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질적인 영웅
길가메시가 이슈타르 여신을 그토록 가혹하게 비난하면서 여신의 유혹을 물리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길가메시가 두려워한 것은 여신의 변덕이었다. 이슈타르 여신은 탐무즈를 사랑했지만 가차 없이 그를 지옥의 여신에게 내주기도 했다. 길가메시가 여신을 비난한 대목을 다시 되돌아보자. ‘당신은 미풍이나 외풍에도 흔들리는 거적문이며, 용맹한 전사를 뭉개 버리는 궁궐이며, 그 건축물을 갉아먹는 쥐이며, 짐꾼의 손을 검게 만드는 역청이며, 물을 나르는 사람에게 물벼락을 주는 물 가죽부대며, 돌로 된 벽도 기울게 하는 석회암이며, 적군을 끌어들이는 성벽을 부수는 망치며, 주인의 발을 꼭 조이게 하는 신발인 거야!’ 자신에게로 오면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하는 사랑의 여신에게 그가 내뱉는 말은 그녀가 무엇을 주고서는 다시 빼앗아 가는 변덕스러운 존재라는 악담이다.
길가메시가 비난하는 것은 사랑의 여신이 제공해 주는 아름다움과 힘과 풍요가 아니라 그 뒷면, 말하자면 에레슈키갈적인 면모다. 사랑의 여신은 그 둘을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태모신을 섬긴 모권사회에서 가부장제를 기축으로 하는 부권사회로 넘어오면서 영웅신화가 부각된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라고 평가되는 길가메시 서사시 역시 길가메시라는 가부장적 영웅의 영생 탐사기다. 영웅신화는 남성 주인공이 어떻게 어머니 여신의 품에서 떨어져 나와 우주 자연이 지닌 원래의 힘을 극복해 나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지 않고 역행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정립해 나간다. 영웅에게 중요한 과제는 일종의 ‘극복’이다. 그들에게 자연의 변화무쌍함은 일종의 악이다. 또한 자연과 자신을 서로 유리된 존재로 바라보고 자신의 내적 자연성에도 저항하고 싶어 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내부에서 울리는 자연의 속삭임, 자연의 욕망이 그들에게는 저항해야 할 악이 되는 셈이다. 그 악과 싸워 이김으로써 의지의 힘을 입증하는 것, 그것이 영웅의 과제다.
길가메시는 우루크에 있는 모든 여자를 자기 소유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우쭐댄다. 그의 오만을 보다 못한 신들이 엔키두(Enkidu)라는 자연의 남성을 길가메시의 친구로 보낸다. 엔키두는 자연과 문명 둘 사이에 있는 존재다. 그는 인간이면서 동물과 어울려 놀며 얼굴에는 하나 가득 털이 덮여 있다. 길가메시가 엔키두에게 반해 그를 친구로 삼게 된 것은 그의 어마어마한 힘 때문이다. 길가메시가 좋아하는 것은 힘이다. 왜냐하면 그 힘으로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두 남자가 힘을 합쳐 처음으로 한 일이 바로 삼나무 숲을 지키는 훔바바(Humbaba)를 죽이고 훔바바의 힘을 빼앗아 온 것이다.
그들이 훔바바를 죽이는 장면은 무척 잔인하다. “그는 도끼를 옆에 들고 허리춤에서 칼을 뽑았다. 그는 훔바바의 목을 내리쳤다. 두 사람은 훔바바의 오장육부를 해체했는데 혀를 비롯해 허파까지 몸속 모든 것을 파냈다. 길가메시는 가마솥 안에 그의 머리를 집어넣었다. 무언가가 무더기째로 산 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삼목 숲을 잘라 내고 있었다.”
이것이 영웅이 자연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길가메시 서사시의 저자는 바로 영웅의 이런 모습을 찬양한다. 자연과 싸우고 자연의 신성을 파괴하면서 영웅은 자연의 힘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길가메시는 훔바바를 죽임으로써 신들의 비밀스러운 성소의 문을 열었고 훔바바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일곱 후광을 취했다. 길가메시는 자신의 무력을 도구 삼아 신이 되기를 원했고 신이 되기 위해 신성한 것들과 싸워 이기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영생을 얻지 못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길가메시가 영생을 얻기 위해 벌인 이러한 투쟁은 과거 그의 선대에서 신들의 제왕으로 숭배받던 마르두크(Marduk)가 태초의 어머니 여신에게 한 행동과도 유사하다. 바빌로니아 지방에서 섬김을 받던 최초의 여신은 티아마트라고 불리는 바다의 여신이었다. 티아마트에게는 아프수(Apsu)라고 불리는 남편이 있었다. 둘 모두 물의 신이었는데 티아마트가 짠물의 신이라면 아프수는 민물의 신이었다. 이 둘은 여러 자식을 낳았고 그러면서 세상은 차츰차츰 질서 잡혀 갔다. 그러나 신들의 자식이 많아지다 보니 세상이 너무 시끄러웠다. 참다못한 아프수는 자식들을 없애 버리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들을 낳은 티아마트가 그러는 남편을 말렸다.
그러다 어느 날 아누(Anu) 신이 커다란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세상을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바람에 큰 신들의 분노를 불렀다. 이 바람 때문에 티아마트의 분노는 폭발 지경에 이르렀고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자식들의 시끄러운 장난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티아마트는 자식들을 없애 버리기로 작정하고 괴물뱀들을 만들어 냈다. 신들의 막내이자 강력한 젊은 신이던 마르두크가 할머니뻘 되는 티아마트와 싸우는 데 선봉에 섰다. 그는 거대한 바다용으로 변해 입을 벌리고 있는 티아마트의 입 안에 악한 바람을 불어 넣었다. 티아마트가 주춤거리는 사이 그는 티아마트의 입속에 화살을 퍼부었고 마침내 화살이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 태초의 여신은 그렇게 숨을 거두었고 마르두크는 여신의 머리를 몽둥이로 으깨어 버렸다. 그러더니 포를 뜨듯이 여신의 몸을 반으로 갈라 한쪽은 하늘에 붙이고 한쪽은 땅에 붙들어 매었다. 이 일로 해서 마르두크는 신들의 제왕이 되어 모든 것을 다스렸다.
조지프 캠벨은 이 신화가 원시 모권 사회를 침략한 부권적 유목민들이 스스로의 침략과 지배의 정당성을 만들어 내기 위해 토착 원주민들의 신들을 깎아 내린 결과라고 지적한다. 흔히 괴물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여신은 대부분 부권적 유목민들의 ‘신화적 비방’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번개를 휘두르고 무기를 휘두르는 남신이 신들의 왕으로 등장하면서 그 이전의 어머니 신들이 괴물의 모습으로 바뀐다. 얼굴을 마주친 사람을 돌로 만들어 버린다는 머리카락이 뱀으로 이루어진 메두사, 수많은 머리가 달린 물뱀 히드라, 사자와 염소와 뱀의 결합체인 키마이라(Chimaera) 등은 모두 태고적 땅을 움직이는 생생한 생명력을 나타내는 존재였다. 이 괴물 여신은 모두 남성 영웅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들 모두 인간중심적인 질서에 방해가 되는 악한 존재로 간주되는 것이다.
길가메시는 이슈타르 여신을 비방한다. 자신 역시 사랑의 힘에 의해 생명을 얻게 되었는데도, 또한 자연의 피와 살로 이루어진 존재인데도 모든 것을 가져다 준 근원적인 어머니 자연을 부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자연의 일부분으로 솟아난 인간이 스스로의 근원을 부정하고 자신을 그와는 다른 존재로 규정하고 싶은 것과 마찬가지다. 자연이 자신을 낳았지만 다시 자신을 거둔다는 사실이 영웅에게는 불만스러웠고 한때는 포근하던 자연의 바람이 겨울이 되면 차가워지고,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구조물의 재료를 제공하고 방법을 알려준 자연이 그것들을 부패하게 만들고 흔들리게 만든다는 사실이 영웅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자연이 지닌 이 변덕스러움을 길들여 언제나 풍요를, 언제나 안전을, 언제나 쾌락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러기 위해 조종하고 정복하며 빼앗고 축적한다. 영생을 얻으러 길을 떠난 길가메시에게 이슈타르의 유혹이 헛소리로 여겨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욕망은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지 자연의 뜻에 따라 찾아오는 잠깐의 기쁨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길가메시를 비롯한 영웅들이 개척한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그들이 원하던 것처럼 인간중심적으로 질서 잡혀 있고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해 보인다.
우리는 내일이 오늘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고 앞으로의 미래도 예측가능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산다. 예측 가능한 미래를 준비해 주는 수많은 제도적 장치와 상품이 우리 주변을 에워싸고 있으며 그러한 것들이 만약 아무런 쓸모가 없는 상황이 다가온다면 우리 모두 패닉 상태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혹시 아는가. 여신이 아직도 길들여지지 않아서 변덕이 살아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 아니겠는가.
참고문헌
- 김산해,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휴머니스트, 2005, 159쪽.
- 조지프 캠벨, 《신의가면 Ⅲ: 서양 신화》, 이진구 옮김, 까치, 1999, 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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