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질상면(叔姪相面) 화무결과 철심난은 넋을 잃고 있다가 사나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그렇다. 내가 바로 연남천이다!" 철심난은 온 몸 속의 피가 머리로 치솟는 듯했다. 그녀는 지금 까지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화무결은 잠시 정신을 놓은 듯 멍하니 서있다가 옷을 벗어 정성 스럽게 접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철심난에게 다가가 양손 으로 그 옷을 건냈다. 사실 그가 이러한 동작을 취한 것은 그러한 행위들을 통하여 감 정의 평온을 찾아보려 한 것이었다. 철심난은 그가 자기에게 주는 옷을 묵묵히 받을 뿐 그의 무겁고 도 복잡한 심경은 알 수가 없었다. 화무결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옷을 잘 보관했다가 이화궁으로 보내시오!" 철심난은 그제서야 그가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옷을 받은 뒤 눈물을 글썽이며 떨리는 목소 리로 말했다. "당신...... 정말 그 사람과 싸우겠다는 거예요?" "연남천과 겨뤄보는 것은 무술을 배운 사람의 일대 희망이오. 영광으로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그의 말투는 비록 침착하고 평온했지만 창백한 얼굴은 흥분으로 빨간 빛이 감돌았고 호흡 또한 거칠었다. 철심난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그냥 이곳을 떠나세요. 내가 대신 그를 막으면 그는 나를 죽이지는 않을 거예요." 화무결은 미소를 지었다. "나의 일생은 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이화궁을 위한 것이 오. 내가 어찌 여길 피한단 말이오!" 그의 말소리에는 매우 무거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또 사실 내가 강소어를 죽이려고 하는 것도 나와 원한 관계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화궁을 위해서였소. 석 달 후에 그를 만나거든 그에게 말해주시오. 비록 그를 죽이려고 했었지만 조금도 내가 원 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 사람이 나를 원망 하지 말았으면 좋겠소." 철심난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젖어 있었다. "당신은 왜 남을 위해서만 살아야 하나요! 당신...... 자신을 위해서 살지를 못 하고......." 화무결은 하늘을 향해 허탈한 웃음을 웃었다. "나 자신을 위해서? 나는 누구지? 도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났지?" 이 말은 그가 처음으로 남 앞에서 자기의 비통함을 드러내는 말 이었다. 비록 간단한 몇 마디의 말이었지만 그 속에 내포된 비통 함은 태산 같이 깊었다. 철심난은 눈물을 흘리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남들은 모두 당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어요. 그 누가 당신의 이러한 뼈저린 고통을 알겠어요! 또 남들은 당신이 빈틈이 없고 냉정하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 누가 당신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도 없이 죽고 사는 것 조차 남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알겠어요!" 연남천은 곁에 서서 화무결의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다. "화무결, 너는 과연 '이화궁'의 제자구나! 이번 싸움의 성패에 상관없이 이화궁의 이름이 너로 인해서 빛날 것이다." "감사하오." "그러나 너도 알아야 될 것이 한 가지 있다. 너 뿐만 아니라 세 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지는 않아. 그리고 설혹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도 그렇게 행복하다고만 할 수 없지. 어쩌면 그들의 삶이 더 슬플 수도 있지." 화무결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당신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나를 죽여야 한단 말이오?" 연남천은 한참 동안 침묵해 있다가 돌연 하늘을 향해 기괴한 탄 성을 발했다. 그의 소리는 너무나 맑고 처량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슬픔을 느끼게 했다. 화무결은 길게 탄식을 하며 품속에서 하나의 은검을 꺼냈다. "오늘 내가 당신을 죽이는 것도 나를 위해서는 아니오!" 철심난은 그가 항상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화궁의 무공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인 줄로 알았었다. 그녀는 화무결 이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이었다. 그가 손 안에 쥐고 있는 검은 매우 가늘어서 마치 손가락 같았 다. 다섯 자의 길이로 전체가 은빛으로 번쩍거렸고 즉각 손을 벗 어나 나를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것은 비록 검이었지만 마치 고무로 만든 것처럼 휘어질 수가 있는 특이한 무기였다. 이것을 본 연남천은 눈에서 빛을 발하면서 그 괴이한 무기를 담 담하게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는 무기까지 꺼내 들었으면서 왜 아직 손을 쓰지 않는 것이 지?" 그의 말이 떨어지자 화무결은 왼손으로 은검을 튕겼다. 순간 ' 챙' 하는 소리가 나면서 그 검은 찬란한 무지개 빛을 발했다. 검이 움직이자 검에서 솟아 나오는 빛이 눈부신 광채를 번뜩이 며 날렵하고 신속하기 이를 데 없이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연남천은 검을 들고 마치 태산처럼 서 있었다. 화무결의 거센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돌연 화무결의 검세가 방향을 바꾸었다. 화무결은 여러 가지 수법으로 유혹했지만 연남천은 결코 속지 않았고 화무결의 검은 허공을 찌를 뿐이었다. 알고 보니 화무결의 검은 허공을 찌른 것이었다. 철심난은 검의 변화를 똑똑히 볼 수가 없었고 다만 '쉭쉭' 하며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만을 들을 수 있었다. 화무결은 일곱 번 의 공격을 했으나 연남천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초식은 '이화궁' 검법 중에서도 가장 교묘한 것이었다. 그러 나 화무결은 계속 일곱 번의 허검을 찌른 것이다. 사실 누구라도 이런 현란한 검빛 아래서 그것이 허검이라는 것을 깨닫기는 지극 히 어려웠다. 그래서 당연히 상대방을 피하려 애를 쓰게 되지만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든 모두 검초의 계산 속에 있게 되는 것이었 다. 일곱 개의 허검은 불가사의한 위력을 발휘하면서 상대방이 물러 설 길을 완전히 봉쇄시킬 수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이화궁'의 비기(秘技)였고, 천하의 어느 검파와도 다른 점이었다. 그러나 연남천은 검빛에 현혹되지 않았으며 이 일곱 검의 초식 은 연남천 앞에서 완전히 그 효력을 잃고 말았다. 화무결이 일곱 번의 초식을 끝내자 이번에는 연남천의 검이 빛 을 내면서 화무결의 가슴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이 검은 아무런 변화없이 팽팽히 찔러 들어갔으며 매우 빠르고 맹렬한 위력을 품고 있었다. 화무결은 자신의 검법이 아무리 변화무쌍하다 해도 우선 이 검 은 피해야만 했다. 연남천은 검풍을 일으키면서 세 번을 지쳐들어 갔다. 그의 검은 결코 허식이 아니었다. 매우 단순한 검초였지만 연남 천의 손에 들린 검은 실로 신기한 위력을 발했다. 화무결은 가까스로 검을 피한 뒤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그의 검은 온통 은빛을 발했고 연남천은 빛에 휩싸여 버렸다. 화무결은 연남천을 둘러싸며 돌았지만 연남천은 조금도 움직이 지 않았다. 화무결의 검빛은 물이 흐르는 것 같았지만 연남천은 마치 흐르는 물 속의 바위와 같았다. 화무결의 이러한 검법은 연남천의 검법을 충분히 무력화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남천은 공력이 깊고 경험이 풍부했기 때 문에 화무결이 감히 따르지를 못했다. 화무결은 비록 몸을 재빠르게 움직이며 초식을 펼쳐내고 있었지 만 사실 그 위기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검풍에 꽃잎들이 날리며 화림(花林) 안에서는 그야말로 다시 보 기 힘든 용호의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소어아는 한 잠 푹 자고 싶은 생각에 여관에 들었다. 그러나 많 은 복잡한 생각들이 머리를 오갔고 아무리 노력해도 잠을 이룰 수 가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다시 옷을 줏어 입고 여관의 대청으 로 나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 여관은 본래 진검과 남궁유가 묵었던 곳이었다. 여관 전체를 차지하고 있던 그들이 떠나버리자 여관은 텅 비어 버려 소어아를 제외하곤 단 하나의 방에 사람이 들어 있었다. 그 방은 분명 인기 척이 있었으나 문과 창들이 모두 꼭꼭 닫혀 있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문을 꼭꼭 닫고 있는 것을 보자 소어아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얘기를 엿듣기 위해 그 방의 창가로 서서히 다가갔다. 그때 돌연 한 청의를 입은 사나이가 여관 안으로 들어왔다. 손 에 말채찍을 들고 있는 것으로 봐 마차를 몰고 온 것 같았다. 그 는 문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큰소리로 외쳤다. "강 나으리께서는 여기에 계십니까?" 소어아는 얼굴색이 변했다. (강별학이 무슨 일로 여기에 왔을까?) 소어아는 급히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문이 열리며 강별학이 얼굴을 내밀었다. "누구냐?" "소인은 단귀입니다. 방금 화공자를 성 밖에까지 모신......." "왜 네가 여기를 찾아 왔지? 화공자는 어디 있느냐?" "화공자는 성 밖에서 웬 기인(奇人)과 마주쳤습니다. 소인은 급 히 돌아와 보고를 하려고 했으나...... 이제야 겨우 나으리께서 여기에 계시다는 것을 듣고 찾아온 것입니다." 강별학은 그저 미소를 지었다. "화공자는 무슨 일을 당해도 혼자서 처리할 수 있다. 그토록 애 태울 필요가 있겠느냐?" "그러나...... 화공자는 매우 위급한 상황에 처한 듯 보였습니 다. 철 아가씨께서도 애태우고 있는 것을 보면 필시 보통 인물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강별학은 단귀라는 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내가 가보지." 이때 방 안에서 돌연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우선 가보아라." "오늘밤 늦게까지는 꼭 돌아오겠습니다." 강별학은 급히 단귀를 따라 나가버렸다. 소어아는 방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여기서 강별학을 기다리고 있는 이상 그리 급하게 서둘러 그 의 신원을 파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히려 누가 화무결에게 어려움을 주는지 먼저 알고 싶었 다. 소어아는 화무결과는 비록 적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화무결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리를 듣자 적잖이 마음이 움직이게 되었다. 문 밖에서 마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어아는 뒤따라 나갔다. 그러나 큰 길에서는 경공을 보일 수가 없어 그리 빨리 갈 수는 없었다. 성을 빠져 나가자 마차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마차가 성을 빠져 나오자 강별학은 차내에서 큰소리로 물었다. "화공자는 그 사람과 대적을 해봤는가?" "그는 공자님의 옥관을 끊어버렸고 공자님도 그에게 일장을 가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볍게 공자님의 일장을 피해버렸습니다." "음, 화공자의 일장을 막을 수 있다니 굉장한 실력이구나. 그는 어떻게 생겼던가?" "그 사람은 매우 키가 컸습니다. 옷은 저보다 더욱 남루했고 생 김새도 매우 신기했습니다." 강별학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이가 얼마나 되어 보이던가?" "사십 살 내외인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오십이 다 된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또 어찌보면 서른 살도 같 고 하여튼 그는 나이를 짐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토록 신비한 사람은 종래 본 적이 없습니다." 강별학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단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그 사람은 허리에 철검을 차고 있었는데 이미 녹이 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강별학은 갑자기 안색이 변했다. 그는 한동안 넋 을 잃은 사람처럼 있다가 무거운 소리로 말했다. "너는 조용히 마차를 몰고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멀리 세우 도록 해라. 알았느냐?" 단귀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강별학의 말을 아니 들을 수도 없었다. 화림(花林)에서 약 이십장(丈)의 거리를 두고 마차는 멈추었다. "아! 화공자와 그 분이 싸우고 있어요!" 강별학은 이미 화림 안에서의 검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검기가 싸인 곳에는 한 사람이 태산처럼 우뚝 버티고 서 있었 다. 화무결은 몸을 매우 가볍게 움직이며 종횡무진하고 있었다. 그 러나 강별학 또한 안목이 높았다. 그는 곧 화무결이 교묘하게 공 격하고는 있지만 감히 쳐들어 가지를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연남천의 무서운 검기가 하 늘을 찢어놓을 것만 같았다. 강별학은 안색이 더욱 창백해지며 중얼거렸다. "연남천, 틀림없이 연남천일 것이다." 그는 비록 화무결과 싸우는 사람의 모습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 지만 연남천 외에는 다른 사람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강별학은 연남천이 다만 이화궁의 검법을 더 자세히 보고 싶어 서 화무결을 죽이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단귀는 그 검기를 보며 화무결이 걱정되는지 진땀을 흘렸다. "강 나으리, 화공자를 돕지 않을 겁니까?" "당연히 가야지." 단귀는 반가운 듯 기쁜 얼굴을 보이면서 말했다. "강 나으리는 화공자의 친구이시니 꼭 화공자를 도울 줄을 알았 습니다." 이때 강별학이 마차 문의 손잡이를 흔들며 말했다. "그런데 왜 마차 문이 열리지를 않지. 고장인가?" 단귀는 마부석에서 내려와 마차 문을 열었다. 마차 문은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강 나으리께서는 너무 급해서 문을 열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그가 말을 하며 고개를 들자 강별학은 싸늘한 눈초리로 단귀를 노려보고 있었다. 단귀는 그 음산한 얼굴과 살기가 가득찬 눈초리를 보자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쳐왔다. "강 나으리...... 무슨 일......." 강별학은 음산하게 웃으며 서서히 입을 열었다. "너무 남의 일에 참견하면 못 써. 오래 살지 못 하니까." 단귀는 놀란 나머지 간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재빨리 달 아나려고 했으나 이미 강별학은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단귀는 애원했다. "강...... 강 나으리...... 소인은...... 당신 위해 위험을 무 릅쓰고......." "나는 네가 고생하는 것을 알아. 그래서 너를 좋은 곳으로 보내 자는 거다." "소인...... 소인은......." 그러나 검은 이미 깊숙이 그를 찔러 들어갔다. 강별학은 천천히 단검을 뽑아 피가 자기 몸에 튀지 않게 했다. 그가 사용한 검은 바로 '정소(情銷)'의 보검이었다. 강별학은 길게 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지금은 어느 누구도 내가 여기에 온 것을 모른다. 그러니 내가 화무결을 구하지 않아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내 협객이라는 이름 이 이 자식 때문에 손상을 당해선 안 되지...... 네가 없어지므로 나 강남 대협이 이름을 보전하는 것을 원망하지는 말아라......." 그는 조용히 마차에서 뛰어 내려 발길을 돌렸다. 그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산을 빙 돌아 성내로 향했다. 화림에서는 계속 악전고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강별학은 날렵하게 신법을 써 달리며 중얼거렸다. "화무결, 너를 구해주고 싶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야. 그러나 나로서는 연남천을 감당할 수가 없구나. 해마다 이때가 돌아오면 내가 잊지 않고 너를 위해 향을 피워 놓겠다. 안심하고 눈을 감아 라!" 소어아는 성을 벗어나자 마차 바퀴 자국을 쫓아 한참을 달렸다. 얼마 후 그는 멀리서 마차와 화림 속에서 뻗쳐나오는 검기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빨리 화림 속의 악투를 보고 싶었다. 화무결이 누구와 대 적하고 있는지도 궁금했을 뿐만 아니라 화무결의 검법을 자세히 봐두어야 금후에 그를 상대할 준비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돌연 굳게 닫힌 마차 문에서 흘러 나오는 피를 발 견하였다. 혹 강별학이 죽었다는 말인가? 소어아는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마차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신속하게 마차 문을 열어젖혔다. 그런데 마차 안에는 눈을 부릅뜨고 통한에 찬 얼굴로 단귀가 죽어있었다. 시체를 자세히 살펴본 소어아는 곧바로 마차에서 나와 화림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소어아는 제일 먼저 철심난이 눈에 들어왔다. 화무결이 걱정되 는지 안절부절하는 모습으로 서있었다. 그는 가슴이 아팠다. 이때 돌연 긴 기압소리가 울려퍼지며 하나의 검광이 하늘을 향 해 치솟아올랐다. 화무결은 손에 쥐었던 칼을 놓치며 뒤로 물러섰 다. 곧이어 그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쓰러지고 말았다. 화무결은 비단 소어아를 죽이려 했을 뿐만 아니라 소어아의 연 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화무결이 쓰러지는 것을 본 순간 무엇 때문인지 소어아 는 가슴이 뜨끔거리며 피가 끓었고 그와 화무결 간의 원한도 잊어 버렸다. 그는 급히 몸을 날렸다. 연남천은 길게 소리를 지르면서 다시 검을 들어올렸고 철심난은 하얗게 질려 비명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연남천이 검을 막 내려치려는 순간 소어아는 번개같이 달려가 화무결의 앞을 가로 막으며 큰소리로 소리쳤다. "그를 다치게 해서는 안 되오!" 철심난은 갑자기 소어아가 나타나자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 다. 연남천은 눈에서 빛을 내며 소어아를 바라보더니 무서운 소리로 호통쳤다. "너는 누군데 감히 나의 검을 막느냐!" 철심난은 고개를 돌려 연남천을 향했다. "그가 바로 소어아예요!" "강소어, 강소어가 바로 너란 말이냐?" 소어아도 그를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당신...... 당신은 바로 연남천 백부님 맞지요?" 철심난이 옆에서 대답했다. "그가 바로 연(燕) 노선배에요." 소어아는 놀랍고도 기뻤다. 그는 급히 달려가 연남천의 품에 안겼다. "연 백부님! 정말 뵙고 싶었어요......." 연남천은 눈물을 글썽이며 중얼거렸다. "강소어!...... 강소어, 나 연 백부도 네가 보고 싶었다." 철심난은 천애고아인줄 알았던 소어아가 친척이 있고, 더구나 그가 천하에 이름이 난 연남천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놀랍고도 기 뻐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때 연남천이 무거운 소리로 말했다. "너는 이 화무결이 이화궁의 제자라는 것을 아느냐?" "알고 있어요." "너는 너의 부모를 죽인 자들이 바로 '이화궁주'라는 것을 모르 지는 않겠지?" "그게 정말입니까?" 그는 어릴 때 어느 신비스러운 사람이 그에게 이 일을 말해주었 던 기억이 났다. 그러나 그는 그 사람의 행적이 불확실했기 때문 에 이화궁의 사람이 정말 자기의 원수라고는 믿지를 않았었다. 그러나 연남천이 그런 말을 하자 그는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철심난이 탄성을 발했다. "그래서 이화궁주가 화...... 화무결에게 당신을 죽이라고 했군 요!" 연남천은 소어아를 바라보았다. "너는 왜 저 녀석의 목숨을 구하려는 거지?" "저...... 저......." 그는 자신도 왜 화무결을 구했는지 몰랐다. 다만 속으로부터 무 언지 모르지만 구해야만 할 것 같은 강한 힘이 소어아로부터 화무 결을 구하도록 만든 것 같다. 연남천이 돌연 철검을 내밀며 소리쳤다. "네가 직접 그를 죽여라!" 소어아는 고개를 돌려 화무결을 쳐다보았다. 화무결은 이미 연남천의 검기에 의해 기절해 있었고 꽃잎들이 그의 창백한 얼굴에 떨어져 있었다. 소어아는 그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저는 그를 죽일 수가 없어요." 소어아의 말을 들은 연남천은 대노했다. "왜 그를 죽일 수가 없다는 거지. 그가 너의 원수라는 것을 알 면서도! 더군다나 그는 꼭 너를 죽이고 싶어하는데!" "저...... 저......." 그는 역시 탄식소리만 낼 뿐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 러더니 무슨 생각이 불쑥 머리에 떠올라서 소리쳤다. "저는 이미 그와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석 달 후에 생사를 판 가름 하기로 했지요. 그래서 연 백부님께서 그를 다치게 한 지금 그를 죽일 수는 없어요." 연남천이 놀라면서 돌연 하늘을 향해 대소했다. "좋아! 너는 과연 사나이구나. 과연 내 둘째 동생의 아들이 다...... 동생아, 너의 아들이 이토록 훌륭하니 이젠 편히 눈을 감아도 되겠구나!" 그의 웃음소리는 점차적으로 공허하게 변해갔다. 소어아는 가슴의 피가 들끓는 것을 느끼며 땅에 꿇어 앉아서 흐 느꼈다. "연 백부님, 제가 지금껏 한 일을 생각하니...... 아! 다시는 아버님의 명예를 더럽히게 하는 짓은 하지 않겠어요." 연남천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담담하게 말했다. "너는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자책하지 말아라. 누구든 간에 너 와 같은 환경에서 자란다면 역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 나 내가 알기로는 너는 그리 나쁜 일을 하지도 않았어." "연 백부님 저는......." 연남천은 다시 크게 웃으면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나 연남천은 내 둘째 동생 강풍에게 너와 같은 아들이 있다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의 웃음 속에는 기쁨의 눈물이 섞여 있었다. 철심난은 곁에서 그들의 얘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 다. 그녀의 마음 속엔 기쁨과 슬픔이 교차했다. 소어아의 고통은 연 남천이 위로해주지만 그녀의 심정은 그 누가 알고 위로해준단 말 인가! 그녀는 소어아가 화무결의 손에 죽지 않기를 바랐으나 역시 소 어아가 화물결을 죽이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서로 잘 지내기를 바랄 뿐이었다. 소어아가 화무결을 구하자 그녀는 무한히 기뻤다. 그들의 원한 도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그들이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원수 사이라 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 중 꼭 한 사람이 죽어야만 원한이 풀 리는 것이다. 게다가 더욱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소어아 때문이다. 그렇게 보고 싶었고 모든 것을 희생해 구해냈던 소어아가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는 것이 아닌가! 소어아가 진정되자 연남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도교교와 이대취 등이 악인곡을 떠난 사실을 알고 있느 냐?" "예!" 연남천은 눈에 빛을 내면서 말을 이었다. "그들을 만나 보았느냐?" 소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 백부님, 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연남천은 화가 치밀었다. "내가 어찌 그들을 용서할 수 있겠느냐!" "그들이 비록 백부님을 해치려고는 했었지만 어쨌든 간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이 나를 키웠고 이제는 옛날 처럼 그렇게 극악스럽지는 않습니다." 연남천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크게 웃어제꼈다. "너는 보기엔 강경해도 마음이 굉장히 약하구나." 소어아도 따라서 웃었다. "연 백부님도 그렇지 않으세요?" 연남천은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좋아, 그들이 다시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면 용서해 주겠다." 소어아는 뛸 듯이 기뻤다. "그들이 이 얘기를 들으면 정말 기뻐할 겁니다. 다시는 사람을 해치지 않을 거예요." 연남천은 철심난에게 눈을 돌렸다. 그는 미소를 띠우면서 부드 러운 음성으로 소어아에게 말했다. "그럼 이젠 저 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누어라. 나만 너를 붙잡고 있을 수는 없구나." 소어아는 돌연 안색이 변하여 차갑게 내뱉았다. "저는 모르는 아가씨입니다." "뭐? 모르는 아가씨라고?" "예. 본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소어아가 하는 얘기를 들은 철심난은 너무 어이가 없었고 슬펐 다. 그렇게 모든 것을 희생해 구해주었건만, 그렇게 애타하며 보 고 싶어 했건만 정작 소어아의 입에서는 자기를 모른다는 차가운 한마디의 말이었으니.......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달려가버렸다. 소어아는 입술을 깨물며 서 있었다. 연남천은 철심난이 달려가는 것을 보고 있다가 소어아에게 고개 를 돌렸다. "이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소어아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아가씨는 머리가 좀 이상하게 된 모양이에요." 연남천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너희 젊은이들의 일은 정말 모르겠구나!" 소어아는 넋을 잃은 사람처럼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연남천은 자세히 그를 바라보다가 얼굴에 웃음을 띠우며 물었 다. "혼자 다니겠는가 아니면 나를 따라 다니겠는가?" 소어아는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활짝 웃었다. "연 백부님을 따르는 것이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나에겐 할 일 이 없어져 재미가 없을 거예요." "하하하! 너는 과연 기백이 있구나." "하지만 나는 백부님과 이야기를 좀 더 하고 싶어요......." "내일 이때 다시 여기에 오겠다. 지금은 할 일이 있어서 가봐야 겠다." 그는 미소를 띠우면서 소어아의 어깨를 툭 쳤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사라져버렸다. 소어아는 그가 그렇게 금방 갈 줄은 몰랐다. 그는 웃으면서 중 얼거렸다. "연 백부님은 정말 성질이 불 같구나. 무슨 일을 하려는지 궁금 하군." 그는 연남천이 철심난과 같은 방향으로 갔다는 것을 유의하지는 못했다. 그는 화무결 옆에 앉아 그의 손을 잡고 진기를 주입하기 시작했 다. 한참 후, 화무결은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소어아를 보자 깜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어찌 여기에?" 소어아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볼 뿐 말을 하지 않았다. 화무결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나를 구했소?" 소어아는 여전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 제5권에서 계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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