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유기화학 선생의 커밍아웃
옛날 옛적에 어떤 유기 선생이 하나 있었다. 그는 마치 유기화학에 대한 모든 것을 안다는 듯 학생들 앞에서 뻐기면서 강의를 했다. 누군지 차마 밝힐 수 없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 선생은 학생들이 질문하는 대부분의 것들에 대해 성의껏 대답을 해주었으나 정작 자기 자신이 잘 모르는 내용이 질문으로 나올 때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거나, 그런거 시험에 안나오니까 몰라도 된다는 둥 구렁이 담넘기 작전으로 넘어가는 일이 가끔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유기라는 학문이 마치 잘 짜여진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공식에 넣으면 답이 척척 나오는 것 처럼 가르치곤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모든 과학이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유기는 철저한 경험론적 학문이다. 유기화학이란 학문이 정립되기까지 수많은 학자들이 피땀을 흘리면서 실험으로 얻은 증거들이 벽돌 한장 한장 쌓이듯이 쌓여 오늘날 유기화학이라는 거대한 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세상 만사에는 다 이유가 있다. 과학은 바로 그 이유를 밝혀나가는 과정이다. 수없이 많은 trial and error가 거듭되면서 정립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련의 재현성과 규칙이 나타나고 이런 것들이 모여 하나의 법칙이 된다. 간혹 어설프게 설정된 법칙이 전혀 뜻밖의 새로운 결과를 만나 무참하게 깨어지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전의 법칙이 엉터리 오류로 점철된 무의미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바로 그 다음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이 된다는 것이다.
유기화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내용들이 이런식으로 정립된 것들이다. 그중 하나가 반응 메커니즘이다. 일련의 유사한 구조의 화합물들은 유사한 물리적 화학적 행동을 보이며 일정한 반응 조건에서 유사한 방식으로 반응을 한다. 이러한 실험 결과들이 시공을 초월하여 검증되고 정리되어 교과서에 실린 것들이 유기 반응 메커니즘이다.
그리고는 이제 막 유기화학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그 메커니즘이 마치 진리를 찾는 종교의 경전인것 처럼 가르친다. 실험을 해보면 예측한대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기초 유기화학에서는 대부분 이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들만 배우게 되지만 가끔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노벨화학상 수상자라고 해도 아직 이해하지 못한 반응들도 많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해보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이나 여러분들이나 모두에게 한가지 불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유기화학 교과서에 이런 반응들도 등장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을 비롯한 많은 유기화학 선생들은 교과서의 어느 한 부분이 진리인것 처럼 얘기했다가 며칠뒤에 수시로 말을 바꾼다. 순간적인 착각이나 실수로 잘못된 내용을 얘기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지만 지금은 그런 부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학습의 과정에서 "아직은 말해 줄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예외가 수도 없이 나오고 "특수한 경우"가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한다. 반응 메커니즘이란 이런 예외나 특수한 경우를 다 빼고 일반화 시켜버린 통계적인 틀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유기 공부를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접근 방법의 문제이다. 반응을 메커니즘 별로 분류하는 것은 학습의 효율성을 제고 하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어떤 반응 메커니즘 하나가 천하무적이라는 환상을 버려야한다.
그림을 그릴 때 구도를 잡고 배경과 대상물들의 위치를 대충 잡고 나서 세부 묘사를 한다. 반응 메커니즘이란것은 바로 이런것이다. 유기화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잘먹고 잘살자는 것이다. 환경을 보호한다거나 인간 생활에 유익한 것을 새로 창조한다거나 하는 여러가지 덕목들을 분자 수준에서 구현하는 것이 유기화학이다. 유기 공부를 이제 막 시작한 여러분들은 이제 그 첫 구도를 잡는 연습을 하고 있을 뿐이다. 메커니즘은 구도 잡는 방법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과정 없이 좋은 그림이 나올리가 만무하다. 세부 묘사법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는다. 지금은 구도 잡는 방법에 총력을 쏟아야 한다.
좀 더 현실적으로 반응 메커니즘을 정의하자면 다음과 같다.
"반응을 커다란 유형별로 분류해서 이해하자"
금방 이사한 후에 짐을 풀고 잔뜩 어지러진 생활 집기들을 분류하고 서랍속에 옷장속에 정리하는 바로 그런 것이 유기 반응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 과정이다.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 없이 유기 공부를 하겠다는 것은 이삿짐을 죄다 거실에 풀어놓은 채로 살겠다는것과 똑같은 일이다.
이곳에 오는 여러분들은 유기를 공부하는 이유가 다들 제 각각일 것이다. 그러나 이왕 공부하는 김에 효율적으로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해보겠다는 공통의 목적으로 이 카페에까지 흘러 들어왔을 것이다. 그게 여러분들이 이곳에 오게된 반응 메커니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