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러가는 길에 잠깐 들렀습니다
"세상에나.세상에나.진짜 니가 얠 여기까지
붙들고 왔단 말야? 여자애 혼자 힘으로?..어떻게?"
"..업어서요"
다리 하나 붙들구 질질 끌어 오구 싶었지만.
그래두 환자니까.
양호실.
정신 잃은 채,
침대 위에 위태롭게 누워있는 김채원을 바라본다.
"남자친구니?"
양호선생의 은밀한 물음.
난 대답하지 않는다.
돌아서서 소독약을 정리하기 시작하는
젊은 양호.
문득 생각이 나서,
난 양호의 등에 대고 천천히 입을 뗀다.
"혹시..사고후유증에 대해 아세요.?"
"응? 무슨 사고?"
고개도 돌리지 않고, 되묻는 양호.
우물쭈물 말을 잇는 나.
"..사고 때문에.머리가..일곱살짜리.."
"응? 뭐?"
"그러니까..일곱 살짜리 애가 돼버렸는데.
나에 대한 기억도 전혀 없는지...매일 피카츄만 찾는데."
거기까지 말했을 때
의아한 듯 내 쪽으로 돌아서는 그녀.
"지금, 누구 얘기야?"
"매일매일, 피카츄를 찾는데.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어버릴 수도 있나요.?
죽어버리면.."
"..하. 어제 밤샜니?"
설레설레 고갤 흔들며
다시 소독약을 정리하기 시작하는 양호.
내가 헛소리를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는지.
"......"
다시 입을 다물고
김채원을 내려다보는 나.
식은땀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
그 애는 간혹, 가느다란 신음을 뱉어낸다.
귀신 나오는 꿈, 꾸고 있나보다.
그런데.
..
"..아빠..."
..아빠?
"...아빠...잘못했어...."
멈칫해선 그 애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잘못했어.....제발.."
뭐야. ? 잠꼬대..?
난 멍청하게 선 채.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김채원을 바라봤고.
일순
그 애의 뜨거운 손이 내 교복 끝자락에 매달린다.
붙잡고 놔주지 않는다.
"아빠..."
그 애의 눈에서 눈물이,
계속해서 떨어진다.
침대 시트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약하게 번지는 듯 하다가,
이내 사라진다.
"..종쳤는데, 교실 안 들어갈래?"
당황해서 양호선생을 바라보자,
그녀는 여전히 소독약에 온 정신이 팔려있고.
난 김채원에게 붙들린 교복자락을
빼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다가 그만
내 손에 엉겨붙어 버리고 마는 그 애의 뜨거운 손.
열 있나.
아니지.아니지.
뜨겁든 말든. 열나든 말든
나랑 상관없는 일 아냐?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착했어.?
팍 하고,
김채원의 손을 아래로 떨궈버렸다.
힘없이 축 늘어지는 그 애 손.
그 애의 눈물은 계속해서 멈추지 않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양호에게 다가간다.
"반, 반창고 같은 거 있어요?"
"응?"
그녀가 되물음과 동시에,
하얗고 네모난 반창고 두 개를 집어드는 나.
손가락에 달라붙어 대롱거리는
반창고를 가지고
다시 김채원에게 간다.
눈물이 흐르는 김채원의 양쪽 눈에 하나씩
반창고를 놓아둔다.
그리고 낮게 읊조린다.
"울지마."
"어머.어머.!너 뭐 하는 거야?"
화들짝 놀라는 양호를 뒤로 한 채
서둘러 양호실을 뛰쳐나와버렸다.
난 또라이인가 봐.
하지만 울잖아.
우는데 어떡해.
이사랑을 닮은 사람이
내 앞에서 울고있는데 어떡하란 말이야.
이미 수업이 시작된 시간.
썰렁한 복도를 천천히 걷는다.
아빠를 부르던 김채원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머릿속을 웅웅 울린다.
아빠.아빠.
아빠.
'아빠.제발,응? 제발.'
'......'
"나 아빠 딸이잖아. 근데 엄마랑 나. 이렇게 버리면 안 되는 거잖아.
그럼 우리 어떻게 살어. 울 엄마..어떻게 살어.'
머릿속을 맴돌던 김채원의 목소리는
어느새 나의 목소리로 바뀌어있다.
무릎꿇은 나를
찌푸린 얼굴로 내려다보던 나의 아버지.
그 사람은 절름발이 엄마와 나를 남겨둔 채
일년 전 사라져버렸다.
엄마와 나는 실종신고를 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가 버려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빠..."
..아까의 김채원처럼,
나도 아빠를 불러본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 사람이, 아빠가.
날 이렇게 망가뜨렸어.
그래서 난 웃음밖에 안 나와.
그 사람이, 아빠가.
일년 전 집을 나가지 않았다면,
지금 난 이렇게 망가지지 않았을 거야.
이사랑과 내가.
이렇게 산산조각 나버리지 않았을 거야.
..그래서 난, 웃음밖에 안 나와.
.\.
1년전 /
강원도. 민정이네 민박집.
"아이고.아이고. 바다에서 막 건진
꽅뚜기떼 마냥!!워미, 홀딱 젖어부렀네!!"
밤 열시,
사십사분 사초.
하늘은 우르릉 쾅하고, 계속해서 천둥번갤 쏴대지,
빗줄기는 퍼붓지.
그런데 그 와중에도 벌써 두시간째,
'강원도 토박이가 운영하는' 민박집을 찾아다닌
나와 이사랑.
이건 순전히 이사랑의 고집탓이다.
"아아아아아아.!!!!!!!!!!!!!"
폭풍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미친사람처럼 비명을 내지르는 이사랑.
홀라당발라당 놀라서 뒷걸음질치는
민정이네 민박집 주인 아저씨.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괴성을 질러대는 이사랑.
"아아아아!!!!!!!나 막 짜증나기 시작했어!!!!!!!!!!
이 아저씬 강원도 사투리 안쓰잖아!!!!!
난 밥 대신 강원도에서 직접 캔 고구마를
쪄 먹으려고 했는데.!!!!!!!
저 아저씨는 도무지 고구마를 쪄 줄 것 같지가 않아!!!!!!!!!!!
사투리의 출처도 분명치 않아!!!!!!!!!!!"
..휴.
난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눈을 감아버렸고.
"...워미.."
이사랑의 발광에, 런닝셔츠 차림으로
짝짝 박수 쳐주는 주인 아저씨.
"고구마라면 얼마든지 쪄주고 튀겨주고
할테니, 들어가드라고"
"진짜냐?!"
휙 그 아저씨를 향하는
이사랑의 얼굴.
진짜냐가 뭐야 진짜냐가.
저 아저씨, 머리도 홀라당 까졌구.
너보다 30살은 족히 많아 보이는데.
휴. 머리가 어지러워 온다.
..
30분 후.
"정말 방 하나를 같이 쓸 참인가?
아직 학생들 아니여?"
미심쩍은 듯 우릴 노려보는 주인 아저씨.
"아닙니다.우리는 학생이 아닙니다"
참으로.
참으로 어색한 표정연기를 해보이며
손을 휘휘 내젓는 이사랑.
수상스런 눈길로 턱을 문지르는 아저씨.
"참말 아닌가?"
"참말."
무겁게 고갤 끄덕이는 이사랑.
"우리는 학생이 아니라, 마트에서 물건 파는 애들이에요.
난 생선코너에서 꽁치 팔구
얜 콩나물 코너에서 두부 팔구.
그러다 눈 맞아서 신혼여행 왔어요"
내 손을 꾹 쥐곤
그렇게 둘러대는 녀석.
"콩나물코너에서 두부를 팔았다?"
마치 셜록홈즈가 된 듯, 피식 웃는 아저씨.
순간
할말이 없어져버린 이사랑은
날 힐끗 보는가 싶더니,
믿기지 않을만큼 큰소리로 꽥꽥대기 시작한다.
"하하 이 아저씨 웃기시는 아저씨시네!!!!!!
아저씨는 왜 그렇게 웃겨요?!!!!!참나!!!!!!!!
여기는 민정이네 민박집이니까
민정이가 곧 오겠네요!!!!!!!민정이는 아저씨 아들이겠죠!!!!!!"
"........"
"......"
조용.
그 애의 뒤죽박죽 높임말과
뜬금없이 튕겨나오는 민정이에 대한 추측.
나는 입을 다물었고
아저씨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일단, 비도 오고하니 쫓아내진
않겠네만. 내가 언제,어디서나 자네를
주시하고있다는 점을 상기하라고. 으이?"
이사랑의 가슴팍을 픽픽 누르며
말을 잇는 아저씨.
이내 나를 향해 고갤 돌리곤 씩 웃어준다.
"뭔 일 있으면 바로 소리지르게."
홀딱 젖은 우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아저씨가 돌아선다.
"뭐야!!!!!나 그렇게 안 굶주렸어!!!!!!!!
난 짐승 아니야!!!!!!!!!난 남자야!!!!!!!"
니가 남자라서, 그게 문제라는 거잖아.
소리치는 이사랑을 힐끗 바라보며
난 그제야 벽에 몸을 기대고
후아. 숨을 내쉰다.
살짝 열린 창호지 문 밖으로
꼬리를 흔드는 진돗개 한 마리.
그리고 개 집 지붕 위엔 빨간 스프레이로,
'민정이'
"..킥..니가 민정이구나."
"뭐?!!!!!!난 이사랑이야!!!!!"
..저런.
잔뜩 흥분한 채 씩씩대던
이사랑.
"난 쟤한테 말한 거야"
내가 문밖을 가리키자
그제야 그 애의 씩씩거림이 사그라든다.
꽤 단순한 데가 있구나 너.
"아 비."
열린 문 틈으로 마구 비가 솟구쳐 들어오자,
문을 쾅 밀어 닫고
고리를 채워버리는 그 애.
갑자기 조용해진다.
"야. 이거 봐. 불도 안 들어와.
그 대머리아저씨. 내가 꽁치 판다니까 무시하나 봐
광어나 우럭 판다고 하는 건데"
딸깍딸깍
그 애는 몇 번 더 전등 줄을 잡아당기다,
이내 포기하곤 내 곁에 털썩 앉는다.
또 다시 조용하다.
이거 약간, 위험한 건가?
같은 반이긴 해도.
이제 막 얼굴이 익숙해지기 시작한
남자애와 한방에 들어온 거.
하지만 방 두 개를 허비하기에
우리의 지갑은 그렇게 두둑한 편도 아니고.
아니, 이사랑의 지갑 속 사정이야
나와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어차피 일주일 후면 죽을 텐데 뭐.
무슨 일이 있어봤자지.
"그렇게 쳐다보지마-
난 너한테 유혹 당하지 않을 거야"
응?
갑자기, 그 애는 그렇게 말한다.
아. 난 이제까지 이사랑 얼굴을
야시꼴랑하게 올려다보고 있었구나.
유혹한 건 아닌데.
단지 피곤해서 눈이 게슴츠레해졌을 뿐이야.
"이별..난 절대 유혹 당하지 않을 거야.
난 짐승이 아니니까"
"......."
"일주일후면 이 세상에 발자국 한 개 안 남기고
사라져버릴 여자애 따위는, 절대 절대
건드리지 않아"
혼잣말하듯 그렇게 중얼이곤,
나와는 정반대편 자리로 가
누워버리는 이사랑.
이불도 안 깔고.
젖은 옷도 안 말리고.
"잘자 이별"
..그래, 졌다. 너도 잘 자, 이사랑.
그 애와 등을 맞대고 눕는 나.
다른 사람과 함께 등을 대고
누워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어쩐지 잠이 안 온다.
근데..그건 나만 그런가 보다.
정확히 육분 뒤.
등뒤에서 그 애의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온다.
뭔가.
바뀐 거 같지 않아 이거?
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잠 못 든 채 끙끙거리는 나와.
평온한 얼굴로 고른 숨소리를 내는 이사랑.
스윽 몸을 돌려
그 애의 등을 보고 눕는다.
불도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서,
이제야 잦아드는 빗소리를 들으며
물끄러미 녀석의 등을 본다.
..침묵 속에,
몇 분이 흘렀을까.
부스럭대는가 싶더니
이내 나를 향해 돌아눕는 이사랑.
"......."
..얼굴이 닿을 듯 가까워 졌다.
이사랑의 숨소리가 내 이마에 따뜻하게 닿는다.
다시 머리가 어지러워 온다.
죽으러 왔고.
한 남자애를 만났고.
지금은 그 남자와 얼굴이 닿을 듯한 거리를 유지한 채
함께 누워있다.
"자니?"
잠든 걸 알면서도 괜히 한번 물어본다.
"자나보네.."
이젠 마음놓고 빤히,
그 애의 감긴 눈을 바라보는 나.
코도 보고
입도 보고 귀도 본다.
"너..죽으러 온 거 뻥이지?"
아까 낮에 물으려다 못한 말.
지금 물어본다.
어차피 대답은 못 듣겠지만.
그런데 그때
♬♪♪♪♪♩♪♬♪♩♩♩♬♪
대답대신,
그 애의 파란 잠바 안에서 울리는 핸드폰소리.
이사랑이 잠에서 깨면,
그 애를 훔쳐 본 사실이 들통나기라도 할까봐
서둘러 파란 잠바에 손을 댄다.
그리고 꺼내든 핸드폰.
벨소리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그걸 받아들고 만다.
..이래도 되는 건가. 하고 망설이는 사이,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남자다.
"사랑이냐?"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날 더러 사랑이냐고 묻는다.
아니요. 난 사랑이는 아니에요.
그냥 받아버렸어요. 얼떨결에요.
"사랑아. 지금 어디냐?"
굵직한 목소리는 나를 사랑이라고
철썩 같이 믿어버렸는지
홀로 말을 이어가기 시작한다.
"집에 들어와라. 너는 아직 어려.
니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니가 그 남자 딸을 만난다 치자.뭘 어쩔 거냐?"
그 남자 딸?
무슨 얘기지.
이러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얼른 핸드폰에서 귀를 떼어내지 못하는 나.
그리고.
그 즈음, 목덜미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하나.
핸드폰을 쥔 내 손을 콱 낚아채며
그 녀석이 내뱉는 나지막한 목소리 하나.
"..뭐 하는 거야.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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