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음식점을 나와서 전세마차에 탔을 때 날씨는 거의 개이고 휘날리던 가랑비도 없었다. 그러나 강변을 비롯한 들판에 짙은 안개같은 구름이 낮게 가라앉아 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축축한 습기가 싱그러운 풀 냄새며 나무 냄새를 풍겼다. 그 습기와 함께 들판 한쪽에 쌓여 있는 말똥 냄새도 요시다와 후미코는 마차를 타고 강변을 지나 시가 쪽으로 향했다. 하얼빈 신시가지 입구에 시장거리가 있었다. 시장에서 내려 그들은 여러가지 물건들을 구경했다. 노점상에서 움직이는 인형을 보며 후미코는 걸음을 멈추었다. 후미코가 인형을 무척 좋아하는 것을 알고 요시다는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돈을 꺼냈다. "아니에요, 사려는 것이 아니고 구경하는 거예요." 요시다가 노점상 주인에게 돈을 내밀자 후미코가 팔을 잡아 당겨 막았다. 상인은 몽고족처럼 머리를 한 갈래로 땋아 뒤로 넘긴 청년이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돈을 받으려다가 머쓱해지며 거두었다. 인형은 전지를 넣으면 북치고 장구를 치는 악대의 재미있어 했다. "얼마요?" 요시다가 들고 있는 1엔 짜리 화폐를 흔들며 물었다. "당신 일본말 알아?" "하이, 하이." "세 개에 2엔 줄 테니 팔겠나?" "세 개면 2엔 10전입니다." "10전도 못 깎아 주겠다는 것인가?" "세 개는 필요 없어요. 모두 두 가지 종류인데, 두 개만 살래요. 1엔에 두 개?" 후미코가 가로막으며 직접 흥정했다. 청년은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럼 가요. 다른 데 가서 사지 뭐." 후미코가 요시다의 팔을 끌며 가자 뒤에서 만주인 청년이 불렀다. "센세이. 센세이(선생님), 가져 "앞으로 물건 사려면 후미코를 데리고 다녀야 되겠군." 요시다가 말했다. 후미코는 인형을 가슴에 안고 키득키득 웃으며 몸을 흔들듯이 걸어갔다. 그때의 후미코는 천진난만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자 시장은 지저분하고 시끄러웠다. 비 온 후라서 땅이 질척거렸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나와 대기시킨 전세 마차를 타고 길림가 쪽으로 갔다. 길림가는 번화한 거리에 유럽식 건물들이 가득 들어찬 곳이었고, 사람들의 왕래도 많았다. 그들은 극장 앞에서 마차를 세웠다. 극장 앞 노점에 담배 파이프를 파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후미코는 노인 앞으로 가서 담배 파이프를 두 개 샀다. "이건 제 선물이에요. 나머지 하나는 오빠에게 드릴 거예요." "고맙소. 앞으로 이 파이프로 담배를 피워야겠군." "그게 건강에 좋을 거예요. 담배에는 니코틴이란 독소가 있어 폐에 나쁘대요." "하이, 하이. 명심하겠습니다, 부인." "싫어요. 난 처녀예요. 저는 영원히 처녀이고 싶어요. 부인이란 말은 징그러워요." "영원한 처녀로 남으면 난 어떡합니까?" "내가 왜 요시다 대위님을 책임져야 하나요?" "책임져야 합니다." "싫어요." "책임져." "하하하." 두 사람은 웃으며 극장 매표구로 갔다. 극장 간판에는 젊은 게리쿠퍼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미국 영화(사랑은 영원히)라는 애정물이었다. 미국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북부지역 남자 주인공과 남부지역 여자가 사랑하지만 주위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고 헤어지는 얘기였다. 남북간의 심한 대결을 배경으로 깐 그 영화를 보다가 여자가 울면서 마차를 타고 떠나는 장면을 보며 후미코가 울었다. 영화를 보고 나온 그들은 길림가에 있는 프랑스식 레스토랑에 들어가 비프 스테이크를 먹고 샴페인을 마셨다. 후미코는 샴페인 한 잔을 마시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자꾸 거울을 보며 걱정을 부쳤으나 쉽게 식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그들은 찻집에 들어가 중국의 향차를 마시면서 후미코의 홍조가 가시기를 기다렸다. 구름이 낮게 덮여서 날은 빠르게 어두워졌다.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할 때 그들은 찻집에서 나와 거리를 나란히 걸었다. 한없이 걸어도 지루하지 않을 여자, 요시다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없이 걸어가도 다리가 아프지 않은 남자, 후미코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은 731부대의 비밀 아지트 백화료(白花寮)로 들어가 삼십 분마다 다니는 버스를 타고 731부대로 향했다. 버스 안에는 휴일에 하얼빈에 나왔다가 부대로 돌아가는 가족들이며 군속들로 가득 찼다. 휴일만은 그들은 마치 속박에서 풀려나듯이 휴일에는 제복을 벗고 사복을 입었다. 그들을 태운 버스가 제1위병소를 지날 때 헌병이 들어와서 경례를 하고 탑승한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가슴에는 출입증을 달고 있어야 했지만, 대부분이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헌병이 내리자 차는 비행장과 본부가 있는 고전압 토담 사이의 넓은 길을 달렸다. 휴일 밤이었으나 본부의 건물은 불빛으로 휘황하게 밝았다. 대강당 앞에서 버스가 멈추자 사람들이 차에서 내렸다. 요시다와 후미코는 나란히 걸어 서쪽 신사 쪽으로 향했다. 요시다가 묵고 있는 독신자 관사가 신사 앞쪽에 있었고, 후미코가 기거하는 오빠 나가야마(永山) 대좌의 고등관 관사가 신사 내려 그릴 앞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마치 입이 아닌 가슴으로 대화하는 것처럼 언어가 중단되고 있었다. 말은 없었으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그릴 앞에서 헤어질 때 요시다가 한 손을 쳐들며 말했다. "잘 자요. 오늘 즐거웠습니다." "안녕." 후미코가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려고 할 때 그녀의 눈이 커지며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요시다의 뒤쪽을 응시했다. 요시다가 돌아보았다. 요시다의 뒤에 이시이 대위가 서 있었다. 그는 몹시 화가 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쏘아보았다. 이시이 나가데는 헌병 제복을 입고 있었고, 군도를 차고 있었다. 이시이 대위가 싸늘한 어조로 내뱉었다. "그럴 수가 있느냐, 그게 무슨 말인가?" 요시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반문했다. "요시다 군(君)."하고 이시이 대위는 억양에 힘을 주었다. 그는 화가 날 때면 요시다를 군(君)이라고 불렀다. "군은 친구의 애인을 빼앗아도 된다고 생각하나?" "이시이, 착각하지마. 난 너의 친구도 아니고, 후미코가 너의 여자도 아니다." "뭐가 어째. 이 새끼." "말 삼가라." "이 새끼. 나하고 싸울 테냐?" 이시이의 오른손이 군도를 잡았다. 요시다는 주춤했으나 물러서지 않았다. "싸우기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승부를 "안 돼요. 두 분 진정하세요." 후미코가 두 사람 사이로 와서 가로막았다. 이시이 대위는 군도를 잡았으나 칼을 빼지는 않았다. 요시다는 군도가 없었기 때문에 이시이를 노려보기만 하였다. "좋아. 너는 지금 군도가 없으니 참겠다. 그러나 날짜와 시간을 잡아서 승부를 내자. 난 널 없애야 되겠어." "이게 무슨 짓이에요?" 후미코가 이시이에게 소리쳤다. 이시이는 후미코의 항의를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요시다 대위에게 말했다. "어떤가? 비겁하게 나의 도전을 피하진 않겠지. 군도를 가지고 싸우지. 그걸로 승부가 나지 않으면 권총으로 하자. 너와 "좋아. 너의 도전을 피하지 않겠다. 어디서 싸울까?" "일 주일 후 월요일 저녁에 안다이(安達) 실험장에서 승부를 내자." "안다이는 여기서 1백2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왜 그곳에 가느냐?" "일 주일 후 월요일 그곳에서 모종의 실습훈련이 있다. 그때 비행기편으로 너도 함께 가자. 각오는 됐겠지? 그러나 일 주일 그 시간 이전에 나에게 무릎을 끓으면 도전을 거두어들일 수도 있다." "천만에. 내가 왜 너 같은 야만인에게 무릎을 끓느냐? 차라리 배를 가르겠다." "하하하. 역시 너는 일본군 장교다." "아, 제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그런 무모한 일은 마세요." 쳐다보았다. 이시이 대위는 자존심이 상했다. 두 사람은 포기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후미코, 난 너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어." 이시이 대위는 타오르는 눈빛으로 후미코를 바라보며 말했다. 타오르는 이시이의 눈빛이 단순한 애정의 불꽃은 아니었다. 분노의 불꽃이며 욕망의 빛인지도 모른다. 이시이 대위는 몸을 돌려 본부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저편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이시이의 등을 바라보다가 요시다는 후미코를 보았다. 당황한 후미코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 "싸우지 마세요. 이시이는 싸움꾼이에요.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않습니다." "무모한 싸움은 피하는 것이 더 용기 있는 거예요." "나는 약속했습니다."하고 요시다는 말했다. "후미코, 미안하오. 오늘 즐거웠는데 끝에 가서 괴로움을 주는 것 같군." "아니에요. 이게 어디 요시다 대위님 탓인가요. 이시이가 불량배이기 때문이에요. 그는 뻔뻔해요. 일방적이에요. 내가 자기의 애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왜 이렇게 화를 내며 요시다 대위님에게 행패를 부리는지 몰라요." "미안하오. 자아, 들어가서 쉬어요." "정말 싸우지 마세요. 이시이의 성격으로 죽이려고 할 거예요." 하겠지." "어머, 요시다 대위님답지 않게 무슨 말씀이에요? 싸우지 마세요. 약속해 주세요." "한 입으로 두 가지 약속을 할 수는 없습니다." "안 돼요. 싸우시면 안 돼요. 이시이는 프자덴이라는 암흑가 건달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불량한 사람이에요. 칼로 당할 사람이 없고, 사격도 부대에서 제일 잘해요. 그와 싸우면 져요." "싸우지도 않고 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운명에 맡겨야지." "안 돼요." 후미코는 울었다. 그녀가 흐느끼자 요시다는 당황했다. 그러나 그녀의 울음을 이시이 대위에게 당한 모멸을 감수할 수도 없었다. 후미코는 요시다를 잃는다는 생각을 하자 울음이 터진 것이다. 그녀는 몸을 돌리더니 고등관 관사 쪽으로 뛰어갔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핸드백과 함께 하얼빈에서 산 인형들이 들어있는 종이 봉투를 싸안고 그녀는 관사로 들어갔다. 요시다 대위는 독신자 관사 숙소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책을 읽으려고 했다. 일본에서 올 때 트렁크에 넣어서 가지고 온 책 중에 시집이 한 권 있었다 릴케의 다니는 사촌 누이동생이 그의 스물일곱 번째 생일날 선물한 책이었다. 책을 받았지만 읽어보진 못했다. 그러나 그날밤은 갑자기 릴케의 시가 읽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 후미코(美子)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후미코가 시를 써 주면 그것으로 작곡을 한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까 의문이었다. 일 주일 후면 그는 생명을 건 결투를 해야 했다. 이시이의 칼에 맞아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후미코가 몹시 당황하면서 극구 말리는 것은 분명 이시이 대위의 솜씨가 살인적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시다로서는 죽음이 두려워 그것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버릴 생각은 없었지만 이시이 대위와의 결투를 무모하다고 만은 보지 않았다. 이시이의 난폭한 얼굴이 떠오르자 책의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책상 위에 던지고 벽에 걸어 놓은 군도를 빼서 추켜들었다. 학창시절에 검도를 배우고, 장교훈련을 받을 때 검도를 했으나 칼을 잡지 않은 지 수 년이 흘러갔다. 군도는 항상 차고 다녔지만 뽑아서 사용한 기억이 별로 없었다. 그는 칼을 들고 대련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방이 좁아서 제대로 훈련이 되지 않았다. 그는 군도를 칼집에 꽂고 벽에 걸었다. 창가에 앉아 창문을 열었다. 서늘하고 축축한 밤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비가 오거나 습기가 차면 더욱 심하게 풀과 나무, 흙과 이끼낀 바위에서 나는 독특한 냄새를 밀어내고 변질시켰다. 한쪽으로 보이는 연못에는 비가 왔으나 물이 고여 있지 않았다. 물이 고이면 불결하다고 연못 옆으로 도랑을 파고 하수도로 물을 빼냈기 때문에 웅덩이에는 물이 없었다. 고여 있는 물에 모기가 서식해서 세균을 옮기기 때문에 취한 조치였다. 본부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독신자 관사까지 풍기는 악취는 어느 때는 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것은 바람이 독신자 관사 쪽에서 본부 쪽으로 불 때였다. 창문을 닫고 요시다는 벽에 걸려있는 권총을 빼 들었다. 권총으로 승부를 건다고 해도 이시이에게 이길 확률은 희박했다. 다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고, 가슴에 달린 메달 상평통보(常平通寶)를 만져 보았다. 생명을 지켜 줄 것이라고 하며 결코 목에서 떼지 말라고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