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이었나보다. 뮤지컬 파우스트를 보고나서는 젊고 마음대로 되지 않던 [것]들이 뭐가 그리 서러웠던지 대학로 초입에서 사내놈이 눈물을 펑펑쏟아 친구놈을 당황케했다. 시간이 이만큼 흘러 감저을 통제한다는 것에 능숙해지면서 인생에 대한 고민이나 꿈에 대한 열정을 소소하게 다루는 것에 익숙해져가고 있다. 어릴 땐 그랬다. 내 맘을 쉽게 뭉클게하는 우선순위는 '나'에 대한 성찰로 무엇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였기에 '우리'나 사랑이라는 감정에 빠져볼만한 시도가 없었다. 그려넣었던 목표나 희망들이 지금 이 순간, 캔버스에 얼마나 채워졌을까 돌아보면 일부분은 과감히 지울줄도 알고 알맹이만을 채워가며 추상적이었던 그림들은 좀 더 현실적으로 심플해져있다. 이제는 아이들에게 "그래도 한번 뜨거워볼만 하지 않겠니?"하는 선배의 여유로움을 내비치기도한다.
서른을 넘어가며 전략의 가치가 변화하듯 사람의 '관계'라는 것에 대하여 배우고 있다. 협력이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는 명제를 던지기 앞서 삶이란 자연스럽게 얽히고 섥혀 이야기를 구상하는 작업이다. 스케치하듯 무언가 그려가다보면 사랑이라는 애틋함을 마주하게 될거다. "필례야, 부족한 나를 여지껏 사랑해줘서 고마워." 대학로 소극장 축제(혜화역 3/4번 출구 종로약국 사이)에 올려지고 있는 '사랑에 관한 다섯 개의 소묘'는 이 함께라는 '관계'의 클라이막스를 보여준다. 확고하건데 살아있는 동안의 열정이나 사랑에 있어 그것이 지워질 소재라도 덧없는 것은 없다. 가을의 절정을 통하여 더 많이 부딪히고 사랑해야겠다는 연인과 가족, 싱글들은 이 작품에 순례를 권한다. 나 역시도 말이다.