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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슈

[문학]입 속의 검은 잎

작성자마지막 바다의 키스는 끝이나고|작성시간18.09.12|조회수3,863 목록 댓글 6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 빈 집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입 속의 검은 잎 / 기형도

























짤 출처 tumbl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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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b | 작성시간 18.09.12 난 진짜 빈집 읽던 순간을 잊지못함..
    숨이 턱 막히는 느낌? 잠시 눈물 흘리고 바로 시집 주문했지..
  • 작성자벌꿀오소리처럼 살아가자 | 작성시간 18.09.13 진짜 너무 좋아... 생전의 시집이 하나밖에 없다는게 아쉬울정도로..
  • 작성자붉은 노을 빛처럼 날 물들여줘 | 작성시간 18.09.13 기형도 진짜 좋아ㅜㅜㅜ
  • 작성자요정 만두맨 | 작성시간 18.09.13 처음으로 내 돈 주고 사 본 시집
  • 작성자도로명주소활성화 | 작성시간 18.09.13 질투는 나의 힘 너무 좋아하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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