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근대성
윤희경
요절하지 않았다
오래된 엘리베이터처럼 어둠이 조용히 아래로 잠기고 있을 뿐이다
'뭔가 해야한다'는 말이 어깨에 내려앉았고
그때는 양어깨가 분명 있었는데 지금은 옷걸이에 남은 무게만 남아있다
플레이리스트, 몇 개의 구겨진 계절
손에 잡히는 것들은 잠시 얼굴이 되었고 거울은 자주 바뀌었다
삶은 켜진 채 놓인 물건처럼 '살아짐'쪽으로 기울었다
가라앉는다는 말은 내 등 뒤에서 습기처럼 숨을 쉬고 있었다
바스락거릴 때마다 서랍 속 공기가 새어나왔고
깨어난 건 말이 아니라 접어둔 종이 속의 거짓들이었다
달력의 빈칸들이 눈을 붙잡았다
일정과 채권자 이름, 카드값, 해야 할 목록이 검은 잉크로 먼저 자리를 잡았다
펜 끝이 흔들렸고, 문장은 조금씩 흩어졌다
아침은 시작되었으나 밤은 빈손으로 끝났다
복도에 센서 등이 켜졌다가 꺼지듯
다음 날도 잠시 열렸다가 닫혔다
그 끝을 알지 못한 채 날마다 아래로만 사라졌다
동사만 남아 흔들렸고 '나'라는 명사는 서류 맨 아래에서 흐려졌다
요절은 없었다
살아 있는 채로 잠겼다
아직 버튼을 누르지 않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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