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들 때 열리는 승리 (출애굽기 17장 8절~16절)

작성자박용석|작성시간26.06.13|조회수1 목록 댓글 0


손을 들 때 열리는 승리 (출애굽기 17: 8-16)



광야는 인간의 모든 꾸밈을 벗겨 내는 자리입니다. 애굽의 벽돌 굽는 소리도 멀어지고, 홍해의 물결도 지나갔으며,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고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왔지만, 사람의 마음은 아직도 쉽게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도록 우리를 비워 내시는 자리입니다. 인간은 가시적이고 시간적인 것만을 붙잡으려 하기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손길을 자주 놓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빈 들판, 그 메마른 목마름, 그 끝없는 두려움 속에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생명은 애굽의 창고에 있지 않고, 너희의 미래는 군대의 칼날에 있지 않으며, 너희의 승리는 너희 손의 힘에 있지 않다. 너희의 생명은 나 여호와께 있다.”

출애굽기 17장의 이 전쟁은 단순한 부족 간의 충돌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속받은 백성이 은혜의 길을 걸어갈 때 반드시 마주하는 영적 현실의 그림자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나라다운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왕도 없고, 성벽도 없고, 정규 군대도 없고, 훈련된 병사도 없었습니다. 어제까지 노예였던 사람들이 오늘 광야의 순례자가 되었고, 바로의 채찍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제는 아말렉의 칼을 만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곧장 꽃길만 펼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홍해를 건넜다고 해서 다시는 바람이 불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만나를 먹었다고 해서 다시는 배고픔이 찾아오지 않는 것이 아니며, 반석에서 물을 마셨다고 해서 다시는 전쟁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에, 하나님의 길을 걷기 시작했기에, 전에 알지 못했던 싸움이 시작됩니다.

아말렉이 왔습니다. 성경은 아주 짧게 말합니다.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이 짧은 문장 속에는 광야의 먼지와 피로와 공포가 가득합니다. 아말렉, 히브리어로 עֲמָלֵק(아말렉)이라 불리는 이 이름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단순한 한 민족의 이름을 넘어, 하나님의 백성을 뒤에서 물어뜯고, 약한 자를 노리고, 은혜의 행렬을 끊어 놓으려는 적대의 상징으로 남습니다. 신명기의 말씀을 보면 아말렉은 이스라엘이 피곤하고 지쳤을 때 뒤에 처진 약한 자들을 쳤습니다. 얼마나 잔인한 모습입니까. 강한 자를 정면에서 상대하는 용기가 아니라, 지친 자의 발목을 베고, 늙은 자와 어린 자와 병든 자를 노리는 비열함입니다. 죄도 그렇습니다. 죄는 언제나 우리가 가장 약할 때 찾아옵니다. 영혼이 피곤할 때, 기도가 말랐을 때, 원망이 입술에 고였을 때, 사랑이 식었을 때, 믿음의 행렬 뒤편에서 헐떡이며 따라가고 있을 때, 어둠은 조용히 다가와 우리를 찌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아말렉이 왔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 전쟁 한가운데 자기 백성을 어떻게 붙드셨는지를 보여 줍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말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여기에는 땅의 싸움과 하늘의 싸움이 함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골짜기로 내려가야 했고, 모세는 산꼭대기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칼을 든 손도 필요했고, 하나님을 향해 들린 손도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서로 경쟁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기 은혜를 이 땅에서 이루실 때, 기도하는 손과 순종하는 발걸음을 함께 사용하신다는 뜻입니다. 참된 믿음은 골짜기를 버리고 산꼭대기에만 머무는 신비주의가 아니며, 산꼭대기를 잊고 골짜기의 칼만 믿는 행동주의도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 손을 들고, 하나님이 맡기신 자리로 내려가 싸우는 것입니다.

모세의 손에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지팡이는 מַטֶּה(맛테)라고 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나무 막대기가 아니었습니다. 나일 강을 피로 물들이고, 홍해 앞에서 길을 열고, 반석을 쳐서 물을 내게 했던 하나님의 표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팡이 자체가 능력은 아니었습니다. 지팡이는 마술 도구가 아니고, 종교적 부적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셨다는 기억의 표지였습니다. 인간은 자꾸 표지를 붙잡고 표지 너머의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은혜의 선물을 붙잡다가 은혜의 주인을 놓치고, 예배의 형식을 붙잡다가 예배 받으실 하나님을 잃고, 신앙의 업적을 세우다가 십자가 앞에서 무너져야 할 자기 자신을 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표지 속에 갇히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식과 제도와 성공과 감동 속에 갇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며, 시간의 시작과 끝을 손에 쥐신 분이십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이 장면은 참으로 신비롭고도 엄숙합니다. 전쟁의 판세가 골짜기의 칼끝에만 달려 있는 것 같지만, 성경은 우리의 시선을 산꼭대기로 이끕니다. 역사의 겉면에는 병사들의 함성과 창검의 부딪힘이 있지만, 역사의 깊은 곳에는 하나님께 들린 한 노인의 떨리는 손이 있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전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보이는 세계의 배후에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팔을 봅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역사를 만든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기념비를 세우며, 자기 치적에 날개를 달려 합니다. 그러나 한 방울의 영원은 시간 아래 있는 모든 영광의 바다보다 더 무겁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스치면 제국의 칼도 마른 풀처럼 시들고, 하나님의 침묵이 열리면 광야의 먼지도 성소가 됩니다.

모세의 들린 손은 기도의 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종교적 열심의 자세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백성의 운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인정하는 손입니다. 그것은 “주님, 우리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손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의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손이 아니라, 빈손으로 은혜를 구하는 손입니다. 믿음은 결국 빈손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내면에 축적된 신념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을 변명할 수 없게 된 영혼의 항복입니다. 믿음은 자기 가능성을 높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불가능성의 심연 앞에서 하나님의 가능성 안으로 던져지는 것입니다. 혈과 육은 이것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세상의 지혜도 이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어제 들은 말씀을 오늘 다시 들어야 하는 일이며, 오늘 붙든 은혜를 내일 또 새롭게 붙들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모세의 손도 피곤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피곤해졌습니다. 홍해를 가른 손, 반석을 친 손, 바로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손도 시간이 지나자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위대한 지도자도 피곤합니다. 오래 기도한 사람도 지칩니다. 믿음의 연륜이 깊은 사람도 때로는 손이 내려옵니다. 나이가 들면 육신의 힘이 빠지고, 젊어도 영혼이 낙심하면 손이 떨립니다. 사람은 누구나 유한합니다. 유한한 인간은 자기 시간의 끝을 언젠가 죽음으로 경험합니다. 죽음은 인간 시간성의 마지막 표지이며,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이 세상의 엄숙한 법입니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 너머에서 우리를 만나시는 하나님입니다. 동시에 죽음보다 더 큰 소망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로운 시간, 영원한 생명의 빛 속으로 불러 주신다는 은혜입니다.

모세의 손이 피곤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깊은 위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대리석 조각상처럼 그리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눈물과 약함과 흔들림을 숨기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두려워했고, 야곱은 속였고, 모세는 주저했고, 엘리야는 탈진했고, 베드로는 부인했고, 바울은 육체의 가시로 탄식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강한 자의 강함을 통해서만 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의 약함 속에서도 자기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인간의 손이 내려오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더 깊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끝까지 버티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끝까지 붙드시기 때문에 우리가 버팁니다.

그때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들었습니다. 돌을 가져다가 모세를 앉게 하고,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그의 손을 붙들었습니다. 해가 지도록 그의 손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이것은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홀로 영웅이 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서로의 손을 붙들어 주는 공동체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도 돌이 필요합니다. 앉을 자리가 필요합니다. 누군가의 어깨가 필요합니다. 혼자 서겠다고 고집하는 사람은 오래 서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서로를 통해 하나님의 붙드심을 경험합니다. 아론과 훌의 손은 단순한 인간적 도움을 넘어, 하나님께서 공동체를 통해 베푸시는 은혜의 통로였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누군가의 모세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자주 우리는 누군가의 아론과 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산꼭대기에서 보이는 자리에 설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골짜기에서 싸우고, 어떤 사람은 산에서 기도하고, 어떤 사람은 말없이 옆에서 손을 받쳐 줍니다. 하나님 나라는 박수받는 손만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 이름 없이 받쳐 주는 손, 눈물로 중보하는 손, 지친 사람 곁에 조용히 머무는 손을 통해 세워집니다. 세상은 무대 위의 사람만 기억하지만, 하나님은 무대 뒤에서 무릎 꿇은 사람을 보십니다. 세상은 결과를 묻지만, 하나님은 사랑을 보십니다. 세상은 승리의 깃발을 든 사람을 높이지만, 하나님은 그 깃발 아래서 피 흘리며 기도한 영혼을 잊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를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기고 내려가면 졌다는 말씀은, 기도가 하나님을 조종하는 기술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도는 인간이 하늘을 움직이는 손잡이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욕망 아래 끌어내리는 장치가 아닙니다. 기도는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로 들어가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드는 일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는 일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들린 손은 승리의 주문이 아니라 의존의 고백입니다. “주님, 주께서 싸우셔야 합니다. 주께서 붙드시지 않으면 우리는 무너집니다. 주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면 우리의 칼은 쇳조각에 불과하고, 우리의 전략은 바람에 흩어지는 먼지에 불과합니다.”

여호수아는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찔렀습니다. 여호수아의 순종도 귀합니다. 그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지 않았다고 해서 덜 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골짜기에서 싸웠습니다. 믿음은 때로 기도실에서 무릎 꿇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때로 삶의 현장에서 정직하게 싸우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병든 부모를 돌보는 손, 가정을 지키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는 발, 유혹 앞에서 아니라고 말하는 결단, 억울함 속에서도 악으로 악을 갚지 않는 인내, 교회와 이웃을 위해 조용히 섬기는 노동, 이 모든 것이 믿음의 골짜기입니다. 산꼭대기의 기도와 골짜기의 순종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기도 없는 행동은 자기 의로 굳어지고, 행동 없는 기도는 공허한 종교성으로 마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손도 사용하시고, 여호수아의 칼도 사용하시며, 아론과 훌의 붙듦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승리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전쟁이 끝난 후 모세는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불렀습니다. 히브리어로 יְהוָה נִסִּי(여호와 닛시), 곧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깃발은 נֵס(네스)입니다. 전쟁터에서 깃발은 군대의 중심이요, 방향이요, 정체성입니다. 병사들은 혼란 속에서 깃발을 보고 자기 자리를 찾습니다. 연기와 먼지와 피비린내가 가득한 전쟁터에서 깃발은 “우리가 누구에게 속했는가”를 말해 줍니다. 모세는 승리 후에 자기 이름을 새기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의 용맹을 기념하는 비석을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제단을 쌓고 말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시다.” 이 고백이야말로 믿음의 절정입니다. 나의 승리는 나의 이름을 드러내는 재료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제단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승리 후에 가장 위험합니다. 패배의 자리에서는 울며 기도하지만, 승리의 자리에서는 쉽게 자신을 높입니다. 어려울 때는 “주님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하다가, 문제가 해결되면 “내가 해냈다”고 말합니다. 병상에서는 은혜를 찾다가, 건강해지면 자기 힘을 믿습니다. 실패했을 때는 십자가를 붙들다가, 성공하면 십자가를 장식품으로 바꿔 버립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높인다고 말하면서 실상은 자기 자신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 나라를 말하면서 자기 왕국을 세우려 합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승리의 날에 제단을 쌓습니다. 참된 은혜는 축복을 자기 자랑의 재료로 삼지 않고, 감사의 번제로 드립니다.

“여호와 닛시.” 이 고백은 오늘 우리의 영혼에도 필요합니다. 우리의 깃발은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건강입니까, 자녀입니까, 명예입니까, 경험입니까, 신앙의 경력입니까, 교회의 직분입니까, 사람들의 인정입니까.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 될 수 있지만, 깃발이 될 수는 없습니다. 깃발이 잘못되면 인생의 방향이 무너집니다. 깃발이 흔들리면 군대가 흩어지듯, 우리 영혼도 하나님 아닌 것을 중심으로 삼으면 결국 흩어집니다. 세상의 모든 깃발은 언젠가 찢어집니다. 젊음의 깃발은 세월 앞에 내려오고, 건강의 깃발은 병 앞에 떨리며, 재물의 깃발은 죽음 앞에 무력해지고, 인간의 명예는 한 줌 흙 앞에서 침묵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깃발은 영원합니다. 그 깃발 아래 있는 사람은 광야에서도 길을 잃지 않습니다.

이 본문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끕니다. 모세가 산 위에서 손을 들었고, 여호수아가 골짜기에서 싸웠으며, 아론과 훌이 그 손을 붙들었지만, 이 모든 그림자는 더 크고 영원한 실체를 향해 흐릅니다. 모세의 들린 손은 중보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손은 피곤했습니다. 모세는 앉아야 했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우리의 참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피곤하여 손을 내리신 분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두 손을 벌려 끝까지 자기 백성을 품으신 분입니다. 모세의 손이 올라갔을 때 이스라엘이 이겼다면, 그리스도의 두 손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죄와 사망의 권세가 결정적으로 패배했습니다.

갈보리 언덕은 참된 산꼭대기였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군사적 깃발을 드신 것이 아니라, 찢기신 몸을 깃발처럼 내어 주셨습니다. 세상은 그 십자가를 실패로 보았습니다. 로마는 그것을 처형 도구로 보았고, 종교 지도자들은 그것을 저주받은 자의 표지로 보았으며, 제자들은 한때 그것을 절망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를 뒤엎습니다. 십자가는 패배의 나무가 아니라 승리의 보좌였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침묵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향해 가장 깊이 말씀하신 자리였습니다. 거기서 심판 가운데 무죄선고가 열렸고, 죽음 가운데 새 생명이 솟아났고, 시간 속에서 영원이 터져 나왔습니다.

하나님에게 겉모습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종교적 가면에 속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는 연출의 대상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장식으로 만들고, 부활을 교리의 문장으로만 가두며, 은혜를 자기 번영의 수단으로 삼는 순간, 우리는 다시 아말렉의 길로 기울어집니다. 십자가는 우리 자아의 왕좌를 무너뜨립니다. 십자가 앞에서 율법적 행위는 우리에게 안전 보장도, 변명도, 평안도 주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입 벌린 심연을 보여 주며, 동시에 그 심연 위에 하나님께서 친히 놓으신 은혜의 다리를 보여 줍니다. 그 다리는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 길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그 승리는 우리의 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못 박히신 손입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은 끝났지만,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이것은 단순한 복수의 선언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대적하는 악에 대한 거룩한 심판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영원히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무관심이 아니며, 하나님의 침묵은 무능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악이 더 빠르게 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삽니다. 거짓이 진실보다 크게 외치고, 폭력이 온유함을 짓밟고, 탐욕이 사랑을 조롱하며, 약한 자들이 뒤편에서 쓰러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묻습니다.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보시고, 기억하시며, 마침내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의 끝에 붙은 작은 부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거룩한 결말입니다. 악이 영원히 웃을 수 없고, 눈물이 영원히 땅에 버려지지 않으며, 억울함이 영원히 침묵 속에 묻히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의 메시지는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말렉만 정죄하고 자신을 의인으로 세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도 아말렉의 그림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약한 자를 무시하는 마음, 지친 자를 정죄하는 말, 하나님의 백성을 흔드는 교만, 은혜보다 힘을 믿는 본성, 십자가보다 자기 의를 붙드는 완고함, 이것이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아말렉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밖의 원수만 보게 하지 않고, 내 안의 원수 앞에서도 떨게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세상의 칼보다 하나님 없는 자기 확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서 계시지 않으면 온갖 무가치한 것들이 우리를 대항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감추셨다면, 우리의 생은 더 이상 우연한 생존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세상이 흔들어도, 병이 찾아와도, 죽음의 그림자가 문 앞에 서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완전히 버려지지 않습니다. 죽음에서 인간이 만나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주인이신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로 우리를 맞아 주신다면, 죽음은 더 이상 마지막 주인이 아닙니다. 죽음은 문이 되고, 그리스도는 그 문 너머의 생명이 되십니다.

부활은 바로 이 승리의 최종 선언입니다. 부활 가운데 성령의 새 세계는 육의 옛 세계와 접촉합니다. 십자가에서 죄가 심판받고, 부활에서 새 창조가 열렸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히 한 위대한 인물의 생환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간 속에 떨어진 영원의 불꽃이며, 죽음의 세계 한복판에서 솟아난 하나님의 새 아침입니다. 마지막 날, 모든 시간이 영원 앞에 서고, 인간의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친히 닦아 주실 때,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광야의 전쟁도 헛되지 않았고, 피곤한 손도 버려지지 않았고, 이름 없는 아론과 훌의 섬김도 잊히지 않았으며, 골짜기에서 흘린 여호수아의 땀도 주 안에서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비유를 마음에 새겨 볼 수 있습니다. 거친 바다를 건너는 작은 배가 있었습니다. 밤은 깊고 파도는 높았습니다. 배 안의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멀리 한 줄기 빛이 보였습니다. 등대였습니다. 그 빛은 파도를 멈추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바람을 즉시 잠재우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빛은 방향을 주었습니다. 선장은 그 빛을 바라보며 키를 잡았고, 사람들은 아직 흔들리는 배 안에 있었지만 이미 길을 잃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 닛시는 바로 그런 깃발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 인생의 파도를 즉시 없애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의 빛을 세워 주십니다. 그 빛을 바라보는 영혼은 아직 울면서도 길을 잃지 않습니다. 아직 병상에 있어도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어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깃발은 환경이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르비딤이 있습니다. 르비딤은 물이 없어 원망하던 자리였고, 동시에 전쟁이 찾아온 자리였습니다. 목마름과 전쟁이 한곳에서 만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몸은 피곤하고 마음은 마르고 관계는 아프고 미래는 흐릿한데, 바로 그때 또 다른 싸움이 몰려옵니다. 경제적 염려, 질병의 두려움, 가족의 갈등, 신앙의 침체, 외로움, 죄책감, 죽음에 대한 생각, 지난날의 후회가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주님, 반석의 물을 마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왜 또 전쟁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물도 주었고, 전쟁 속에서도 함께하겠다. 너는 나를 시험하는 자리에서 나를 신뢰하는 자리로 나아오라.”

믿음은 모든 문제가 사라진 뒤에 생기는 여유가 아닙니다. 믿음은 문제가 아직 남아 있을 때 하나님을 붙드는 은혜입니다. 믿음은 골짜기의 먼지 속에서도 산꼭대기를 바라보는 눈입니다. 믿음은 손이 떨릴 때에도 누군가와 함께 다시 손을 드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자의 새로운 방향 설정입니다. 믿음은 값진 진주를 얻기 위해 가난해지는 자의 기쁨이며, 예수 때문에 자기 생명을 내려놓는 자의 자유입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에게 쉽고도 어렵습니다. 가능한 것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기 때문이고, 불가능한 것은 인간의 혈과 육으로는 결코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손을 드십시오. 그러나 자기 의의 손을 들지 마십시오. “내가 이만큼 했습니다”라는 손을 들지 마십시오. “나는 저 사람보다 낫습니다”라는 손을 들지 마십시오. 십자가 앞에서 그런 손은 내려와야 합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손은 가난한 손입니다. 회개하는 손입니다. 은혜를 구하는 손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손입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손이 내려갈 때, 그 손을 붙들어 주십시오. 판단하기 전에 곁에 앉아 주십시오. 충고하기 전에 함께 울어 주십시오. 쉽게 정죄하기 전에 돌을 가져다가 앉을 자리를 만들어 주십시오. 교회는 지친 손을 비난하는 곳이 아니라, 지친 손을 함께 들어 올리는 은혜의 공동체입니다.

목회적으로 이것은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어느 가정에는 모세처럼 손을 들고 버티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자녀를 위해 밤마다 울며 기도하지만, 이제는 손목이 아프고 마음이 지쳤습니다. 어느 교회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십 년을 섬긴 성도가 있습니다. 아무도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 작은 촛불처럼 자리를 지켰습니다. 어느 병상에는 기도할 힘조차 없어 눈물만 흘리는 성도가 있습니다. 어느 노년의 마음에는 지나간 세월의 그리움과 남은 날의 두려움이 함께 앉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손을 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안다. 네 눈물을 안다. 네 피곤함을 안다. 네가 끝까지 나를 붙든 것이 아니라,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너를 붙들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그 하나님의 붙드심입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손이 내려오는 사람들입니다. 결심도 내려오고, 기도도 내려오고, 사랑도 내려오고, 감사도 내려오고, 인내도 내려옵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 들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조롱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오라.” 그러나 주님은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못이 그분을 붙든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그분을 붙들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언약의 신실함이 그분을 붙들었습니다. 그분은 내려오실 수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버릴 수 없어서 십자가에 머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손 힘에 달려 있지 않고, 십자가에서 끝까지 펼쳐진 그리스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세상의 다른 진리들 곁에 나란히 놓이는 하나의 종교적 의견이 아닙니다. 복음은 모든 인간의 진리 주장을 질문대 앞에 세우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인간아, 너는 무엇으로 너 자신을 구원하려 하느냐. 너는 무엇을 깃발로 삼고 있느냐. 너는 무엇 앞에 무릎 꿇고 있느냐. 너는 어떤 승리를 자랑하고 있느냐. 복음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의 의로는 안 된다. 너의 열심으로도 안 된다. 너의 눈물 자체로도 안 된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 그리스도께서 여신 새 생명만이 너를 살린다. 은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갈라진 심연을 잇는 그리스도의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이미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결정적인 방향을 얻었습니다. 물론 아직 전투는 남아 있습니다. 아말렉의 그림자는 역사 속에서 반복되고, 죄의 유혹은 우리를 흔들며, 죽음의 그림자는 여전히 우리 곁을 지나갑니다. 그러나 최종 승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선포되었습니다. 우리는 승리하기 위해 불안하게 싸우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깃발을 만들기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세워진 여호와의 깃발 아래 모인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깃발은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노래는 은혜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부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손이 내려오는 날이 있습니까. 기도하려 해도 말이 나오지 않고, 믿으려 해도 마음이 따라오지 않으며, 웃으려 해도 눈물이 먼저 고입니까.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손이 떨리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다만 혼자 있지 마십시오. 십자가 아래로 오십시오.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누군가에게 기도를 부탁하십시오. 그리고 누군가의 손을 붙들어 주십시오. 우리가 서로의 손을 붙드는 동안, 사실은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가 해가 지도록 버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인내가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 저녁보다 길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의 피곤보다 깊기 때문입니다.

해가 졌습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아말렉은 물러갔고, 이스라엘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그날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여호수아의 칼소리도, 병사들의 함성도 아니었습니다. 오래 남은 것은 제단의 이름이었습니다. “여호와 닛시.” 여호와는 나의 깃발. 우리의 인생도 언젠가 해가 질 것입니다. 젊음의 해가 지고, 건강의 해가 지고, 사명의 해가 지고, 마침내 이 땅의 마지막 해가 질 것입니다.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남겠습니까. 우리의 업적입니까. 우리의 재산입니까. 사람들의 박수입니까.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이 고백입니다. “주님이 나의 깃발이셨습니다. 주님이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나의 피난처였고, 주님의 은혜가 나의 생명이었고, 주님의 부활이 나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눈물 속에서도 다시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원망의 르비딤을 예배의 제단으로 바꾸십시오. 피곤한 손을 다시 주님께 드십시오. 그리고 말하십시오. “주님, 나는 약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강하십니다. 나는 자주 내려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내려오지 않습니다. 나는 끝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처음과 마지막이십니다. 나는 광야 한복판에 서 있지만, 주님은 나의 깃발이십니다.” 그 고백 위에 성령께서 바람처럼 임하실 것입니다. 낙심한 영혼을 일으키시고, 굳은 마음을 녹이시고, 마른 눈물 속에 다시 기도의 샘을 여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승리는 우리의 이름으로 오지 않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옵니다. 구원은 우리의 손에서 시작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손에서 완성됩니다. 우리의 오늘은 선물이고, 우리의 내일은 소망이며, 우리의 영원은 주님의 은혜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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