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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 혜충국사

작성자검산|작성시간12.03.30|조회수72 목록 댓글 0

남양 혜충국사

 

 

혜충국사는 6조의 법을 이은 분이다.

 

國師 一日 喚侍者 侍者 應諾 如是三喚 侍者 三應 師曰將謂吾辜負汝 却是汝辜負吾

어느날 혜충국사가 시자를 부르니 시자가 응답을 했다.

이와 같이 세 번을 부름에 세 번 응답하자

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저버린다고 여겼더니 네가 나를 저버렸도다”

하였다.

(?친절이 넘쳐 허물만 일으켰도다)

 

忠國師 因僧 問如何是本身盧舍那 師云 與我過淨甁來 將淨甁到 師云 却安舊處着 復問如何是本身盧舍那 師云 古佛過去

또 국사가 어떤 스님이

“어떤 것이 이 본신인 노사나 입니까?”하고 물음에 인해

사께서 이르시기를

“나에게 깨끗한 물병을 가지고 오너라”하니

승이 깨끗한 물병을 가지고 오거늘(?욕심도 많으십니다)

사께서 “도로 있던곳에 두어라”하니 승이 다시 묻기를

“어떤 것이 이 본신 노사나 입니까?”하니

“옛 부처가 지나간지 오래니라”했다

(?옛 부처 지나간 곳을 보았는가?.   “!”)

 

 

 [어느 스님이 불조직지심체를 강해한 것을 보면 혜충국사께서 “고불은 시간적으로 오래된 것”이라고 답변하셨다. 교리적인 답변은 아니다. 선의 차원에서 답변한 말이다 했는데 - 선지로 답한 것이라는 뜻을 모르고 “고불은 시간적으로 오래된 것”이라고 답했다하니 법을 그르쳤도다]

 

 

忠國師 因僧問 如何是一念相應 師曰憶智俱忘 卽是相應 僧曰憶智俱忘 誰見諸佛 師曰忘却無 無卽佛 僧曰無卽言無 何得喚作佛 師曰無亦空 佛亦空 曰無卽佛 佛卽無

또 혜충국사가 어떤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일념상응(계함-합해짐)입니까?”하니

“기억과 지혜를 잊어버리면 곧 상응이니라”

(? 한생각 일으키면 멀어지니라)하시니

“기억과 지혜를 함께 잊어버린다면 어떻게 부처님을 볼 수 있습니까?”(?보는 것이 부처니라)하니

“잊어버리면 없는 것이니 없는 것이 부처니라”하자

“없으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니 어찌 부처라고 말 할 수 있습니까?”하자

“없는 것도 또한 공이요 부처도 또한 공이니라 그러므로 없는 것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없는 것이니라”라고 했다.

(? 없다고 말하는 것이 부처니라)

 

 

[어느 00스님은 여기서 “일념상응은 의식적인 기억과 또한 의식을 초월한 밝은 지혜 두가지를 다 잊어버리는 것으로 곧 열반과 같은 자리이다” 했으나 -

 옳지 못한 것이니 일념상응을 혜충국사는 평등진제의 답으로 한 것이나 일념은 일념 그 자체가 생각을 일으킴(用)이므로 의식을 초월한 밝은 지혜 두가지를 다 잊어버린다는 것으로 잘못 알면 안되는 것이니 반야지혜의 작용이 본성반야와 둘 아닌 것으로 계합한 그 본성처를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가 없다는 것은 부처라는 상이 없는 진공 진여임을 알아야 한다.

또 “반야심경에 없다는 無가 많이 나온다. 없는 것이 부처이고 부처가 없는 것이다. 조주스님은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물을 때

“없다”고 답했다

그 화두가 ‘無’자 화두다” 했는데-

조주스님의 “無”라 답한 불성을 없음으로 안다면 크게 모르는 소치요, 어림없는 소견이니

조주스님이 말씀하신 無자 화두의 뜻을 알려면 조주스님의 뱃속을 들어가야 하니라]

 

忠國師 因肅宗帝 請看戱 師云 有甚麽身心看戱 再請 師云 幸自好戱

혜충국사가 숙종황제가 희극을 보기를 청하자

“어떠한 몸과 마음이 있어 희극을 보는 것입니까?”했으나 다시 청하자

“무던히도 희극을 좋아하는 구려”했다

(보는 것도(주)공하고 볼 것(객)도 공한데 상에 끄달려 희극(허망)을 하는 도다)

 

忠國師 問僧 近離甚處 云 南方 師云 南方知識 以何法 示人 云 南方知識 只道 一朝 風火散後 如蛇退皮 如龍換骨 本爾眞性 宛然不壞 師云 苦哉苦哉 南方知識 說法 半生半滅 半不生滅

僧云 南方知識 卽如是 未審和尙 此間 說何法 師云 我此間 身心 一如 身外 無餘 云 和尙 何得將泡幻身 同於法體 師云 你爲什麽 入於邪道 云 甚麽處 是某甲 入於邪道處 師云 不見 敎中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 行邪道 不能見如來

또 혜충국사께서 어떤승에게 묻기를

“근자에 어느 곳을 떠나왔느냐?”하니

“남방에서 왔습니다”하자

“남방에 있는 지식들이 어떤 법으로써 보이느냐?”하니 승이“남방의 선지식들이 다만 말을 하되 ‘하루아침에 풍화(팔풍)가 흩어진 후에 뱀이 허물을 벗는 것 같으며 용이 뼈를 바꾸는 것과 같아 본래의 참 성품은 완연히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더이다” 하자

“맞지 않다. 남방 지식들의 설법은 반은 생하고 반은 멸하며(색신) 반은 불생불멸(법신)이로다” (둘로 보는 상견)하시니 승이

“남방의 지식들은 곧 그와 같거니와 모르겠으니 화상께서는 여기서 어떤 법을 설하시나이까?”하니

“내가 지금(그 자리, 진여법) 설법하는 것은 몸과 마음이 한결같음이니 몸(진여법신) 밖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 (진공실상)하셨다. 승이

“화상께서는 거품과 같고 눈흘림 같은 몸을 가지고 법체와 같다고 하십니까?”하니

“너는 어찌하여 삿된 도에 들어갔느냐?”하시므로

“어느 곳이 제가 사도에 들어간 곳입니끼?”하자

“보지 않느냐? 교에서 말씀하시기를‘만일 빛깔로써 나(佛)를 보며 소리로 나를 구하려 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 이라 능히 여래를 볼 수 없다’하셨느니라”했다

 

忠國師 因僧問 敎中 但見有情作佛 不見無情受記 且賢劫千佛 孰是無情佛耶 師云 如皇太子 未受位時 唯一身耳 受位之後 國土 盡屬於王 寧有國土 別受位乎 今但有情 受記作佛之時 十方國土 悉是遮那佛身 那得更有無情受記耶

또 어떤 승이 “교에서는 유정이 부처가 된다고 하는것만 보이시고 무정물이 수기받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또 현겁천불 가운데 어느 누가 무정부처 입니까?”하니

“황태자(불성)가 왕위를 받지 못할 때 (중생심)에는 오직 한몸(자아)이나 왕위를 받은 후에는(깨친 뒤) 국토(일체가)모두 왕에게 속하나니 (부처요 부처의 나툼-원융) 어찌 국토와 왕위를 따로 받는 것이 있겠는가?

(무정물-불성이 자체에 없어 부처를 이룰 수 없는 무기임)

지금 다만 유정물이 수기를 받아서 부처님이 될 때 시방 국토가 모두 이 비로자나 부처님의 몸(법신)이니 어찌 다시 무정물이 수기를 받는 것이 있겠느냐?”하셨다

 

 

[이를 강해한 00스님은  경에 무정물이 성불해서 수기를 받는다고 하는 말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그런 말은 경전에 없다는 것이다.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르고 스쳐 가는 것이다”했는데- 어처구니없는 삿된 소견이다.

무정물은 무기성이라 수기를 받을 것이 없는 유정의 각 가운데 일체각인 부처안의 부처의 나툼이요 작용임을 모르는 소치이다.

또 “중생이 성불할 때 시방국토가 다 비로자나의 몸이라는 것이다”했는데 - 중생이 성불하기 이전에도 온 우주가 비로자나의 몸(법신)인 것이며 중생이 성불하면 그러함을 요달 한 것이다.

또 유정물이 수기를 받아 성불할 때 무정물도 성불이 동시에 따라서 된다 한 대목도 맞지 않음을 알지 못한 말이요, 석가모니가 성불하심과 동시에 그 땅이나 모든 만물이 다 성불하는 도리에 의해서 석가모니가 계시던 가야산이 붓다가야로 되었고(붓다가야로 명명해 성지화 한것임) 필발라수도 보리수로 되었다(같은도리). 그래서 “유정이 성불할 때 무정도 따라서 성불한다는 것이다. 유정물과 무정물이 둘인 것 같지만 둘이 아니고 무정물도 성불하는 도리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정물이 성불할 때 무정물도 성불하는 것을 여기서 밝히는 것이다” 했으니- 이렇게 법을 그르침이 심할 수 없도다]

 

忠國師 因靈覺僧 發心出家 本爲求佛 未審如何用心 卽得 師云 無心可用 卽得成佛 曰無心可用 阿誰 成佛 師云  無心自成 佛亦無心 曰佛有大不可思議 爲能度衆生 若也無心 阿誰 度衆生 師曰無心 是眞度衆生 若見有生可度者 卽是有心 宛然生滅

영각이란 승이

“발심하여 출가한 것은 본래 부처를 구함이니 알지 못하겠아오니 어떻게 마음을 써야만 증득하리까?” 하고 묻자

“마음을 쓰는 것 없는 것이 곧 성불함을 증득하는 것이니라”하시자

“마음을 쓰는 것이 없다면 어느 누가 성불합니까?”하니

“마음이 없으면 스스로 이루나니(이뤄진 것이니) 부처도 또한 무심이니라”했다 승이

“부처님께서는 크고 불가사의함이 있어 능히 중생을 제도하시니 만약 마음이 없다면 어느 누가 중생을 제도하나이까?”하니

“무심한 것이 바로 참으로 중생을 제도(장엄 또한 그러한 이치)한 것이니 만약 중생을 제도할 것이 있는 것으로 본다면 곧 이 마음이 있는 (차별심,상견)것이니 완연한 생멸(상견)이니라”했다

 

 

[이를 강해한 00스님은 “혜충국사는 用心하는 것이 없게되면 저절로 부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했으나--用心 이 없는 것이 스스로 부처를 이룬 것이며, 用心이 없음도 또한 분별, 상집의 작용을 이르는 말씀이니 용심이라도 반야작용이라면 이것은 부처의 작용이며 나툼이니 이런 경계에서 불성과 용심을 둘로 봐서는 안되는 것이다]

 

忠國師 因僧 作麽生相應去 師云 善惡不思 自見佛性 又佛與衆生 一時放下 當處解脫

또 어떤 스님이

“어떻게 하여야 상응해 갈 수 있나이까?”물으니

“성과 악을 생각지 않으면(분별심 없는 그대로) 저절로 불성을 보느니라(보는 것이 불성이니라).

또 부처와 중생(이라는 분별심)을 일시에 놓아 버리면 바로 그 자리가 해탈이니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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