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간공파...입암마을정착...역사 비교
오박사(태규)추천 0조회 621.08.16 22:14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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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글 본문내용
고려 상장군 함양 부원군 오광휘 공(1200년)이 시조이시고. 2세에 소감 홍예. 3세에 집현전태학사 대광 적. 4세에 예문관 직제학 현비. 5세에 개성소윤 방식. 6세에 문충공. 이조판서 두암공 오상덕. 공은 두문동에 은거한후에 처가인 황의정승의 남원 광한루 별장 이웃인 남원 노암동 술산에 사셨다. 7세에 호조판서. 오치인.은 단종말(1455년)에 남원에 은거하여 술산에 살았고. 8세에 대사간 오능. 은 연산군시절(1502년) 곡성 오지리에 은거 하시였다. 이것이 곡성파 와 대사간공파 의시작이되었다. 9세에 부사 오언보. 는 옥전리에 사셨고. 10세에 오봉준. 은 선능참봉. 을 지냈고. 11세에 오대손. 은 성균관 생원으로 기묘사화(중종14년.1519년. 조광조 사화) 때 지리산에 은거하시다 만년에 강석동에 살았다. 12세에 종사랑. 오명주. 는 남원 대강면 강석동에 집이 있고. 옥전리는 가까웠다. 13세에 오열, 부의 휘는 오자발. 이다. 14세 오열은 휘는 열이고. 자는 학이. 이다. 학이공이 남원 입암에 처음 정착하였고, 묘소도 입암에 있다. 학이공의 부인는 동래정씨로 2남 1녀을 두었는데 아들은 순산. 순문 이고. 순산은 손자 인복과 인상을 낳았다. 학이공의 8세손 승정원 참찬공. 방규와 9세손 도사.익진이 족질인 선전관.국진과 함께 (1897년) 묘 아래에 제실을지었다. 방규는 심성이 온화하여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고 족친간에 돈목을 다하였다. ....................................................................................................................................................................................... 비교... 시조님이신 (光 輝)할아버님부터 세손별로 나열 하겠습니다, ※참고로( )이어짐. 2세손 : 烈, (洪 芮), 良芮, 3형제 중 차남 3세손 : (迪), 5형제 중 막내 4세손 : (玄 庇), 玄碩, 玄奉, 5세손 : (邦 植), 6세손 : 尙道, (尙 德, 두암), 7세손 : 致善, 致行, (致 仁), 8세손 : 凝, (凌, 大司諫), 9세손 : (彦 輔), 彦弼, 彦公, 彦卿, 10세손 : 奉先, 奉浩, (奉 俊), 11세손 : 大義, 大謙, (大 遜), 세덕편 647페이지 기록되어있음, 12세손 : (命 樞), 13세손 : (自 發), 14세손 : (悅), 할아버님까지는 세덕편 647페이지 기록되어있어 확인하였으며. 15세손 : 順文, (順 山) 16세손 : 仁福, (仁 相) 17세손 : (以 芳) 18세손 : 承白, (承 武), 承文, 承天, 19세손 : (泰 延), 泰成, 20세손 : (廷 徽), 21세손 : 芟壽, 達壽, (圭 壽), 業壽 22세손 : 錫謙, (相 謙), 23세손 : 甲鎭, 國鎭, (原 鎭), 이상과 같은 세순으로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사료됩니다. ......................................................................................................................................................................................................... 남원..대강면...입암마을..정착지...역사...세덕편에서... ......................................................................................................................................................................................................... 함양오씨시조 오광휘의 14세오열은 휘는열(悅)이고 자는학이(學而)이다. 공은 이조명종 14년(1559년) 강석동 에서 태어나 광해군 12년(1620년 ) 대강 입암에서 삶을 마치니 향년 60세 였다. 공은 33세에 선조25년(1592년)에 임진왜란을 당하여. 화산아래 경치좋고. 양지바르고. 땅이 기름지고. 샘물 맛이 일품인 이곳에 은거 정착하였다. 공은 성리학연구에 전념 하였고. 인효로써 자재들을 훈육 하고. 예 로써 향리사람들을 권면하여 말하기을. 이곳에 유달리 안락한 경지가있는데. 어찌 명예을 누려 볼곳을 찾는데 골몰하여 시비하는 무리속에 몸을 섞어야만 할것이냐? 며 벼슬을 사양 하였고. 광해군의 혼정에 이르자 세상일을 말하지 않으며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자신만의 선을 행하시는 지조높은 삶을사시였다. 남원의 동쪽에는 녹림적이 성세을 이루고. 순창의 회문산에는 도적들이 닥치는데로 약탈하였는데. 공이 거처하는 이곳을 지나면서 "공은 명예와 영리을 멀리하여 벼슬하지 않은체 은거하는 선비이니. 삼가 범하지 말자". 하였다고 한다. 공 의 덕행과 의리가 가히 사람들의 마음을 적실만 하였다. 임진왜란 중에는 선조의 교서을 받고 운량관으로 남원성에 주둔중인 명나라 군사들에게 곡식 수백곡을 마련하여 지원 하였고. 명나라 장수들이 칭찬을 거듭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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