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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정부

열세번째 지파: 하자르 제국의 역사> 제.. 국제유태자본론

작성자가을|작성시간09.12.05|조회수1,827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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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1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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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카페 > 【부흥】네이버 대표 역사 카.. | 뱀장수
원문 http://cafe.naver.com/booheong/36315

글에앞서(필독!!):

 

이 책은 아서 쾨스틀러 Arthur Koestler 가 1976년에 쓴 "The Thirteenth Tribe" 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책은 원래 1)하자르제국의 역사와 2)제국의 멸망 이후의 하자르 유대인들, 이렇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번째 파트인 역사 부분은 그다지 별 문제가 없는데.. 문제가 되는 것은 멸망 이후의 하자르 유대인들에 대한 부분입니다.

 

 두둥..

 

혹시 이런 얘기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을 차지하는 유대인들의 상당수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아니라는.

이게 뭔 소리냐면,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의 상당수가 아브라함과 핏줄로 연결되지 않은 하자르 유대인들의 자손이라는 얘기입니다.


(참고로, 구약성서는 개종자를 유대인으로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런경우는 유대인이되, 아브라함의 핏줄은 아닌거죠.)
이러한 주장은 반 유대주의자들과, 자신들이 아슈케나지들에게 차별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 다른 유대인들에게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아서 쾨스틀러가 쓴 이 책의 두번째 파트는 이러한 주장을 집대성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쾨스틀러가 반 유대주의자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 자신이 아슈케나지 유대인입니다. 나름대로 이름도 있던 문필가인데요.
자기 나름대로는 상당히 진지하게 아슈케나지의 하자르 요소를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배경 때문에 그의 주장은 오히려 반-유대, 혹은 반-이스라엘 주의자들에게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물론 역사계에서의 비판도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주장은 90년대 이후 DNA 분석기술이 실용화되면서 기반을 상실했습니다.
비록 아슈케나지들이 하자르인들의 피가 약간 섞인 건 사실이지만, 세라파디나 다른 유대인들이라고 딱히 더 '순혈' 유대인은 아니라는게 밝혀졌거든요.
90년대 이후로, 각 유대인 분파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몇차례 있었는데,, 정도는 차이의 있을지언정 다들 중동지역의 조상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결론이 났습니다.

.

 

 

 

쾨스틀러

 

이러한 사실들이 밝혀지고.. 게다가 자신의 이론이 찌질이들에게 악용되는 것을 괴로워한 쾨스틀러는 결국 자신의 아내와 함께 자살합니다..

 

......

 

제가 번역한 것은, 오늘날에는 사장되는 이론을 담은 두번째 파트가 아니라, 하자르 제국의 역사만을 다룬 첫번째 파트입니다.
아슈케나지의 기원 어쩌구.. 와는 상관없이 순수하게 '하자르 제국' 에 대한 부분입니다. 입문서로는 그냥 괜찮은 것 같더군요.


p.s: 전 훈족이 고구려인이라거나 대쥬신 단지파 곤수단대왕.. 이런거 좀 별로인 사람입니다;
이 허접번역이 그런 주장에 사용되는 비극은 없었으면 합니다..

 

p.s2: 하자르인들의 도읍, 이틸은 아틸이라고도 불립니다..

 

 

열세번째 지파.

 

파트 1.

 

하자르 제국의 성쇠.

 

"하자르국에는 양과 벌꿀, 그리고 유대인들이 넘쳐난다."

-Muqaddasi , Descriptio Imperii Moslemici  (10세기) .

 

 

제국의 흥기.

1

 

샤를마뉴가 새로운 로마제국의 왕관을 썼을 바로 그 무렵, 코카서스에서 볼가강에 이르는 동유럽 지역은 이른바 하자르 제국이라고 알려진 한 유대인 국가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하자르 제국은 그 전성기였던 7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중세의 운명을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그 영향은 현대 유럽에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10세기의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이자 역사가였던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피로게니토스는 이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음이 틀림없으니, 그는 자신이 저술한 궁정 법규에 대한 규범에서 말하길, 로마의 교황과 서방의 황제에게 보내는 서한의 황금봉인에는 2 솔리두스 Solidi 만큼의 금을 사용해야 하지만, 하자르인들의 군주에게 보내는 금인에는 3 솔리두스 만큼의 금을 사용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자르 제국에 대한 아첨의 의미로 이러한 사실들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니, 이는 그 당시의 진정한 정치적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베리교수는 "동로마 제국의 외교정책이라는 관점에서 볼때, 하자르의 카간은 샤를마뉴 대제와 그 계승자들 만큼이나 중요한 존재였다." 라는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투르크계 민족들로 이루어졌던 하자르국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위치하는 전략적으로 핵심이 되는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이 지역은 또한 당대의 막강한 동방 세력들이 교차하는 곳이었습니다. 이 나라는 불가르인들, 마자르인들, 페체네그인들, 그리고 후대의 바이킹인들이나 러시아인들과 같은 사나운 야만부족들로부터 비잔티움 제국을 보호하는 일종의 완충제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비잔티움 제국의 외교와 전체 유럽역사의 관점에서 볼때 아마도 그보다 더 중요할 사실은, 이들의 군대가 그 세력이 가장 막강할 시절의 무슬림인들의 산사태를 저지했으며, 이로서 무슬림들의 동유럽으로의 진출이 좌절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에 관련해서하자르 역사에 관하여 권위자인 컬럼비아 대학의 던롭 Dunlop 교수는, 매우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자르국은.. 아랍인들 세력의 전방에 위치한 자연적 방어선을 따라 위치하고 있던 국가이다. 무하마드가 죽고 (632년) 얼마 지나지 않아, 칼리프의 군대는 쇠약해진 두 제국을 통과하여 북쪽으로 전진하여 마침내 코카서스라는 거대한 산악 장애물과 마주쳤다. 일단 이 방어벽을 넘기만 하면, 거기서부터는 동유럽으로 얼마든지 쉽사리 이동할 수가 있었다. 아랍인들이 막 그러한 시도를 벌일려고 했을때, 그들은 이 지역에서 자신들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세력과 마주쳤다. 비록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아랍인들과 하자르인들간의 전쟁은 한 세기 이상 지속되었으니, 마땅히 이는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을 가치가 있다. 프랑크인들의 카를 마르텔 Charles Martel 은 투르 Tour 전투에서 아랍인들의 물결을 돌렸다. 거의 같은 시각, 유럽의 동쪽에서 가해진 위협도 다급하기가 결코 그에 뒤지지 않았다. 승승장구하던 무슬림들은 하자르 왕국의 군대와 마주쳐서야 진격을 멈추었다..  코카서스의 북부지역에서 버티었던 하자르와, 동방의 유럽문명의 보루였던 비잔티움이 없었더라면, 기독교 국가들과 이슬람 국가들의 역사는..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것과 크게 달라졌을 것임이 틀림없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생각할 때, 아랍인들에 대한 하자르인들의 승리가 있은 이후인 732년, 미래의 로마황제가 될 콘스탄티노스 5세가 하자르 공주와 혼인을 맺은것은 놀랄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후 이들 부부의 아들이 레온 4세라는 이름으로 황위에 올랐을때, 비잔티움 사람들은 그를 하자르인 레온 Leo the Khazar 라고 불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737년에 벌어진 마지막 전투는 하자르인들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무슬림들의 성전으로서의 열의는 이미 사라진 뒤였습니다. 게다가 이제 칼리프국은 국내의 문제에 맞서야만 했으며, 결국 아랍 침공군들은 확고헌 교두보를 얻지 못한 채 코카서스 산맥을 거쳐 후퇴해야만 했으니, 이로서 하자르국의 기세는 그 전보다도 오히려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그 후로부터 몇년 뒤, 그러니까 아마도 740년경에 그들의 왕과 그의 관료, 군사귀족들이 유대인들의 신앙을 받아들였으니, 이때부터 유대교는 하자르국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결정은 당대인들에게 놀라움으로 다가왔으며, 이러한 놀라움은 아랍과 비잔티움, 그리고 러시아와 히브리어 사료를 접하는 현대 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일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 가장 최신의 코멘트는, 헝가리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인 안탈 바르타 Antal Bartha 박사의 저작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저술한 "8-9세기의 마자르 사회" 는 그 몇몇 챕터가 하자르인들에게 할당되어 있는데, 헝가리인들은 이 시기 대부분의 기간동안 하자르인들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유대교로의 개종에 대한 언급은 다음과 같이 달랑 한 단락만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연구는 사상사까지는 다루고 있지 않지만, 독자들은 하자르 왕국의 국교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들의 사회지도층 사이에서 공적인 종교가 된 것은 다름아닌 유대교이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인종적으로 명백히 비 유대인들이었던 그들이 유대인들의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하자르 역사를 연구하는 모든 역사가들을 놀라게 만들었던, 어떠한 정치세력의 비호를 받기는커녕 세상 모든 곳에서 박해의 대상이었던 종교로의 개종 -비잔티움인들의 기독교 선교와 동방에서 몰려오는 무슬림들의 정치적인 압력에도 불구하고- 이 우연하게 벌어진 일이 아니라, 그들의 왕국이 추구했던 독립적인 정책의 증거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의견은 예전의 연구성과와 비교하여 아주 약간의 전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부적인 부차적 사항에서는 약간의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그 큰 줄기는 기존의 연구성과와 대동소이 합니다.

 

하자르 제국과 관련된 논쟁의 대상 중 하나는, 12세기, 혹은 13세기 이후, 즉 하자르 제국이 멸망한 이후의 유대계 하자르인들의 운명에 관한 것입니다. 비록 이 문제와 관련된 사료는 전해지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만, 후기 중세시대의 다양한 하자르인 거주지역들이 크리미아와 우크라이나, 헝가리, 폴란드, 그리고 리튜아니아 등지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단편적인 사료를 종합해서 알 수 있는 전반적인 큰 그림을 통해, 하자르 부족들과 그 공동체들은 이러한 동유럽 지역 -주로 러시아와 폴란드- 에 대규모로 이주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지역들은 중세 초기에도 유대인들이 가장 밀집되어 있던 지역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몇몇 역사가들로 하여금 현실적인 진실을 추측하게 만들었으니, 아마도 동유럽 유대인들의 상당수 -그리고 아마도 전세계 유대인들의 상당수- 는 실은 하자르인들의 후손이며, 따라서 셈족 계통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가설이 내포하고 있는, 기존의 견해보다 훨씬 진보된 함의는 아마도 이 문제에 접근해온 역사가들에 의해 보여진 다대한 관심 -만약 그들이 이 문제를 회피하지 않을 때의 일이기는 하지만- 을 설명해 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1973년판 유대 백과서전 Encyclopaedia Judaica 의 "하자르" 장에는 던롭교수의 서명이 들어있긴 하지만, 선택된 민족이라는 교리의 추종자들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추가된, 편집자의 서명이 들어간 "왕국이 멸망한 이후의 하자르 유대인들" 이라는 다음과 같이 조심스런 독립된 단락이 별도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크리미아와 폴란드 등지에 분포하는 투르크어를 말하는 카라이트 Karaite 인들 (근본주의적 유대인 일파) 은 하자르인들과 관련이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민속학과 인류학, 그리고 그들의 언어로 확증되는 사항이다. 유럽지역에는 이러한 하자르인들의 후손들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음을 의히마는 상당한 양의 증거들이 있다. 

 

양적인 의미에서 볼때 솀의 천막속에 있었던 야벳의 코카서스 후손들의 "존재" 가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요? 하자르에서 기원한 유대인에 대한 문제에 대해 가장 라디칼한 가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는 텔 아비브 대학의 중세 유대사 교수인 폴리악 A. N. Poliak 박사입니다. 그의 저서인 하자리아 Khazaria (히브리어로 출판) 의 초판은 1944년에 텔 아이브에서 출판되었으며, 두번째 판은 1951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는 서문에서 역사적 사실들이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귀결된다고 서술했습니다.

 

하자르 유대인들과 다른 유대인 공동체 사이의 관계와, 우리가 이들 하자르 유대인의 사회를 동유럽의 거대한 유대인 거주지역의 핵심으로 여겨야 되는가에 대한 의문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법이 있다.. 이러한 거주지역의 후손들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거나, 미합중국이나 다른 곳으로 이주했거나, 이스라엘로 온 이들- 은 이제 세계 유대사회의 거대한 다수를 구성하고 있다.

 

이 글은 아직 홀로코스트의 전모가 드러나기 전에 쓰여진 것이기는 하지만, 전 유대인의 상당수가 동유럽에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가 하자르 기원의- 기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그들의 조상 중 일부가 요르단 강이 아닌 볼가 강변 출신이며, 마찬가지로 가나안 출신이 아니라 한때 아리아 인종의 요람이라 여겨졌던 코카서스 출신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는 이들이 유전학적으로 아브라함이나, 이삭 그리고 야곱의 부족들보다는 훈족이나 위구르, 또는 마자르족과 좀더 가깝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항들을 살펴가 보면, 이러한 연구들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되는 "반 유대주의" 라는 단어는 아무런 의미를 상실할 것이니, 이는 단지 가해자와 피해자가 공유하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로부터 그 모습을 천천히 드러내면서, 하자르 제국의 역사는 지금껏 역사가 범한 가장 잔인한 장난으로 비쳐졌습니다.

 

2

 

"결국 아틸라는 단지 천막들로 이루어진 왕국의 두목이었을 뿐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이 여전히 그 중요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나라는 사라져 버렸다. 천막은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도시는 유지되기 마련이다. 훈족의 왕국은 회오리바람에 불과했다.."

 

이러한 시각을 가진 19세기의 동양사학자 카셀 Cassel 의 관점에 따르면, 하자르인들 역시 비슷한 이유로 훈족과 비슷한 운명을 맞았을 겁니다. 하지만 유럽역사의 무대에서 훈족은 단지 8년 동안만 등장했을 뿐이지만, 하자르인들의 왕국의 전성기는 4세기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들 역시 주로 천막속에서 살기는 했습니다만, 그들은 거대한 도시를 거느리기도 했으니, 그들은 유목 전사들로 이루어진 부족이 농부들과 어부들, 포도나무 경작자들, 장사꾼들과 유능한 기술자들의 국가로 변해가는 과도기적 상태에 있었습니다. 소련의 고고학자들은 "훈족의 돌풍" 과는 구분되는, 즉 상대적으로 더욱 발전된 문명의 증거가 되는 유물들을 발굴해 냈습니다. 그들은 수 마일에 걸친 마을의 흔적들을 발견해냈는데, 여기서 집들은 회랑을 통해 거대한 외양간과 마굿간들 (이것들의 크기는 3미터 X 10-14크기이며, 기둥으로 지탱되어 있었습니다.) 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일부 남아있는 소 쟁기는 아주 놀랄만한 장인정신을 보여 주는데, 이러한 솜씨는 버클과 걸쇄, 그리고 장식이 베풀어진 말안장과 같은 공예품에서도 발휘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관심이 가는 것은, 원형으로 생긴 집들의 땅속에 함몰된 형태의 기초부분입니다. 소련의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특징은 하자르인들의 모든 거주지역에서 발견되는 사항이며, 그들의 "일반적인" 직사각형 형태의 건물들보다 이른 시기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원형주거는 명백히 돔 형태의 이동식 천막이 고정적인 주거공간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유목민적인 생활습관에서 정착문화, 혹은 준 정착문화로 변해가는 그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동시대의 아랍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하자르인들은 겨울동안에는 오직 그들의 마을 -수도인 이틸 Itil 을 포함해서- 에서만 거주했으며, 봄이오면 천막을 꾸려서 양떼와 소떼와 함께 집을 떠나 스텝 지역으로 들어가거나, 그들의 밭이나 포도농장에서 캠프를 차렸다고 합니다.

 

발굴사업이 진척되면서, 이 왕국이 후기에 들어오면서 8세기에서 9세기경에 만들어진 정교한 요새선으로 둘러쌓이게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는데, 이 방어선들은 개방된 초원지대과 접하고 있는 북부 국경지대를 수비하기 위한 것이였습니다. 이러한 요새선은 크리미아 (하자르인들은 한때 이 지역을 다스린 적이 있습니다.) 지역에서 시작하여, 도네츠강과 돈 강을 가로질러 볼가강으로 연결되는 거친 준-원형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 남쪽은 코카서스 산맥, 서쪽은 흑해, 그리고 동쪽은 당시에 "하자르 바다" 로 불린 카스피 해로 보호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러한 북부지역의 요새망은 하자르 국가의 고정적 핵심지역을 보호하는 내부 방어선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북방의 여러 부족들을 포함하는 그들의 현실적인 세력권은 전쟁의 향배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변했습니다. 전성기의 하자르국은 코카서스와 아랄해, 우릴산맥, 키에프와 우크라이나 평야의 도시들을 아우르는 30개의 여러 민족들과 부족들을 지배하거나, 그들로부터 공물을 받았습니다. 하자르국의 종주권에 속한 민족들 중에는 불가르인들, 부르타인들, 구즈인들, 마자르인 (헝가리인) 들, 크리미아 지역의 고트인 (크림 고트족) 들과 그리스 식민지들, 북서 삼림지대의 슬라브 부족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나 먼 지배권역을 넘어, 하자르 군대는 그루지야와 아르메니아를 공격했으며, 아랍 칼리프의 모술에 이르는 지역으로까지 진격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소련 고고학자인 아르타모노프 M. I. Artamonov 는 다음과 같은 언급을 남겼습니다.

 

9세기 이전까지, 하자르인들은 흑해 북부지역과 인근 드네프르 강 유역의 스텝과 삼림지역에 어떠한 라이벌도 두지 않았다. 하자르인들은 동유럽의 남쪽 절반지역의 최상위 지배계층의 지위를 한세기 이상 고수했으며,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들어오는 우랄-카스피해 통로를 차단하는 강력한 보루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 시기에 그들은 동방에서 몰려온 모든 유목민족들의 공격을 격퇴시켰다.

 

 

후대의 그루지야 인들과 투르크인들 

 

동방의 위대한 유목제국들의 역사를 세심한 눈으로 살펴볼 때, 하자르 왕국은 그 시기와 규모, 그리고 문명화된 정도에 있어서 예전의 훈족 또는 아바르족과, 후대의 몽골제국 사이의 일종의 과도단계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3

 

그렇기는 하지만, 그 세력이나 업적들 못지않게 버림받은 종교를 신봉함으로서 유명해진 이 민족은 대체 어떤 이들이란 말입니까? 이에 대한 기술들은 대체로 그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이들에 의해 작성된 것이며, 당연히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자르인들은" 이라고 한 아랍 연대기 작가는 적고 있습니다. "북쪽으로 일곱번째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머리위에는 북두칠성의 성좌가 떠 있다. 그들의 땅은 춥고 습하다. 그들의 혈색은 창백하며, 푸른 눈을 가졌으며, 그들의 머리카락은 길게 흘러내리며 보통 붉은색을 띤다. 그들의 몸은 건장하며 천성은 냉혹하다. 그들의 일반적인 특징은 거칠다는 것이다."

 

이미 한 세기에 걸친 전쟁을 겪은 후의 일이기 때문에, 이 아랍인 작가는 하자르인들에게 거의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 겁니다. 이러한 현상은 그루지야나 아르메니아의 기록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현상이니, 훨씬 오랜 문화를 가진 이들 나라들은 하자르의 기병들에게 반복적으로 시달림을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한 그루지야의 연대기에는, 전통적인 표현에 따라 하자르인들을 곡과 마곡 (Gog and Magog,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탄의 꾐에 빠져 신에게 맞서는 두 나라를 일컬음) 의 주인이라고 까지 -"무시무시한 얼굴과 날짐승의 습관을 가졌으며, 피를 즐기는 야만인들"-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아르메니아인 작가는 그들에 대해 "무시무시한 하자르인 떼거리들의 얼굴은 오만하고 넓으며 눈썹이 없는데, 그들은 마치 여자처럼 머리를 길게 길러 늘어뜨린다." 라고 쓰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요 아랍어 자료를 저술한 작가 중 한명이었던 아랍인 지리학자 이스타크리 Istakhri 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자르인들은 투르크인과는 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으며, 두 부류로 나뉘어지니, 한 무리는 카라-하자르 Kara-Khazars (검은 하자르) 라고 불리는데, 이들은 마치 인도인들처럼 짙은 검정에 가까운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졌으며, 또 다른 한 무리는 악-하자르 Ak-Khazars (흰 하자르) 라고 불리니, 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이 기록은 다른 기록들보다는 그래도 공정한 듯이 보이지만, 또한 우리에게 혼란을 가져다주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투르크인들의 지배계층이나 지배 부족들은 "하얗다" 라고 표현되며, 이에 반해 피지배 계층들은 "검다" 라고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들만을 가지고 이른바 "화이트 불가르인들" 이 "블랙 불가르인들" 보다 실제로 더 흰 피부를 가졌다거나, 마찬가지로 5세기와 6세기에 거쳐 인도와 페르시아를 침공한 이른바 "화이트 훈족 (에프탈인)" 들이 유럽대륙을 침공한 다른 훈족 부족들보다 더 흰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믿을 이유는 없습니다. 이스타크리가 기록한, 이른바 검은 피부를 가진 하자르인들에 대한 언급은 -그와 그의 동료들의 기록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일이기는 하지만- 아마도 구전과 전설에 기반을 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그들의 신체적 특징이나 인종적 기원에 대해서 그다지 자세하게 알고 있지 못하고 않습니다.

 

결국 이 마지막 질문은 오로지 막연하면서도 감질나는 답변들밖에는 얻을 수 없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좌절감은 훈족, 알란인들, 아바르인들, 불가르인들, 마자르인들, 바쉬키르인들, 부르타스인들, 사비르인들, 위구르인들, 사라구르인들, 오노구르인들, 우티구르인들,쿠트리구르인들, 타르니아크인들, 코트라가르인들, 카바르인들, 자벤데르인들, 페테네그인들, 구즈인들, 쿠만인들, 킵챠크인들과 그 외에도 하자르 왕국의 시대나 그 밖의 시대에 등장한 다른 부족들의 기원에 대한 의문에도 똑같이 주어지는 답변입니다. 그나마 다른 민족들보다는 많은 것이 알려진 훈족도, 그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심스러운 부분들이 널려 있습니다. 그들의 명칭은 아마도 호전적인 유목민족들을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중국어의 히웅누 Hiung-nu 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외에도 다른 많은 민족들이 모든 종류의 유목민족들을 가리키는 훈족이라는 무차별적인 단어로 불렸으니, 여기에는 위에서 언급한 "화이트 훈족" 외에도 사비르인들, 마자르인들, 그리고 하자르인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1차대전 당시의 영국인들은 "훈족" 이라는 단어를 경멸적인 뜻으로 사용했지만, 나의 헝가리인 친구들은 어린시절 "우리의 영광스러운 훈족 선조들" 을 애국적인 자긍심을 가지고 존경하도록 배웠으며, 부다페스트의 한 배타적인 인기클럽은 "후니아 Hunnia" 라고 불렸다는 것입니다. 또한 헝가리에서 아틸라라는 이름은 여전히 인기있는 이름 중 하나입니다.)

 

1세기 경, 중국인들은 비우호적인 훈족 이웃들을 서방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했으며, 이로서 오랫동안 아시아에서 서방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지역들을 쓸어버렸던 주기적인 이동 중 하나가 시작되었습니다. 5세기 이후, 이러한 서쪽 변방의 부족들 중 많은 수가 "투르크인 (돌궐인)" 이라는 이름으로 싸잡아 불렸습니다. 이 투르크라는 용어는 아마도 중국어에서 기원된 (아마도 어느 언덕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것으로 보이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공통적인 특징을 지닌 언어를 말하는 모든 부족들 -투르크 어계- 을 지칭하는 단어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중세 작가들 -과 현대의 인종학자- 이 사용하곤 했던 투르크라는 이 용어는 기본적으로 인종이 아닌, 언어를 언급하는데 사용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훈족과 하자르인들 역시 "투르크" 족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자르인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핀-위구르어계에 속합니다.) 하자르인들의 언어는 아마도 투르크어의 추바시 Chuvash 방언과 비슷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방언은 볼가강과 수라강 사이에 위치하는 추바시 소비에트 자치 공화국에서 아직도 그 명맥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사실 추바시인들은 하자르인들의 언어와 유사한 방언을 사용했던 불가르인들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든 사항들은 다소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근본적으로 동양어학자들의 순이론적인 추론에 근거한 것으로서, 다소 그 타당성에 의문점이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하자르인들은 "투르크" 계 부족이었으며, 그들은 대략 5세경에 아시아의 초원지대에 그들의 모습을 드러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안전할 것입니다.

 

하자르라는 명칭의 기원, 그리고 여기에서 유래된 현대에까지 전해지는 다른 파생어들은 독창적인 사색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이 단어는 투르크어에 기원을 두고있는 gaz, 즉 "떠돌아 다니는" 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니, 즉 간단히 말해 "유목민" 이라는 뜻입니다. 비전문가라 할지라도 이 문제에 흥미가 있는 분들이라면 여기에서 파생되어 현대에도 쓰이고 있는 다른 단어들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 중에는 러시아어의 코사크와 헝가리어의 훗사르 Huszar 가 있는데, 이 두 단어 모두 호전적인 기마민족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Huszar 라는 단어는 하자르인들을 언급한 그리스어 문헌에서 기초한 세르보-크로아티아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보입니다.) 그 외에도 독일어의 켓쳐 Ketzer 라는 단어가 있으니, '이단' 이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다름아닌 유대인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만약 이러한 추측이 옳다면, 이는 하자르인들이 중세시대의 다양한 민족들에게 상당한 인상을 남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할 것입니다.

 

4

 

몇몇 페르시아와 아랍 연대기들은 전설과 소문이 섞인 흥미로운 자료들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흔히 천지창조로 시작되며, 마지막에는 당대의 이야기들로 끝나곤 합니다. 이러한 자료들의 저자들 중 한명인, 9세기경의 아랍 역사가였던 야부키 Yabuki 는 하자르인들의 기원을 노아의 셋째아들이었던 야벳에서 찾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야벳 기원설은 이후 여러 문학작품에서 되풀이되어 나타나고 있으며, 그 외에도 하자르인들의 기원과 관련된 전설들 중에는 아브라함과 알렉산더 대왕이 얽힌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하자르인들에 대한 초기 실록으로는, "수사학자 자카리아 성인 Zacharia Rhetor" 에 의해 기록된 시리아어 연대기가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6세기 중반무렵에 작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는 하자르인들이 코카서스 지역에 사는 민족들의 명단에 올라와 있습니다. 그 외의 다른 사료 중에는 이들이 한세기 이전 (5세기) 부터 이 지역에 등장했으며, 훈족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기원후 448년,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2세는 유명한 수사학자 프리스쿠스가 포함된 사절단을 아틸라에게 파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외교적인 협상만을 위해 보내진 것이 아니었으니;, 궁정의 음모 (역주/아마 바길라스의 아틸라 암살음모를 포함한..) 들도 그가맡은 임무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아틸라의 화려한 연회장에 참석했는데, 이에 관하여 실로 완벽한 가십 칼럼니스트로서의 솜씨를 보여주는 그의 기록은 지금까지도 훈족의 관습과 풍습에 대한 주요 사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프리스쿠스는 자신이 아카트지르인 Akatzirs 이라고 언급했던 훈족의 피지배민들에 대해서도 기록을 남겼으니, 이 민족들은 아마도 악 하자르 Ak-Khazars, 즉 "백색 하자르인 (카라 하자르, 즉 "검은" 하자르인들과 구분되는) " 들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카트지르" 라는 단어는 한세기 후의 고트족 역사가인 요르다네스에 의해서도 언급되는 단어이며, 또한 이른바 "라벤나의 지리학자" 는 이들을 하자르인들과 명백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대부분의 권위자들도 이에 찬성하는 편입니다.) 프리스쿠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로마 황제는 이 전투민족을 자신의 편에 서게 하려고 시도했지만, 카리다치 Karidach 라는 이름의 탐욕스러운 하자르인 우두머리는 겉으로는 얼토당토않은 액수의 뇌물을 요구하면서 훈족에게 충성을 지켰다고 합니다. 원래 아틸라는 카리다치의 라이벌 족장을 패배시켰으며, 그를 아카트지르인들의 유일한 수장으로 임명한 후 그를 자신의 궁정으로 초대한 것이었습니다. 카리다치는 초대에 큰 감사를 표하면서 다가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죽음이 운명지어진 인간이 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사람이 태양을 응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위해를 입지 않고 가장 위대한 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아틸라는 이러한 말에 기뻐했음이 틀림없을 것이며, 또한 카리다치는 자신의 통치권을 보장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상의 프리스쿠스의 연대기는 하자르인들이, 후에 아틸라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간 마자르족과 다른 부족들처럼, 처음에는 훈족 휘하의 부족으로서 5세기 중반에 유럽 지역에 등장했음을 보여줍니다.

 

5

 

 

아틸라 사후에 이어진 훈족 제국의 붕괴는 동유럽 지역에 세력의 진공상태를 초래했으며, 여기에 또 다른 유목민족들의 무리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밀고 들어왔으니, 이들 중 두드러진 이들은 위구르인들과 아바르인들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하자르인들은 부유한 그루지야와 아르메니아의 트랜스 코카서스지역을 털어먹으면서 귀중한 약탈품들을 수집하는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6세기 후반부가 되자 코카서스 부족들 중에서 강력한 세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 지역의 부족들 중 일부 -사비르인들, 사라구르인들, 사만다르인들, 바란자르인들 등등- 는 이 시기부터 더 이상 사료에 이름이 언급되지 않게 되었으니, 이들은 하자르인들에게 복속되거나 동화되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하자르인들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은 강력한 불가르인들에 의한 것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역시 괴멸적인 패배를 당했으며 (대략 641년의 일) , 그 결과로서 그들은 두 민족으로 쪼개졌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현대의 불가리아에 해당하는 서방의 다뉴브 강쪽으로 이주했으며, 북동쪽으로 이주한 일파는 볼가강 중류에 도착했으니, 이들은 그 이후로 하자르인들의 종주권 하에서 살았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면서 이 다뉴브강의 불가르인들과 볼가강의 불가르인들 모두를 빈번하게 접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군주국가를 이루기 이전의 하자르인들은 단명한 다른 세력들의 세력권 하에서 살아야만 했으니, 이들은 이른바 서 투르크 제국, 혹은 투르쿳 Turkut 왕국이라 불렸던 나라를 이루고 있었던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부족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으며, 카간 (Kagan 혹은 Khagan 혹은 Kaqan 혹은 Khaqan 혹은 Chagan.. 어쨋든 본인은 서구시각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Kagan 이라는 스펠링을 사용할 것입니다. 동양사학자들은 스펠링에 까다롭습니다.) 이라 불린 지도자의 통치를 받았는데, 이 명칭은 후대에 하자르인들의 지도자들을 지칭하는 데에도 그대로 사용되게 됩니다. 이 첫번째 뚫흙인 국가 -국가라고 부를 수 있다면- 는 한세기동안 유지되었으며 (대략 550-650년) , 그후 거의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고 해체, 멸망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적어도 하자르인들이나 불가르인들과 같은 다른 투르크어계의 민족들과는 구분되는, 특정한 민족을 나타내는 의미로서 "투르크" 라는 명칭으로 불렸던 국가가 성립된 후의 일이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이후로도 "투르크" 라는 명칭은 스텝지역의 유목민들을 가르키는 무차별적인 통칭으로 사용됩니다.)

 

하자르인들은 훈족의 후견을 받았으며, 그 후에는 이와 같은 투르크인들의 후견을 받았습니다. 그 후 7세기 중반에 투르크인들의 세력이 기울자, 이제 그들은 페르시아인들과 비잔티움인들이 "북방의 왕국" 이라고 불렀던 왕국을 세울 기회를 잡았습니다. 한 전승에 따르면, 위대한 페르시아 왕이었던 호스로우 Khusraw Anushirwan 는 그의 궁전에 세개의 황금으로 만든 접대용 의자를 비치했다고 하니, 그것은 비잔티움과 중국, 그리고 하자르인들의 황제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고 합니다. 어떠한 국가도 이러한 유력자들의 방문을 현실으로 받아보지는 못하였으며, 따라서 이 황금 옥좌는 -만약 그것들이 존재했다면- 순수하게 상징적인 의미를 나타내었던 것임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 존재가 사실이든 아니든간에, 이 이야기는 비잔티움 황실 문서실에서 하자르인들의 군주에게 보내어지는 문서에 부착되는, 콘스탄티노스 7세의 공식적인 "3 솔리두스" 금인 (1 솔리두스 금인이 세개가 찍혀있는 형태를 하고있음.) 에 관한 지시와 잘 부합되는 이야기입니다.

 

6

 

무슬림들의 돌풍이 아라비아에서 폭발하기 바로 직전인 7세기 첫 몇십년간 중동지역은 비잔티움, 페르시아, 그리고 서 투르크 제국 이렇게 세 세력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앞서 두 제국은 한세기에 걸친 전쟁을 벌였으며, 막무가내의 싸움끝에 둘다 몰락의 가장자리에 몰린 듯 보였습니다. 그 후 비잔티움은 기력을 추스릴 수 있었지만, 페르시아 왕국은 곧 멸망의 지경에 이르렀으며, 하자르인들은 이 틈을 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었습니다.

 

 

 헤라클레이오스

 

그들은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서 투르크 왕국의 휘하에 있으면서 그들 중 가장 강력하고 위력적인 세력임을 입증했으며, 이는 그들의 앞날에 탄탄대로를 약속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은 기원 후 627년에, 로마 황제인 헤라클레이오스는 그의 페르시아 원정에 대비하여 하자르인들과 -그 후에도 계속 이어질- 군사동맹을 맺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하자르인들이 그들의 역할을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게 수행했음을 보여주는 몇가지 버젼의 이야기들이 있긴 하지만, 그 이야기들이 의미하는 핵심은 모두 같습니다. 하자르인들은 헤라클레이오스에게 지에벨 Ziebel 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휘관의 지휘를 받는 4만명의 기병을 제공하면서 페르시아로 진격해갔지만, 그 후 -아마도 그리스인들의 조심스런 전략에 지쳤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티플리스 공성전을 위해 되돌아 갔습니다. 결국 이 공성전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다음해에 이들은 다시금 헤라클레이오스와 합류하여 그루지야의 도읍을 점령하고 풍부한 노획물과 함께 귀향했습니다. 기번은 (테오파네스의 기록에 의거하여) 로마 황제와 하자르인 지도자간의 첫번째 만남을 다음과 같이 화려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호스로우와 아바르인간에 체결된 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로마 황제는 투르크인과 유용하고도 영광스러운 동맹을 맺었다. 그의 인심좋은 초청에 의해 한 초자르인 Chozars 들의 무리가 그들의 막사를 볼가강의 평야에서 그루지야의 산악지대로 끌고 내려왔다. 헤라클레이오스는 그들을 티플리스 인근지역에서 맞아들였다. 이 자리에서 칸과 그의 귀족들은 말에서 내렸으며, 또한 우리가 만약 이를 기록한 그리스인들의 기록을 믿을 수 있다면, 황제의 권위에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땅에 넓죽 업드려 부복했다고 한다. 이러한 자발적인 경의의 표시와 중요한 원조의 제공은 가장 따뜻한 감사의 표시를 받았다. 즉 황제는 자신의 왕관을 풀어 이 투르크 군주의 머리에 씌어주고는 부드럽게 포옹하면서 이는 내 아들이라고까지 불렀다. 화려한 연회가 끝난 후, 그는 지에벨에게 황실에서 사용하던 장식품과 황금, 보석, 비단을 선물한 후, 이 새로운 동맹자들에게 손수 값비싼 보석과 귀고리를 선물했다. 그 후 비밀리에 진행된 면담에서 그는 자신의 딸 에우도키아의 초상을 보여주면서 그 야만인에게 그가 이 정숙하고 고귀한 여인을 신부로 맞게 될 것이라는 약속으로 짐짓 겸손하게 비위를 맞추었다. 그리고 그 즉시 4만명의 기병으로 이루어진 원군을 얻을 수 있었다..

 

에우도키아 (혹은 에피파네스) 는 헤라클레이오스가 그의 첫번째 아내에게서 얻은 유일한 딸이었습니다. 이렇게 애지중지하던 딸을 "투르크" 인과 결혼시키겠다는 이 약속은, 비잔티움 궁정이 하자르인들과의 동맹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결혼은 결국 최소되었으니, 이는 그가 에우도키아와 그녀의 수행원들이 자신에게 도착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한편 테오파네스의 기록의 의하면 지에벨 역시 "수염도 채 나지 않은 그의 아들" 을 황제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 이른바 퀴드 프로 쿠오 (주고 받기) 였던 것이었을까요?

 

 

 헤라클레이오스

 

한 아르메니아 연대기에는 이와는 좀 다른, 하지만 생생한 구절이 기록되어 있는 바, 여기에는 페르시아에 맞선 두번째 원정을 위해 하자르 군주에 의해 발동된 이른바 총동원령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명령은 "모든 부족들과 민족들 (물론 하자르국의 세력범위 안의), 산악지대와 평야지대에 사는 모든 주민들, 지붕밑에서 살거나 노숙을 하는 모든 이들, 그들의 얼굴을 면도하거나 머리를 길르는 모든 이들." 에게 보내졌다고 합니다.

 

이 기록은 하자르 제국을 이루었던 이질적인 인종적 모자이크에 대한 첫번째 암시를 제공해 줍니다. 이른바 "진짜 하자르인들", 즉 그들의 국가를 다스렸던 이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의 오스트리아인들처럼 언제나 소수였던 듯 합니다.

 

7

 

페르시아인들의 나라는 헤라클레이오스 황제에게 당한 627년의 괴멸적인 패배에서 결코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그 후 페르시아에서는 모반이 잇따랐습니다. 왕은 자신의 아들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그 뒤를 이은 그 아들역시 몇달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 후 한 어린아이가 왕위를 이어갔지만, 10여년간의 무정부상태와 혼돈이 있은 후 아랍인들의 첫번째 무리가 이 사산 제국에 결정타를 먹였습니다. 거의 같은시기에 서 투르크 연맹은 개개의 부족 단위로 쪼개졌습니다. 이렇게 예전의 삼각세력을 이제는 새로운 세력들이 대신했습니다, 즉, 이슬람교를 믿는 칼리프국과 기독교 비잔티움 제국, 그리고 새롭게 떠오른 북방의 하자르 왕국이 그들입니다. 하자르 왕국은 그 초기단계부터 아랍인들의 정면공격을 막아냄으로서 동유럽 평야지대를 침략자들로부터 지켜내야 했습니다.

 

헤지라 -모하메드가 메디나로 탈출한 622년을 가리킴. 아랍인들의 연대는 이때부터 시작됨- 이후 첫 20년간 무슬림들은 페르시아와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를 점령하고 치명적인 준-원형의 포위망을 쳐 가면서 비잔티움 인들의 심장부 (현대의 터키지역) 을 포위했으니, 이 포위망은 지중해에서 코카서스 산맥, 그리고 카스피 해의 남안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물론 코카서스 산맥은 분명 강력한 자연적 방어벽이었지만, 피레네 산맥보다 그다지 더 험준한 지역은 아니었습니다. 즉 침공군들은 다리엘 Dariel 통로를 뚫고 나가거나 카스피해 연안가의 다르반드 Darband 협로를 거쳐 우회해가는 방식으로 이 지역을 통과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다르반드 협로

 

아랍인들에 의해 밥 알 아브왑 Bab al Abwab, 즉 관문중의 관문이라고 불린 이 요새화된 협로는 하자르인들과 다른 약탈민족들이 태곳적때부터 남쪽의 나라들을 약탈하고 또 돌아올 때 거친, 일종의 역사적 회전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랍인들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642년에서 652년에 이르기까지 반복하여 다르반드 관문을 돌파하여, 하자르인들의 영토로 진출하여 가장 인접한 지역인 발란자르 Balanjar 를 점령하려는, 코카서스 방면의 유럽에 교두보를 마련하려는 시도를 계속했습니다. 아랍-하자르 전쟁의 첫번째 단계에서 아랍인들의 시도는 모두 격퇴되었는데, 652년에 벌어진 마지막 전투에서 양측은 공성기 (캐터펄트와 발리스타) 까지 동원했습니다. 여기서 아랍인들은 그들의 지휘관이었던 아브달-라만 이븐-라디쉬 Abdal-Rahman ibn-Rabiah 를 포함한 4천명의 전사들을 잃었으며, 생존자들은 산맥을 넘어 무질서하게 물러갔습니다.

 

그 다음 삼사십년 동안, 아랍인들은 하자르인들의 거점을 공격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벌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방향이 비잔티움을 향했기 때문입니다. 어떨때는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수륙양면으로 포위공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코카서스를 횡단하여 흑해연안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그 수도의 측면을 포위할 수 있었으며, 이때 로마제국의 운명은 매우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이때 하자르인들은 불가르인들과 바자르인들을 복속시키면서 우크라이나와 크리미아 지역을 목표로 한, 그들의 서방 진출작업을 완료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업은 더 이상 약탈물과 포로들을 획득하기 위한 약탈공격이 아니었습니다. 즉 이는 정복전이었으니, 그들은 정복된 민족들을 강력한 카간의 통치를 받는 안정적인 행정체계를 갖춘 제국의 깃발 아래에 합병시켰습니다. 카간은 행정을 감독하고 세금을 걷기위해 속주 총독들을 정복한 지역에 임명했습니다. 8세기 초반이 되자 그들의 국가체계는 아랍인들에 대한 공격전을 감당해낼 수 있을 정도로 단단히 통합되었습니다.

 

천년도 더 지난 지금의 시각으로 보기에는 이 시기에 이어진 간헐적인 전쟁 (722년에서 737년까지 이어진 이른바 "2차 아랍전쟁")  은 국지적인 규모로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지루한 이야기들의 연속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든든한 갑옷을 입은 하자르인들의 기병대는 다리엘 통로나 다르반드 관문을 돌파하여 남쪽의 칼리프국 영토로 쳐들어가곤 했습니다. 이에 맞선 아랍 반격군이 동일한 통로나 우회로를 통해 볼가강으로 진격했으나 다시 후퇴하곤 했습니다. 제한된 사료로 이 시기를 바라보는 독자들의 머릿속에는, 만명의 병사들을 거느렸던 요크의 공작에 관한 옛 시가 떠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그들과 함께 언덕의 꼭대기에까지 올랐다. 그리고는 다시 아랫쪽으로 행군했다." 사실 아랍인들의 사료에 따르자면 (비록 그것들은 자주 과장되긴 했지만) 양측에서 10만명에서 30만명에 이르는 군대가 대치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적어도 동시대에 벌어진 서방의 투르전투의 운명을 결정짓는데 필요했던 병사들의 수를 압도하는 것이었음에는 틀림없을 겁니다.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광신이 이러한 전쟁의 특징을 이루고 있으니, 이는 한 하자르 마을 전체가 항복을 거부하고 스스로 불을 질러 집단자살을 택했다거나, 밥 알 아브왕의 식수로에 아랍 장군에 명령에 의한 독이 풀어졌다든가, 패배한 아랍군대를 멈추게 하여 마지막 일인까지 싸우게 만든 "지옥이 아닌, 천국과 무슬림을 위해 -천국의 기쁨은 성전에서 죽은 모든 무슬림 군인들에게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 와 같은 전통적인 절규등에서 여실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15년간의 전쟁의 어느 시점에, 하자르인들은 그루지야와 아르메니아를 초토화시켰으며, 아르다빌 전투 (730년) 에서 아랍군대에게 큰 패배를 안겼으며, 칼리프국의 수도인 다마스쿠스에서 절반도 남지않은 거리에 위치한 모술과 댜르바키르 Dyarbakir 까지 진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이 훈련된 무슬림 군대가 그들을 가로막았으며, 이에 하자르인들은 결국 산맥을 넘어 고향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다음해에, 당대의 가장 유명한 아랍 장군이었으며, 이전에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을 이끌었던 경력이 있는 마슬라마 이븐-압드-알-말리크 Maslamah ibn-Abd-al-Malik 는 발란자르를 점령하였으며, 그 후에는 더욱 북쪽에 위치한 하자르인들의 대도시인 사만다르 Samandar 까지 점령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침공군들은 확고한 수비체계를 갖출 수 없었으며, 다시금 코카서스 이남으로의 퇴각을 강요당했습니다.

 

로마제국의 안도의 한숨은 다른 왕조와의 동맹이라는 형태로 실체를 가지게 되었으니, 그들의 후계자는 하자르인 공주와 결혼했으며, 그들의 아들은 후에 하자르인 레온 Leo the Khazar 라는 이름으로 비잔티움을 통치했습니다.

 

아랍인들의 마지막 공격은 미래의 칼리프가 될 마르완 2세 Marwan II 가 거둔 피루스의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마르완은 하자르 카간에게 동맹제의를 하면서 그 한편으로 코카서스의 두 통로에 기습공격을 가했습니다. 하자르인들의 군대는 이 첫번째 충격에서 회복하는데 실패했으며, 결국 볼가강 지역까지 후퇴했습니다. 이에 카간은 동맹 조건에 대해 협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르완은 자신들에게 정복당한 다른 나라들에게 제시한 조건의 관례에 따라 카간에게 '진정한 신앙' 으로의 개종을 제안했습니다. 카간은 이 조건에 응하기는 했지만, 몇년 후 국교로서 유대교를 받아들이게 됨으로서 (이 개종은 아마도 740년 경의 일로 보입니다. 후술.)  초래된 결과와는 대조적으로 이슬람으로의 개종에 대해서는 관련된 아랍이나 비잔티움 사료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의 이슬람으로의 개종약속은 단지 립서비스에 불과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어찌되었든 자신의 조건이 충족된 것에 만족한 마르완은 군대를 이끌고 하자르인들의 땅을 떠나 트란스 코카시아로 돌아갔는데, 이때 그는 어떠한 수비대나 총독, 혹은 행정기관도 남겨놓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오히려 얼마후 그는 하자르인들에게 남방의 불충한 부족들에 대항한 동맹협정을 제의했습니다.

 

이는 하자르인들에게 도피처가 되어 주었습니다. 마르완이 그렇게 관대한 조건을 내건 이유는, 역사의 야릇한 장에서 제기되는 다른문제와 마찬가지로 같이 오로지 추측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아마도 이는 아랍인들이 상대적으로 문명화된 페르시아인들, 아르메니아인들, 그루지야인들과는 달리 이 사나운 북방의 야만족들은 무슬림 괴뢰 군주와 소규모의 수비대만으로는 지배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또한 마르완은 시리아와 옴마야드 칼리프 왕국의 다른 부분에서 계속해서 터져나오는 주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총동원해야만 하는 처지이기도 했습니다. 마르완 자신은 뒤이은 내전에서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744년에는 옴마야드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가 되었습니다 (그는 6년뒤 암살되었으며, 칼리프는 압바스 왕조로 이어집니다.) . 이러한 상황였기에 마르완은 하자르인과의 전쟁으로 그의 정력을 낭비할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더 이상 코카서스 산맥을 넘는 침공을 단념시키게 될 수업을 가르쳤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이로서 서쪽으로는 페레네 산맥을, 동유럽 방향으로는 코카서스 산맥을 넘으려는 무슬림들의 강력한 협공은 거의 동시기에 각각 저지되었습니다. 카를 마르텔이 이끄는 프랑크인들이 갈리아와 서유럽을 구하였다면, 마찬가지로 하자르인들은 볼가강과 다뉴브강과 동로마 제국으로 통하는 동방의 진입로들을 지켜냈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적어도 이러한 관점에서 소련 고고학자이자 역사가인 아르타모노프와 미국 역사가인 던롭은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습니다. 나는 이미 후자의 의견을 인용한 바 있으니, 하자르인들이 없었더라면, "유럽문명의 동방의 보루였던 비잔티움은 아랍인들에게 꼼짝없이 포위당했을 것이니" 만약 그랬다면 역사의 흐름은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아르타모노프 역시 같은 주장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하자르인들의 국가는 동유럽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봉건국가였으며, 그들의 위세는 비잔티움 제국과 아랍 칼리프국과 맞먹을 정도였다.. 비잔티움이 아랍인들에 맞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랍인들의 군대를 코카서스로 돌리게 만들었던 하자르인들의 강력한 저항 덕분이었다.."

 

옥스포드 대학의 러시아사 교수인 디미트리 오볼렌스키는 최근에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하자르인들이 세계사에 공헌한 주된 업적은, 북방으로 진격하는 아랍인들에 맞서 코카서스 방어선을 지켜낸 것이다."

 

마르완은 하자르를 공격한 마지막 아랍인 장군이었을 뿐 아니라, 최소한 이론상으로는 이슬람의 승리를 온 세계에 떨치기 위한 팽창정책을 추구했던 마지막 칼리프이기도 했습니다. 압바스 칼리프조가 들어서자 정복전쟁은 중단되었으며, 그들에게서 부활한 옛 페르시아 문화는 부드러운 사회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룬 알 아시드 치세에 바그다드는 찬란한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8

 

제 1차, 2차 아랍전쟁 사이의 소강상태 동안, 하자르인들은 비잔티움 역사와, 그 밖의 시대적 상황에서의 자신들의 역할의 비중이 더욱 커졌음을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에피소드에 휘말려 갔습니다.

 

685년, 유스타니아노스 2세 리노트메토스는 열여섯살의 나이로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기번은 그만의 독특한 문체로 이 젊은이의 초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열정은 강력했으나, 그의 이해는 빈약했다. 게다가 그는 어리석은 자부심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가 총애하는 장관들은 인간의 연민을 가장 적게 받아 마땅할 두 부류였으니, 바로 환관과 승려들이었다. 전자는 황제의 어머니를 채찍으로 모욕했으며, 후자는 그들의 머리를 아래로 끄덕임으로서 은근하고 화염이 가득한 불꽃 위로 지불 불능상의 속국들을 매달았다.

 

10년 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실정에 결국 혁명이 터졌으며, 새로 등극한 황제인 레온티오스는 유스티니아노스를 불구로 만들고는 추방에 처했습니다. (아래는 기번의 기록)

 

그의 코와, 그리고 아마도 그의 혀의 절단은 효과가 없었다. 그리스어의 유연성은 그에게 리노트메토스 ("코가 잘린") 이라는 별명을 부여했다. 그리고 이렇게 불구가 된 폭군은 크림 타타르의 케르손으로 추방되었으니, 이 외로운 지역에서는 밀과 포도, 그리고 기름을 이국적인 사치품으로서 수입하고 있었다.

 

케르손에 유형되어 있는 동안 유스티니아노스는 자신의 왕좌를 되찾을 음모를 계획했습니다. 3년 후, 그는 레온티오스가 폐위되고 마찬가지로 코가 절단되는 것을 보면서 기회가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했습니다. 유스티니아노스는 크리미아의 하자르인 고장인 도로스에도착하여 하자르인들의 카간 부시르 Busir (혹은 바지르) 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카간은 비잔티움 왕실의 정책에 개입할 수 있는 이 기회를 환영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유스티니아노스와 동맹을 맺고 그의 여동생과 혼인까지 시켰습니다. 테오도라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후에 남편과 함께 제관을 받은 그의 여동생은 이러한 일련의 지저분한 모략에서 유일하게 정숙하게 처신한 인물로 보이며, 그의 코가없는 남편 (그는 아직 30대 초반에 불과했습니다.) 을 진실한 애정으로 대했습니다. 이 부부와 그들의 추종자들은 이제 케르치 해협 동안의 파나고리아 (현재의 타만) 로 이동했는데, 이곳은 하자르인 총독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부시르 왕이 일단 약속한 군대와 함께 비잔티움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새로 황위에 오른 황제인 티베리오스 3세가 보낸 사절단이 부시르를 설득하였으니, 그들은 많은 금을 약속하면서 유스티니아노스를 산채로든, 죽은 채로든 비잔티움 인들에게 양도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부시르 왕은 각각 파파체스 Papatzes 와 발기트레스 Balgitres 라는 이름을 가진 자신의 두 심복들에게 자신의 매형을 죽이도록 명했습니다. 하지만 충직한 테오도라는 이 음모를 알아차리고는 그의 남편에게 경고했습니다. 유스티니아노스는 파파체스와 발기트레스를 각각 따로 자신의 거처에 초대하여 차례차례 목졸라 죽여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쪽배를 훔쳐서 흑해를 건너 다뉴브강 어귀에 도착하여 새로이 강력한 불가르인들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들의 왕이었던 테르볼리스 Terbolis 는 적어도 이 시기에는 카자르의 카간보다 더 믿음직했으니, 그는 704년에 유스티니아노스에게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도록 15,000기의 기병을 제공했습니다. 지난 10년간 비잔티움인들은 유스티니아노스의 첫 치세동안의 악정은 잊어버렸으되, 현재 그들의 지도자의 통치는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던 참이었으므로 그들은 갑자기 티베리아스에 대항하여 유스티니아노스를 다시 옥좌에 복위시켰습니다. 불가리아 왕은 "자신의 스키티아식 도르래로 측정한 금화 무더기를" 선물받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몇년 후 비잔티움과 새로운 전쟁에 돌입하게 됩니다.) .

 

유스티니아노스의 두번째 치세 (704-711년) 는 첫번째 치세보다도 더 잔인했습니다. "그는 신민들의 충성을 담보하기 위해 오직 도끼와 교수형에 쓰이는 끈, 그리고 고문대만을 고려했다." 그는 정신적으로 불안해졌으며, 그가 추방의 쓰라린 경험을 했던 케르손의 주민들에 대한 증오에 사로잡혀서 그들에 대한 징벌군을 보냈습니다. 케르손의 몇몇 지도적 시민들은 산채로 화형에 처해졌으며, 다른 이들은 수장되었고 많은 포로들이 추방되었습니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노스의 복수욕은 이것만으로는 만족되지 않았으며, 그는 두번째 원정대를 보내 이 도시를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의 군대는 이번에는 강력한 하자르인들의 군대에 의해 제지당했으며, 이에 유스티니아노스의 크리미아 지역에 파견된 대리인인 (아마도) 바르다네스는 편을 바꾸어 하자르인들의 편에 가담했습니다. 사기가 떨어진 비잔티움 원정군은 유스티니아노스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고 바르다네스를 필리피코스라는 이름으로 황제에 선출했습니다. 하지만 필리피코스가 하자르인들의 손아귀에 있는 한, 반란군들은 그들의 황제를 옥좌에 앉히기 위해 카간에게 많은 대가를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원정군들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자, 유스티니아노스와 그의 아들은 암살되었습니다. 해방자로 받들어진 필리피코스는 옥좌에 올랐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폐위되고 장님이 되었습니다.

 

이 피투성이의 이야기의 요점은 이 시기에 동로마 제국의 운명에 영향을 끼쳤으며, 그에 덧붙여 코카서스의 보루에서 무슬림들을 막아낸 방어자로서의 하자르인들의 영향력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바르다네스-필리피코스는 하자르인들이 세운 황제였으며, 공포로 점철된 유스티니아노스의 치세는 그의 처남인 카간에 의해 막을 내렸습니다. 이에 대해 던롭 교수는 "이에 대해 카간이 현실적으로 그리스제국에 새 황제를 제공했다고 말해도 과장된 것은 아닐 것이다." 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9

 

연대순으로 보자면, 다음에 이어질 사건은 기원후 740년 경에 벌어진 하자르인들의 유대교로의 개종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놀라운 사건을 올바른 시각에서 바라보기 위해서 우리는 적어도 개종전의 하자르인들의 문화와 관습, 그리고 일상생활에 대한 대략적인 사항들을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슬프게도, 우리는 아틸라의 궁정에 대한 프리스쿠스의 기록과 같은 생생한 목격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자료는 주로 비잔티움인들과 아랍 연대기 작가들에 의해 작성된 간접적인 언급들과 편찬물들인데, 이것들은 두가지 예외를 제외하면 대체로 피상적이면서 파편적인 기록들입니다. 예외 중 하나는 하자르 왕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고 전해지는 것이며,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한 기록은 아랍 여행가인 이븐 파들란 Ibn Fadlan 의 여행담인데, 그는 -프리스쿠스와 같이- 문명화된 궁정에서 북방의 야만족들에게 파견된 외교 사절단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들의 궁정은 칼리프 알 무크타디르 al Muktadir 의 궁정이었으며, 이 외교 사절단은 바그다드를 출발하여 페르시아와 부하라를 지나 볼가 불가르인들의 영토에 도착했습니다. 이 당당한 사절단은 공식적으로는 불가리아 왕에게서 보내진 초대장에 의한 것이었는데, 그는 칼리프에게 자신의 백성들을 이슬람으로 개종하는데 필요한 성직자들을 보내줄 것이며, 또한 자신의 대군주인 하자르 왕에 맞서기 위한 강력한 요새를 건설하는데 힘을 보태달라고 요청한 바 있었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이전의 외교적 접촉에 의해 예정된- 이 방문은 사절단이 지나게 될 지역에 사는 무수한 투르크 민족들에게 코란의 말씀과 많은양의 황금 bakhshish 를 제공하면서 친선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었습니다.

 

이 여행담은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칼리프 알 무크타디르가 불가르인들의 왕에게 파견한 대사인 무하메드 이븐-술레이만 Muhammed ibn-Sulayman 장군의 공식 수행원인 아흐매드 이븐-파들란 이븐-알-아바스 이븐-하마드가 작성한 기록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투루크족의 땅에서 만난 하자르인들, 루스인들, 불가르인들, 바쉬키르인들과 그들의 다양한 종교와 그들의 군주들의 역사와 그들의 족적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한다.

 

불가르인들의 왕이 보낸 서한이 신심깊은 지도자, 알 무크타디르에게 도착했다. 그는 자신에게 종교 교사를 보내어 이슬람의 율법에 대해 알려줄 것과, 또한 자신의 백성들에게 개종의 임무를 수행할 모스크와 설교단을 지어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또한 칼리프에게 적대적인 군주들로부터 자신들을 방할 요새를 건설하는데 힘을 보태달라는 간청도 보냈다. 그들의 왕이 요청한 것 모두가 칼리프의 동의를 얻었다. 나는 왕에게 보내는 칼리프의 서한을 전달하도록 선발되었으며, 또한 칼리프가 보내는 선물을 전달하고 교사들을 감독하고 율법을 번역하는 임무도 맡았다.. (뒤이어 이 임무에 소요된 예산과 관련된 사항들과, 사절단원들의 이름이 줄줄 나열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309년 11번째 Safar 목요일 (서기 921년 6월 21일) 에 평화의 도시 (칼리프국의 수도, 바그다드를 가리킴) 를 출발했다.

 

보시다시피 여행기에 기록된 날짜들은 우리들이 지금껏 살펴본 시대보다 훨씬 후대의 것들입니다. 이느 하지만 하자르인들의 이교적 이웃민족들의 관습과 관례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기의 유목민족들의 삶에 대한 그의 기록을 살펴보면서 이븐 파들란 시대의, 즉 그 당시까지도 그들의 이웃들이 숭배하던 것과 유사한 샤머니즘을 숭배하고 있었던 초기 -즉 아직 개종을 하지 않은- 의 하자르인들의 삶에 대해서도 다소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의 여행은 그들이 아랄해 남부의 칼리프국의 국경지대인 콰리즘국에 느릿느릿 도착할때까지는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평온했습니다. 여기서 이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총독은 그들을 윽박지르면서 그들이 불가르인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을 저지하려고 노력했으며, 자신의 나라와 불가르인들의 왕국 사이에 거주하는 "신앙을 가지지 않은 무수한 부족들" 이 분명히 그들을 죽일 것이라는 위협했습니다. 사실 그가 이렇게나 칼리프의 사절들을 소홀히 대한 것에는 다른 동기에서 비롯된 이유도 있었을 겁니다. 그는 이 사절단의 목적이 자신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활발한 교역을 벌이고 있던 하자르인들에 간접적으로나마 대항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사절단의 고집에 손을 들고 말았으며, 사절단에게 아무다리야 강의 어귀에 있는 구르가니 Gurganj 로 가는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석달동안 겨울을 나기로 했으니, 이는 많은 아랍 여행가들의 걱정거리였던 혹한이 다가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강은 석달간 꽁꽁 얼어붙었으며, 우리는 그러한 풍경을 바라보면서 차가운 지옥이 우리에게 열렸다고 생각했다. 진실로 말하노니, 나는 시장과 거리가 추위때문에 완전히 텅텅 비어있는 것을 보았다.. 한번은 내가 목욕을 하고나서 숙소로 돌아오면서 보니 나의 턱수염이 얼음덩어리가 된 것을 발견했으며, 나는 이것을 불을 쬐면서 겨우 녹였다. 나는 어느 집의 내부에 있는 건물 (울안을 말하는 것인지?) 에서 여러날을 머물렀는데, 거기에는 투르크식 펠트 천막이 세워져 있었으며 나는 천막 안으로 들어가서 내 몸을 옷가지들과 모피로 둘렀으나, 뺨만은 어쩔 도리가 없어서 방석에 종종 들러붙곤 했다.

 

2월 중순이 되어서야 날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절단은 북부 평야지역을 가로지르는 5000명의 사람과 3000마리의 짐가축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대상의 무리와 합류했으며, 그들로부터 필수품을 구입했으니, 낙타와 강을 건너기 위한 낙타 가죽으로 만든 가죽 보트, 그리고 석달치의 빵과 기장, 그리고 양념한 고기가 그것이었습니다. 현지인들은 북쪽으로 갈수록 더욱 심한 추위가 기다리고 있다고 경고했으며, 그에 대비하기 위한 옷가지에 대한 충고를 해주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쿠르탁 Kurtak (소매없는 내의) 를 입고, 그 위에는 울로 만든 카프탄을 입고, 그 위에는 부슬린 buslin (모피로 안감을 낸 코트) 를 입고, 그 위에는 부르카 (모피코트) 를 입고 털모자를 썼는데 그 밑으로는 오직 눈만 삐죽 보였다. (아랫도리에는) 투박한 한 쌍의 속바지를 입고, 그 위에 안감을 댄 바지를 입고, 그 위에 겉바지를 입었다. (발은) 상어가죽 (kaymuht) 으로 만든 실내화를 신고, 그 위해 장화를 신었다. 이렇게 중장비를 갖춘 일행의 한 사람이 낙타를 타자, 그는 자신의 옷 때문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까다로운 아랍인이었던 이븐 파들란은 콰리즘 지역의 기후와 사람들 모두가 탐탁치 않았습니다.

 

그들의 언어와 관습을 존경하기는 하지만, 사실 그들은 가장 불쾌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언어는 마치 찌르레기가 재잘거리는 것 같다. 어느날 도착한 마을은 아르드콰 Ardkwa 라고 불렸으며, 그 주민들은 카르달 Kardal 인이라고 불렸다. 그들의 언어는 마치 개구리들이 개굴대는 것 같았다.

 

그들은 3월 3일에 다시 길을 떠났으며 밤에 잠간 Zamgan 이라고 불린 대상의 숙사에 묵었으니,  이곳은 구즈 투르크인들의 영토로 연결되는 관문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사절단은 완전히 이방인들의 땅으로 들어간 것이었으니, 그들은 "우리의 운명을 전능하고 고귀하신 신께 맡겼다." 빈번하게 마주쳤던 눈사태 중 하나와 마딱뜨렸을 때, 이븐 파들란은 한 투르크인의 뒤에 (낙타를) 타고 있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불평했습니다. "도대체 왕께서 원하시는게 뭐란 말입니까? 덕분에 우린 다 얼어죽겠구만요. 만약 우리가 그분이 원하는 것을 안다면, 즉시 그분에게 그것을 전해다 드릴텐데 말입니다." 이에 대해 이븐 파들란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당신 민족들이 '알라외에 다른신은 없다' 라고 고백하는 거라오." 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그 투르크인은 웃음을 터뜨리며 답했습니다. "그분이 원하는걸 알았으니, 우리는 이제 그렇게 말하면 되겠구만요."

 

그 후에도 이븐 팔라단이 지역주민들의 정신세계의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기록으로 남겼던, 유사한 사건들이 줄곧 이어졌습니다. 바그다드 궁전의 사절단들도 자신들의 체면을 위해 유목 부족민들에 대한 기본적인 경멸감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다음의 일화는 하자르인들에게 공물을 바쳤던 강력한 구즈 투르크인들의 영역에서 벌어진 일이었는데, 몇몇 사료에 따르면 그들은 하자르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우리는 한 투르크인과 마주쳤다. 그는 외모가 괴이했으며, 복장은 지저분했고 태도는 경멸할 만 했다. 당시 우리는 억수같은 빗속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멈추시오." 그러자 3000마리의 짐승들과 5000마리의 대상행렬이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그리고는 그는 "여러분 중 아무도 이곳을 통과할 수 없소." 라고 말하는게 아닌가. 우리는 멈춰서 그의 명령에 복종했다. 그리고는 그에게 말을 붙여보았다. "우리는 쿠다르킨 (부왕) 의 친구들이요." 이에 그는 웃기 시작하더니 "쿠다르킨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내가 그 작자의 수염에 똥을 갈기겠소." 그리고는 "빵을 주시오." 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빵 몇덩이를 나누어 주었다. 그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가던 길을 가시오, 나는 당신들이 가엾어서 보내주는 것이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뭔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을때 구즈족이 택하곤 했던 "민주적인" 방법들은 아주 독실한 종교국가에서 온 이들 대표단을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유목민들이며, 펠트로 만들어진 집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한동안 한 지역에 머물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곤 한다.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천막이 유목민들의 관습에 따라 여기 저기에 세워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들은 힘든 삶을 영위하긴 하지만, 스스로 마치 길을 잃은 나귀처럼 행동하곤 한다. 그들은 자신들과 신을 연결해주는 어떠한 종교도 갖고 있지 않으며 그렇다고 이성에 의한 지도를 받는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 어느것도 숭배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의 우두머리를 왕이라고 부른다. 언젠가 그들중 하나가 자신의 족장에게 의견을 물은 적이 있었다. "오 왕이시여,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들간의 행동은 그들의 논의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그들이 어떠한 행동을 결의하고 그것을 진행할 수행할 준비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들 중 가장 비천하고 낮은 이조차도 그 결정을 무위로 만들 수 있다.

 

구즈인 -과 다른 부족들- 의 성性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기록에서는 자유분방함과 미개함이 더욱 강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여자들은 그들의 남자들이나 이방인든 앞에서도 베일을 쓰지 않는다. 또한 그 여자들은 다른 사람 앞에서도 그들의 몸을 전혀 가리지 않는다. 어느날 우리는 한 구즈인의 건물안에서 둘러앉아 있었다. 그의 아내도 그 자리에 있었다. 우리가 담화를 나누자, 그 여자는 자신의 은밀한 부분을 나체로 만들고는 그것들을 쭉 뻗었고, 우리는 그것을 보고 말았다. 우리는 즉시 얼굴을 가리고는 "신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를!" 이라고 빌었다. 그녀의 남편은 이를 보고 웃더니 통역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에게 말하시오. 우리는 당신들 앞에서 그 부위를 벗고, 당신들은 그것을 보고 자신을 속박할 것이나 이는 성공할 수 없는 것이오. 하지만 이는 그 부위를 가리고 스스로를 속박하는 것보다 낫소." 간통은 그들에게 흔하지 않다. 하지만 만약 어느 남자가 간통하는 것이 들통나면, 그들은 그를 두 갈래로 찢는다. 이 형벌을 위해 이들은 두 생나무의 가지들을 한데 모은 뒤 간통자를 가지에 묶고나서 어느순간 나무가지를 원상태로 회복시킨다. 그러면 가지에 묶였던 간통자는 두 조각으로 찢어지는 것이다. (역주/로마군이 사용한 형벌과 비슷하군요?)

 

그는 간통한 여성도 같은 벌을 받는지는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그는 나중에 볼가 불가르인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마찬가지로 간통자를 두 조각내는 야만적인 방법에 대해 묘사하고 있으니, 이는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형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놀라움과 함께 묘사한 것처럼 불가르인 남녀들은 함게 강가에서 벌거벗은 채 수영을 했으며, 구즈인들과 마찬가지로 육체에 대해서는 거의 부끄러운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랍 세계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동성애에 대해서 이븐 파들란은 "투르크인들은 그것을 끔찍한 죄악으로 여긴다" 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이러한 기록과 관련된 유일한 일화에는 "수염이 나지않은 젊은이" 를 탐하는 색마가 400마리의 양을 벌금으로 내고 죄를 용서받았다는 일화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바그다드에 지천으로 널려있던 목욕탕에 익숙한 우리의 사절단들은 이들 투르크인들의 지저분함에 크게 괴로워했습니다. "구즈인들은 용변을 보고 난 뒤에도 씻지 않는것은 물론이요, 사랑을 하고 난 뒤나, 그 외의 다른 일을 한 뒤에도 목욕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물과 관련된 어떠한 행동도 거부하는데, 이러한 경향은 특히 겨울철에 더욱 그러하다.."

 

사절단이 만난 구즈인들의 최고 사령관은 새 코트를 입기 위해 자신이 입고있던, 무늬를 넣어 짠 화려한 코트를 벗었는데, 이때 사절단들은 그의 내의가 "더러움으로 닳아 있었으니, 그들은 그들의 몸에 가깝게 접촉하는 이러한 옷들을 일단 한번 입으면 그것이 누더기가 될때까지 벗지 않는다." 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다른 투르크 부족인 바쉬키르인들에 대해서는, "그들은 자신들의 수염을 깍고 자신들의 몸에서 나온 이를 먹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입은 내의의 주름을 뒤졌으며 이렇게 찾은 이를 이빨로 씹어먹었다." 라고 언급했습니다. 이븐 파들란이 바쉬키르인들의 이러한 행동을 보았을 때, 이를 먹는 사람은 그에게 "이것들은 맛있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쨋든, 이러한 광경은 그다지 매력적인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까다로운 사절단이 이들 야만인들에게서 느끼는 경멸의 심연은 깊어만 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멸감은 오로지 그들의 지저분함과, 그가 몸을 노출시키는 것이 음란한 것이라고 여기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반면 그들의 형벌과 희생의식에서 보여지는 미개함은 그에게 완전히 다른 인상을 남겨놓았습니다. 그는 불가르인들의 살인죄에 대한 형벌을 공정한 흥미를 가지고 기술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그의 기록에서 자주 보여지는 분개의 감정은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 "그들은 그 (범죄자) 를 위해 자작나무로 만든 상자안에 그를 집어넣고 뚜껑을 못질하고는 세 덩이의 빵과 가능한 한 많은 양의 물을 안에 넣어주고는 두개의 높은 장대가운데 매달으면서 설명했다. '우리는 그를 지상과 천국가운데에 매달았으니, 그는 태양과 비에 노출될 것이고, 이렇게 함으로서 신께서는 어쩌면 그를 용서하실 수도 있을 것이요.' 그리고 그는 자신의 육신이 썩어 바람에 휘날릴 때까지 계속 매달려 있었다."

 

그는 마찬가지의 냉정함을 유지하면서 수백마리의 말과 다른 가축떼가 동원된 희생제사와 자신의 주인의 묘 앞에서 살해된, 한 루스인 노예소녀가 당한 으스스한 종교적 희생의식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들이 신봉하는 이교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쉬키르인들의 남근문화는 그의 흥미를 끌었으니, 그는 자신의 역관을 통해 한 원주민에게 그들이 나무로 만든 남근을 숭배하는 이유를 물었으며, 그 대답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저것과 유사한 것으로부터 연유했으며, 그 외에 나를 창조한 다른것을 알기 못하기 때문이오." 그리고 파들란은 덧붙이기를, '그들 (바쉬키르인들) 중 일부는 열두명의 신들을 숭배하니, 겨울의 신, 여름의 신, 비의 신, 바람의 신, 나무의 신, 인간의 신, 말의 신, 물의 신, 밤의 신, 낮의 신, 족음의 신, 이승의 신이 그것들이다. 천상에 거주하는 신이 그들 중에서 가장 위대하긴 하지만, 다른 신들의 조언을 구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며, 따라서 모두들 다른 신들의 행동에 서로 만족한다.. 우리는 밤을 숭배하는 이들도 보았고, 물고기를 숭배하는 이들도 보았고, 학을 숭배하는 이들도 보았다.."

 

 

 

 바그다드를 떠나는 이븐 파들란.. 이라고 하네요. 

 

볼가 불가르인들에게서 이븐 파들란은 한가지 기괴한 관습을 목격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 민첩함과 지성으로 자신들을 능가하는 이를 발견하면, 그들은 "이 사람은 우리의 신에게 봉사하는 것이 더욱 어울린다." 라고 말하면서 그의 목에 밧줄을 걸고는 그의 신체가 썩어 휘날릴 때까지 나무에 매달아둔다. (ㄷㄷ)

 

이러한 일화에 대해, 이븐 파들란과 그의 시대에 한한, 논란의 여지가 없는 권위자인 터키의 동양사학자 제키 발리디 토간 Zeki Validi Togan 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불가르인들이 아주 현명한 이들에게 가한 이러한 잔인한 대우는 하등의 미스테리한 점이 없다. 이는 그저 자신들이 평범한 삶이라고 생각한 삶을 유지하기를 원하면서, "천재" 가 그들을 몰고 갈지도 모르는 어떠한 모험이나 위험요소를 피하고자 하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간결하면서도 진실한 이유에 기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타타르인들의 속담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너무 잘났다면, 바로 그것이 당신의 목을 조를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너무나 관대하다면, 그것이 당신을 짓밟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결론짓기를 그 희생자는 "단순히 학식있는 자로 간주되는 대신에, 지나치게 영리하여 집단이 다루기 힘든 천재로 여겨져야 한다." 라고 언급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러한 관습은 변화를 거부하는 사회적 방어기제, 즉 현실에 만족하지 않는 잠재적 혁명가에 대한 형벌로 보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몇 문장 뒤에 그는 이와는 좀 다른 해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븐 파들란은 단순히 아주 현명한 이의 살해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교적 풍습 중 하나를 묘사한 것이다. 즉, 인간제물을 말하는 것이니, 여기서는 사람들 중 가장 뛰어난 이가 신에 대한 제물로 받쳐지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아마도 평범한 불가르인들에 의해서가 아닌, 그들의 Tabib 즉 의사들, 예를들면 샤먼들에 의해 수행된 것일수도 있는데, 불가르인들과 루스인들 모두 사이에서 존재했던 이들은 그들의 종교의 이름으로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권세를 휘둘렀다. 이븐 루스타 Ibn Rusta 에 의하면, 루스인들의 의사들은 신의 자비를 간청하기 위해 아무에게나 목에 밧줄을 걸고 나무에 매달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의식이 끝나면, 그들은 "이것은 신에게 바쳐지는 제물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들 두가지 동기들은 서로 섞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즉, "어차피 희생제물이 필요한 이상, 기왕이면 말썽꾼을 제물로 삼자." 는 거지요. 우리는 이러한 인신공양이 하자르인들 사이에서도 행해졌음을 알 수 있으니, 여기에는 그 치세가 끝나기 직전에 행해진 군주의 종교적인 시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외에도 이븐 파들란이 묘사한 부족들의 관습과 하자르인들의 관습 사이에 다른 많은 유사점들이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라 가정할 수 있을 겁니다. 불행히도 그는 하자르인들의 수도를 방문하는 것을 금지당했으며, 대신 특히 불가르인들의 궁정과 같이, 하자르인들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지역에서 수집한 정보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0

 

칼리프인들의 사절단이 그들의 목적지인 볼가 불가르인들의 땅에 도착하는데에는 거의 1년 (921년 6월 21일부터 922년 5월 12일) 이 걸렸습니다. 바그다드에서 볼가강에 이르는 직통로는 코카서스와 하자리아에 걸쳐 있었는데, 후자의 지역을 피하기 위하여 그들은 이른바 "하자르 해" 라고 불렸던 카스피 해의 동안을 둘러가는 긴 우회로를 택해야만 했습니다. 여행을 계속하면서 그들은 하자르인들의 땅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과, 그에 따라 다가오는 잠재적인 위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특별한 사건이 그들이 구즈 군대의 총사령관 (위에서 언급한 지저분한 속옷을 입은 사령관) 과 함께 있었던 와중에 벌어졌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환대를 받았고 연회에 초대받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구즈인들의 수령들은 자신들과 하자르인들간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점차 마음이 바뀌어 갔습니다. 이에 총사령관은 수령들을 모아 어떻게 할지를 의논했습니다.

 

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영향력이 있었던 이는 타르칸 Tarkhan 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절름발이 인데다가 장님이었으며, 손은 절단된 사람이었다. 총사령관이 그들에게 말했다. "이들은 아랍인들의 왕이 보낸 사절들이며, 나는 여러분의 의견을 듣기 전까지는 그들을 그냥 보내줄지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소." 그러자 타르칸이 말했다. "이 일은 우리가 이전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일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선조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산 이래, 술탄의 사절이 우리의 영토를 지나간 일은 이제껏 없었습니다. 의심할 것도 없이 술탄은 우리를 기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실제로는 하자르인들을 선동하여 우리에게 대적하도록 보내진 이들일 것입니다. 우리의 최선의 방도는 저 사절들을 두조각내고 그들의 소유물들을 압수하는 것일 겁니다." 이에 다른 수령이 말했다. "안됩니다. 대신 그들의 소유물들을 압수한 뒤 나체로 자신들이 온 곳으로 쫒아내는 것이 가할 것입니다." 또 다른 이는 이렇게 말했다. "안됩니다. 하자르인들의 왕은 우리 인질들을 잡고 있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을 보내 그들과 맞바꾸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들은 일곱날 동안 논쟁을 벌였으며, 그 동안 이블 파들란과 그 동료들은 혹시모를 최악의 사태가 닥칠까 두려워했습니다. 결국 구즈인들은 그들을 보내주기로 했지만, 그 이유는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는 이븐 파들란이 자신들의 임무는 하자르인들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성공적으로 납득시켰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사실 구즈인들은 이전에 하자르인들과 손을 잡고 다른 투르크부족인 페체네그족과 싸움을 벌인 적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간의 관계는 적대적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래서 하자르인들은 그들에게서 인질을 잡아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행이 진행될수록 하자르인들의 위협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었습니다. 볼가강과 카마강 인근의 합류점 근처 어딘가에 위치한 불가르인들의 야영지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은 카스피해 북부지역에서 또다시 다른 장구한 우회로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 (불가르인들의 야영지) 에서 그들의 왕과 수령들은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그들 사절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환영식과 축제가 끝나자, 왕은 이븐 파들란과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븐 파들란에게 강력한 어조로 ("그의 목소리는 마치 그가 술통 바닥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사절단의 임무를 상기시켰으니, 즉 그에게 자금을 원조함으로서 '나는 나를 정복한 유대인들로부터 나를 지켜줄 요새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오.' 라는 것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건설자금 -대략 4천 디나르- 은 까다로운 관료적 형식주의에 의해 사절단에게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 후의 다른 사절단에 의해 전달될 예정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되자 왕, 즉 "넓직하고 뚱뚱한, 인상적인 외모를 가진 사람" 은 실망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사절단이 자금을 횡령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까지 했습니다. "'당신들은 미약하고, 포위당하고, 그리고 억압당하는 이들에게 보내어지는 자금을 전달할 것을 명받고는, 그것을 횡령해버린 이들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나는 대답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한 이들은 사악한 이들입니다.' 그러자 그가 물었다. '그것은 당신의 개인적인 견해인지요, 아니면 일반적인 견해인지요?' 나는 대답했다. '일반적인 견해이지요.'"

 

어쨋든 이븐 파들란은 불가르인들의 왕에게 자금의 도착은 단지 지연되는 것일 뿐이라고 납득시키는데는 성공했습니다만, 왕의 근심까지 진정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왕은 계속해서 이 초청의 목적은 요새를 짓는 데 있다고 말했으니 "왜냐하면, 그는 하자르인들의 왕을 두려워했기 때문"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두려워할만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이븐 파들란은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가르인들의 왕의 아들은 인질로서 하자르인들의 왕에게 붙들려 있었다. 게다가 불가르인들의 왕이 아름다운 딸을 두고 있다는 소문이 하자르인들의 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이에 그는 그녀를 자신에게 보내라는 전갈을 보냈다. 이에 불가르인들의 왕은 적당한 핑계를 대서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하자르인들은 또다른 사절단을 보내어, 비록 자신은 유대인이고 공주는 무슬림임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공주를 자신의 궁정으로 끌고갔다. 하지만 그녀는 하자르인들의 궁정에서 곧 죽고 말았다. 그러자 하자르인들은 또다른 사절을 보내어 불가르인들의 왕의 다른 딸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사절단이 막 도착하자 불가르인들의 왕은 그들이 또 자신의 딸을 강제로 끌고갈 것이 두려워, 공주를 자신의 신하인 아스킬 Askil 의 군주와 허겁지겁 혼인시켰다. 이러한 위협이 불가르인들의 왕으로 하여금 칼리프와 보조를 같이하게 하였으며, 그에게 요새를 건설하는데 힘을 보태달라고 요청한 이유였으니, 이는 모두 그가 하자르인들의 왕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마치 상투적인 신파극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한편, 이븐 파들란은 불가르인들의 왕이 하자르인들에게 바쳤던 연간 조공에 대해서도 기록을 남기고 있으니, 불가르인들의 왕 지배하에 있는 모든 가구가 각각 하나씩의 담비가죽을 바쳐야 했습니다. 당시 불가르인들의 가구수 (즉 천막의 수) 는 대략 5만 가구정도로 추산되며, 전 세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던 불가르지역의 담비 가죽은 틀림없이 매력적인 공물이었을 겁니다.

 

11

 

이븐 파들란이 하자르인들에 대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들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의 여로에서 수집한 간접적인 정보에 기초하는 것들이며, 동시에 주로 불가르인들의 궁정에서 얻은 견문이기도 합니다. 생생한 개인적인 관찰에서 우러나온 그의 이야기의 다른 부분들과는 달리, 하자르인들에 대한 내용은 간접적이고 간략하면서도 다소 무미건조합니다. 게다가 그의 정보의 소스는 편견에 치우쳐 있습니다. 즉 하자르 군주에 대한, 이해할 수 있을만한 적의를 품고 있는 불가르인들의 왕의 시각에 기초한 것입니다. 게다가 라이벌 종교로 개종한 그 왕국에 대한 칼리프국의 분노역시, 굳이 애써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여행기의 어조는 루스인들의 궁정과 하자르인들의 궁정에 대한 설명 부분에서 갑자기 변하고 있습니다.:

 

카간의 칭호를 가지고 있는 하자르인들의 왕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는 1년에 넉달간만 대중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인다. 그들의 신민들은 그를 대 카간 Great Kagan 이라고 부른다. 그의 대리인은 카간 베크 Bek 라고 불리는 사람인데, 그는 군대를 지휘하고 군대를 조달하고 국사를 관장하고, 대중앞에 모습을 보이고, 전쟁을 이끈다. 인근의 군주들은 그의 명령에 복종한다. 그는 복종심과 겸손함과 함께, 맨발로 걸어나와 손에는 나무봉을 쥐고는 매일 대 카간을 알현한다. 그는 카간에게 인사를 마친 뒤 나무봉에 불을 붙이고는 그것이 다 타면 왕의 오른쪽에 마련된 옥좌에 앉는다. 그 다음의 서열은 크느드르 K-nd-r 카간(-_-?) 이며, 그 다음 서열은 조샤이르 Jawshyghr 카간이다.

 

대 카간이 그의 신민들과 직접 만나거나, 그들과 이야기를 하지 않는것이 그들의 관습이며, 이제껏 우리가 언급한 이들 외에는 아무도 그와 만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사람들을 묶거나, 풀어주거나, 벌을 주거나, 나라를 다스리는 권력은 그의 대리인인 카간 베크의 소관이다.

 

그리고 대 카간이 죽으면, 그를 위한 거대한 건물이 지어지는 것이 또한 관례이니, 이 건물에는 20개의 방이 있으며, 각각의 방에는 그를 위해 만들어진 무덤이 있다. 돌들이 모래가 될때까지 쪼개어져서 그 바닥에 뿌려지고 그 위는 역청으로 덮힌다. 그 건물 아래에는 강이 흐르고 있으며, 이 강은 폭이 넓고 흐름이 급하다. 그들은 이 강물을 무덤 위로 돌려 놓았으며, 그리고는 악마도, 인간도, 벌레나 어떠한 기어다니는 창조물도 그에게 접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묻히고 나면, 그를 묻은 이들은 참수당하며, 따라서 그 누구도 카간의 진짜무덤이 어느 방에 위치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 무덤은 "천국" 이라고 불리며, 그들은 죽은 카간을 가리켜 "그는 천국문에 들었다." 라고 말한다. 모든 방에는 금사를 넣어 짠 비단이 펼쳐져 있다.

 

하자르인들의 왕은 스물 다섯명의 아내를 취하는 것이 그들의 관습이다. 그 아내들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봉신들의 여식이다. 그녀들을 자발적으로 보내지기도 하지만, 강제로 끌려온 이들도 있다. 그 외에 그는 60명의 후궁을 두고 있으니, 그녀들 모두가 천하 절색이다.

 

그 다음에 이븐 파들란은 다소 상상력이 풍부한 문체로 카간의 하렘을 묘사하고 있으니, 여기서 카간의 여든 다섯명의 왕비와 후궁들은 "각자의 궁전" 과 수행원, 혹은 환관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들은 왕의 명령이 떨어지면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들을 카간의 정자로 데리고 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븐 파들란은 이 밖에도 좀더 그 진위가 의심스러운 하자르 카간의 "관습들 (나중에 좀더 살펴보기로 합시다.) " 을 기록하고 있으나, 적어도 그 왕국에 대해서는 다소간 사실적인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왕은 이틸강 (볼가강) 양안에 걸쳐있는 거대한 도시를 소유하고 있었다. 강 한편에는 무슬림들이 살고 있었으며, 그 맞은편에는 왕과 그의 신하들이 살고 있었다. 무슬림들은 그 자신도 무슬림인 국왕의 한 관리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 하자르인들의 수도에 사는, 지정된 옷을 입은 무슬림들과 이국에서 온 상인들은 그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누구도 그들의 일에 끼어들거나 그들을 무시하고 판결을 내리지 못했다.

 

현존하는 파들란의 여행기는 다음의 문장으로 끝납니다.:

 

하자르인들과 그들의 왕은 유대인들이다. 불가르인들과 그 밖의 다른 모든 이웃들은 그에게 복속되어 있다. 그들은 그에게 경의에 찬 신종을 보여야만 한다. 어떤 이들은 곡과 마곡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로 하자르인들의 나라일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한다.

 

12

 

지금까지 나는 이븐 파들란의 오딧세이를 다소 지루하게 언급했지만, 이는 그가 전해주는 하자르인들에 대한 빈약한 정보때문이 아니라, 개종 이전의 그들의 과거를 보여주는 당시대 민족들의 적나라한 야만행위에 대한 언급과 같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어렴풋이 비추는 서광 때문입니다. 이븐 파들란이 불가르인들을 방문할 당시의 하자르인들은 그들의 이웃들과 비교해서 놀랄만큼 발전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발전의 차이는 다른 아랍 역사가들의 기록에 의해서도 증명되고 있으니, 이는 주거형태에서 재판형태에 이르는 모든 사항에 걸쳐 나타나고 있습니다. 불가르인들은 여전히 각각 천막에서 지내고 있었으며, 그들의 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비록 왕실의 천막은 "매우 거대해서 천명 이상의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 고 하지만 말입니다. 반면 하자르인들의 카간은 구운 벽돌로 만든 성에서 살았으며, 그의 처첩들은 "티크로 만든 지붕을 가진 궁전" 에서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무슬림들은 다수의 모스크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 중 한 모스크의 광탑은 왕궁보다도 높이 솟아 있었다." 고 합니다.

 

비옥한 토양을 바탕으로, 그들의 농장과 경작지역은 육칠십마일 이상 뻗어나가 있엇습니다. 또한 그들은 광대한 포도밭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븐 하우칼 Ibn Hawkal 역시 "코즈르 Kozr (하자리아) 에는 아스미드 Asmid (사만다르) 라고 불린 도시가 있는데, 그곳에는 무수한 과수원과 정원이 있으니, 실로 다르반드에서 세리르 Serir 에 이르는 전 국토가 정원과 경작지가 이 도시의 소유였다. 이 도시에는 이러한 경작지가 4만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 중 다수가 포도를 생산한다." 라는 언급을 남겼습니다.

 

코카서스 산맥의 북부지역은 극도로 비옥한 지역이었습니다. 서기 968년 이븐 하우칼은 러시아인들의 공격이 있은 후, 그 지역을 방문한 한 남자와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어떠한 포도원이나 과수원에도 불행을 맞은 이들을 위해 남겨진 것이 없었다고 한다. 가지에 달린 잎사귀조차도.. (하지만) 토양의 비옥함과 풍부한 생산량 덕분에 그 지역이 예전처럼 되돌아가는 데에는 3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현대 소련에서도 코카서스 와인은 맛이 좋기로 유명하며, 대량으로 거래되는 물품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국고를 채워주는 주된 원천은 외국과의 교역이었습니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대상들이 중앙아시아와 볼가-우랄지역을 바쁘게 오가는 모습은 이븐 파들란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포함된 사절단과 구르가니 Gurganj 에서 합류한, "5천명의 사람과 3천마리의 짐가축" 으로 이루어진 대상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물론 과장이 섞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 점을 고려한다 해도 이는 여전히 거대한 대상임에 틀림없으며, 우리는 이러한 대상들의 무리가 얼마나 많이 여정에 올랐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무지는 그들이 지고 간 교역품의 종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아마도 옷감과 건과류, 꿀, 왁스와 향신료 등이 주종을 이루었을 겁니다. 두번째 주요 교역로는 코카서스를 건너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페르시아를 지나 비잔티움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세번째 교역로는 볼가강을 떠나 하자르 해로 이어지는 북적북적한 루스인들의 상선대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여기서 거래되는 상품은 주로 무슬림 지배계층 사이에서 많은 수요가 있었던 귀한 모피와 북방 이틸의 노예시장에서 팔린 노예들이었습니다. 노예를 포함하여, 모든 교역물에 하자르인들의 군주는 10%의 관세를 매겼습니다. 이 관세에다 불가르인들, 마자르인들, 부르타스인들 등등의 민족들이 보내온 조공은 하자리아를 번영하게 만들었지만, 그 번영은 상당부분 하자르인들의 군사력과 세리들과 관세관리들에게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과수원과 포도원이 집중되어 있는 남부 영토를 제외하면, 그들의 영토는 지하자원이 부족했습니다. 아랍 역사가인 이스타크리 Istakhri 는 그들이 수출하는 고유상품은 부레풀 뿐이라고 언급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이는 그들의 교역활동의 상당부분이 중계무역으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품들 중에서, 꿀과 양초에 쓰이는 왁스는 특히 아랍 연대기 작가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습니다. 무콰다시 Muqaddasi 는 이에 대해 언급하기를 : "하자리아에는 양과 벌꿀, 그리고 유대인들이 넘쳐난다." 라고 기록하기까지 했습니다. 한 사료 -다르반드 전례 the Darband Namah- 에는, 하자르인들의 영토에 금광과 은광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그 위치는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한편 몇몇 사료에 의하면 하자르인들의 상품이 바그다드에서 팔리곤 했다고 하며, 하자르 상인들은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 심지어는 사마라와 페르가나에도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하자리아가 다른 문명세계와 고립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부족단계의 북쪽 이웃들과 비교했을 때 하자리아는 상대적으로 코스모 폴리탄적인 국가였으며, 물론 두 종교적인 강대세력들에 맞서 열정적으로 자신들의 독립성을 수호하기는 했으되, 모든 종류의 문화와 종교적 영향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보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분위기가 유대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게 한 쿠데타의 기반이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자리아에서는 고급 양재기술을 포함한 예술과 기술또한 융성했습니다. 미래의 로마황제가 될 콘스탄티노스 5세가 하자르 카간의 딸과 결혼했을 때 (섹션 1 참조.) , 그녀는 일종의 결혼 지참금으로 비잔티움 궁정에서 찬탄의 대상이 된 화려한 예복을 가져왔으며 이것은 후에 공식적인 의전복장으로 채택되었습니다. 비잔티움인들은 이것을 치차키온 tzitzakion (역주/혹은 Chichacion)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공주의 하자르-투르크식 애칭 (그녀가 이레네라는 이름으로 세례받기 전에 불린) 이었으니, Chichak 즉 "꽃" 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토인비는 "여기에서 우리는 문화사의 단편을 조명하고 있다." 라고 언급했습니다. 다른 하자르 공주가 아르메니아의 무슬림 총독과 결혼했을 때, 그 결혼행진에는 그 수행원들과 노예들은 차치하더라도 수레에 실린 열개의 천막이 이어졌으니, 이것들은 "가장 훌륭한 비단으로 만들어졌으며, 각각 금은으로 도금한 문이 달렸고, 그 바닥에 담비가죽이 덮혀 있었다. 20대의 다른 수레들에는 금은 항아리와 다른 보물들이 그녀의 지참금으로 실려 있었다. (동양사학자 제키 발리디 Zeki Validi의 언급.)" 고 합니다. 카간 자신은 훨씬 으리으리한 이동식 천막을 타고 이동했으니, 그 천막 꼭대기에는 순금제 석류장식이 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13

 

하자르인들의 예술은 불가르인들과 마자르인들처럼 주로 사산조 페르시아의 양식을 모범으로 삼고 모방한 것이었습니다. 소련의 고고학자인 바데르 Bader 는 페르시아식의 은공예품들이 북방으로 전파되는 데 있어서 하자르인들이 담당한 역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담당한 중개인으로서의 역할과 부합하는 일이지만, 이들 북방지역에서 발뎐된 유물들 중 일부는 아마도 하자르인들에 의해 재수출된 물건들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유물들 중에는 일부 하자르인들의 공방에서 만들어진 모방품들이 있는데, 이러한 공방의 옛터가 사르켈 Sarkel 의 고대 하자르 요새 인근에서 발견된 바 있습니다 (불행히도, 가장 중요한 하자르 유적지인 사르켈은 최근 건설된 수력발전소의 영향으로 물에 잠겨버렸습니다.) . 이 요새에서 발견된 보석장식들은 지역 생산품들이었습니다. 스웨덴인 고고학자 아르네 T. J. Arne 는 스웨덴에서도 발견되는 장식판과 걸쇠, 버클을 강조하고 있으니, 이것들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비잔티움의 영향을 받아 하자리아나 그들의 영향력 하의 지역에서 생산된 것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하자르인들이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문화를 동유럽 야만부족들에게 전달해준 중요한 중개자 역할을 수행했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바르타 Bartha 는 철저한 고고학적 조사와 문헌 기록 (대부분 소련에서 작성된) 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서기 629년에 벌어진 사건으로 여겨지는 티플리스의 약탈은 우리의 주제와 관련이 있다.. (점령기 동안) 카간은 금, 은, 철, 구리 제품의 생산을 감독할 조사관을 보냈다. 수산물을 포함한 모든 교역은 그들의 통제하에 있었다.. (따라서) 7세기 동안 부단히 이어진 일련의 코카서스 전역에서 벌어진 작전을 통해, 하자르인들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전통을 승계한 문화와 접촉하게 되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러한 문화권의 생산품들이 오로지 교역 뿐만이 아닌, 약탈이나, 심지어는 세금의 형식으로 스텝지역의 민족들에게 전파되게 되었다.. 우리의 10세기 마자르인들의 기원을 밝혀내려는 희망과 관련된 모든 증거들은 우리의 시선을 하자르인들의 영토로 되돌리게 만들었다.

 

이 헝가리 학자에 의해 기록된 마지막 언급은 "나기젠트미클로스 Nagyszentmiklos 의 보물" 이라 알려진 화려한 고고학 유물에 관한 것입니다. 제작연대가 10세기로 추정되는, 스물 세개의 금항아리로 이루어진 이 보물은 1791년에 그 이름의 마을 인근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현재 루마니아에 속해 있으며, 시니코라울 해 Sinnicolaul Mare 라고 불립니다.) . 바르타는 황금 항아리의 아랫부분에 새겨진, 포로의 머리카락을 끌고가는 '전승을 거둔 군주' 와 신화에 기초한 장면들과 다른 장식품들의 디자인을 지적하면서, 불가리아의 노비 파자르 Novi Pazar 와 하자르의 사르켈에서 발견된 유물들과의 유사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마자르인들과 불가르인들 모두는 상당한 시간동안 하자르인들의 종주권 밑에 있었다는 점을 생각할때 이러한 점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며, 다른 보물에 새겨진 전사의 모습은 우리에게 적어도 하자르 제국에서 번성한 예술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줍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대로, 여기에는 페르시아와 비잔티움의 영향이 두드러져 나타납니다.) (이 유물에 흥미있는 독자들은 Gyula Laszlo 가 낸 사진집인 '대 이주시기의 예술 The Art of the Migration Period' 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그의 역사적 언급을 받아들이는 것에는 신중을 기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

 

 

 

 포로의 머리카락을 끌고가는 '전승을 거둔 군주'

 

헝가리 고고학자들 중 한 학파는 헝가리 지역에서 발견된 10세기의 금은 세공품들이 실제로는 하자르인들의 작품이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챕터 III 참조.) , 마자르인들이 896년에 헝가리로 이주했을 때, 그들의 이주는 카바르인 Kabars 이라고 알려진 반체제적 하자르 부족들에 의해 이끌어졌으며, 그들은 마자르인들과 이곳 새로운 고향에 정착했습니다. 카바르-하자르인들은 그들의 금은 세공솜씨로 유명합니다. (좀더 원시적인 시기의) 마자르인들은 그들의 새로운 국가를 세우게 된 뒤에야 이러한 기술들을 습득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적어도 헝가리에서 발견된 유물의 일부를 토대로 (마자르인들의) 하자르 기원론은 영 믿기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이는 앞으로 진전될 마자르-하자르인간의 연관관계에 대한 조명으로 더욱 명확해질 것입니다.

 

황금 항아리에 세겨진 전사가 마자르인이든 하자르인이든, 그는 아마도 정예부대의 일원으로 추정되는 당대 기병의 외양을 시각화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마수디 Masudi 에 따르면, 하자르 군대는 "그들 중 칠천명 (이스타크리는 12,000명을 언급하고 있음.) 은 그들의 왕과 함께 말을 몰았으며, 궁수들은 가슴 보호대와 투구, 그리고 메일코트를 입었다. 그들 중 일부는 창기병이었는데, 무슬림들과 흡사한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하자르인들의 왕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의 그 어떠한 군주도 정규 상비군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 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이븐 하우칼은 "그들의 왕은 휘하에 12,000명의 직속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만약 그들 중 한명이 죽으면, 즉시 다른이가 그 자리를 채운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자르인들의 우월성을 보장한 다른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즉 근위대를 보유한 고정적인 전문적 군대가 그것인데, 그들은 평시에는 여러 민족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했으며, 전시에는 군대의 중핵으로서의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참고로 우리가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전시에 군대는 10만명 이상으로까지 불어났습니다.

 

(마수디의 언급에 의하면, 이른바 왕실군대는 '인근의 호라즘 지역에서 이주해 온 무슬림들로 이루어졌다. 먼 옛날, 이슬람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그들의 땅에서는 전쟁과 흑사병이 이어졌으며, 이에 결국 그들은 하자르인들의 왕에게 의지했다.. 하자르인들의 왕이 무슬림들과 전쟁을 벌일 때, 그들은 그의 군대에서 독립된 위치를 차지했으며, 그들과 같은 신앙을 가진 이들과 싸우지 않았다. (1954년의 던롭교수의 연구) " 여기서 언급된대로 군대가 오로지 무슬림만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물론 과장이며, 심지어는 마수디 자신이 몇줄 뒤에 언급한 내용과 모순을 이루기까지 하니, 몇줄 뒤 그는 무슬림 부대가 하자르 군에서 "독립적인 위치" 를 가졌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븐 하우칼은 "그 왕은 자신의 부대에 4천명의 무슬림을 두었으며, 이번 왕은 2천명의 무슬림 병사들을 거느렸다." 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호라즘인들은 군대에서 이른바 스위스 용병대의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이며 그들의 동포들이 "인질" 이라고 불렀던 (전술한 10장의 내용을 참조바람.) 은 다름아닌 이들일지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비잔티움 황제였던 콘스탄티노스 포르피로게니토스는 하자르인 근위대로 이루어진 정예부대를 거느렸는데, 이들은 그의 궁전문 앞에 배치되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값비싼 특권이었습니다. "이들 근위대는 아주 후한 보수를 받았기에, 그들은 상당한 금액을 치루면서까지 그 자리를 보전해야만 했다." 고 합니다.)

 

이 잡동사니같은 제국의 수도는, 처음에는 코카서스의 북부 구릉지대에 위치한 발란자르 요새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8세기경에 아랍인들의 위협이 닥치자 카스피해 서안에 위치한 사만다르로 옮겨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볼가강 어귀에 위치한 이틸이 그들의 최종적인 수도가 되었습니다. 

 

 

 

 이틸의 유적

 

우리는 이틸과 관련하여, 서로 상당부분 일치하는 몇몇 사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그 도시는 강 양안에 걸친 쌍둥이 도시였습니다. 강을 경계로 하여 그 동쪽 절반은 하자란 Hkazaran, 서쪽 절반은 이틸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렇지만 도시는 시대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으니, 알 바야다 al-Bayada 는 이를 "순백의 도시" 라 부르고 있습니다.) . 이 두 지역은 하나의 부교로 연결되고 있었습니다. 서쪽 절반은 벽돌로 지어진 요새벽으로 둘러쌓여져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카간과 카간베크 Bek 의 궁전이 위치하고 조신들, 그리고 그들의 수행원들 (마수디는 이들 건물들이 서쪽 대안에 가까운 섬, 혹은 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의 주거지와 "순혈의 하자르인들" 의 거주지가 있었습니다. 성벽에는 네개의 성문이 있었으며, 그들 중 하나는 강을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강 건너편의 동안에는 "무슬림들과 우상 숭배자들" 이 살았는데, 이 지역에는 모스크와 시장, 목욕탕과 기타 다른 공공 오락시설들이 있었습니다. 몇몇 아랍 작가들은 무슬림 지역의 모스크의 수와 가장 중요한 광탑의 높이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무슬림 조신들과 성직자들에 의해 수행되는 자치권도 강조했습니다. 이른바 "아랍인들의 헤로도토스" 라고 알려지는 알-마수디는 많은 이들에 의해 언급되게 될 자신의 "금광과 보석의 초원 Meadows of Gold Mines and Precious Stones" 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자르인들의 도읍의 관습대로, 그곳에는 일곱명의 재판관이 있었다. 그들 중 두명은 무슬림이고, 다른 두명은 하자르인들인데, 그들은 토라 (모세의 율법) 에 의거하여 판결을 내렸다. 나머지 두명은 기독교도들인데, 이들은 자신들의 복음에 따라 판결을 내렸으며, 나머지 한명은 사콸리바인 Saqualibah, 루스인, 그리고 그외 잡다한 이교도들을 담당하는 재판관이었으니, 그는 이교의 율법에 따라 판결을 내렸다.. 그 (하자르인의 왕) 의 도시에는 많은 무슬림들과 상인들, 장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이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이곳으로 온 이유는 그 왕의 공정함과 그들에게 제공되는 안전 때문이었다. 그들은 소중한 모스크와, 왕성보다도 높이 솟은 광탑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뒤에는 다른 모스크들이 있는데, 아이들은 그곳에 부속된 학교들에서 코란을 배운다.

 

10세기 전반부에 살았던 가장 유명한 아랍 역사가에 의해 기록된 (아마도 943년에서 947년 즈음) 이 구절을 읽을 때 독자들은 아마도 하자르 왕국에서의 삶에 대한 너무나 이상화된 시각을 가지게 되는 유혹을 받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유대 백과사전 Jewish Encyclopaedia 에 수록된 "하자르" 장을 참고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서유럽에서 광신과 무지와 혼란이 판칠 때, 하자르인들의 왕국은 그 공정함과 넓은 아량의 통치로 유명했다."

 

우리가 지금껏 봐 온대로, 이는 부분적으로는 진실입니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요. 하자르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기 전후를 막론하고, 그들이 종교 박해를 벌였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동로마 제국이나 초기단계의 이슬람 제국보다 더욱 관대하면서도 계몽된 이들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반면에, 그들은 그들의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일부 야만적인 풍습들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븐 파들란을 통해, 왕묘를 건설한 일꾼들이 처형된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는 또한 다른 고풍적인 관습인 국왕살해의 관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왕의 통치시기는 40년이다. 만약 그가 하루라도 더 통치를 하게되면, 그의 신하들과 수행원들이 달려들어 그를 죽이고 "그의 분멸력은 이미 희미해졌다. 그리고 그의 통찰력은 혼란스러워졌다" 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스타크리는 이를 다른 시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이를 카간의 자리에 추대할 때, 그들은 그의목 주위에 비단으로 만들어진 밧줄을 걸고 그가 질식상태에 빠지도록 죈다. 그리고는 그에게 묻는다. "전하께서는 얼마나 오랫동안 통치를 하실 생각이십니까?" 만약 그가 자신이 약속한 시기에 이르기 전까지 죽지 않는다면, 그는 그 시기가 되자마자 살해당한다.

 

베리교수는 아랍 여행객들이 전해주는 이러한 이야기들의 진실성을 의심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러한 종교적 국왕시해가 원시적 (혹은 그렇게 원시적이지는 않은) 민족들 사이에서 그렇게나 넓게 퍼진 현상이 아니었다면, 여러분들 역시 이러한 이야기들을 무시하게 될 것입니다. 프레이저 Frazer 는 왕의 신성함에 관한 개념들 사이의 관계를 아주 강조하고 있으니, 고정된 시기가 지나거나, 왕의 총기가 사그라들때 그를 죽이는 종교적인 책무를 통해, 왕의 신성함은 더욱 젊고 활기찬 화신을 찾는다는 겁니다.

 

이스타크리가 설명한 미래의 군주에게 행해지는 기괴한 "질식" 의식은 당시 기준으로 그리 옛날이 아닌 시기에 다른민족, 즉 곡-투르크인 Kok-Turks 들 사이에서도 존재했다고 전해집니다. 제키 발리디는 프랑스 인류학자인 생 쥴리앙 St. Julien 의 1864년도 논문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족장이 선출되면 그의 사관들과 수행원들은.. 그를 자신의 말에 태운다. 그들은 그의 목 주위에 걸린 비단으로 만든 리본을, 혈행이 완전히 차단되기 직전에 이를때까지 조인다. 그리고 그들은 리본을 잠시 느슨하게 푼 다음 그에게 질문을 강요한다. "전하께서는 얼마나 오랫동안 저희의 칸으로 군림하시렵니까?" 왕은 아무도 부를수 없기에 괴로운 심정에 빠지는데, 그의 신하들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어조의 강도를 보고 그의 치세가 길지 짧을지 결정한다.

 

 

우리는 이러한 왕을 살해하는 하자르인들의 관습이 (그러한 것이 실제로 존재했다면) 그들이 유대교를 받아들이면서 중지되었는지 어쩐지는 알지 못하지만, 이와 관련된 아랍 작가들은 그들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들보다 이른 시기의 여행가들의 기록을 참고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혼동하고 있으며, 이러한 과거의 사실들을 당대의 관습이라고 여기곤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논쟁의 여지가 없어보이는 핵심적인 사항은 카간이 희생을 당했다는 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카간에게 부여된 신성한 역할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가 존경을 받긴 하지만, 장엄한 의식과 함께 묻히기 전까지는 자신의 백성들과 단절된채 격리되어 살아간다는 기록을 살펴보았습니다. 군대를 이끄는 것을 포함한 전반적인 국사는 베크 Bek (종종 카간 베크라고 불리는) 의 소관이었으니, 그야말로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이였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아랍인들의 기록과 현대의 역사가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으며, 후자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하자르인들의 정부 시스템을 "이중적인 왕권" 으로 간주하고 있으니, 즉 카간은 신성을 의미하고 베크는 세족적인 권력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하자르인들의 이중적인 왕권은 -물론 단순히 비교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지만- 스파르타의 양두정치체제와 비교되곤 하며, 투르크계 부족들에게서 발견되는 양두 지도체제와도 표면적으로는 흡사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지도적인 가문의 후계자인 스파르타의 두 왕들은 동등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유목 부족들에게서 나타나는 양두 지도체제에서도 마찬가지였으니, 이들 사이에도 하자르인들처럼 기본적인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습니다. 좀더 그럴듯한 비교는 전통적인 일본의 정부시스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중세시대부터 1867년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세속적인 권력은 쇼군의 손 안에 있었으며, 반면 미카도는 세상에서 격리된 채 신성한, 명목상의 군주로 여겨졌습니다.

 

카셀은 하자르인들의 정부 시스템과 체스게임간의 흥미로운 유사점을 언급했습니다. 이중 왕권은 체스게임의 킹 (카간) 과 퀸 (베크) 에 해당한다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자신의 수행원들에 의해 보호받는 킹은 바깥과 격리되어 있으며, 미약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한번에 한칸밖에는 움직일 수 없지요. 반대로 퀸은 체스판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이며 전장을 지배합니다. 그렇지만, 퀸이 죽어도 게임은 계속 진행되지만 킹의 죽음은 게임의 끝을 불러오는 궁극적인 재앙입니다.

 

따라서 이중 왕권은 하자르인들의 신성함과 불경함의 이분법적 사고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카간의 신성함은 이븐 하우칼이 기록한 다음의 문장에서 훨씬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카간은 반드시 왕족 (이에 대한 이스타크리의 기록은 "..유력한 가문") 에서 추대된다. 누구도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고서야 그에게 접근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가 자신에게 다가와 아뢰어도 좋다는 명령을 내릴 때까지는 그 앞에서 부복하고 있으며, 그들의 얼굴을 바닥에 문지른다. 카간이.. 죽고, 그의 무덤 근처를 지나는 이들은 반드시 걸어서 지나가야 하며 그의 무덤에 존경을 표해야 한다. 그리고 무덤을 지나쳤더라도, 그 무덤이 보이는 지점에 다다를때 까지는 말을 타지 못한다.

 

이 군주의 권위는 절대적이며, 그의 명령은 맹목적으로 수행되니, 만약 그가 자신의 귀족들 중 누군가가 죽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그에게 "가서 자살해라." 라고 명하면, 그 사람은 즉시 자택으로 돌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카간위의 승계는 같은 가문에서 이루어진다 (이에 대한 이스타크리의 기록은 "유력가문의 일원 중 권력이나 부를 소유하지 않은 이가 승계한다.) . 제위계승을 차례가 누군가에게로 돌아오면, 비록 땡전한푼 없다고 하더라도 그는 존엄함이 보장된다. 그리고 내가 믿을만한 사람에게 들은바에 의하면, 공설시장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보잘것없는 물건 (이스타크리의 기록에 따르면 "빵") 을 파는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만약 지금의 카간이 죽으면 이 젊은이가 왕위를 이을 것이다." 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이스타크리의 기록에 의하면 "이 젊은이보다 카간의 자리에 어울리는 이는 없다.") . 하지만 그 젊은이는 무슬림이었으며, 카간의 자리는 오직 유대인에게만 돌아가는 것이 관습이었다.

 

카간은 황금으로 만들어진 옥좌와 천막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것들은 다른이들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카간이 사는 궁전은 다른 건물들보다 높이 솟아 있었다.

 

빵을 파는 고결한 젊은이에 관한 구절에서 언급된 시장사람들의 목소리는, 정의의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의 일화와 비슷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유대인들에게만 허용된 황금옥좌의 계승자였다면, 왜 그는 가난한 무슬림이라고 기록된 것이었을까요? 여러분이 이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는 카간이 "왕족" 이나 "유력가문" 와 같은 핏줄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의 덕성에 의해 선출된다고도 가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는 아르타모노프와 제키 발리디의 시각이기도 합니다. 아르타모노프는 주장하기를, 하자르인들과 다른 투르크 민족들은 사라져버진 투르크 제국 (3장 참조) 의 투르쿳 Turkut 왕조의 후손의 지배를 받았다고 합니다. 제키 발리디는 카간을 배출하는 "왕족" 이나 "유력가문" 들이 중국 사료에서 언급되는 사막지역의 귀족들인 고대 아세나 Asena (돌궐) 왕조에 속한다고 가정하고 있는데, 이들 사료에서 투르크와 몽골의 지도자들은 전통적으로 이들의 후손임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그럴듯한 이야기이며, 앞서 언급된 이야기 -즉 가난한 고귀한 젊은이와 옥좌를 둘러싸고 있는 화려함과 요란스러움- 의 모순되는 점들과 일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스크린상의 두 물결무늬가 만들어내는 광학적 간섭처럼, 우리는 두 전승이 겹치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힘들게 살아가는 사막유목 부족들의 금욕주의와 상공업과 바그다드와 콘스탄티노플의 라이벌과의 경쟁으로 번영하는 왕실의 화려함의 교차가 그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화려한 궁정에 의해 신봉되는 이러한 신념은 과거의 금욕적인 사막의 예언자에 의해 고취된 것일 겁니다 (역주/이슬람교와 마찬가지로..) .

 

이러한 모든 사료들도, 이미 당대에도 독특한 것으로 여겨졌던 신성과 세속의 기묘한 분할을 완전히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이에 대해 베리교수는, "우리는 어느 시기에 카간이 그의 실권을 신성한 무실권과 바꾸거나, 일본의 정부가 아닌 일본의 황제처럼 그 존재가 국가의 번영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여겨진 것과도 유사한 지위로 격상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라고 언급했습니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한가지 이론적인 답변이 최근에 아르타모노프에 의해 시도되었습니다. 그는 국교로서 유대교를 받아들인 것은 일종의 쿠데타의 결과의 결과이며, 여기서 모세율법에 대한 충성을 완전히 신뢰받을 수 없는 이교 왕조의 후계자는 단순한 명목장 지도자로 끌어내려진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가설들과 같은 가설일 뿐이며,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많지 않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두 역사적 사건 -즉 유대교를 받아들인 것과 이중왕권의 수립- 사이에는 다소간의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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