤을

본다 폐수의 독(毒)에 중독된 채

창자가 곪아 가는 우울한 쇠우렁이를

물가에 발상했던 문명(文明)이

처리되지 않은 뒷구멍의 온갖 배설물과 함께

곪아 가는 증거를


호수를 둘러싼 호텔과 산들의 경관에

취하면서 유원지를 향해

관광객들이 잔잔한 호수를 건너갈 때


灼晩 ? 미래사, 1991






바퀴벌레 일가                             최승호


바퀴벌레 일가(一家)


소비자의 욕망을 언제든지

충족­소비시켜주는 자동판매기에

바퀴벌레 일가(一家)가 산다

매춘부 안에 포주의 식구들이 살듯이

그들의 껍질은 윤택하다 구멍이

돈을 삼키며 시작되는 홍등의 아침

커피와 밀크의 향기는 훈훈하게

설탕과 꿈은 무한하게

그리고 마지막 동전 떨어지는 소리 뒤에

밤이 온다 밤의 고요는

밤잠 없는 욕망에 찢어진다

고무호스가

창녀의 방광에서 뻗는 요도(尿道)처럼

물통에 매달려 종이컵에 뜨신 물 붓는

자동판매기에 바퀴벌레 일가(一家)가 산다

그 옹기종기한 식구들이 지닌 사랑의 한계를

우리들 또한 지니고 있다


灼晩 ? 미래사, 1991






밤의 힘                                   최승호


밤의 힘


폭풍우에 휩싸인 채

정전된 밤의 도시

검은 아스팔트, 검은 강(江)

상점마다 촛불이 가물거린다

번갯불이 터진다 천둥이 친다

그것은 번갯불로 충전된 푸른 도끼다

때리면 별들이 힘차게 빛난다

때리면 산이 쩌렁쩌렁 운다

때리면 난장이들쯤이야

허지만 거신족(巨神族)이 아닌 이상 그런 도끼를

함부로 휘두를 만한 인간이 그 어디 땅 위에 있겠는가

번갯불이 터진다 천둥이 친다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는 채석장

혹은 옛날 스타일로

교미하는 용(龍) 한 쌍 얽힌 듯

질투하는 발톱 큰 용(龍) 한 마리 더 얽힌 듯

먹비늘을 긁어 대는 빛의 발톱

먹비늘을 뜯어 뱉는 빛의 이빨

벼락불이 떨어진다 천둥이 친다

고압선이 얽힌 도시의 하늘을

내리찍는 불의 시퍼런 도끼

기억해 두자 저 얼크러져 꿈틀대는 밤의 힘

비록 내가

거신족(巨神族)의 식탁을 위한 한낱 제물(祭物)에

혹은 밤이 낳고 밤이 먹는

밤의 아들에 불과하다 해도

세찬 빗발이 나를 두드리고

내가 다시 싱싱해지고

나의 두개골 안에

불타는 가시덤불의 거센 불길이

느껴지는 이 싱싱한 밤을.


灼晩 ? 미래사, 1991






밥숟갈을 닮았다                           최승호


밥숟갈을 닮았다


움푹해라 내 욕망은

밥숟갈을 닮았다

천만 개의 숟갈이 한 냄비에 덤비듯

꿀꿀거리고 덜그럭대는 서울에서

나도 움푹한 욕망 들고 뛰어 가고

보름달 뜨면 먹고 싶어라

둥근 젖

움켜쥘 그때부터 나는 아귀였던가

부르도자가 움푹한 입 벌리며 굴러 가고

기름진 돼지 머리가

웃고 있는 좌판 위의 서울

움푹해라 뒤뚱거리는 영혼도

밥숟갈을 닮았다

죽어서도 배가 부르게 해주십사

거위 주둥이를 벌린다


灼晩 ? 미래사, 1991






변기                                      최승호


변기


  □  1


늦은 밤 불을 켜니

둥근 벽 변기에 빠져 있는

귀뚜라미,

몸뚱이보다 촉수가 긴 게

별 꽤나 헛더듬은 시인 같다.

거품의 밤을 울던 창녀 같다.


  □  2


변기의 물 전체가 떨고

떨림의 진원점에

그가 있다

파도에 까만 눈이

어리둥절 흔들린다


내가 일으킨 파도에

내가 휩쓸려 익사하는 수도 있겠구나


  □  3


둥근 벽 안에서 귀뚜라미가 헤엄친다

저쪽이 피안이겠지

출렁이며 헤엄쳐 가 닿는 순간

둥근 벽이 그를

밀어낸다


어쩔 것인가

가는 곳마다 둥근 벽이요

가지 않으면 천천히 몸이 가라앉을 때


  □  4


굴원(屈原)이여

아무리 욕되도 죽지 못하는 자들을 왜 괴롭히는가

강물 속에서 거울을 들고

일어서는 큰 물귀신


살아서는 세상에 거슬리고

죽어서는 물살에 거슬렸던

기개있던 굴원(屈原)이여

나는 멋있는 놈이 아니다

세상이 본래(本來) 청정(淸淨)한데

나만 탁하다고 생각하니까


  □  5


둥근 벽 밑바닥의

구멍은

언제라도 삼킬 준비를 끝내고

때를 기다린다


누구든 죽음의 반대편으로 노젓는 일이란 없는 것이다


구멍으로 들어가긴 들어가는데

왜 이리 오랜 날들을

겁 먹은 채

맴돌다가 들어가야 하는지


  □  6


변기의 뚜껑을 덮으면

귀뚜라미의 절망은 완성된다.

둥근 벽을 덮치는 둥근 뚜껑,

나는 귀뚜라미를 건지지 않았다.

움푹한 자궁과 움푹한 무덤이

아가리를 꽉 맞추고

한 덩어리

둥글네모난 감옥을 이룬

뭐랄까,

임신해서 매장까지의 길들이

둥근 벽 안에서 미끄러지고 뒤집히는

거대한 변기의 감옥 속에서 죽어가는

나를 건져줄 그 어떤 손도 나는 거부했기에.


灼晩 ? 미래사, 1991






부르도자 부르조아                         최승호


부르도자 부르조아


반이 깎여 나간 산의 반쪽엔

키 작은 나무들만 남아 있었다


부르도자가 남은 산의 반쪽을 뭉개려고

무쇠턱을 들고 다가가고

돌과 흙더미를 옮기는 인부들도 보였다


그때 푸른 잔디 아름다운 숲 속에선

평화롭게 골프 치는 사람들

그들은 골프공을 움직이는 힘으로도

거뜬하게 산을 옮기고

해안선을 움직여 지도를 바꿔놓는다

산골짜기 마을을 한꺼번에 인공호수로 덮어 버리는


그들을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누군가의 작은 실수로

엄청난 초능력을 얻게 된 그들을


灼晩 ? 미래사, 1991






부패의 힘                                 최승호


부패의 힘


뚱뚱한 쥐가 더욱 뚱뚱해지고

뚱뚱한 쥐가 뚱뚱한 쥐새끼들에게

너희들도 뚱뚱해져야 한다고 자꾸 처먹인다

뚱뚱한 쥐 눈에는 뚱뚱한 쥐의 행복만 보이니까

싸워서라도 뚱뚱해져야 한다고 뚱뚱한 쥐들이

서로 잡아 먹으며 뚱뚱해지고 놀라웁게 뚱뚱해지고

이만하면 투실투실한 게 남 보기에도 뚱뚱한데

또 뚱뚱해져야겠다고 잡아 먹고 잡어 먹어서 얼씨구

이러다간 큰 쥐 한 마리 내지 뚱뚱한 쥐가족만 살아 남겠네


灼晩 ? 미래사, 1991






북어                                      최승호


북어(北魚)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 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灼晩 ? 미래사, 1991






뿔 돋친 벽                                최승호


뿔 돋친 벽


죽음은 뿔과 같다, 딱딱한 것,

뾰족한 것, 노려보는 것, 속이 텅 빈 것.

느닷없이 죽음과 마주쳐

처음엔 얼마나 놀랐는지,

증기탕에서 털투성이 음부를 보고

울어 버린 소년의 공포 그것이었다.

죽음, 뿔 돋친 벽,

죽음을 벗어나는 일은

코뿔소가 제 코뿔 속으로 들어가려고

애써 먼 길을 뛰는 것과 같고

뿔 돋친 벽에 머리를 찧으며

피 흘리는 수고를 하는 것이다.

차라리 제 머리를 끊어

구르는 두개골로 축구를 하며

`나는 이제 죽음에서 해방되었노라'고 외치면서

머리 없이 광장을 가로지르는

광인을 상상해 보셨는지?

죽음, 뿔 돋친 벽,

그 벽에 먼저 덤빌 필요가 없다.

언젠가는 그 벽이 달겨들어야 하겠지만

그때는 온몸에 뿔이 박힌 채

구멍투성이로 울부짖어야 하겠지만.


灼晩 ? 미래사, 1991






뿔쥐                                      최승호


뿔쥐


위기의 시기였다

마루골이 삐걱거리는 복도

어둑한 곳에서

뿔쥐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였다

나를 혼란시킨 뿔쥐들,

잡으러 가면 온데 간데 없고

국어사전에도 없고 동물도감에도 없는,

다행히 쥐뿔이라는

말이 있었다

쥐뿔,

그곳이 바로 사전의 구멍이었다

나는 뿔쥐들이

그 구멍으로 쏟아져 나왔다고 생각한다

위기의 시기였다 모든 요일이

몽(夢)요일이었다

몽유병자들이 꿈 속의 현실을 흘러다녔다

비현실이기엔 너무 생생했던 사건들

쿠데타, 계엄령, 체포, 처형

위기의 시기였다

흘러 가며 줄어드는 몽유병자들의 무리를

새로운 몽유병자들이 흘러 들어 대신했다

떠밀려간 몽유병자들

사라진 그들이 구멍 저쪽 허(虛)구렁에서

한 군거집단을 이뤘는지 모르겠다

내가 불어난 그 만큼

움푹해진 또다른 마이너스의 내가

허(虛)구렁 저쪽에 존재한다는 이 희미한 느낌

내가 죽는 날이 바로

마이너스의 내가 태어나는 날일지 모른다

뿔쥐들은 그쪽에서 몰려 와

헛것인 것은 나라고

말했는지 모른다 나는 대체 누군지

모르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몽(夢)은 짧고 환(幻)은 길 뿐이니

결코 뿔쥐들이

당신을 영원토록 쏠아 먹지는 않을 것이다


灼晩 ? 미래사, 1991






사람이 하늘보다                           최승호


사람이 하늘보다


사람이 하늘보다

어질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원두막에서 비를 피하던

농부들을 벼락이 때리는 순간이다


灼晩 ? 미래사, 1991






설경 속                                   최승호


설경(雪景) 속


눈동자에 흰눈 그득한 채 희고 흰 길 가다 눈사람에게 인사한다. `당신은 온몸이 눈송이뿐이군요. 당신이 참으로 은불(銀佛)이십니다' 눈사람이 바보달처럼 흰 웃음을 웃으니 눈송이들이 모두 흰 웃음을 웃는다. 은니빨 드러난 중 둘이서 어린애처럼 눈싸움을 하며 즐겁다. 적의 없는, 이 흰 소리, 그대로 두기로 한다. 나는 눈사람에게 인사하며 집으로 오지 않았다. 나는 지금 설경(雪景) 속 방 안에 있다. 나는 이불 쓰고 눕고, 스님들은 일어나 범종 울리고 목어(木魚)치는 새벽, 설경(雪景) 핀 눈동자 속으로 은불(銀佛)이 훤한 달을 이고 지나 간다.


灼晩 ? 미래사, 1991






세 개의 변기                              최승호


세 개의 변기


  □  1


변기에서 검은 혓바닥이 소리친다


고통은 위에서 풍성하게

너털웃음 소리로 쏟아지는 똥이요

치욕은

변소 밑 돼지들이 울음이라고


  □  2


변기여,

내가 타일 가게에서

커다랗게 입 벌린 너를 만났을 때

너는 구멍으로써 충분히

네 존재를 주장했다

마치 하찮고 물렁한 나를

혀 없이도 충분히 삼키겠다는 듯이

네가 커다랗게 입을 벌렸을 때

나는 너보다 더 크게 입을 벌리고

내 존재를 주장해야 했을까

뭐라고 한 마디 대꾸해야 좋았을까


말해 봐야 너는 귀가 없고 벙어리이고

네 구멍 속은 밑 빠진 허(虛)구렁인데


  □  3


나는 황색의 개들이 목에 털을 곤두세우고

으르렁거리는 것을 보았다

똥을 혼자서 다 먹으려고

으르렁거리는 변기 같은 아가리들을


개들의 시절의 욕심장이 개들아

너희들은 똥을 먹어도 참 우스꽝스럽고 넉살좋게 먹는다

구토도 없이

구토도 없이


나는 개들의 시체 즐비한 보신탕 골목에서

삶은 개의 뒷다리를 보았건만


灼晩 ? 미래사, 1991






세속도시의 즐거움 1                       최승호


세속도시의 즐거움 1


일류배우가 하기엔

민망한 섹스신을

그 단역배우가 대신한다

은막에 통닭처럼

알몸으로 던져지는 여인

얼굴 없는 몸뚱이로 팔려 다니며

관능을 퍼덕거리는


하여 극장의 어둠 속엔

나, 관객이 있다

환(幻)으로 배 불러오는 욕정과

환(幻)이 불러일으키는 흥분이 있다

눈 앞의 시간이

토막난 채 흘러 가는 필름이고

텅 빈 은막 위에 요동치는 것들이

환(幻)인 줄 알면서 나는 환(幻)에 취해

실감나게 펼쳐지는 환(幻)을 끝까지 본다

내 망막의 은막이 텅 빌 때까지

눈에서 나온 혓바닥이 멸할 때까지


灼晩 ? 미래사, 1991






세속도시의 즐거움 2                       최승호


세속도시의 즐거움 2


상복 허리춤에 전대를 차고

곡하던 여인은 늦은 밤 손익을

계산해 본다.


시체냉동실은 고요하다.

끌어 모은 것들을 다 빼앗기고

(큰 도적에게 큰 슬픔 있으리라)

누워 있는 알거지의 빈 손,

죽어서야 짐 벗은 인간은

냉동실에 알몸거지로 누워 있는데


흑싸리를 던질지 홍싸리 껍질을 던질지

동전만한 눈알을 굴리며 고뇌하는 화투꾼들,

그들은 죽음의 밤에도 킬킬대며

잔돈 긁는 재미에 취해 있다.


외로운 시체를 위한 밤샘,

쥐들이 이빨을 가는 밤에

쭉정이 되는 추억의 이삭들과 침묵 속에서

냄새나는 이쑤시개를 들고 기웃거리는

죽음의 왕.


시체냉동실은 고요하다.

홑거적 덮은 알몸의 주검이

혀에 성에 끼는 추위 속에 누워 있는 밤,

염장이가 저승의 옷을 들고 오고

이제 누구에게 죽음 뒤의 일을 물을 것인지

그의 입에 귀를 갖다댄다

죽은 몸뚱이가 내뿜는다 해도

서늘한

허(虛)


灼晩 ? 미래사, 1991






숫소                                      최승호


숫소


저 놈은 숫소다.

눈썹이 검고

불알은 크고

머리엔 도깨비의 뿔이 솟아올랐다.

저 놈은 숫소다.

콧구멍이 내뿜는 콧김은

증기기관차의 증기처럼 거세고

다리는 다리의 다리처럼 튼튼한데

쯧쯧, 저런!

숫소가 쿵 하고 드러눕는다.

빼빼 마른 백정 앞에서

덩치 큰 숫소가 드러눕는다.

드러누워

버둥거리다가

도살장 천정 향해 검은 울음을 게우다가

저것 봐, 숫소가 일어선다.

도끼와 뿔의 박치기다.

아니다.

도끼와 급소의 박치기다.

숫소는 글썽글썽한

큰 눈알을 부릅뜬 채 죽어간다.

저 놈은 숫소다.


灼晩 ? 미래사, 1991






시궁쥐                                    최승호


시궁쥐


먹을 거라면 환장하는 새끼들에게

좀 쩝쩝댈 거라도 물어다 주자는 거겠지

아니면 배추잎이라도 장만해서

군색한 살림을 그럭저럭 꾸려 나가자는 거겠지


부지런한 맞벌이 부부

시궁쥐 한 쌍이 뭐 물어갈 게 있다고

가난한 백성들의 쓰레기통에

뭐 물어 갈 게 있다고

눈치를 보아가며 부지런하게 들락거린다


쥐들고 제 새끼에게 젖을 물리나

콧수염을 기르고 털가죽 외투를 입고

피에 젖은 성생활(性生活)까지 뻔질나게 하면서 사나

평생을 그런 짓거리나 되풀이하다가 죽나


좀 쩝쩝거릴 것만 떨어지지 않으면 되겠지

아무리 더러운 똥오줌 진창바닥이라도

제대로 숨도 못 쉬는 쥐구멍 속에서도 모가지만

모가지만 붙어 있으면 되겠지 시궁쥐들은

배가 고프면 서로 잡아먹어도 되겠지


灼晩 ? 미래사, 1991






썩는 여자                                 최승호


썩는 여자


그녀는 지하생활자가 되어 간다

지하철을 타고 지하상가의 많은 물건들을

방에다 가득 채우는 그녀의 머리에

끈끈한 음지식물들이 자라는 것을

나는 보고 있다 그녀는

지하생활자가 되어 간다 습기와 시멘트 냄새,

하수구의 악취,

그녀의 살가죽은 눅눅하고 퀴퀴하게

속으로부터 썩으면 곪고 있지만 아직

구멍이 난 것은 아니다 새끼들을 치고

부엌에 나타나 뻘뻘거리는

쥐며느리, 바퀴벌레, 그리마

축축한 벽지를 들고 일어나는 곰팡이와

그녀의 싸움은 결국 곰팡이들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밤이면 관 속에 누워 있는 여자,

천장 위에 이사온 사람들이 못질하는 소리,

그녀는 조금씩 시체를 닮아가는 모양이다

발가락들은 헐어 진물을 흘리고

화장품은 더 이상 그녀의 주름살을

덮어 주지 않는다 때때로 그녀도 책을 읽는다

늙은 학자의 흰 수염처럼 하얀 벌레들이 기어나오는 책을

그러나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중얼대다 잠든다

컴컴한 문명 속의 이 문둥이 여자를

그 어디

햇볕 좋은 땅 위로 데려가

그녀의 머리에 끈끈하게

거머리처럼 자라난 음지식물들을 말려 죽여야 할까


灼晩 ? 미래사, 1991






아이쿠 사막                               최승호


아이쿠 사막


모두들 정치에 뒷덜미가 잡힌 채

끌려 다니는 아이쿠 사막에선

머리가 띵한 사람들이 독주를

들이키며 살아 간다 술에 고통을 절여 버린다

아이쿠 아이쿠 소리 끝없는

아이쿠 사막에선

미치고 싶거나 죽고 싶은 사람들이

구멍을 찾는다 구멍 속 수렁에

온몸을 쑤셔 넣는다

아이쿠

도처에 매음의 털 난 수렁이 널려 있는

아이쿠 사막에선

껍질에 곧잘 속는 사람들을 위해

낙타상인들이

포장 잘된 신기루표 물건들을 끌고 온다

큰 상인이 대자유인(大自由人)인

아이쿠 사막

긴 목마름의 낡은 변두리에선

궁한 모래쥐들이

우는 새끼들을 달래며 단비를 기다린다

연중강우량 1mm

아이쿠 사막에선

모래에 뿌리 박은

가시돋친 혀들이 선인장처럼 자라면서

뚱그런 철퇴모양 번쩍이는 해 아래 이글거린다

아이쿠 아이쿠 소리 끝나는 날 없어도

모두들 지옥은 딴 데 있다고 말한다.


灼晩 ? 미래사, 1991






어느 정신병자의 고독                      최승호


어느 정신병자의 고독


그는 밖으로 나갈 때 방 안에서 문을 노크한다. 보다 넓게 폐쇄된 공간으로, 열리는 문을 그는 보는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자, 노크할 권리있는 존재, 즉 인간임을 주장하기 위해 그는 노크한다. 그러나 과연 아귀지옥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과 원만하게 어울릴 수 있는 지를 그는 늘 걱정하고 복면을 쓴 사람들을 두려워한다. 그는 너무 착하다. 남에게 조금도 해 끼치지 않으려고, 그는 문을 벽으로 만들어 놓고 똑, 똑, 똑, 섬세하게, 문을 노크한다. 그러니까 그는 밖으로 나가는 법이 없다. 그는 그렇게 혼자, 자물통 속 정신병원에서 죽어간다.


灼晩 ? 미래사, 1991






엘리베이터 속의 파리                      최승호


엘리베이터 속의 파리


썩어서도 거드름 피우는

그 놈들 코에 가 붙지 않고

하필 파리가 내 뺨에 붙었을 때

나는 죽은 꽁치들이 빽빽한 통조림 속에

머리를 내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불쾌했다

내 안에서 부패가 진행되고 있는 느낌이랄까

나는 손을 들어 파리를 쫓았다

그 동작이 늪수렁에 빠져 살려고 버둥거리는

허우적거림으로 비쳤을지 모르겠다 죽음에 둘러싸여

무력했지만 파리 쫓을 힘은 있었다

빌딩을 오르내리는 날개 없는 요일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고 있었다

올라가도 거대한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듯

함몰과 큰 추락에 대한 공포에 나는 떨고 있었다


灼晩 ? 미래사, 1991






오징어 3                                  최승호


오징어 3


그 오징어 부부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부둥켜 안고 서로 목을 조르는 버릇이 있다


灼晩 ? 미래사, 1991






의자의 수렁                               최승호


의자의 수렁


삐걱이는

의자에 앉아

꺼져 가는 사람은

팔걸이에 늙은 팔을 걸치고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수렁으로 꺼져 간다

배꼽구멍쯤이 수렁에 잠긴 당신과

목구멍이 수렁에 파 묻히는

나, 그 다음엔

삼켜진 우리들을 수렁이

물과 진흙으로 주무르기 시작한다

삐꺽이는 의자에 앉아

꺼져가는 사람은

머리를 뒤로 젖혀 한숨을 쉰다

토막난 탯줄 삼킨 밤의

어둠이 흘러 드는 입술

그토록 빈 말을 거품처럼 늘어 놓은 입과

부글대던 귀 사이의

뻑뻑해진 근육을 잡아당기며

소리친다

아, 안 돼, 이렇게 꺼져갈 순 없어!


灼晩 ? 미래사, 1991






자동판매기                                최승호


자동판매기


오렌지 쥬스를 마신다는 게

커피가 쏟아지는 버튼을 눌러 버렸다

습관의 무서움이다


무서운 습관이 나를 끌고다닌다

최면술사 같은 습관이

몽유병자 같은 나를

습관 또 습관의 안개나라로 끌고다닌다


정신 좀 차려야지

고정관념으로 굳어 가는 머리의

자욱한 안개를 걷으며

자, 차린다, 이제 나는 뜻밖의 커피를 마시며


돈만 넣으면 눈에 불을 켜고 작동하는

자동판매기를

매춘부(賣春婦)라 불러도 되겠다

황금(黃金)교회라 불러도 되겠다

이 자동판매기의 돈을 긁는 포주는 누구일까 만약

그대가 돈의 권능(權能)을 이미 알고 있다면


그대는 돈만 넣으면 된다

그러면 매음(賣淫)의 자동판매기가

한 컵의 사카린 같은 쾌락을 주고

십자가(十字架)를 세운 자동판매기는

신(神)의 오렌지 쥬스를 줄 것인가


灼晩 ? 미래사, 1991






주전자                                    최승호


주전자


진눈깨비가 내린다

누비옷으로 몸을 감싼 여인들이

누비옷 속에 아기를 업고 창 밖을 지나간다

증기를 뿜는 주전자

아가리를 뚜껑으로 덮으니

답답해

콧구멍이 뚫렸어도 답답해

증기를 뿜는 주전자가 뚜껑을 들먹거린다

형이상학의 뚜껑 밑에

댓진 냄새 풍기는 파이프

연기를 코로 내뿜는 형이상학자들

그리고 물 위로 콧구멍만 내놓는 소심한 해마(海馬)들이여

콧구멍만 뚫렸으면 뭘 해

이렇게 무식하고

이렇게 숨이 차고

이렇게 대머리가 점점 벗겨지는 생(生)

때때로 고뿔까지 앓으면서 훌쩍이고

이렇게 죽어가는 죽어가는 생(生)

주전자의 코는 코뿔소의 코뿔처럼 낯설고

살가죽도 낯설고 이제는 내 턱뼈조차 낯설다

콧구멍만 뚫렸으면 뭘 해

묵묵히 콧김이나 뿜으면서

이렇게 해마(海馬)의 주름살이 잡혀가는 생(生)


灼晩 ? 미래사, 1991






죽은 해마                                 최승호


죽은 해마(海馬)


밥을 먹다가 보았다

새우젖 사발에 꼬부라져 누워 있는 해마(海馬)

해마(海馬) 새끼를

꼿꼿이 서서 헤엄쳐다녀야 할 해마(海馬)가

최초로 이렇게

절여진 슬픈 꼴로 눈앞에 나타나다니

허지만

해마(海馬)는 기다려왔는지 모른다

자기를 시집(詩集)에 넣어 달라고

나는 기꺼이 시집(詩集)에 넣겠다

죽은 해마(海馬)를 위해

다음과 같이


사발에 누워 있다가 보았다

밥을 먹고 있는 남자

밥맛이 없어 보이는 남자를

하필이면 저런 꾀죄죄한 인간이

저승의 옥졸(獄卒)마냥

나를 방망이로 뒤적이고 있나니

허지만

그는 기다려왔는지 모른다

해마(海馬)라는 한 편의 시(詩)를

나는 기꺼이 시(詩)가 되어 주겠다

아직 살아 있는 남자를 위해

다음과 같이


생전(生前)에 나는 해마(海馬)였다 아버지의 배주머니 속에서 아버지의 간섭을 받아야 했다 이제 나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 고래의 너털웃음에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멍게의 울음에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 온갖 해마적(海馬的)인 감정이 증발하였다 내가 살던 해마(海馬)의 마을에 평화가 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물의 그물코가 넓어야 걔네들이 해마(海馬)답게 살텐데…새우 그물은 얼마나 촘촘하고 튼튼했는지 새우들의 이마뿔이 부러지고 왕새우의 왕초도 구멍 하나 뚫지 못했다 정작 구멍이 뚫린 것은 내 살이다 요즘 나는 계속 해체되는 중이다 하기야 내 살은 바다가 잠시 빌려 줬던 것이니까 해체되면서 성하(聖河)의 흐름을 따를 수밖에 없다 자 그럼 절여진 해마(海馬)는 이만 안녕


灼晩 ? 미래사, 1991






쥐치                                      최승호


쥐치


연탄불에 굽은 쥐포들이 꿈지럭거린다

쥐포는 딱딱하고

방부제를 잔뜩 발라 놓았고

콧구멍도 없다

주둥이도 없고 혀도 없고

귀도 없다 눈도 없다 지느러미조차 없다

쥐치포는 쥐포일까

혹시 쥐고기를 얇게 썰어 붙인 게 아닐까

쥐치포를 보면서

집단적으로 벌거벗겨진 쥐치들을 생각한다

벌거벗은 채

철조망 속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주둥이가 뾰로퉁한 아프리카 포로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개성이 없다

방패도 없다 발언권도 없다 칼도 없다

포로들은 엄중한 감시 속에

눈치나 보면서 앉아 있는

궁둥이를 고작 걸레로 가린 자들이다

쥐치포를 보면서

주둥이가 뾰로퉁한 쥐치들을 생각한다

불행의 포로,

불행의 포로 수용소에 갇혀 있는

이름 없는 숱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灼晩 ? 미래사, 1991






지하철 정거장의 노란 의자들               최승호


지하철 정거장의 노란 의자들


땅 속의 계단을 내려간다

어떤 죽음의 동굴을 내려가서

우리는 또 이렇게 붐비면서 망령들 속에 기다릴까

저승의 강가에 앉아

용선(龍船)을 기다릴까

춥고 찌들은 몽고족(蒙古族)의 얼굴로

…가 웅크린 채 앉아 있는 노란 의자

복권을 구겨 버리고

…이 앉아 기다리는 노란 의자

이 지하철 정거장이

뚜렷한 희망의 개찰구로 뻗어 있다면

저리도 시무룩한 얼굴들이 아니다

설레임조차 없는 기다림

멋장이 뚜장이 같은 광고판

이윽고

구식 제복을 입은 기관사를 따라

줄줄이 얼빠진 얼굴 가득한 열차는 온다

저승의 강을 건너는 용선(龍船)이 있다면

용선(龍船)이 있다면 용선(龍船)을 타고

영혼은 또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것일까

북적거리던 한 무리가 휑하니 떠나면

돌고드름과

돌의 떡잎과

돌기둥들이 자라나는 텅 빈 동굴만큼이나

썰렁한 지하철 정거장

계단을 스물 아홉 번 밟으면

스물 아홉 순간 늙는 줄 모르면서

마흔 계단을 밟으면

마흔 순간 죽어가는 줄 모르면서

어느새 또

찌들은 몽고족(蒙古族)의 얼굴로 계단을 내려와

…가 웅크린 채 앉아 있는 노란 의자

새로 산 복권을 들여다보며

…이 앉아 기다리는 노란 의자


灼晩 ? 미래사, 1991






첫번째 자루                               최승호


첫번째 자루


내 몸에 구멍나기 전의 일을 내가 어떻게 알 수가 있나,

두 귀 막으면 몸 안에서 몸 안에서 훨훨 불타는 소리, 눈을 감으면 캄캄하고 코 막히면 입으로 숨을 쉰다.

그러니 구멍들을 막지 말아다오, 뜨겁고 답답해서 죽겠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답답하고, 노끈이 목을 조르는지

숨소리가 갈수록 가빠진다. 어떤 날은 헉헉, 또 어떤 날에는

2분의 1의 호흡. 내 머리는 개 목덜미가 아니니

움켜쥐고 끌지 말고, 발로 밟지도 차지도 말고

길 가다가 나 같은 자루 만나거든 수렁에서 꺼내 시원한 들판에 놓아다오.


灼晩 ? 미래사, 1991






통조림                                    최승호


통(桶)조림


나는 죽어서는 기꺼이 썩어지겠다.

대지는 거름이 필요할 테니까.

구름은 내 몇 됫박의 국물이 필요할 테니까.

허지만 살아서는

내 앞에 가없이 펼쳐진 시간(時間)의 개펄을

발바닥으로 걸어 나가야 한다.

대지는 나의 거름,

구름은 몇 됫박의 국물을 거름에 부어줄 테니까.

허지만 지금 나는 방(房),

모든 문짝이 굳게 닫힌 밤 기슭의

벽 속에 있다.

천장 위를 요란하게 뛰던 쥐들이

죽어서 썩는 건지 며칠째

천장에 테를 넓히며 얼룩이 지고

파리똥과 쥐오줌과 거미줄로

얼룩진 천장이 내 넋을 음울하게 한다.

상표가 화려한 통(桶)조림,

국물에 잠겨 있는 통(桶) 속의 송장덩어리,

웬만한 양념으로는 이미

이 맛은 변치 않는 삶은 송장맛이 아닐는지.


灼晩 ? 미래사, 1991






홈통                                      최승호


홈통


그래도 아직 영혼만은

신비벽을 간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네 조상들의 눈으로는

이무기에 용(龍)이 들어 있었다

산삼에 산신(山神)이 들어 있었다


후손인 우리네 눈으로는

이무기에 정력제가 들어 있다

산삼에 우글대는 분자(分子)들이 들어 있다


용(龍)은 정력제

산신(山神)들이 분자(分子)들로 변한 만큼

인간도 벌거벗겨진 벌건 대낮에


죽은 이무기처럼 입을 벌리고

서 있는 홈통들을 나는 본다

산성비에 더 빨리 부식되고

구멍이 뚫려가는 굵은 홈통들을


灼晩 ? 미래사, 1991






휘둥그래진 눈                             최승호


휘둥그래진 눈


너와 마주치기 전에는

삶이 그렇게 놀라운 것도 외로운 것도 아니었다.

네가 나에게 창을 던졌을 때

작살에 찔려 허공에 버둥거리는 물고기처럼

눈은 휘둥그래졌고

세상은 놀라움의 광채를 띠게 되었다.

죽음을 품고 햇빛을 더 강하게

죽음을 품고 어둠을 더 거칠게

그리고 낯설음을

더욱 낯설게 느낄 수 있는

회복기(回復期) 병자들의 거울,

거울 속의 해골바가지여,

너와 마주치기 전에는

삶이 그렇게 놀라운 것도 외로운 것도 아니었다.


灼晩 ? 미래사, 1991






희귀한 성자                               최승호


희귀한 성자(聖者)


자신은 똥칠이 되어도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6척(尺)의 똥 막대기

물이 쏟아지지 않는 그 거화(巨貨)빌딩 화장실엔

6척(尺)의 똥막대기 하나가

언제나 벽에 기대어 서서 당황한 사람들을 기다립니다

자신을 아낌없이 사용해 주기를 바라면서 기다립니다

줄을 아무리 잡아당겨도

구원은커녕 좀처럼 씻겨 내려가지 않는

악마 같은 똥덩어리를 힘껏 떠밀어서

변기의 구멍 깊이 쑤셔넣은 다음

반드시 벽에 다시 세워놓기를 바라면서 기다립니다

더러움 앞에서 쩔쩔매며

꼼짝없이 당하는 억울한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서

수난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은 아무리 똥칠이 되어도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6척(尺)의 똥막대기


灼晩 ? 미래사, 1991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