쟝 밥티스트 비욤(Jean Baptiste Vuillaume, 1798 ~ 1875)
바이올린 제작 집안에서 태어나 기술을 익힌 후 1818년 François Chanot 공방에 들어가기 위해
파리로 오게된다. 그 후 몇몇 공방을 거치다가 1823년부터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은
악기가 나오기 시작한다(그러나 아직 자신의 공방을 소유한것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의 공방을 연것은 1827년 파리박람회에서 은메달을 수상한 다음해인 1828년 부터이고
나날이 발전한 그의 기량은 1839, 44년에 금메달과 프랑스 황제 훈장을 안겨주기까지 한다.
일반적으로 명기를 결정하는 요소의 70%이상이 재료에 달려 있다고 한다.
비욤의 19세기 중반 이전 레이블은 70%이상의 성공확률을 안고 시작하는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왜냐면 파리 공방을 연 초기 그의 바이올린들은 최상급의 재료를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 제작자의 아픔이라고나 할까? 그 당시에도 전문연주자들은 이태리 악기를 선호했고
이미 비욤의 악기가 명성을 얻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많은 고객들은 이태리 악기도 찾았던 것 같다.
비욤은 이때문에 제작자와 악기딜러를 겸하면서 유명한 이태리의 악기수집가문인 Tarisio 등으로 부터
주로 과리넬리를 중심으로 명기들을 사들여 공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만든 악기가 과리넬리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 또는 자부심의
발로였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사들이는 물량은 한계가 있는데 달라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일까?
비욤이 기쁜 마음으로 혹은 서글픔으로 과리넬리를 카피하기 시작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는 과리넬리, 스트라드 등을 카피했다. 그리고 그 소리의 완성도와 바니쉬가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되었고 전문가들 조차 진품과 비욤의 카피를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제작자로서의 자존심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욤은 자신이 카피한 완성도 높은 과리넬리 등을
과리넬리로 팔지 않았다(완성도 높은 프라다 짝퉁을 상해 푸동공항 프라다 면세점에서 팔듯이 말이다)
레이블이나 낙인에 자신의 이름과 제작지인 Paris를 항상 선명히 새겨놓았다.
모랄까, 이태리 크레모나 만이 바이올린 제작의 메카요 넘버원이 아니라는 일종의 항변처럼 말이다.
그의 악기는 정말로 훌륭해서 훗날 핑커스 쥬커만 까지도 비욤의 바이올린을 오랫동안 愛器로 사용하면서
극찬을 해왔고 소더비에서인가 당시 최고의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하지만 비욤이 카피한 모든 악기가 다 명품은 아니다. 그가 과리넬리와 스트라드의 비밀을 풀어냈다고
소문이 나면서 (하지만 연구가들은 비밀을 풀어냈다기 보다는 자신만의 방법과 최고의 재료를 통해
완성도를 높힌 것으로 평가한다), 주문이 폭주했고 비욤과 그 형제들은 많은 사람들을 고용하여 대량생산을
해내기에 이르렀다. 1850년 이후 비교적 어렵지 않게 만나는 비욤 공방 악기들이 이에 해당되는데
약 3,4천개의 악기가 1880년대 까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당시 악기들도 레이블은 1840년대
것을 사용하고 있어서 유통시장이 문란해진것도 사실이다. (원산지, 유통기한 표기의 중요성 ^^)
뿐만 아니라 19세기말 ~ 20세기초에는 이미 작고한 고인을 지나치게 추모(?)한 나머지 많은 제작자들이
비욤을 카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비욤과 비욤 공방에서 함께 제작했던 비욤 형제들은 모두 1880 이전에
사망했고 그의 자녀가 대를 이었다는 기록은 없는 것을 보면 자녀들은 부자가 된 아버지 덕에 더 이상
헝그리 정신을 가지지 않았나 상상해본다 (어디까지나 상상)
결론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비욤의 악기 중 최고급은 단연 (1)19세기 초 최고재료 및 비욤의
손끝에서 거의 모든게 이루어진 오리지날 비욤 (형태는 스트라드 포맷을 주로 사용) 또는 (2)마찬가지
시기의 과리넬리 카피 드 비욤이다.
때문에 비욤의 악기 가격은 (1),(2)의 경우에 해당된다는 certificate이 있을때와 그렇지 않을때의 가격이
5배 ~ 20배 정도 차이가 있다고 보면 된다. 소더비, 크리스티, 타리시오 경매 등의 최근 기록은
10만 ~ 15만불 선이다. (군침만 꿀꺽)
여기서 실용적인 얘기로 넘어가 보자. 과리넬리의 추앙자이자 라이벌로서 과리넬리를 넘어서고자 했던
비욤이 우리 같은 평민을 위해 남겨준 3 ~ 4천개의 대량생산품들 (약 40년간 4천개면 1년에 100개,
휴일 빼고 3일에 한개씩 만들었다는 얘긴데, 당시 공방에 몇명 근무했는지는 몰라도 산업혁명 이전이고
자동화 설비 자연히 없었을 테니까 그래도 비욤과 그 패밀리가 관리감독한 수공 아니겠는가?).
그들은 지금 어디를 헤매고 있나? 필자와 우리 카페 멤버 같은 분들이 애타게 찾고 있는데 말이다.^^
유럽에서, 특히 프랑스에서 살만한 가장 현실성 있는 악기중의 하나가 비욤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20세기 초
비욤을 카피한 copy of 비욤 copy of 과르넬리를 구별해 낼 수만 있다면 말이다.
(필자는 진품으로 여겨지는 녀석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입시하는 지인의 자녀에게 빌려준 상태다.
올해 입시 끝나고, 반드시 합격하고 돌려받게 되면 그때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재수하게 되어서
내년 말이나 올린다는 방정맞은 생각 절대 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