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별학의 수난(受難) 모용구매는 전신이 검은 옷으로 가리워져 있었고 심지어 머리마 저 덮혀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그녀를 주시하던 삼소저도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드디어 참지 못하여 입을 열었다. "이 분은 누구입니까?" 삼소저의 물음에 우물쭈물 하던 소어아가 결국 대답했다. "이 아가씨는 내가 하고 있는 일과 매우 큰 관련이 있으니, 장 차 알게 될 것이오." 그는 모용구매를 삼소저에게 넘겨 주며 독촉했다. "빨리 가시오." 모용구매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고자 했지 만 소어아가 이미 발길을 돌렸기에 말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이 러한 표정을 지켜보고 있던 삼소저는 얼굴에 한가닥 의심하는 듯 한 빛이 스쳤으나 이내 한숨을 길게 내쉬며 모용구매에게 말을 던 졌다. "나를 따라와요!" 일찌감치 사당에 도착한 소어아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후 주위에다 몇 가지의 장치를 했다. 그리고는 은신하기 가장 좋은 곳을 찾아 자신의 몸을 숨겼다. 그곳은 사당의 모든 구석을 환하게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에 게 들킬 염려도 없는 곳이었다. 소어아는 자기의 계책을 처음부터 다시금 검토했다. (검진과 남궁유는 모용구매의 쪽지를 받고 반드시 올 것이다. 강별학도 역시 편지를 보았으니 안 올 수가 없을 것이고. 진검 등 그들은 팔십만 냥의 은을 휴대하고 있을 테고 강별학 쪽의 사람들 은 표은을 찾고자 할 테니 그들이 이곳에서 만나면 반드시 흥미진 진한 장면들이 벌어질 것이다! 서로 조급하게 굴 것이니 한마디만 잘못하면 싸우게 되겠지. 설사 그들이 서로 끝까지 싸움을 하지 않는다해도 삼소저가 모용구매를 강별학의 방에 데려다 놓는다면, 모용집안의 인물들이 백개심의 밀고를 듣고 그녀를 찾아낼 테니, 그때 가서는 절대 강별학을 가만 놓아 두지 않을 것이다.) 소어아의 이 계책은 실로 일거양득일 뿐만 아니라 일거다득의 묘안이 숨겨져 있었다. 첫째, 강별학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쓰라림을 맛볼 수 있게 하 는 것이 가장 큰 이득이었다. 둘째, 소선녀 고인옥 등 어젯밤 그를 골탕먹인 사람들에게 대가 를 치뤄줄 수가 있었다. 셋째, 결국 모용구매를 자기 집안의 사람에게 돌려 주게 되면 설사 정신이 회복되지 않는다 해도 떠돌아 다니며 놀림을 당하지 는 않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소어아로서도 걱정거리 한 가 지를 덜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네째, 강별학이 이번 계책에 넘어간다면 설사 목숨을 건진다해 도 거동을 얼마쯤은 삼가할 것이고, 또한 백개심 등 사람들도 함 부로 일을 저지르지는 못하게 될 것이었다. 다섯째, 단씨네의 표은을 되찾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것은 친절 을 베풀어 주는 단씨 부녀에 대한 보답이 되는 셈이었다. 여섯째, 애재여명이란 칭호를 받고 있던 노영웅 철무쌍도 이 계 책으로 인하여 억울함을 씻을 수 있었다. 이것이 그 불쌍한 노인 을 편안히 잠들게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방법이었다. 소어아는 생각을 거듭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신의 계책이 추호의 빈틈도 없다고 느껴졌고, 강별학이 제아무리 영악하다 해 도 아마 이토록 교묘한 계책을 세우지는 못 할 것이라고 느껴졌 다. 강별학, 진검, 남궁유, 백개심, 나구, 나삼 등 이 계책과 관련 있는 사람들은 모두 상대하기 힘든 영악한 존재들이었지만, 그에 게 이용을 당하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는 이 세상에 자기의 계책을 미리 알 수 있는 자는 절대로 없을 것이라 자부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 띤 얼굴로 뇌까리기까지 했다. "누가 감히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총명한 사람이 아니라 말할 수 있나! 누가 감히 내가 천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느냔 말이 다." "이봐, 나를 따라 오라니까!" 삼소저는 다시금 그녀를 재촉했다. 그러나 모용구매는 전혀 그 녀의 말을 듣지 못한 듯 그저 소어아가 가버린 방향을 넋을 잃고 바라볼 뿐이었다. 삼소저는 일부러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몸집은 모용 구매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모용구매의 시선을 막을 수가 있었다. "당...... 당신은 왜 나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죠?" "그는 떠나간 지 이미 오래되었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보는 것 이냐?" 모용구매는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더니 갑자기 웃음을 띠웠다. "옳은 말이에요. 그는 이미 갔지요. 하지만 그는 언젠가 반드시 나를 찾아올 거예요." "그는 너를 속이고 있는 거야. 너를 이곳까지 데려온 것으로 너 희들의 사이는 이미 끝난 것이란다." "그가 절대로 나를 속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어 요." 그녀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달빛이 그녀의 미 소를 띠운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맑고 아름다운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미래의 행복이 가득차 있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은 실로 더없이 아름다웠다. 삼소저도 여자였 지만 그녀의 모습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멍해졌고 한참이 지난 후 에야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너...... 네가 어떻게 그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나?" "그분이 나를 이곳까지 데려온 것은 오직 내 마음깊이 파묻혀있 는 악마를 내쫓기 위해서입니다. 그 악마가 내몸에서 떠난다면 그 는 다시금 나를 찾아올 것입니다." "너의 마음 속에 악마가 파묻혀 있다고?" 모용구매는 애절한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 악마가 내 마음 속에 파묻혀 있기에 나는 과거의 일들 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삼소저는 그녀의 아름답고도 순정어린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는 과거를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이냐? 만약 네가 제 정신이었다면 그분이 너를 이곳에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냐?" "그도 나와 헤어지기 싫어하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어요." "너의 정신만 회복되면 그는...... 즉시 너를 찾아온단 말이 지?" 삼소저의 음성은 질투로 인하여 떨리고 있었다. 모용구매는 여전히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는 틀림없이 저를 찾으러 올 것입니다." "그는...... 그는 또다른 말은 하지 않았느냐?" 모용구매의 안개가 가득찬 눈에서 갑자기 빛이 쏟아져 나왔다. "또 있어요. 그는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영리하고 아름다운 소 녀라고도 했어요. 그리고 내가 그의 말을 잘 듣는다면 영원히 내 곁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했지요. 나는 당연히 그의 말을 잘 듣겠 어요." 삼소저는 그녀의 이러한 말에 갑자기 울부짖는 음성으로 부정하 듯 말했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모용구매는 그녀의 외침소리에 놀라 겁난 눈동자로 그녀를 살폈 다. "왜요?"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야. 너는 조금도 영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금도 예쁘지 못하고 단지 일개의 추한 미친 여자밖에 지 나지 않다. 그 분이 절대로 너를 좋아할 리가 없어!" 모용구매는 멍하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다가 끝내는 눈물로 두 뺨을 적셨다. "나를 속이려는 것이지...... 나를 속인 것 뿐이지......." 삼소저의 선량한 눈에는 놀랍게도 흉악한 빛이 가득차 있었다. 그녀는 큰 목소리로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생각해 보아라. 그와 같은 분이 어찌 너 같은 미친 계집을 좋 아할 리가 있겠느냐? 이것은 결코 꾸며대는 말이 아니란다!" 모용구매는 더 이상 참다 못하여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나는 미친 사람이 아니야. 나는 결코 미친 사람이 아니란 말이 야......." "네가 미치지 않았다면 그럼 너는 누구이며, 어디에 살고 있었 느냐?" "나는...... 나는......." 아무리 애써 생각해봐도 모용구매는 머리만 쪼개질 듯 아파왔고 생각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있는 기력을 다하여 자신의 머리를 쥐 어뜯던 그녀는 드디어 통곡하면서 말을 이었다. "제발, 제발 부탁이니 나에게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 나는 모 르겠습니다.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그러나 애걸하며 괴로워하는 모용구매에게 삼소저는 냉소를 터 뜨렸다.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미친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미친 사람이란 말이냐?" 이 말에 모용구매는 크게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미쳤다. 나는 미쳤단 말이다...... 그분이 나를 좋아할 리가 없다. 좋아할 리가 없단 말이야......." 이렇게 외친 그녀는 통곡을 하며 마구 달려가기 시작했다. 삼소저는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본 후에야 비로소 숨을 돌리며 허탈한 듯 내뱉았다. "가라! 멀리 멀리 가라! 그 분이 영원히 너를 찾을 수 없게 말 이다......." 그녀의 입가에서는 한가닥의 잔혹한 승리의 미소가 넘쳐 흘렀 다. 평상시에는 그토록 선량했던 여인이 한 남자를 사랑하고 독차지 하기 위해 이같이 잔혹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매 우 정상적인 일이었고 절대로 그녀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탓할 수 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토록 영리한 소어아도 역시 이런 변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그는 이 세상에 질투하지 않는 여자는 없다는 것을 잊었던 것이 다. 그는 여자의 마음이 갈대와 같다는 말을 잊었던 것이었고, 여자 의 약속은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이 지켜진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 다. 한 남자로서 만약 불행하게도 그 점을 잊는다면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했다. 운이 매우 좋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소어아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사람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 었다. 그곳은 교외였기 때문에 야경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시간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이때 멀리서 은은히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 어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느 쪽에서 먼저 왔을까? 양쪽 모두가 조급하겠지만 강별학은 비교적 침착하게 처신할 테니 아마도 진검 쪽이 먼저 온 모양이 다.) 당나귀의 울음소리와 마차 수레 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과연 내 생각대로 진검 그들이구나. 하지만 그들이 당나귀가 끄는 수레로 은을 운반할 줄이야.......) 그는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진검과 남궁유 같은 집안의 공자는 설사 수레로 은을 운반한다 해도 말로 수레를 끌 것이지 절대로 당나귀로 끌지는 않을 것이라 는 생각에서였다. 소어아는 비록 허황된 장난꾸러기였지만 일을 처리할 때는 매우 치밀했기 때문에 약간의 이상한 것도 그냥 지나 치지를 않았다. 그가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에서 벗어난 것도 결 코 남보다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오직 조심하는 사람만이 오래 살 수 있다는 이치를 어릴 때부터 익히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마차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은 진검과 남궁유 쪽도 아니었고, 강별학은 더욱 아 니었다. 엉뚱하게도 그들은 상복차림의 산발을 한 육칠 명의 촌여 자들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이지 이 무슨 엉뚱한 일이란 말인가? 이 토록 깊은 밤에 이 촌여자들은 잠도 자지 않고 무엇 때문에 이곳 에 왔단 말인가?) 그 촌여자들은 사당에 들어서자 일제히 땅바닥에 꿇어앉아 방성 대곡을 했고, 왼쪽에 있던 부인은 큰절을 하며 곡을 하는 것이 아 닌가! "영감! 불쌍한 내 영감! 당신의 영혼이 계신다면 말 좀 해 보십 시오. 나는 당신 집안의 핏줄을 이어 주려고 십여 년 동안을 과부 로 늙으며 고생끝에 아들을 키웠습니다. 그런데 그가 남의 해침을 받을 줄이야...... 나보고 앞으로 무엇을 믿고 살아가라는 것입니 까?" 이 부인의 연령은 사십 세 안팎이었고 비록 상복 차림을 하고는 있었지만 깔끔한 용모였다. 부인의 뒤에는 한 젊은 아낙이 그 부 인의 등을 쓰다듬으며 울먹였다. "작은 어머님! 제발 고정하셔요. 몸을 생각해서라도 너무 상심 하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날엔 가산을 모두 뺐기고 말 것입니다. 작은 어머님이 뭐하러 남에게 좋은 일을 해 줍니까?" 이때 오른쪽에 꿇어앉아 있던 부인이 지지 않으려는 듯 즉시 울 음을 터뜨렸다. "영감! 당신의 영혼이 계시다면 저 천한 년의 입을 찢어 주십시 오. 비록 내가 난 자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집안을 이어받을 핏줄인데 어찌 내가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겠습니까? 저 천한 것이 오직 우리의 가산이 탐이 나 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것입니다. 정말 억울합니다." 그 부인은 나이가 조금 위인 것 같았고 얼굴이 못 생긴 편이었 으며 또 보기 민망할 정도로 야위었다. 그녀가 이렇게 울고 불고하자 그의 옆에서도 역시 한 젊은 부인 이 그녀를 따라 울었다. "큰 어머님, 제발 몸을 생각해서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도 눈이 있으니 절대로 저 악독한 작은 어머님에게 가산을 빼앗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소어아는 이 몇 마디를 듣자 사태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 다. 원래 이 두 부인은 한 남편을 섬긴 부인과 첩이었다. 그녀들의 남편은 일찍이 세상을 하직했고 아들을 하나 남겼는데 그는 첩의 자식이었다. 아들이 죽기 전에 첩은 아들의 귀중함을 믿고 자주 본부인을 괴 롭혀 왔다. 그러나 그 아들이 갑자기 죽고 말자 본부인은 오랫동 안 당한 울분을 참지 못해 첩을 내쫓으려 했고 첩은 본부인이 자 기 아들을 죽였다고 우기며 도리어 본부인을 내쫓으려 했다. 그들 은 집안 싸움의 시비를 가리기 위해 이토록 깊은 밤에 조상의 사 당을 찾아온 것이었다. 소어아는 이렇게 일이 전개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당황해서 귓 속이 윙윙거렸고 그저 그녀들을 쫓아내고자 하는 마 음만이 간절했다. 비록 낡아 빠진 사당이었지만 역시 그 부인들의 소유였으니 그 가 어떻게 그녀들을 쫓아낼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만약 그가 나 서 있을 때 강별학 등 사람들이 갑자기 들이닥친다면 그의 계책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게 될 위험이 있었다. 그가 마음 속으로 푸념을 하며 부인네들을 원망하고 있을 때, 얼굴을 가린 대여섯 명의 흑의인영이 소리없이 사당 입구에 나란 히 나타났다. (음! 드디어 나타나셨군. 강별학 네 놈도 역시 별 수 없는 놈이 로구나!) 그러나 이 일을 전혀 모르고 있는 부인들은 아직도 울며 불며 서로 욕을 하고 있었다. 그 흑의인들이 그녀들 뒤에 다가와 섰지 만 전혀 입을 열지는 않았다. 처음에 그 본부인과 첩은 저승에 있는 남편을 이용하여 빗대어 상대를 욕했었는데, 지금은 열이 오른 듯 서로 직접 욕들을 퍼부 었다. 본부인이 첩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여우같은 년! 네 년만 없었으면 내 남편이 벌써 돌아가셨을 리 가 만무하다. 네 자식이 죽은 것이야 말로 천벌인데, 네 년이 감 히 그 죄를 내게 뒤집어 씌우려 하다니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 첩도 가만히 듣고만 있지는 않았다. "이 추악하기 짝이 없는 년아! 물을 떠다 얼굴을 비춰 본 뒤에 나 남을 질투할 일이지...... 너야 말로 내 남편을 죽인 진범이 야!" 본부인의 음성 속엔 노기가 등등했다. "누가 네 남편이야? 그 분은 분명히 내 남편인데 네가 무슨 자 격으로 그 분을 남편이라 부르느냐? 이 망할 년아!" "흥! 너야말로 진짜 집안을 망칠 년이다. 자식 하나도 못 낳은 주제에 무슨 큰소리냐? 내가 아니었던들 남편 묘소에 향불을 피울 사람조차도 없을 뻔하지 않았느냐!" 첩의 치욕적인 욕설을 듣자 흥분한 본부인은 치를 떨며 첩의 뺨 을 후려쳤다. 따귀를 얻어맞은 첩은 상기된 얼굴로 외치다시피 말했다. "좋다. 이제 감히 손까지 올라오다니 너 죽고 나 죽자!" 그녀는 덤벼들어 본부인의 머리채를 잡아 당겼다. 양쪽으로 갈 라 서있던 젊은 부인들은 이 광경을 보자 급히 싸움을 막으려 했 다. 하지만 결국은 서로 치고 받게 되었고 심지어 당사자들보다 더 욱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정말 가관이었다. 여러 명의 아낙네들은 머리카락이나 옷자락을 휘어잡으며 뒹굴기 시작했다. 싸움이 점점 치열해지면서 그 아낙 네들은 흑의인들이 서 있는 곳까지 밀려갔다. 이때 갑자기 쉭! 쉭! 쉭! 하는 소리가 들려오며 싸움을 하고 있 던 아낙네들의 몸에서 수십 개의 암기가 솟구쳐 나왔다. 그 암기들은 실로 악독하고 빨랐다. 흑의인들은 이미 완전히 암기에 덮여 있었고, 전혀 피할 가망이 없어 보였다. 사실 소어아는 벌써부터 뭔가 수상한 점을 발견했었다. 그것은 그 아낙네들이 비록 산발을 했고 얼굴의 피부도 곱지 않 았지만, 열 손가락이 매우 희고 곱다는 점이었다. (모용집안의 아가씨들은 과연 만만치 않은 인물들이구나! 강별 학! 네가 오늘 제대로 걸렸구나!) 그러나 흑의인들은 그것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들은 일제히 허공에 몸을 솟구쳤다가는 검을 뽑아 들고 곤두 박질하며 그 아낙네들을 향하여 공격을 뿜어냈다. 그렇다고 그 아낙네들도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들은 제각 기 신형을 날려 흑의인의 공격을 피했다. 그녀들의 손에도 어느새 무기가 쥐어져 있었다. 이때 흑의인 중의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갑자기 냉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감히 내 앞에서 조잡한 간계를 부리다니...... 그 따위 재주로 나를 속이는 것은 어림도 없다. 흥! 이 사당은 이미 멸족을 당한 집안의 것이다. 너희들은 도대체 누구냐?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다 면 살아서 이곳을 나갈 생각은 하지 말아라!" 소어아는 이 광경을 보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강별학은 과연 여우 같이 교활한 놈이구나! 무슨 일을 하든지 사전에 치밀한 조사를 하고 계획을 세우니 말이다.) 이때 그 본부인이 냉소를 지으며 흑의인에게 물었다. "시침을 떼지 말아라! 우리가 뭣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네가 모 른단 말이냐?" 그녀의 이런 질문은 사실 대답하기가 그리 어려운 아니었다. 하 지만 그 흑의인은 극히 치밀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만 히 대답을 망설이고 있었다. 더욱이 이 일은 막대한 표은과 강옥 랑의 생사와도 관련이 있는 까닭에 그는 섣불리 응답하기가 곤란 했다. 상대방이 왜 왔는지를 알고 있다고 응답하면 자신이 그 표은을 강탈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만약 상대방이 그를 떠보는 것에 지나지 않다면 결국 계책에 말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본부인과 첩이 서로 눈짓을 교환하더니 첩이란 여인이 먼 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죠? 그 편지 때문에 온 것이 아니오?" 흑의인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냉소를 터뜨렸다. "만약 그 편지가 아니었다면 내가 뭣 때문에 깊은 밤에 이곳까 지 왔소?" 여전히 첩이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은이 꼭 필요하겠군요!" "비단 은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사람도 필요하오!" 본부인은 얼굴 색이 크게 변하며 대노했다. "은을 가진 후에도 사람을 필요로 한단 말이오?" "한 가지도 놓칠 수 없소!" 그 첩으로 변장한 여인도 대노한 음성으로 맞섰다. "당신은 무엇을 믿고 그렇게 건방진 것이오!" 흑의인은 그녀의 말에 싸늘하게 응답했다. "손에 쥐고 있는 검을 믿고 하는 말이오." 이렇게 되자 쌍방은 모두 자기들이 찾고 있는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오해가 더욱 더 깊어 가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흑의인은 표은과 강옥랑을 모두 중요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 히 한 가지도 빠뜨리지 않고 되찾겠다고 했고, 그 아낙네들은 그 가 은을 가진 후에도 모용구매를 되돌려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 했다. 쌍방은 점점 화가 치밀었다. 한편 소어아는 자신의 계책에 도취 되어 흐뭇함을 금치 못했고 그들이 빨리 싸움을 시작하기를 고대 하고 있었다. 이때 첩으로 변장한 여인과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이 다시금 눈짓을 교환했다. "당신은 결코 은과 사람 중 단 한 가지도 가질 생각을 마시오. 그 원인은 우리는 전혀 은을 가지고 오지 않았고, 사람은...... 당신이 만약 사람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당신의 생명을 앗아가겠 어!" 흑의인은 독한 눈빛으로 아낙네들을 쏘아 보았다. "벌써 말했지만 은과 사람 중 단 한 가지도 빠져서는 안 된다. 자, 우선 은을 가지고 오너라!" 그는 뒤에 있는 부하들에게 살며시 손짓을 했다. 앞에 있던 두 명이 갑자기 일격을 뿜어냈다. 칼빛이 번쩍거리자 마차를 끌던 당나귀가 그들이 뿜어낸 일격을 맞고 땅바닥에 쓰러 졌다. 동시에 뒤에 있던 두 흑의인이 재빨리 수레에 놓여있는 관들 중 하나를 끌어 당겨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화라락'하는 소리와 함 께 관에서 많은 은이 쏟아져 나왔다. 비록 밤이었지만 그 많은 은 은 눈이 부시게 반짝였다. 우두머리인 그 흑의인도 엄청나게 많은 은을 보자 기쁜 듯 껄껄 웃어댔다. "벌써 말했지만 나를 속이기엔 너희들이 아직 어리다." 은을 본 그는 살기가 더욱 짙어져 갔다. 그 은이 바로 표은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흑의인은 다시 살며시 손짓을 했다. 흑의 대한들은 일제히 칼을 뽑아들며 공격을 퍼부으려 했다. 바로 이때 돌연 또다시 '쉭! 쉭! 쉭!'하고 바람을 가르는 예리한 소리가 연거푸 들려오며 은을 담 은 관 속에서 수심 가닥의 거무스름한 빛이 흑의인들을 향하여 솟 구쳐 나왔다. 관 속에 은이 담겨져 있으리라는 것도 예측하기가 힘든 일이었 는데, 그 속에 다른 장치가 있을 줄이야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하였 다. 흑의 대한들은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우두머리인 흑의인은 보다 먼 곳에 서 있었고 임기응변 또한 매 우 신속했기에, 검빛을 휘날리며 암기들을 모두 막아냈다. 그는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부하가 모두 죽음을 당한 것 을 보자 눈빛 속에 놀라움과 살기가 가득찼다. 그는 대갈일성했 다. "이 악독한 것들이 감히......." 그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당신 같이 악독한 자를 상대할 때는 당연히 이런 악독한 방법 을 써야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당신을 이길 수 있단 말이 냐!" 그녀는 다른 아낙네들과 합세하여 흑의인을 중심으로 포위망을 좁혔다. 그와 때를 같이해서 흑의인의 뒤에서 '꽝'하는 소리와 함 께 하나의 관이 산산조각이 나더니 그 속에서 한 여인이 나타났 다. 그녀는 사나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너는 또 무슨 할 말이 있느냐?" 그 흑의인은 홀로 중앙에 포위되었지만, 두려운 기세는 조금도 없었다. "너희들이 이토록 치밀한 계획을 세웠는지를 미처 몰랐다. 아마 내가 너희들을 너무 무시한 모양이다. 하지만 너희들은 아직 기뻐 하기는 이르다." 그 관에서 나타난 사람은 몸매가 곱고 얼굴이 면사로 가리워진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그녀의 얼굴엔 비록 면사가 가리워져 있었 지만 소어아는 첫눈에 그녀가 바로 소선녀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성질이 매우 급했기 때문에 일을 그르칠까 봐 관 속에 숨어있게 한 것 같았다. 그녀는 그 동안 막혔던 숨이 탁 트이자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흑의인의 등을 향하여 일검을 뿜어내며 외쳤다. "잔소리 말고 어서 목숨을 바쳐라!" 그 흑의인은 등에 눈이라도 달린 듯 돌아보지도 않은 채 뒤로 일 검을 뿜어냈다. 그 충격으로 소선녀는 검이 손에서 벗어날 뻔 했다. 소선녀는 손에 불에 덴 듯한 통증을 느꼈고, 그제서야 비로소 흑의인이 자기의 평생 처음 만난 강적임을 알아차리고 놀라고도 화가 치밀어 큰소리로 외쳤다. "네 놈은 죽음을 앞두고도 감히 반항을 하겠단 말이냐?" 흑의인은 뿜어낸 일검의 기세를 이용하여 재빨리 벽쪽으로 물러 섰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자가 누군지 어디 사방을 바라보아라!" 그의 이러한 말이 떨어지자 아낙네들을 즉시 고개를 돌려 바라 보았다. 이때 사당밖에는 헤아릴 수도 없는 많은 흑의인이 도사리 고 있었다. 그들 손에는 모두 화살이 쥐어져 있었다. 여인들은 모두 아연실색함을 금치 못했다. 흑의인의 냉소섞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지금 이 사당밖에는 백사십 장의 철태궁(鐵胎弓)이 놓여 있고, 또한 매 한 장의 궁마다 삼백 석의 침이 들어 있다. 내가 셋을 샐 동안 만약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지 않는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 것 인지는 너희들도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백사십 장의 철태강궁(鐵胎强弓)이 한꺼번에 발사된다면 설사 무예계의 제일 가는 절정고수라도 막을 수가 없었다. 그 아낙네들도 당연히 자기쪽에서 설사 한두 사람이 뚫고 나갈 수 있다해도 나머지 사람들은 필히 당할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사태가 이쯤 되자 그녀들은 한자리에 모여 소곤대며 의논을 했 다. 소선녀와 그 첩으로 변장한 여인은 금방이라도 뚫고 나가려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이 그녀들의 손목을 굳게 잡는 바람에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이윽고 옆에서 그녀들이 의논하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흑의인이 유유히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이때 그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잠깐! 은과 사람을 모두 당신에게 주겠소!" "그럼 우선 사람을......."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당밖에서 돌연 한 차례의 비명소리가 들려오며 몇 명의 흑의인이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이 은과 사람을 모두 주겠다는 말을 들 은 소어아는 그들이 계속 협상해 나간다면 필시 자기의 계책을 망 치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미리 준비해둔 돌멩이들을 궁수들에게 퍼부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엄밀하게 설치된 궁수들의 포진이 삽시간에 혼란을 일으키며 흩어져 버렸다. 사정이 급변하자 첩으로 변장한 여인은 그 틈을 놓칠세라 급히 외쳤다. "삼매, 칠매, 어서 돌격해 나가자꾸나!" 외침소리와 함께 그녀는 한 자루의 단검으로 흑의인을 향하여 일격을 뿜어냈다. 그녀는 단검으로 한 줄기의 검빛을 휘날리며 삽시간에 강별학을 향해 십여 초의 공격을 퍼부었다. 그녀는 비록 여자의 몸이었지만 뿜어낸 검법은 악독하고도 거센 것이었다. 무예계에서는 여자고수도 적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여자는 모두 힘이 연약한 까닭에 암기와 경공으로 이름을 떨칠 뿐이지 검과 내 력은 천생의 소질로 인하여 남자보다 비교적 뒤떨어졌다. 또 몇몇 검법으로 이름을 날린 여자도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교묘한 변화에 능숙하지 이처럼 거친 힘과 악독한 초식을 동시에 지닌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첩으로 변장한 그 여인은 비단 검법이 악독할 뿐만 아니 라 매초마다 상대와 함께 죽을 결심을 각오하고 있는 듯했다. 곁에 서 있는 그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은 그저 검을 가슴팍에 비스듬히 빗겨들고 있을 뿐이지 전혀 협공할 기세가 없었다. 여자 와 남자가 격투할 때는 손해보는 쪽이 아무래도 여자였다. 그러므 로 여자들이 설사 협공을 한다해도 무예계에서 그것을 가지고 왈 가왈부 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이 첩으로 변장한 여자는 자기 의 신분을 생각하는 듯 협공을 전혀 바라는 눈치가 아니었고 그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자 역시 눈을 번뜩이고 서 있을 뿐 참견하지 를 않았다. 이 얼마나 패기가 가득찬 여자들인가! 흑의인은 이 광경을 보면 볼수록 이상하게 여겨졌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놀라움이 커갔다.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 젊은 부인들로 변장한 시녀 같은 여인들도 암기를 퍼붓는 수법이 보통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녀 들이 손을 번쩍 들기만 하면 밖에서는 즉시 몇 가닥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소선녀는 벌써부터 밖으로 달려나가 이리저리 몸을 날리고 있었 다. 백여 명의 흑의 대한 중 이미 사오십 명이 땅바닥에 쓰러졌고 나머지 대한들은 자신을 방어하기에도 바빴다. 이 광경을 주시하고 있던 소어아는 기뻐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 았다. 강별학에게 여러 번이나 당한 분노를 오늘에야 비로소 풀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첩으로 변장한 그 여인의 검은 점점 신속해졌고 초식 또한 악독 해졌다. 그녀는 매초마다 흑의인의 급소를 노렸다. 이번에 그녀는 흑의인의 목구멍을 향하여 일검을 퍼부었다. 남이 보기엔 흑의인 이 패배를 앞두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흑의인은 실로 매우 영악한 성격의 소유자라 생각에 잠 겨 있었던 까닭에, 지금까지 자신을 방어할 뿐이었지 정신을 쏟아 격투하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그는 생각을 끝내자 갑자기 우렁찬 음성으로 껄껄 웃으며 평범 한 일검을 뿜어냈다. 그러나 그 첩으로 변장한 여인은 상대방이 뿜어낸 가벼운 일검 이 천여 근의 힘을 지니고 있는 것 같이 느꼈다. 그녀는 검이 당 도하기도 전에 이미 웅혼한 힘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초식을 변경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맞부딪 쳐 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검법은 비록 악독하고 강인했지만 내력은 여전히 그 흑 의인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은 다 급한 목소리로 급히 말했다. "그와 힘의 대결을 하지 말아요!" 그녀는 협공 따위를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사태가 너무나 긴박 했기에 하는 수없이 장검을 휘날리며 치열한 격전 속으로 달려 들 어갔다. '쨍그랑'하는 소리가 들려오며 불꽃이 사방으로 튕겼다.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과 첩으로 변장한 여인은 동시에 흑의인 과 일격을 맞부딪쳤다. 하지만 그녀들은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쥐고 있던 장검을 손에서 놓칠 뻔했다. 이 혈전을 주시해 온 소어아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이 계집들이 자기들의 특기를 쓰지 않고 도리어 남과 힘의 대 결을 하니 정말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구나!)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과 첩으로 변장한 여인은 흑의인의 힘에 밀려 약 이 장이나 물러서 거의 벽에 부딪칠 뻔했다. 하지만 이러 한 실수를 범한 그녀들은 여전히 당황하지 않고 손에 한 줌의 암 기를 쥐어 들었다. 모용가문 아가씨들의 경신술과 암기는 무예계에서 벌써부터 알 려진 것이었고, 흑의인이 만약 승리하고 싶은 생각에서 계속 공격 을 퍼부어 온다면 아마 성한 몸으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흑의인은 자신의 일격이 성공하지 못한 것을 보자 즉시 공격을 멈추더니 우렁찬 음성으로 말을 걸어왔다. "오늘 밤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이대로 떠나겠소." 그는 서서히 뒤로 후퇴해 갔다. 그가 취한 이 행동은 심지어 소어아에게도 의외의 일이었다. 본 부인으로 변장한 여인과 첩으로 변장한 여인은 더욱 이상하게 여 겼다. 흑의인은 분명 이기고 있는데 어째서 오히려 간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첩으로 변장한 여인이 큰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애를 쓰며 우리를 괴롭혔는데 왜 갑자기 간다는 것이 오?" "지금까지는 소저가 누구인지 몰랐기에 그랬오. 만약 떠난다면 후일에 어디가서 소저들을 찾는단 말이오." 첩으로 변장한 여인이 다그쳐 물었다. "지금은?" "모용가문의 소저들은 무예계에 이름을 떨쳐왔을 뿐만 아니라 가산(家産)도 있으니 비록 오늘은 내가 원하는 물건을 얻어 갈 수 가 없을 망정 훗날 소저들의 댁을 찾아가서 얻으면 되지 않겠소?" 첩으로 변장한 여인의 얼굴색이 크게 변했다. "흥! 당신은 이미 우리의 신분을 알았단 말이오?" "모용가문에 둘째 소저의 검법은 악독하고도 강인함이 천하에 알려진 사실이오. 만약 내가 그래도 소저들의 신분을 알아보지 못 한다면 눈뜬 장님이오!" 첩으로 변장한 여인은 그의 말을 듣자 갑자기 머리 위에서 한 주먹의 머리카락을 뽑아들며 얼굴을 가린 가면을 벗어 던졌다. 한 장의 백설 같이 희고 고운 얼굴이 가면 뒤에서 나타났다.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뜨고 살기가 등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당신은 우리의 신분을 알았지만 우리는 당신의 신분을 아직도 모르고 있으니 훗날에 다시 당신을 찾을 길이 없지 않소? 그러니 우리는 당신을 보내 줄 수가 없소?" 이때 갑자기 한가닥의 음성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는 이제 갈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소선녀의 음성이었다. 그녀는 지금 사당의 문을 가로막 고 있었다. 뒤를 돌아 본 흑의인이 그녀를 보자 갑자기 미친 듯이 껄껄 웃 었다. "만약 내가 여길 빠져 나갈 자신이 없었으면 방금 그런 말도 하 지 않았을 것이오." 모용쌍은 큰소리로 외쳤다. "어떻게 달아나나 두고 봅시다!" 이 모용가문의 둘째 소저는 과연 다급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조 금 전에 분명히 패배를 당하고도 조금도 흑의인을 두려워 하지 않 고 다시 검을 휘날리며 다가갔다. 그때 '쨍그랑'하는 소리가 들려오며 그 본부인으로 변장한 여인 이 그녀의 앞을 가로 막았다. 모용쌍은 자기를 막은 사람이 동생인 것을 보자 대노한 음성으 로 외쳤다. "삼매, 너는 저 자를 놓아 줄 속셈이냐? 너는 구매를 찾고 싶지 않단 말이냐?" 모용가문의 삼소저는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 자는 이미 독 안의 쥐와 같은데 서둘 필요가 없지 않아요?" 모용산은 매우 총명한 여인이었기에 모용가문에서 재질이 가장 뛰어나다고 소문이 나있었다. 그래서 모용쌍은 성질이 비록 급했 지만 평상시엔 모용산의 말을 매우 잘 귀기울여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못마땅한 듯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무엇을 기다리란 말이냐?" "제가 보기엔 이 일에 필시 곡절이 있을 것이에요." "곡절은 무슨 곡절이냐?" "이 자는 우리를 이곳까지 불러 냈으니 당연히 우리가 누구란 것을 알아야 할 텐데, 어째서 지금에야 비로소 우리의 신분을 알 았느냐 하는 말입니다. 이 점이 이상하지 않아요?" 모용쌍은 멈칫하더니 여전히 발을 굴렀다. "그것이 뭐가 수상하단 말이냐? 그가 연극이라도 하는 것이 아 니라고 누가 보증하겠나?" 소선녀도 끼어들었다. "옳은 말이요. 우선 이 놈을 잡아 놓고 봅시다." 흑의인이 이때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 "아가씨들께서 잠시 고정하시고 불초의 말을 조금 들어 주십시 오. 소저들과 나는 아마도 남의 간계에 빠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와르르'하는 소리가 들 려오며, 천장을 바친 기둥 위에서 향로 하나가 흰 포목을 펼치며 떨어졌다. 그 흰 포목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강별학! 너는 많은 악독한 일을 저질렀기에 이젠 변명할 여지 가 없다." 주먹만한 붓글씨로 쓰여 있는 그 글자는 비록 밤이었지만 확실 하게 볼 수가 있었다. 이것들을 본 모용집안의 소저들과 소선녀는 모두 깜짝 놀랐다. 모용쌍은 놀라움이 가득찬 음성을 발했다. "당...... 당신이 강별학이오?" 흑의인의 눈에 놀라움과 당황함이 나타났다. 그는 역시 자기가 남의 계교에 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상대가 누구인줄도 모르 게 말이다. (이 계략을 세운 놈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나를 당하게 할 수 있을 정도니 참으로 무서운 지혜를 가진 놈이로구나! 이토록 무서 운 자가 암암리에 나를 노리고 있으니 설사 오늘은 내가 이곳을 빠져 나간다 해도 앞으로 편히 살 생각을 말아야겠구나!) 이렇게 생각한 그는 등뼈가 오싹해옴을 느꼈다. 그는 매우 영악한 사람이라 남이 한 가지 일을 생각해 낼 때 그 는 열 가지 일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 점이 도 리어 그에게 화를 안겨 주었다. 그것은 그가 생각에 잠겨 있기 때 문에 대답을 종종 잊기 때문이다. 모용쌍은 그가 응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 냉소를 터뜨렸다. "당당한 강남 대협께서 그런 일을 저지를 줄이야 미처 생각하지 못했소!" 흑의인이 응답을 하기도 전에 또다시 한 차례 '와르르' 하는 소 리가 들려 오며 향로 하나가 또다시 천정에 위치한 기둥에서 떨어 져 내려왔다. 그 향로도 흰 포목에 매달려 있었다. 거기에도 주먹 만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강별학! 네가 숨긴 사람을 이미 찾아냈으니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그 흰 포목은 물론 소어아가 미리 장치했던 것이었다. 그는 모용산의 말이 점점 이상해져가는 것을 듣자 그대로 나가 다간 자기의 걸작이 망쳐질까봐 재빨리 그 장치를 가동시켰던 것 이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시간을 연장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는 진검 등 사람들이 강별학의 방에서 모용구매를 찾아내 이 곳까지 데려 오기만 하면 강별학은 설사 백 개의 입이 달렸다고 해도 변명할 여지가 없을 것이라 아울러 생각했다. 그의 계략은 정히 만무일실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꿈에도 그 일이 뒤틀리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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