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 7장 (2026.6.7.) 설교: 이재영 장로님
오늘 본문은 결혼에 대한 여러 형태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곧 종말이 올거라는 전제, 즉 자기 생애가 끝나더라도 가까운 시간에 하나님의 종말이 올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으며 또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 많은 핍박에 직면해 있어서 핍박을 받게 될 상황을 전제로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복잡해 보이지만 이 말의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영적, 육신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참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어떠한 것들을 제한해야 하는가, 어떤 것들을 넘어서야 하는가 하는 얘기입니다.
오늘 본문을 결혼의 얘기로만 받아들이면 크게 참고할 일이 없습니다. 결혼에 있어서 부정한 결혼을 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적용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혼이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참자유를 어떻게 누릴 수 있는가에 관한 얘기라는 바탕을 깔고 들으시면 우리에게 유익한 말씀이 됩니다.
1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라는 말로 보아 고린도전서 이전에 서로 편지를 주고받은 것 같습니다. 결혼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질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영지주의가 팽배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는 두 가지 부류가 있었는데 이 세상에 누릴 것이 없으므로 깨끗하게 살아야 하기에 결혼을 하지 말자는 금욕주의와 육신은 문제 삼지 않고 정신만이 중요하기에 육신은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된다는 쾌락주의입니다. 이에 대한 질문이 사도 바울과 고린도교인 사이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하는 것이 좋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의 중간과 마지막에 계속 삽입되어 있는 문구는 ‘임박한 환난 때문에’입니다. 이는 종말론적인 환난일 수도 있고 기독교인들이 탄압에 직면해 있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는 혼자 사는 것이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는데 조금 더 좋지 않겠는가 라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금욕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디모데전서4:3-5)
그러기에 사도 바울이 혼인을 금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모든 것이 선한데 그 감사함의 이유가 이 땅의 이기적인 해석으로 인한 감사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 의한 어떤 결론으로써의 감사함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감사해.’ 하면서 만족을 표현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감사는 세상 사람들도 다 하는 감사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의 감사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 감사입니다. 그래서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바른 지향으로 나갈 수 있음에 대한 감사가 진정한 감사입니다.
바울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라고 했으나 26절에서는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결혼을 결정할 때 여러 가지 고려할 사항들이 있는 것인데 그중에 사회적인 어려움, 신앙적인 어떤 어려움에 대해 우리가 판단해 볼 수 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야무진 생각을 하는 것이지만 단지 의욕일 뿐이고 몸의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무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2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그러면 결혼이라는 것이 음행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란 말인가요? 결혼은 창조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진리 안에서의 행동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임박한 환난과 종말적인 어려움 때문에 이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인데 그렇더라도 종말론적인 임박한 어려움을 피하기도 전에 자기 몸의 욕구 때문에 오히려 죄를 짓게 되면 모든 것이 무의로 되지 않겠는가 그러기에 너무 무리하지 말고 그런 사람들은 결혼하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말론적인 임박한 어려움이 전제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결혼은 신성한 것이고 창조 섭리적으로 반드시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태복음19:4-6)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결혼의 유지에 대해서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쏘마)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에베소서5:31-33)~ 일반적으로 육체라 할 때 싸르크스(몸,육신,살덩어리)를 쓰나 여기서는 쏘마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쏘마는 몸과 영, 정신을 포함하는 전인적인 형태의 육신을 뜻합니다. 둘이 전인적으로 하나가 된다로 해석하면 됩니다. 전인적 하나됨이 교회의 비밀과 일치한다는 것은 교회가 예수그리스도와 일치된 한 몸으로 살아가는 그 신비와 동일하다고 얘기함으로써 사도 바울이 결혼을 아주 높은 단계의 가치로 표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것은 임박한 환난이나 핍박, 종말론적 어려움을 전제로 하고 있는 말임을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도 개인적으로 핍박이나 환난이 있을 때 고려하고 참고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없다면 결혼하거나 말거나 내 자유야 이렇게 말하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는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신비와 육체적인 신비가 같이 어우러지는 관계로써 교회의 일치에 비유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 안에서 둘이 아닌 하나의 형태로 살아가는 것을 올바른 것으로 창조자께서 규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여자와 한 남자의 결혼은 영적이고 창조적인 원리에 근거하는 현실적이고 육체적인 결합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무조건 결혼해야 돼.’ 라는 뜻은 아닙니다. 결혼은 원칙적으로 하는 것이 맞지만 개인적인 환난이나 핍박이나 어려운 문제들이 있을 때는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의무’는 ‘오팰리언’이라는 단어로 ‘빚’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한 몸으로 결합되는 순간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빚진 존재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뭔가를 갚아야 하는 존재로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명령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는 서로 빚 갚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빚은 사랑의 빚입니다. 사랑은 처음부터 상대방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그런 느낌에서 출발하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을 얘기할 때 받는 것이 아니라 뭔가 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에베소서 5:25)
우리는 빚진 자인데 그 빚의 정신은 십자가 정신입니다. 십자가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한 그리스도의 희생이 복음이 되는 정신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고 했을 때 자신이 고생하는 것을 십자가를 졌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모든 고생이 다 십자가는 아닙니다. 여기서 십자가 라고 말할 때는 타인을 위한 사랑이 전제된 희생을 얘기할 때 이를 십자가 정신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과 같은 방법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에베소서 5:24에서 이렇게 규정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에게는 십자가를 지라고 하고 여자에게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남자가 더 크게 희생해야 한다고 차이가 있게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에베소서5:21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을 전제로 계속 방법론적인 얘기를 5:24,25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차 복종하라고 했을 때 ‘히포타소메노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그 말은 군사용어로 ‘~ 아래 정렬하다’는 뜻입니다. 복종한다는 말은 그리스도 아래 정렬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실상(본질)이라고 말할 때도 진격 명령을 받기 위해 줄 서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가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를 내 소원의 실상이 믿음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러나 이를 배제할 수는 없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전부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정렬해 서 있는 상태, 말씀을 집행하기 위해서 바로 돌격 직전에 있는 상태가 믿음, 복종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4절 부부는 서로가 몸을 주장하지 않고 상대가 주장한다고 합니다. 상호 책임의 관계 안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한 사람들은 결혼을 잘 유지할 책임이 있습니다.
5절 서로 분방하지 못하게 합니다.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 나 자신의 영적인 이기주의 때문에 아내의 어려움을 야기시킨다든가 아내의 영적 이기심 때문에 남편의 현실적인 문제를 유발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사탄이 틈을 타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틈은 몰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의미 합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허용하는 것이고 명령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부 관계의 제일 주체는 부부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하나님의 말씀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서로 자유롭게 결혼을 유지하는 것이 좋기 때문에 명령은 아니다고 얘기합니다.
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 이는 임박한 환난, 종말론적 어려움을 견뎌내기 위해 자신과 같기를 원한다고 얘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마다 정욕을 참지 못해서 마귀의 틈을 줄 수 있겠다 생각하면 결혼을 해서라도 자리를 지키는 것이 옳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이를 은사에 따라서 해야 한다고 합니다. 독신을 100%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은사가 있는 사람 해야 한다고 합니다. 독신을 권장하는 의미가 아니면서도 그 때 당시 유대인 사회는 결혼이 사회적으로 강요가 되는 분위기였습니다. 결혼하지 않으면 사람 구실을 못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결혼 안한 사람은 산헤드린의 자격이나 투표권 등을 주지 않으면서 여러가지로 결혼을 강압하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에는 흔들리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고 합니다. 결혼은 금욕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금지된 것은 아닙니다. 서로의 아름다운 유익을 위하여 명확한 범죄나 금기 사항이 아니면 자유롭게 결혼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필요한 규제나 조건 등으로 사람을 강압하는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 갈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하나님 말씀 안에서 잘 결정하면 됩니다.
10-11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서로 합의 이혼은 가능한가, 서로의 이기심을 충족하는 것이 합의인가를 우리는 따져봐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피차 복종하는 존재라고 했을 때 이 복종의 의미가 그리스도 아래 정렬해서 말씀을 실행하기 위한 준비된 자세라고 했습니다. 내가 결혼이나 이혼을 하는 이유가 서로의 이기심을 충족하는 것을 가지고 한다면 올바른 합의라고 할 수 있을까요? 때때로 우리는 합의를 상호 간의 이기심, 집단적 이기심을 가지고 판단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판단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잘 지켜야 되고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호이기적인 배려는 시대적인 우상숭배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맹목적 독신주의자에 있어서 이 점을 잘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 혼자도 살기 힘든데 아내와 자식까지 먹여 살린다면 도저히 부담스러워서 안 하겠다.’가 그들이 이유입니다. 이는 올바른 이유가 아닙니다. 결혼을 안 하는 자신의 개인적인 뜻이 있어야 하며 그 뜻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했을 때 정당성을 얻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타적인 배려를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며 이기적으로 서로 화합하는 것은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 입니다. 돌이나 나무를 깎아 놓고 절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결론을 도출하고 그것을 주장할 때 이것은 해석의 우상이 될 수가 있습니다. 모든 말씀은 사랑을 지향합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한계 없는 배려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이 아닌 해석들은 자기가 좋아서 자기 나름으로 만들어 낸다면 해석의 우상이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가지고 해석의 우상을 섬기면 말씀 가지고 싸웁니다. 이는 어느 한쪽도 옳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불화, 분열하고 이 불화 분열의 이유를 말씀을 가지고 만들어 냅니다. 이는 결코 올바른 해석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들은 하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를 본받으라고 하시면서 나도 섬기는 자로 있지 주장하는 자로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모든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해석할 때 이기적인 해석과 이타적인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기적인 해석은 ‘해석의 우상’이 됩니다. 이타적인 해석만이 옳은 해석입니다. 이타적인 해석을 하면 나는 망하라는 얘기인가, 나는 전혀 생각하지 말라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심기지 않으면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결실을 맺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 결실을 내가 이타적으로 여겼던 그 대상만 누릴까요? 함께 누리는 열매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랑의 열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면 나만 손해 보는 거 아니야?.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은 더 큰 이익을 보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살려고 하면 죽어야 하며, 일등 하려면 꼴찌가 돼야 하며 자유인이 되려면 종이 돼야 된다는 이 진리를 믿어야 해석의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예수님을 숭배하고 경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2-15 믿지 않는 아내와 믿지 않는 남편에 결함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신앙적 이유로 갈라서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에스라서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70년 만에 다시 돌아왔을 때 그 동안 이방인 여자들과 결혼한 사람들을 강제 이혼을 시킨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유대인들은 믿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에 대해서는 그 자체가 이혼해야 하는 사유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런 종교적, 신앙적 이유로 이혼해서는 안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율법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의 완악함(미성숙함)으로 인해 제한된 범위 내에서 명령하였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마태복음19:8-9)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는 이혼 사유가 될 수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와 결혼했을 때 갈라서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거룩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 거룩함은 종교적 거룩함이 아니라 부부 관계가 성실함으로 해서 올바른 관계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태어나는 자녀도 합법적인 자녀가 됩니다. 만약 갈라서게 되면 아이들의 문제가 불합리하게 변하게 됩니다. 결혼의 신성함이 유지되는 범위 안에서 어떤 제약도 없습니다. 종교적으로 다르더라도 결혼은 유지돼야 하며 유지되지 않으면 거룩함이 깨지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가족관계의 올바름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가족관계가 올바르지 못해서 많은 사회적 문제가 야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과의 결혼 자체도 서로가 사랑하는 사이면 그대로 유지하도록 지시하고 있습니다.
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이것 때문에 분쟁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평화로운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 부르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평화가 이유가 되는, 믿음이 이유가 되는, 사랑이 이유가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상대를 존중하는 결혼 관계를 유지할 때 좋은 영향력으로 인해서 서로가 서로를 구원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파괴해서 반반쯤 있는 구원의 기회도 빼앗기지 않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신자와의 결혼을 권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결혼할 수 밖에 없다면 또 그렇게 결혼이 되었다면 평화 안에서 결혼을 유지하도록 서로가 도와줄 필요가 있습니다.
17-20 오직 주께서 각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 이같이 명하노라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네가 자유 할 수 있어도 그대로 지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자유로워지지 않음으로 해서 오히려 더 많은 사람에게 자유와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기독교는 노예제도나 종의 제도를 장려하거나 찬성하지 않습니다. 빌레몬서에서는 종을 자신의 분신으로 여기는 바울의 태도를 봅니다. 우리는 종의 제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나는 이제 자유인이야라고 하면서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얻은 자유를 하나님 안에서 잘 사용해서 선한 영향력, 평화를 만드는 영향력, 사랑이 되는 영향력으로 살아내는 것이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말씀을 시작할 때 여러 가지 복잡한 결혼 얘기를 했지만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크게 도움이 되거나 문제가 되는 성경 귀절은 거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유를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문제를 통해서 이해를 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이제부터 너희를 종이라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니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해하고 실천한다면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나의 친구라(요한복음 15:14)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산다면 예수님의 친구가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과 친구가 되는 동격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조차도 자유를 내 자유야 하면서 배타적인 권리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이 상황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라고 질문하는 것이 나아갈 자유의 방향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는 것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는 이게 아닌데 예수 믿기 힘들어.‘라고 생각하시나요? 안해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해 보면 ’아, 맞네. ‘이 소리가 자동으로 나옵니다. 우리 동네에서도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 믿다가 뼈도 못 추리겠다. 이래 가지고 남는 게 있겠어.’ 뭔가 두 가지를 병행 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완전히 망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대로 하겠다고 했더니 지금까지 하나하나 인도하셔서 좋은 여건들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안 해보면 걱정이 됩니다. 말씀대로 살다가는 내 건강, 명예, 체면, 자존심 모든 것이 없어질 것 같아서 도저히 용납이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 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한복음 7:17)
그대로 행하려 하면 알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의 자유를 위해서 한 번 시험해 보십시오. 이대로 하면 내가 망하는가, 이대로 하면 내 자존심이 구겨지는가, 나만 손해보는가 이는 체험하지 않으면 이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체험하지도 않고 이 말을 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고 사기꾼입니다. 우리는 불가피하게 이런 체험들을 할 수 있었고 그 과정은 험난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그냥 빨리 해보시라는 겁니다. 여유가 많을 때, 젊을 때 해 보세요. 그러면 손해 적게 보고 말씀의 진정한 결실들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결실은 한 배, 두 배가 아니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산다는 것이고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 아름다운 체험들을 앞당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스스로 세워 놓은 이론들이 있습니다. 그것에 속박돼서 해석의 우상이 되지 않을 때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