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시작과 끝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 속죄의 메시지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53:5) 라는 말로 명쾌히 요약했다. 여기에서 "채찍에 맞음으로" 라는 말의 원어는 굉장히 무서운 표현이다. 이 말은 본디 '온 몸이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시퍼렇게 멍이 들 때까지 맞는 것'을 뜻한다. 언제나 인류는 육체적 고통을 형벌의 수단으로 사용해왔다. 사회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벌을 줄 수 있도록 법적인 정치를 마련해왔다. 대개의 경우, 형벌은 범죄의 성격에 따라 결정된다. 형벌은 일종의 보복이다. 사회 규범을 범한 사람에게 사회가 보복하는 방법이 형벌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었다. 주님의 고난은 자기 자신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분의 고난은 그분의 행위에 대한 형벌이 아니었다.
예수의 고난은 교정의 의미를 갖는다. 그분은 우리를 고치고 온전케 만들기 위하여 기꺼이 고난을 당하셨다. 주님의 고난이 고난으로 시작하여 고난으로 끝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난으로 시작하여 치유로 끝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난을 통과하셨다.
사랑하는 형제여! 이것이 십자가의 영광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마음에 품고 계셨던 고결한 희생의 영광이다. 이것이 회개하는 죄인으로 하여금 그의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와 평안과 은혜의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하는 속죄의 영광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시작되었지만, 우리의 치유로 끝난다. 그것은 그분의 상함으로 시작되었지만, 우리의 정화로 끝난다.
무엇이 회개인가? 무엇보다도 회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상처를 입힌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이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도 양심의 가책을 완전히 극복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용서받고 깨끗함을 얻자마자 그분께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는 것이 회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회개를 할 때 날카로운 고통의 감정이 누그러지고 대신 기쁨과 평강이 찾아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 중에 지극히 거룩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어린양께 무한한 고통을 안겨줬던 사실을 다시금 떠올린다. 이런 생각이 계속해서 떠오르면 그는 충격을 받고 놀랄 것이다. 왜냐하면 상처와 찔림을 받은 하나님의 어린양이 자기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을 자기의 상처를 이용하여 깨끗케하고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하니까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여러 복음주의 교파에서 은혜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으로 메마른 시대에 존 웨슬리가 가르치고 모범을 보인 '영적으로 깨끗한 심령'을 향해 나아가려는 움직임이다.
'성화'라는 말은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아름다운 단어이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복음주의적 교회들이 '열광적 신자들'로 불리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성화'라는 좋은 단어가 다시 사용되기 시작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화가 이런 변화의 물결에 힘입어 우리에게 진정으로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믿음있는 그리스도인, 즉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순수한 마음과 깨끗한 손을 원하는 거룩한 갈망이 있어야 하는데,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이 순수해지고 우리의 손이 깨끗해지도록 만들기 위해 예수께서 스스로 굴욕과 멸시와 고통을 당하셨던 것이다. 주님이 찔리고 상하고 징계를 받으셨던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을 깨끗하고 신령한 백성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깨끗케 하기 위함이다.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행하심은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시작되어 우리의 정결함으로 끝난다. 그것은 예수님의 공개적인 피 흘림의 상처로 시작되어, 우리의 평안한 마음과 조용하고 기쁨에 찬 선행으로 끝을 맺는다.
-------- 에이든 토저의 " 내 자아를 버리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