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의 풀벌레 소리
안도현
풀벌레가 다른 풀벌레 소리 위에 자신의 소리를 한 겹 얹기 위해 우는 게 아니었다 한 소리에 다른 소리를 꿰매어 잇대려
고 우는 것도 아니었다 풀벌레는 화전민의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
풀벌레는 입에 물고 있던 풀숲을 펼쳐 풀잎을 만들고, 각자 손수 지은 풀잎의 처마와 내 귀 사이에 소리를 슬어놓느라 분
주했다 울음이 불씨이므로 머지않아 풀숲은 화염에 휩싸이게 될 터 그래서 나는 풀벌레는 무너지기 위해 운다, 라고 쓴다
구름 한 점 없는 밤마다 풀숲에 자지러지던 별들은 떠났다 이제 별들과 풀벌레는 교접하지 않는다 별들이 풀밭에 설치했
던 보면대(譜面臺)를 별자리라고 우기며 운명을 맡기는 자들이 아직도 세상에는 많다 땅에서 풀벌레가 울고 하늘에서 별
이 운다고 믿던 단결과 연대의 시절은 분명히 갔다 나도 자주 아프면서 나이를 먹었다
그리하여 손톱에 박힌 가시와 수많은 잔소리들, 이별 직후의 쓰라림이 왜 풀벌레 소리를 내는지 이유를 조금 알게 되었
을 뿐, 가을밤의 풀벌레가 불도 켜지 않고 왜 모두 다른 빛깔로 우는지 아직은 알지 못한다
바라건대 우리 동네에는 풀벌레 우는 소리를 들으며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악보를 떠올리는 아이들이 부디 없었으면 좋
겠다 얘들아, 풀벌레 소리를 까마중 따먹듯이 따먹어다오 너희가 폐허에 숨은 음표잖니? 풀벌레 소리만 듣고도 그 풀벌
레가 경작하는 풀잎을 그려 나에게 보여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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