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杖匙)라는 채를 이용하여, 나무공[毛毬]을 쳐서 일정한 거리에 있는 구문(毬門)에 넣는 경기. 고려 말에는 단오에 남성 중심의 놀이로 크게 성행하였다. 격구(擊毬)는 한자로 타구(打毬), 격구희(擊毬戱), 농장희(弄杖戱), 격봉(擊棒)이라고 하며, 이것을 민간에서는 공치기 또는 장치기라고도 한다.
[유래]
격구는 원래 페르시아지방에서 형성되어 인도, 중국 등으로 전파되었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크게 성행하였으며, 이것이 발해, 후삼국으로 유입되었다. 격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한치운의 『해동역사(海東繹史)』에 나타나는데, 발해 사신 왕문구(王文矩) 일행이 889년에 일본에 가서 격구를 하였다고 한다. 당시 발해에서 격구가 매우 성행하였으며, 일본에 직접 전파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고려사(高麗史)』 태조 2년에 아자개 일행의 환영식을 격구장에서 했다는 기록이 처음 나타난다. 따라서 이미 후삼국 시대에 격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때 격구가 크게 성행하여 왕들이 좋아하였는데, 특히 의종이 격구에 능숙하였다.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무관들이 무예를 연마하는 군사적 목적 외에 격렬한 마상놀이로 행해지기도 했다. 고려 말기에는 국가적인 오락 행사로 단오절에 왕이 참관하는 대규모 격구대회가 벌어졌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여전히 격구가 널리 성행하였다. 태조는 뛰어난 격구술을 지녔으며, 특히 세종은 격구를 무예로서 중시하여 무과시험 과목으로 채택하였다. 한편, 조선 초기에 궁궐에서 이루어진 격구는 지상격구[步擊毬] 형태였다. 대개 지상에서 공을 장시로 쳐서 구문를 통과시키기도 하지만, 작은 구멍에 넣는 일종의 미니 골프 형태도 있었다. 조선 중기에 와서 총포와 화포가 발달하면서 말의 효용성이 점차 떨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마상격구는 조선 중기 이후에 무과시험에서도 빠지면서 점차 약화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민간화되면서 초동(樵童)들의 장치기로 변모되었다. 곧 지상격구가 민간에 전승되면서 나무꾼들이 겨울철에 나무 작대기를 이용해 소나무 옹이로 만든 공을 쳐서 상대 골문에 넣는 형태로 민간에 널리 전승되었다.
결국 격구의 전승은 고려 초기에는 궁궐에서 왕과 왕족 중심으로, 중기에는 무신 중심으로, 후기에는 단오에 격구장이나 저잣거리에서 상하층이 참여한 대규모 격구대회 형태로 전승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무과시험으로 채택되어 놀이적 성격이 줄어들었다가 점차 장치기로 변모되었다.
따라서 시대에 따라 상층 유희적 성격→단오의 집단 세시풍속적 성격→상층 유희 및 무과(武科) 무예연마적 성격→민간의 겨울철 남성놀이적 성격으로 변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